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추억
- 손택수
프린터기가 종이를 씹는다
이면지를 쓰면 생기는 일이다
기계에게도 추억이 있다
한 번의 만남도 만남은 만남이어서
무심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질주하는 포장의 평면을 덜컹덜컹
비포장의 굴곡으로 만들며
애를 먹이는 프린터기
씹힌 종이를 뽑는다 구겨진 종이가
뭔가를 겪었다는 느낌이다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뭔가를 자기 식으로
살아냈다는 느낌이다
완행버스 타이어 바퀴라도 갈 듯
종이를 뽑는다 만남 이후의 이면엔 늘
시작점과 종착점 사이에 숨은
풍경들이 있는 것,
그걸 구름이라고 할까
빗방울이 연주하던 잎잎의
떨림이라고 할까
프린터기에 물린 종이를 편다
밥을 먹다 씹은 내 혀다
―계간 《포지션》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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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시조문학 월례 합평회에 내놓은 작품에 이면지를 활용했습니다
오래전 영주FM에서 칼럼방송원고로 뽑아 두었던 이면지였습니다만
문우들은 뒷면의 산문을 의아하게 읽었던 모양입니다^*^
잉크 냄새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장이 지녔던 향기는 옅어져 있었습니다
이면지를 다시 쓰다보면 심하게 찌그러지거나 백지 상태로 겹쳐 인쇄될 때도 있습니다
첫 만남 이후의 이면에 남아있을 풍경들이 흐릿할 때도 있습니다만
늙은이도 밥을 먹다기 자기 혀를 씹을 수 있는 게 삶이잖아요?
익숙하다고 해서 버릇이라고 해서 순탄하다고만 여길 수 없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