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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31
ㅡ 후삼국시대 8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4 공산전투- '지고도 이긴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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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탄핵문제와 담양군수 재보궐선거 때문에 그 동안 미루어 둔 <고대사는 흐른다> 편이 두 달 가까이나 올리지 못 했습니다.
정리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는 후삼국 시대를 마지막으로 '고대사' 부분을 끝내고, 아직 정리가 안 된 '고려초기' 만 정리를 끝내면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는 '단군'부터 '이승만' 까지 대단원이 끝납니다. 아마 올 상반기까지는 가능하리라 봅니다.
이 완결된 글을 가지고 이미 <'조선오백년 상편', '구한말 역사 중편'이 책으로 발간되어 있고, 앞으로 '고대사 편', '후삼국과 고려편',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 편' 3권을 책으로 발간하여
총 5권의 전집으로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를 마무리 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책 출판은 쉬운 일이 아니고, 비용도 상당히 들어가는 문제라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갈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반드시 해내고 싶은 내 인생 마지막 목표 중 하나 입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집집마다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전집 5권>이 서재에 꼿혀있는 장면을 흐뭇한 미소로 함께 상상해 보면서,
이 기나긴 작업을 또 다시 시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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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전투'(公山戰鬪 현 대구 동구 팔공산 일대)는 후삼국시대 가장 중요하고 큰 전투 중 하나 이다.
'공산전투'는 후삼국 세력구도가 결정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공산전투 개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신라를 적대시하고 틈만나면 신라를 공격해온 '궁예'와는 달리, 궁예를 쫒아내고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신라와의 화친정책을 폈고, 이는 신라 공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후백제 '견훤' 입장에서는 고려가 눈엣가시가 되었다.
왕건과 견훤의 첫 대결은 두 번에 걸친 '조물성전투'로,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고려가 끝끝내 성을 지켜내어 승패가 명확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이 내용은 앞 편 조물성전투 편에서 자세히 정리했다. 참고바란다.
'공산전투' 전개 내용은 고려사에 자세히 나온다.
[왕건이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 대장 신숭겸(申崇謙)ㆍ 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을 빼앗고 전야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ㅡ 고려사 ㅡ
이 공산전투 때 '신숭겸'이 '왕건' 옷으로 갈아 입고 왕건대신 죽고, 그 덕분에 왕건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지만 어느정도 역사적 근거도 있는 사실이다. '태조 왕건'이라는 티브 드라마에서도 '신숭겸'을 상당히 부각시켰다. 왕건도 신숭겸의 그런 충성을 잊지못해 그 공덕을 크게 치하하고 성씨 까지 왕씨로 하사했고 후손들도 극진히 대우했다. 신숭겸은 공산전투에서 장렬한 죽음으로 역사 속 명장으로, 그 가문은 고려시대는 물론 지금도 명문가로 남게 되었다.
'공산전투' 승리를 바탕으로 후백제 견훤은 곧바로 경주로 진격, 포석정에서 잔치를 하고 있던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고,
그 왕비를 겁탈한다. 그리고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옹립한다. 이 때 신라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 후백제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다.
한 나라 왕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이 또한 '삼국사기'와 '고려사' 기록이다.
공산전투 이후 여태까지 계속 고려에게 밀렸던 후백제가 이후 '고창전투' 이전까지 만큼은 확실히 후삼국 주도권을 완전히 움켜쥐게 되고, 견훤의 기세가
그 어느 때 보다도 하늘을 찔렀다.
이처럼 공산전투 승리이후 후백제 견훤 위세는 절정에 달했으나 그러나 견훤의 자만과 무리한 확장이 견훤에게도 위기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고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커다란
패배를 했지만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했다. 왕건의 공산전투 패배는 그야말로 왕건과 고려에겐 최악의 시련의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왕건의 경상도의 영향력이 깔끔히 사라지고 만다.
이처럼 공산전투 이후 후삼국의 영토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후백제는 신라를 실질적 속국으로 만든 동시에 영토 역시 신라 9주 중 6주에 이르러서 최대 판도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로는 전주(전북), 무주(광주 전남), 강주(경남 서부), 웅주(충남과 충북 일부), 상주(경북 북부),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이다.
한편 신라는 서라벌과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만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고려는 변두리의 한주(경기도와 황해도), 삭주(영서 지방), 명주 (영동 지방) 3주만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땅만 넓지 산지가 많고 경제력이 좋지않은 지역 이었다.
게다가 견훤은 오랫동안 눈엣가시 였던 나주 점령에도 성공한다.
이와같이 공산전투는 왕건 개인적으로는 물론 고려의 전체 역사에 걸쳐서도 통주전투, 갈라수전투만큼 최대패배 였다고 평할 수 있는 전투였다.
특히 전투에 참여한 말단 병사들 뿐 아니라 주요 장수들 태반이 전사한 것도 모자라 국왕마저 겨우 목숨만 부지해 나온 전투로 고려가 아니라 한국 역사 전체를 봐도 이런 전투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패배를 교훈삼아 더 이상 무리한 외부 개입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방향으로 정치와 군사를 강화하여 고려기반을 굳건히 다진다.
이후 왕건은 후삼국시대 또 하나 결정적싸움이었던 '고창전투'에서승리하고 후삼국통일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와같이 공산전투는 왕건에게 손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산전투 자체는 견훤의 군사적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어 왕건이 대패배한 전투였으나, 왕건이 신라지원을 하다 패배했기에 당시 신라 여론은 고려측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지게 된다.
또한 공산전투 직후 후백제견훤이
경주까지 침략하여 신라경애왕을 죽이고 경애왕 왕비를 능욕했다는 소문으로 신라 귀족들과 호족들은 견훤에게 큰 반감을 보였다.
신라백성들은 부패와 향락에 물든 신라왕실을 척결해준 견훤이 고마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는 백성들에게 당장 이런 효과가 나타나긴 어려운 환경이었다.
견훤은 공산전투 이후에도 경상도 에서 점유면적을 크게 늘려 갔고, 경북 서남부 및 백제지역에서도 견훤지지가 굳건했다.
이 지역 백성들은 이미 신라 왕실을 마음 속에서 저버린지 오래라 견훤의 경수 만행에 그닥 나쁘게 영향받을 건 없었다.
또한 왕건의 지원군은 그 이후 에도 한동안은 후백제군에게 패배하기 일쑤였다. 경애왕 당시 까지 신라왕실에 충성하던 서라벌 근처 호족들은 제아무리 신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어도 당장은 살아남기 위해 견훤에게 협조할 수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 견훤은 드디어 아버지 아자개의 세력인 상주와 고향인 문경에 있던 세력들을 군사력으로 찍어눌러 후백제 휘하에 강제로 데려온다. 그동안에는 아버지의 세력권이고 어려서부터 봐온 고향 사람들이라 사정을 봐주었지만 더는 봐줄 수 없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던 것이다.
다만 공산전투에서 대패이후 '명주'를 지배하고 있던 호족 '김순식'이 위무를 목적으로 직접 개경으로 왕건을 찾아 간다.
김순식은 명주 군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호족이었고, 궁예가 독립세력을 꾸리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처럼 김순식은 원래 궁예사람이었다.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의 관계가 그동안은 아주 불편했음에도 공산전투 패배를 위무하고자 김순식이 직접 왕건을 찾아 온 것이다. 사실상 김순식의 왕건 지지선언 이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 된다.
신라에 충성도 하고 반감도 가지고 있었던 통일신라 시절 북부 3주 김순신을 비롯한 지역 호족들은 견훤의 지나친 경주 만행 소문을 듣고 견훤보다는 왕건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견훤의 경주만행이 주요 호족들이 후백제를 버리고 고려에 동조하는 큰 계기가 된 것이다.
견훤이 즉위시킨 경순왕도 즉위 초기에는 백제 눈치를 보았지만 결국은 고려로 갈아 탄다.
이와같이 공산전투는 견훤의 대승리였으나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후 후삼국 통일 향방을 갈랐던 '고창전투'에서도 그 일대 신라 호족들이 왕건 편을 든 것이 견훤 패배 결정타가 되었음을 고려할 때 공산전투 승리로 욱일승천하던 견훤 위세로 삼국통일로 이끌지 못 한 것은 견훤이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능력이 왕건에 비해 많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경애왕 강요로 자결시킨거와 그 왕비 겁탈이 견훤 왕 자질에 대한 치명타가 되었다.
그러나 견훤은 이후 왕건에 보내는 편지에 경애왕 살해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서 보니 경애왕은 이미 죽어있었다고 변명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삼국사기나 고려사등 정사에 견훤이 죽인 것으로 나와있으니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결국 경애왕은 견훤의 강요로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며 이후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겁탈했고 장군들은 첩들을 겁탈했으며 경애왕의 동생 박효렴(朴孝廉) 등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갔다]
ㅡ 삼군사기, 고려사 ㅡ
확실한 것은 그 당시에도 견훤이 경애왕을 죽였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견훤도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 들여지고 있었다.
이처럼 '공산전투'는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고려왕건이 견훤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그 결과 후백제견훤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고려왕건이 신라왕실 및 아직 신라왕실에게 충성하는 경북 동부, 경남 일대 호족들의 지지를 얻는 밑거름이 되어 훗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한 전투이기도 했다.
즉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크게 지고도 결국에는 이긴 싸움이 되었다는 것이디.
이것은 반대로 공산전투는 후백제 입장에서 삼국통일 마지막 기회 였다.
아무리 신라나 신라주위 호족들이 견훤이 저지른 행위에 실망했었도 고려왕건이 공산전투에서 죽어 버렸으면 모두 다 소용없는 짓 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덕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끝내 후삼국을 통일 시키고 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지고도 이기는 싸움'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여기서 견훤의 경애왕 자살 압박 유도와 왕비 겁탈설에 조금 다른 의견이 있어 덧 붙인다.>
경애왕 자살과 왕비겁탈 이야기는 정사 '삼국사기'에 나온다. 고려사에도 나오지만 고려사는 삼국사기를 참고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때 유학자 김부식이 신라중심으로 기록했다는 말들이 많다. 그래서 이 기록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다.
견훤 경주만행도 당시 가담항설을 김부식이 진실처럼 정사에 기록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드는 것 중 하나는 견훤이 포석정으로 침입한 것은 12월인데 추운 겨울날 야외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놀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고, 아무리 무능한 왕일지라도 그 많은 병사들이 쳐들어 오는데 그걸 모르고 놀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왜 경애왕을 그런 식으로 표현 했을까?
경애왕은 신라말기 보기드문 박씨출신 왕이었다. 신라는 사위가 왕위를 물려받는 일이 많았는데, 대개 근친혼이 많아서 넓은 의미로 박혁거세 시조를 중심으로 김씨, 박씨.석씨 성씨와 관계없이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따지고 보면 모두 같은 혈족이었다. 그래서 성씨가 김씨인 김부식이 박씨 출신 왕인 경애왕을 조금 홀대해서 기록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경애왕 재위기간은 3년에 불과 했지만 '고려'나 '당나라' 등에 신라를 지키기 위하여 이런 저런 외교적 시도들을 볼 때 분명 무능하진 않은 용기있고 나름 유능한 군주였다. 이런 그가 견훤부대가 경주 포석정까지 들이닥치는데도 그걸 모르고 그 추운겨울에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 뒤가 전혀 맞지않는 일이다.
그리고 견훤이 당시 60세를 눈 앞에 둔 나이였는데 얼마나 성적 욕망이 있었다고 왕비를 겁탈을 할 수 있었겠냐는 설도 있다.
한 나라를 창업한 견훤정도 되는 사람이 왕비겁탈이 후에 얼마나 욕된 역사가 되는지 몰랐거냐는 것이다.
견훤도 왕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러한 것들에 대해 극구부인하는 내용이 삼국사기 기록에도 나온다.
견훤의 경주만행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우리는 우선은 정사 삼국사기 기록을 깨뜨르는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정사에 기록된대로 믿고 갈 수밖에 없다.
ㅡ 초롱박철홍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