♣복음말씀의 향기♣ No2889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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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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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UWW4B9ho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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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환한 미소와 극진한 환대와 사심 없는 친절을 통해 매력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늦은 밤 귀가 시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언덕 위에 위치한 저희 수도원을 한 번 바라보게 됩니다. 건물 외벽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태양광 조명등이 은은히 빛을 발합니다. 집에 다 왔다는 마음에 편안함과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마을에서 수도원을 올려다볼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산 아래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과연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우리 수도회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 위로의 언덕, 구원의 성채가 되어주고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 공동체가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 슬픔과 절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끼리만 알콩달콩, 희희낙락하면서 개념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국내 여러 종교들이 전반적으로 심각한 퇴보 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천주교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굳이 제시된 지표와 자료를 통해서 확인해보지 않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심각합니다.
복음화율에 비해 실제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교우들의 숫자는 미미합니다. 미사를 비롯한 각종 성사 참여 빈도는 극히 저조합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 젊은 층의 신자들을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이 노령화, 청소년들과 청년들, 주일학교의 급격한 위축...전반적인 지표들이 급격한 하락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때 우리 가톨릭교회가 잘 나갈 때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때가 봄날이었습니다. 신자수가 급격히 증가하며, 동시에 사제나 수도자들의 수효도 증가했습니다. 밀려드는 예비자이나 수도회 지망자들을 감당하기 벅찰 정도였습니다. 종교 선호도 조사를 하면 언제나 1등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교회가 사회적 약자들의 대변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의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정확히 할 말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중차대한 기로 앞에 섰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 교회가 잃어버린 매력을 회복할 때입니다. 매력이란 것은 절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끝도 없는 자기 성찰과 각고의 노력 끝에 조금씩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가장 부유할 때, 사실은 가장 바닥을 쳤습니다. 반대로 극단적 청빈을 살고자 노력할 때, 거지 중의 상거지 집단이 될 때, 그 바닥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 교회가 제왕처럼 군림한다든지,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좌정한 관리자로 남아있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언제나 환한 미소와 극진한 환대와 사심 없는 친절을 통해 매력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양떼와 세상을 향한 진심어린 헌신과 봉사로 좋았던 시절의 매력을 되찾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우리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천상 예루살렘의 거룩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빛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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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1rpM6ZZbr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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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초점: 잠과 죽음의 순간에 느낄 행복>
오늘은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본받기 위해 다짐하며 노력하는 날입니다. 한국의 성인들은 모두 순교자들입니다. 순교를 생각할 때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순교와 자살의 차이가 뭐죠?”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순교자들의 죽음은 자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는다면 거기에서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그 죽음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 순교와 자살의 차이가 구별됩니다.
2014년 11월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 세 명이 자살을 선택한 일이 있었습니다. 10월 30일, 50대 이모 씨와 그의 부인, 그리고 12살 딸이 안방에 나란히 누워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들 옆에는 타다 남은 연탄재가 있었습니다. 딸 이모 양이 계속 학교에 빠지자 담임 교사가 집으로 찾아왔고 문이 잠긴 걸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경찰은 부인과 딸이 먼저 목숨을 끊고, 귀가해 이를 발견한 남편이 뒤따라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지난 수년 동안 뚜렷한 직업 없이 주택경매에 매달리다 실패를 거듭해 큰 빚을 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파트에서 일하던 부인도 두 달 전 직장을 그만둬 마이너스 통장으로 근근이 생활해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웃 주민은 집도 다 빚으로 산 것이라 이자 내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곁에는 부인과 딸이 남긴 유서만 놓여 있었습니다. 먼저 부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살아서 발견되면, 응급처치는 하지 말고 그냥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딸의 유서는 이렇습니다. “그동안 부모님 말씀 안 들어서 미안하다.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거라서 나는 슬프지 않다. 행복하게 죽는다.” 이 양은 힘든 가정형편에도 성실히 학교생활을 해와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숨진 채 나란히 누운 이들 가족 옆에는 아빠가 딸과 먹으려고 사 온 가리비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습니다.
자살은 살인입니다. 물론 죽어가면서 회개했다면 모를까, 마지막에 살인하고 죽어서 천국 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양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좀 특별합니다. 분명 자살이지만 “행복하게 죽는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족이 영원히 함께할 거라서.”입니다. 그녀의 죽음 안에는 행복도 있고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믿음도 있고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자살은 자살이기는 하지만 순교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됩니다. 죽음이 행복이 되려면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순교자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에 올 부활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후대에 남겨 본받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죽을 때 행복하고 행복한 이유를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순교입니다. 믿었고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하시며, 당신 삶에 만족하셨고 그 이유가 이웃사랑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웃사랑은 순교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죽음 앞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행복하고 자기 삶을 뒤따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순교의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해 지금 자살로 가고 있는지, 순교로 가고 있는지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는 그날 ‘잠자리’에서 결정됩니다. 삶이 순교인 사람은 잠자리가 행복이며, 삶이 자살인 사람은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한 사람에겐 잠이 상이 되지만, 한 사람에겐 잠이 두려움이 됩니다. 그래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잠자리에 누울 때,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날은 순교의 삶을 산 것이고 믿음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것을 양심이 심판해 줍니다.
어느 주말에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씨에게 응급실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에게 치료를 받던 말기 암 환자의 경동맥이 터져서 응급실로 실려 온 것입니다. 보통 이런 상태라면 수술이나 지혈술을 해야 합니다. 쇼크 때문에 심장이 멎으면 심폐소생술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냥 편히 보내주세요.” 그 환자는 이미 치료를 포기할 정도의 상태였고 더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현재에만 충실해지려 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큰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였고 자신의 상태를 아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한 달 전 환자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네? 아버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데요?” “그냥…. 치료하면 좋아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버지는 항상 “나는 이번에 치료받으면 곧 좋아질 거다.”, “바쁠 텐데 병원에 따라올 필요 없다.”, “아버지는 잘 이겨내고 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초점이 죽음이 아닌 지금의 삶에 맞춰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의사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 혈관이 터져 돌아가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현 상황을 말해주었고, 아들은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환자는 결국 회사나 대인 관계, 인생 등 정리해야 할 상황이 많았지만 하나도 하지 않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순교자들은 항상 ‘죽음’의 순간에 두었습니다.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했습니다. 만약 지금의 행복을 위해 죽음의 순간을 잊는다면 그것이 자살입니다. 잠이나 죽음이나 상을 받으러 가는 순간의 마음이라면 그런 사람의 하루의 삶이나 인생은 ‘순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오늘 하루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잠이나 죽음이나 다 부활의 영광을 받는 마지막 발걸음이 됩니다.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초점을 ‘잠’과 ‘죽음’에 둡시다. 그 순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람이 됩시다. 이것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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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8,16-18 :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16절). 이는 어두움을 밝히고 다치거나 헤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또 거기에서 제 구실을 하여야 한다. 등불의 존재이유는 방에 들어오는 사람을 비추어주고 어둠을 밝혀주는데 그 존재이유가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두움을 밝혀주는 그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구원의 빛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삶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 앞에 나의 믿음의 등불을 가리거나 덮어두어서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의 삶의 길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되어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진정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느끼게 하고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체험하게 해주는 삶임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올려놓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닭장에 10마리의 흰 닭을 넣으면서 1마리는 누런색의 닭을 넣었더니 10마리의 닭은 자기들과 다른 색의 닭을 그냥 놔두지 않고 계속 쪼고 쪼아 결국은 죽였다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조차 자기들과 다른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집안에 어느 누가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보여주자면 시련과 고통이 의례히 따르게 되고 인간적인 정마저 금이 갈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수용하기 힘든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야 하는, 그리고 새로이 모든 것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방어적인 본능이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것 같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8절)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들은 계속 더 큰 하느님의 체험을 갖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중요성도 모르고 그러한 말씀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씀을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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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는 마치 산 위에 있는 고을의 등불처럼 세상을 비추며,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교회 헌장 1항)와 같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어둠을 무서워하였습니다. 어둠은 빛과 반대되는 것으로 빛이신 그리스도에 비긴다면 악이며, 어둠의 시간은 악이 활동하는 때로 여겨졌습니다. 이 어둠의 악을 물리치는 방법은 ‘빛’밖에 없습니다.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18],105)라고 전합니다. 또한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에서 등잔의 불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인 삶인 기름을 통하여 세상을 밝히는 것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죄 말고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히브 4,15 참조). 또한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빛과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을 실천하고, 그리스도께 받은 우리의 ‘빛’을 비추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더욱 믿고 따르게 하며(마태 5,16 참조), 빛으로 어둠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을 잘 닦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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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등불의 비유>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6-18)
이 말씀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복음은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등불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이미 그 등불의 인도를 받아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그런데 혼자서만 가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갈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이기도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7,21) 또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1코린 13,1-3)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는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마라.”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감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일부러 감추지 않는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나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과 복음을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스테파노 순교 후에, 박해를 피해서 각지로 흩어졌던 초대 교회 신자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ㄴㄷ)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당시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흩어지긴 했어도 숨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스테파노 순교와 종교 박해는 오히려 복음이 더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일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신앙인의 능동적인 응답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만일에 당시의 신자들이 박해가 무서워서 숨어 있기만 했다면, 복음의 등불’은 그냥 그대로 꺼져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라는 말씀도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아라. 그래서 집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하여라.”인데, “적극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하여라. 그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그것을 얻는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보면 배척당하기도 하고, 박해도 받겠지만, 기뻐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배척당하는 것이 싫고, 박해받는 것이 무서워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지 않으면, 복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어둠 속에 버려두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라는 말씀은, “복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복음을 감추지 말고 널리 알려라.” 라는 명령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 말씀 뒤에 다음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이 말씀은,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는 명령과 같은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읽으면, “너희가 드러내지 않아도 언젠가는 복음이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고, 너희가 알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훤히 알려지게 될 것이다.”로 해석되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완료되는 날이 오면, 복음 선포
활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날 받을 몫이 없다.”라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라는 말씀은, 당신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듣고 잘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라는 말씀은, “말씀에 성실하게 응답하고 잘 실천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의 뜻을 제대로 알고 실천한 종들에게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여기서 ‘많은 일’은 ‘큰 기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행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큰 기쁨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씀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실행했더라면 받을 수 있었을 은총을 못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빼앗길 것이다.’는 뜻으로는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잃는 일입니다.(마태 7,21) 전에 무슨 은총을 얼마나 받았든지 간에 그 은총에 응답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하느님 나라에서 그 은총이 완성되지 않으면, 그것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게 되고,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바로 지금’ 실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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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가톨릭평화신문은 2개의 연재를 기획하였습니다. 하나는 이길재 기자의 ‘신 김대건, 최양업 전’이고 다른 하나는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입니다. 2개의 기획기사를 읽으면서 초대 한국교회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어째서 한국의 천주교회는 자생적으로 시작되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가톨릭성가 287번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성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에 짙어 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노래를 작사하신 최민순 신부님은 당시 조선의 실학자들의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불교를 받아들여서 삼국통일일 이루었던 신라가 있었습니다. 유교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교와 유교이외에 또 다른 깨달음의 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진리,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진리,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은 사랑과 친교 그리고 나눔의 관계를 보여주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는 진리, 하느님께서는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그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죽더라도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였고, 강한 군사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면 국가는 부강하고,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이 받아들인 진리인 천주교는 이 땅의 중인, 양인, 천민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정부는 천주교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이유, 문화적인 이유, 사회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는 당시 천주교를 믿는 양반들을 몰아내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이유는 당시 천주교회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유교의 전통에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사회적인 이유는 신분제도가 있는 조선시대에 천주교인들은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면서 신분의 벽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천민들도 많았습니다. 그분들이 박해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복자 황일광 시몬은 당시 천한 신분인 백정이었습니다. 황일광 시몬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희생된 신앙 선조는 1만여 명에 달합니다. 그중 많은 선조가 황일광 시몬 복자와 같이 신분 세습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사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들에게 신앙은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을 각오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는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나의 욕심이, 나의 게으름이, 나의 자존심이, 나의 이기심이, 나의 교만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나 자신을 떼어놓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순교자들이 보시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너무 쉽게 보이곤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야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재산과 가족, 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지켜온 신앙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와 나눔, 우리의 사랑과 희생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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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배교를 취소한다는 표시로 똥물을 마셔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모질고 혹독한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순교의 영예를 얻은 한국의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일상의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순교자들이 배교하지 않고 단번에 순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죽음 앞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배교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배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개하여 순교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하며 매일의 일상 안에서 유혹에 빠져 넘어지더라도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예전에 저희 아버지께서 들여 주신 재미있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사제가 많지 않아 주로 공소에 모여 공소 예절을 하고 일년에 한두 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봉헌하던 곳이 많았습니다. 미사와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몇 십리를 걸어서 가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간절했기에 오히려 더 믿음은 순수했습니다. 한 번은 부부가 고해성사를 보고는 같은 보속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며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공소올 때 고무신에 콩을 3개 넣고 걸어 오라”는 것이 보속이었습니다. 지금 이런 보속을 주는 사제는 없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했나 봅니다.
아무튼 보속을 지키기 위해 아내는 콩을 3개 고무신에 넣고 한 시간 거리의 공소를 향했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남편은 멀쩡하게 잘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당신 고무신에 콩 넣지 않은 것 아니어요?”
그러자 남편이 “나도 넣었소. 나는 더 보속하기 위해 5개나 넣었소!”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게 걸어갈 수 있어요? 당신은 참 대단하셔요. 소 발바닥도 아니고…”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소! 삶은 콩을 넣었거든!” @@
그렇죠! 신부님께서 보속으로 어떤 콩을 넣으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남편이 보속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의 수난을 묵상하기에 삶은 콩은 부족한 듯 보입니다. 아무튼 어릴 때 들은 남편의 재치있는 “삶은 콩 이야기”는 늘 생각하면 할수록 저를 미소 짓게 만듭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지금 우리야 성당도 많고 사제들도 많아 자동차로, 전철로, 혹은 걸어서 쉽게 미사 참례를 할 수 있고, 고해성사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지만, 200여년 전 한국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오던 시절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쇄국 정책으로 천주교를 박해하자 많은 교우들이 칼 아래 쓰러져 순교하거나 피신에서 산속에서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신부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들으면 수 십리길을 멀다 않고 걸어서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그들은 간절했기에 더 순수했고, 그들은 절박했기에 더 열정적이었습니다.
가령 성 이호영 베드로는 “1835년 2월에 한강변에서 누이 이 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당하면서 갖은 형벌을 받았습니다. 감옥 안에서의 고통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여러차례 혹형을 당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살이 터져 피와 고름이 흐르며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는데 그 후로도 형조로 이송되어 3차의 형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감옥에는 악취는 물론 굶주림에 지친 이는 더러운 지푸라기를 뜯어먹기도 하고 이까지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4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온화한 모습을 항상 보여주면서 기도를 계속하였고, 누이와 함께 순교하기를 원하였지만, 옥에서 얻은 병으로 끝내 1838년 11월 25일 주님의 나라로 갔습니다.”
성녀 이소사 아가다는 “1839년 5월 24일, 달구지에 다른 신자들과 함께 태워져 포청을 떠나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도 온화한 기색을 잃지 않았으며, 달구지에서 내려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아 순교의 옷을 입고 천국으로 기꺼이 올라갔다.”라고 전합니다.
성녀 박희순 루치아는 “형조로 이송되어 곤장 30대를 맞았고, 다리가 으스러지면서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이 되었지만 "이제야 오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하였는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교우들에게 감동적인 권면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궁녀로서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처지임에도 신앙의 고통을 스스로 안고서 모든 유혹과 형벌과 고문을 참아낸 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하늘나라의 궁궐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강론을 준비하면서 순교 성인들의 이야기를 거의 다 읽었는데 대부분 이와 유사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에 대해 흔히, 그분들은 우리와는 아주 달라서 단순하고 단호한 믿음으로 죽기까지 충실하게 주님을 증언했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분들을 본받아 오롯한 믿음으로 일상의 모든 박해와 십자가를 기꺼이 이겨 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천주님을 배반함은 큰 배신이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분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희광이들의 칼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지금 우리야 쉽게 성사에 참여하고 성경과 교리를 배울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보다 훨씬 배움의 기회가 적었고, 신분 사회 안에서 외적으로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분들께서 어떻게 그렇게 죽음 앞에 당당하실 수 있으셨을까 의심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순교하신 분들이 계신 것에 반해, 또한 많은 교우들이 죽음과 고문 앞에 배교를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단순한 이원론적 신앙,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내세의 보상 심리, 계급 사회에서의 기존 지배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욕구 등으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신비로운 순교자들의 크신 믿음을 인간의 머리로만 헤아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라고 기도하셨듯이, 우리 한국 순교성인들 역시 죽음 앞에 두려움과 주저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 정국보 쁘로다시오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타인의 밀고로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형벌과 형관의 감언이설로 결국 배교하여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석방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배교를 뉘우치면서 다시 형조에 달려가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여러 차례 원하였습니다. 처음 그의 배교는 신자들을 슬프게 만들었고 격분 시켰지만, 그의 회개와 순교는 더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성 허임 바울로는 너무 심한 고문과 혹형에 배교를 하여 풀려나왔습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배교를 취소하였습니다. 형리가 배교를 취소한다는 표시로 똥물을 마셔야 한다고 했을 때, 서슴지 않고 한 사발을 떠서 마시고 또 두 번째로 떠 마시려고 하자, 형리들이 깜짝 놀라며 그를 말렸다고 합니다.
성 남경문 베드로는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여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 첩까지 거느리고 사는 방탕한 생활을 3년 동안 계속하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다시 고해와 성세성사를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을 뉘우치고 그 죄를 보속하기 위해 순교를 결심하고 다시 열심히 수계하였다고 합니다.
성녀 이성례 마리아는 젖먹이 세살 막내를 포함하여 다섯 아들과 남편이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급기야 감옥 살이의 굶주림 속에서 막내 세살 젖먹이가 빈젖을 빨다가 그만 옥에서 죽자, 어머니 이성례는 실성을 할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흔들려 이대로 가다가는 아이들 모두를 굶겨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결국 배교하겠노라고 고하고 맙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풀려나 남은 아들들과 함께 골목 골목을 누비며 걸식을 하고 다녔지만, 주린 배를 채우기가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교우들도 배교를 알기에 밥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습니다. 형조에 이르자, 이성례 마리아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배교의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습니다
성 우세영 알렉시오와 성 김제준 이냐시오도 배교 후 다시 회개하여 순교한 성인들입니다. 이처럼 순교 성인들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명의 인간으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고통 앞에 믿음을 저버리기도 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순교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상 안에서 신앙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진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더 큰 선으로 인도해 주심을 믿고 그분의 길을 따라 가도록 해야 겠습니다. 다시 일어나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르며 바오로 사도와 같이 다음의 고백을 드리도록 합시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헐벗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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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영재 요셉 신부님]
이영재 요셉 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복음 9장 23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오늘의 대축일은 우리에게 참된 용기와 위로를 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모든 현상을 넘어 원리와 진리의 지혜를 찾도록 인도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믿는 이들의 선택은 훈련이고 교정이며 시험을 거친 것이지요. 도가니 속에서 금이 정제 정련되듯,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통해 믿는 이들이 당신 뜻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단련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천상적 지혜와 지식을 얻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을 제시해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복음 9장 23절)
먼저, 세상의 많은 것을 버린다 해도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갈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럴 진데, 자신을 버리는 일이 어찌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러기에 매일 우리는 자신을 비워내는 수련을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피하는 게아니라 짊어져야 할 대상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모든 일을 죽음으로 수행하신 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큰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이 단련의 기회요 순수하게 정련되고 정제되는 기회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거 할 좋은 기회임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어려워하며 떠나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복음 6장 67절) 하고 물으셨습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 같기도 합니다. ‘너희도 정녕 떠나려 하는가?’ 많은 이가 떠나더라도 우리 신앙인마저 덩달아 떠나서야 되겠습니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복음 6장 68절)
우리 모두 오늘 들은 독서 말씀들에서 힘을 얻어 순교자들처럼 믿음을 증거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지혜서 3장 2절-6절)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장 31절.35절, 38절-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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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상훈 바오로 신부님]
<큰 사랑을 이뤄 한몸같이 주를 섬기라>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국천주교회는 2021년 한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여 많은 신자들이 성 김대건 신부님이 보여주신 믿음의 모범을 따라 살도록 초대하며, 특별히 한국의 모든 사제들이 성 김대건 신부님을 닮아 신자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불타오르기를 권고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종식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그 기세를 떨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신앙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많은 것에 불안한 것이 우리들의 현 상태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마음에 성 김대건 신부님이 쓰신 편지글이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신부님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상황에서 신자들을 향해 편지를 쓰시는데, 그 편지 가운데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님들께! …부디 환난에 짓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서 뒷걸음치지 말고, 오히려 지난날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아주 많이살펴 이를 본받고 실행하여 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이며 자녀가 되었음을 증거하십시오.”(21번째 서한, 마지막 회유문 중에서
코로나19로 미사 참례와 기본적인 성사 생활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많은 신자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체를 모시고 미사성제에 참례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이자 뿌리임을, 역설적이게도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뿌리가 점점 약해지고 흔들리며 우리의 신앙이 위기에 처하게 됨을 절감하지만, 나약하기만한 우리는 이 같은 위기와 환난의 상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성 김대건 신부님은 분명한 답을 제시 해 주십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의 말씀 그대로 코로나19라는 환난에 짓눌려 하느님을 받드는 일과 영혼을 구하는 일에서 뒷걸음질 치지 않도록, 지난날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성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한국천주교회의 순교 성인들의 삶을 묵상하며 본받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한국 모든 사제들의 수호자이자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께서 우리의 작은 노력에 함께하여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고 하느님의 곁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부디 서러워하지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 몸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후에 함께 영원히 하느님 앞에서 만나 길이 영복을 누리기를 천 번 만 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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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라>
5월부터 지금까지 계단 오르기 운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폭염으로 숨이 턱턱 막혀도, 장대비가 내려 나가기 귀찮아도 ‘날마다’ 하루 한 시간씩 꾸준히 계단을 오른 결과, 지난 몇 년간 늘 ‘다이어트’를 해왔음에도 꿈쩍 않던 체중이 빠지기 시작해 총 11㎏ 정도 살이 빠졌지요.
이 체험을 통해 어느 한 가지를 꾸준하게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겨우 체중 몇㎏ 줄어든 정도도 이렇게 큰 기쁨을 느끼는데, 만약 내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하고 행복한 삶을 선물로 받게 된다면 얼마나 더 기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려면 어떤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먼저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구원에 별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것들을 덜어내라는 뜻입니다. 좋아하고 원하는 것만 하려고 드는 나의 취향, 성격, 계획 등 자기중심적인 것들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예수님 중심의 삶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는 절망이나 포기와는 다릅니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여름에 감나무가 덜 익은 열매들을 털어내듯이, 가을에 활엽수들이 그 많던 나뭇잎들을 떨구듯이…. 중요한 것은 그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꾸준함을 ‘날마다’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듯이,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그 날 분량의 만나 만을 거두어들였듯이, 하루하루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고 봉헌하는 과정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은 십자가를 지는 행동으로 구체화 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에 동반되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편하고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려고 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길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비효율적,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걷다 보면 중간에 높은 산과 깊은 강을 만나는데, 그렇다고 ‘천국’을 내버려두고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 그냥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이 ‘어쩔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짊어진 채 힘겹게 끌고 가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원래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듯,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어 안고 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나를 아프게 찌르고, 손해와 희생을 주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사랑과 순명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 성인들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신 분들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분들이 고난을 당하고 벌을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분들의 마음은 주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고통이 그저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을 본받고 싶다면 우리도 구원에 대한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그 희망은 신앙인다운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는 이들은 그 마음가짐을 굳건히 가지기 어렵겠지요. 가정생활도, 사회생활도 ‘그리스도인답게’,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해야 마음속 희망이 굳건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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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성인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1만여 명의 순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11위의 성직자와 92위의 평신도, 모두 103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셨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개혁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는 말씀하십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부 떼르뚤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바쳐야하는 순교를 강요하지는 않을지 모르나, 여전히 하늘나라의 정의와 진리를 위한 투신의 삶은 시대와 세속정신을 거슬려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으로 녹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 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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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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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8,17)
<등불이신 예수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지만, 어제 주일로 이동해서 지냈기 때문에 연중 제25주간 월요일로 복음묵상글을 준비합니다.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 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와 함께하는 명절이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둥근 보름달처럼 넉넉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등불이신 예수님, 어둡고 그늘진 세상을 훤히 밝히시러 오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 빛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등불과 빛'이 상징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전 존재를 너를 위해 내어놓는 사랑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셨고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순교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늘진 세상,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착한 행실과 작은 관심들, 미소와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인사가 그곳을 훤히 비추는 등불이요 빛입니다.
요즘 우리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입니다. 거기에 코로나 팬데믹이 더해져서 우리의 친교가 점점 더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너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늘진 삶,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곳을 나의 착한 행실로 훤히 비추고 밝히는 등불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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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빛이 빛들에게>
루카 8,16-18 (등불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한빛이 빛들에게>
한빛이
빛들을 놓아
작은 빛은 작게
큰 빛은 크게
결코 스스로
꺼지지 말고
더 이상
비출 수 없을 때까지
다만 끝까지
비추라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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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상에는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 순간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서 절망과 좌절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힘든 순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 힘든 시간을 버텼음에 뿌듯함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분명히 지나갔고 지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든 순간을 보내고 이렇게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데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저를 잡아주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습니다. 제 편이 되어 주었던 가족이 있었고, 힘차게 응원해 준 친구도 있었으며,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자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은 침묵 속에서 제게 필요한 것을 주신 주님이었습니다. 이런 만남 안에서 저는 성장해왔고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가며 지금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손길은 종종 실망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는 어떠할까요? 주님의 손길 역시 커다란 실망으로 다가오기는 합니다. 문제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이 담겨 있을 때, 주님의 손길을 실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으면서 지금을 힘차게 살아갑니다.
우리나라의 성인·성녀들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위협에서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말씀에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믿지 않는 사람은 배교하지 않는 순교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고,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항상 우리의 시선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절대로 실망하지 않는 순교자들의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과거와 같은 박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신앙을 저버리게 하는 많은 유혹이 많습니다. 그 모든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현대의 새로운 순교자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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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찾기>
어느 군부대에 저녁 식사 때 특식으로 돈가스가 나왔습니다. 병사들은 맛있는 돈가스에 큰 기대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잠시 뒤에 또 좋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글쎄 돈가스를 하나가 아닌 두 개씩 배식한다는 것입니다.
병사들 모두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배식하면서 돈가스 소스를 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부식 담당 병사가 실수로 돈가스 한 상자, 소스 한 상자가 아닌, 돈가스 두 상자를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집니다. 소스 없이 어떻게 퍽퍽한 돈가스를 두 개나 먹냐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한 선임이 말합니다. “너희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분명히 어떤 부대는 지금 돈가스 없이 소스만 2인분 먹고 있을 거야.”
조금만 생각하면 감사한 일투성입니다. 그런데 왜 감사하지 못한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까?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 안의 작은 감사를 계속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커다란 감사의 일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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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등경 위에 놓은 등불>
신앙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가슴에 담고 가슴에 담은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생활화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요, 죽은 믿음(야고 2,17)입니다.
등불은“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합니다”(루카8,16).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으로 봉사하고 섬겨야 합니다. 촛불이 자신을 녹이지 않으면 빛을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희생이 없는 이웃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합니다.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고 영적성장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의 지식을 생활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살지 않으면 이미 받은 믿음의 은총도 시들해집니다. 마음이 완고해지면 빛이 들어갈 틈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수 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간수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가지 않습니다.”(로마 11,29)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시기 바랍니다.”(1베드 4,10)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 주셨고”(2고린 4,7), 당신의 빛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의 관심사와 모든 행동이 주님을 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면 할수록 더 견고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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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순교적 신망애信望愛의 삶-
섬김의 영성, 섬김의 권위입니다. 어제 일반 알현시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섬김에 대한 말씀이 은혜로웠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함은 섬김service의 원의願意를 뜻합니다. 사실 하느님 눈에, 위대함과 성공은 사회적 지위나 직업, 또는 재산이 아닌 섬김에 따라, 그가 지닌 것이 아니라 그가 내주는 것에 따라 측정됩니다.”
섬김의 절정이 순교입니다. 섬김의 삶자체가 순교적 삶입니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인 한국 순교 성인들 대축일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연휴기간에 맞는 대축일이라 흡사 큰 축제 날처럼 생각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어제 연중 25주일에 이동하여 대축일을 경축했지만, 우리 수도원은 9월20일, 오늘 날자 그대로 세계 가톨릭 교회들과 함께 축일을 지냅니다.
정말 자랑스런 대축일입니다. 평신도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참 특이한 한국천주교회는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등 5차례에 걸친 박해를 통해 일만여명이 순교했으니 가톨릭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성인숫자로 하면 가톨릭 국가중 4위로 흡사 예전 산티아고 순례자의 경우 1위에서 4위 사이를 오르내리든 일을 연상케 합니다. 특히 103위 순교성인들은 1984년 5월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로마가 아닌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으며, 당시 수도회의 청원자로 참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뿐 아니라 한반도의 남한은 전 땅이 성지라 할만큼 곳곳에 순교성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시아에서 하느님의 각별한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가톨릭교회요 대한민국임을 깨닫습니다. 순교성인들의 전구로 조속한 시일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북이 이뤄져 남북의 평화공존 및 통일의 기반이 확립됐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특히 만25세 꽃다운 나이에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만46세 한창의 중년 나이에 순교한 성 정하상 바오로 두 대표적 성인들을 대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에 젖게 됩니다. 성 김대건과 성 정하상, 두 성인의 순교 직전 마지막 진술도 감동입니다.
“내 마지막 시간입니다. 주의깊게 내 말을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통교했다면 그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죽는 것도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내 영원한 삶은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사후 행복하고자 한다면 신자들이 되십시오. 하느님 알기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하느님께 영원한 응징이 있을 것입니다.”
“네가 쓴 것은 옳다. 그러나 국왕은 이 종교를 금지했고 종교를 포기해야함은 네 의무가 아니냐?”라는 판관의 물음에 대해, 성 정하상은 “나는 당신에게 내가 신자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죽기까지 신자로 있을 것입니다.”말한 후 참수됩니다.
참으로 의연하고 당당히 순교를 맞이한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참으로 오늘 순교성인들 모두가 우리의 순교영성을 북돋워 순교적 삶에 항구하게 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가톨릭 신자들안에 면면히 흐르는 순교영성의 영적 디엔에이DNA를 믿습니다. 부를 때 마다 감동인, 성인신부 경지의 최민순 신부 작사에 이문근 신부 작곡의 성가도 코로나 2년 연속 부르지 못했지만, 오늘 시간내어 끝까지 구구절절 감동적인 곡을 혼자라도 크게 부르려 합니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칼아래 스러져 백골은 없어도, 푸르른 그 충절 찬란히 살았네.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순교자여, 승리에 빛난 보람 우리게 주소서.”(성가283장1절;순교자 찬가)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 무궁화 부르자 알렐루야
서럽던 이강산아 한목숨 내어던진 신앙의 용사들이
끝없는 영광속에 하늘에 살아있다.”(성가289장1절; 병인 순교자 노래)
두 순교성인뿐 아니라 대부분이 참으로 의연하고 당당히 순교를 맞이한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참으로 오늘 기념하는 순교성인들 모두가 우리의 순교영성을 북돋워 순교적 삶에 항구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을까요? 답은 셋,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즉 신망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첫째, 하느님 믿음으로 사십시오.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믿음으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예외없이 믿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한, 참 많이 나눴던 제 좌우명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이밖에 무슨 소원이 있겠는지요. 이렇게 하루하루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 희망으로 사십시오.
바로 우리가 의인들입니다. 그러니 제1독서 지혜서의 의인들처럼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로 실망하지 마라.”(성규4,74), 베네딕도 성인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우리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떤 고통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죽는 것도 파멸로 여겨지겠지만 우리 의인들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불행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의인들은 불사의 희망을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의인들은 단련을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입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의인들을 용광로 속의 금처럼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찾아오실 때에 우리는 빛을 내고 불꽃처럼 퍼저나갈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지혜서의 말씀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우리 의인들에게 그 은혜를 약속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
셋째, 하느님 사랑으로 사십시오.
제2독서 바오로의 고백은 언제 읽어도 용기백배, 신바람 나게 합니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시들해질 때 다음처럼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그 사랑의 뿌리를 깊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천하무적의 사랑입니다. 영적전쟁에 백전백승의 사랑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안에 우리 연약한 사랑이 깊이 뿌리 내릴 때 비로소 튼튼한 우리 사랑에 영육의 치유에 건강입니다.
유비무환, 예방이 치유보다 백배 낫습니다. 힘있을 때, 여력이 있을 때 지체없이 항구히 날로 깊이 그리스도께, 하느님께 사랑의 뿌리 내리시기 바랍니다.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순교적 신망애의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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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빛이 되는 방법을 안내하십니다.
"등불을 ...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등불은 숨기거나 감추지 않습니다. 등불의 역할이 공간에 빛을 비추는 것이니 일단 그 목적으로 불을 붙였다면 감출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빛은 아무리 꽁꽁 덮어두어도 물리적으로 아주 미세한 틈이라도 있을라치면 여지없이 새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아니고서는 빛을 완벽히 감추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한 영혼 안에 들어오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말씀을 듣고 머무르면 내면에 빛이 차오릅니다. 말씀이 세상 고통과 시련으로 어둑해져가는 마음에 빛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가 되려고 다가오시는 주님께서 바로 말씀이시고 빛이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이 말씀은 신앙인이면서 실천 없이 사는 이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경고문과 같습니다. 다가오신 말씀을 품고 내면화하여 말씀에 비추어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서는 빛이 새어나오기 마련입니다. 억지로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렇게 됩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지요. 들은 말씀을 삶으로 표현하는 이들은 그래서 더 받게 됩니다. 그들이 말씀을 지식이나 지혜로써만 아니라, 빛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소유하는 까닭입니다.
반면 다가오신 말씀을 듣고도 삶과 연결하지 않으면 결국 말씀을 잃어버립니다. 언젠가 들은 그 말씀과 인격적으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본인이 지식창고에 고이 간직한 줄로 착각해도 쉬이 휘발되고 말지요. 내면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귀와 그의 마음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빛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과의 관계는 기억력이 아니라 삶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방인 "주님의 종"이 등장합니다.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에즈라 1,1)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남 유다는 바빌론에 패망하였지요.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비참하게 유배생활을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빌론의 뒤를 이어 통치한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에즈 1,2)
이방인인 키루스의 통찰이 놀랍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자기에게 권력을 맡기신 분이 누구이신지 정확이 알고 있습니다. 알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하신 주님의 그 말씀을 기민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지요. 이스라엘 민족이 간절히 기다리던 해방은 이렇듯 밖으로부터 도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에즈 1,5)
키루스뿐만 아닙니다. 이미 바빌론에서 자리를 잡고 적응해 살던 이들 중에 주님의 메시지에 귀기울인 이들이 이에 협력하기 위해 당장 이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들 역시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함으로써 민족적 구원 여정에 앞장선 이들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고 흘려버리거나 의식 저편으로 묻어두지 않고, 자기 인격 안에서 내면화한 뒤 삶에서 역동적으로 표현하는 이들을 통해 말씀은 빛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화답송)
귀양살이를 마치고 기쁨에 차 예루살렘을 향하는 무리의 환호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분 말씀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삶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이들을 통해 "큰일"을 이루십니다. 말씀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까지 우리 각자의 삶에서 역동을 일으키셨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되짚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각자의 인격과 영혼을 통해 빛이 되셨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지요.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머무르는 우리를 통해 그분께서 세상에 빛을 비추시니, 두려워 말고, 움츠리지 말고 말씀에 우리를 내어맡깁시다. 말씀의 사람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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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mBLV4TIi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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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하느님
사랑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것은
하느님
사랑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신앙의
역사가 있다.
신앙의 역사는
십자가와
함께 하는
사랑의
역사이다.
십자가의
신앙은
사랑의
거룩한
순교이다.
이 땅 위의
실제적인
삶안에서
만나게 되는
뜨거운
순교자들의
삶이다.
두려움과
싸워이긴
이 땅의
승리자들이다.
시련과 역경도
그리스도와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순교자들의
승리이다.
양심의
승리이며
진리의
승리이다.
순교의 영혼은
십자가를
드러낸다.
그리스도를
향한 빛나는
믿음이
순교이다.
믿음은
이와같이
단순하다.
믿음은
양심을
되찾는
것이다.
참된
삶을 위해
거짓된
모든 것을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진실로
삶을 이긴
승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뜨거운 순교의
피로 세워진
믿음의 교회이다.
믿음의
역사 안에서
진실로
회개하는
순교자들의
대축일이다.
순교의
희생으로
새 날을
맞이한
우리들의
가을이다.
날마다
사랑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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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된다."(루카 8, 16)
빛 속에서
꽃들이
피어납니다.
빛은 뜨겁고
아름다운 삶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빛이
있습니다.
빛은 빛을
알아봅니다.
빛과 함께
존재하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풀어주는 이 빛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삶을 비추는
등불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렇듯 가까이에
있습니다.
빛은 우리들에게
걸어가야 할 길을
일깨워 줍니다.
빛은 우리를
끌어올려 줍니다.
사랑의 등불이
있어야 할 곳은
우리 마음
한 가운데입니다.
우리 또한
비오 사제처럼
십자가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등불의 이유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사랑으로
비추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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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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