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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에 이르러 문학 작품을 정신사의 방법으로 다루게 된 것은 확실히 하나의 충격적인 변혁이었다고 할 것이다. 정신과학이 자연과학과 그 방법론에 의해 너무도 오랫동안 질곡과 속박으로 부자유를 강요받아 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문학의 정신사적 탐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시대정신, 즉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영하는가의 문제이다. 문학정신사에서 역사주의에 관한 인식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인간이 이미 터 잡고 살아온 역사의 내력을 통해서만 밝혀진다는 깨달음이다. 삶은 하나의 움직임으로서 쉴사이없이 흐르며, 이 삶의 흐름이란 다름 아닌 역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삶이란 바로 역사적 삶과 직결되는 의미이다. 이러한 삶은 개인의 삶이면서, 아울러 다수의 개인들을 결합하는 공통성을 뜻하는 것이다. 혈연관계, 지역적 공동생활, 노동에 있어서의 협력, 지배와 복종의 관계 따위가 개인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바탕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고립된 존재로서의 개인은 하나의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정신사적 탐구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삶이 아니라, 개인의 삶이 그 속에서 어떻게 활동해 가느냐 하는 포괄적인 연관에 관한 문제이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개인만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이기도 하며, 동시에 역사의 세계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삶의 내용과 그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가 배출한 빼어난 민족시인 신경림의 시작품을 통하여 시인의 인격 속에 깃들여 있는 정체성, 총괄성으로서의 정서와 그 시대정신을 다시금 간추려 재정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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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도합 마흔다섯 편의 시가 실린 시집 『농무(農舞)』가 발간되었을 때 타성과 안일주의에 빠져 있었던 문단이 겪은 충격은 놀라운 것이었다. 종래의 문단 풍토가 일제 때부터 그 뿌리를 키워 온 순수문학과 모더니즘론, 혹은 핵심이 거세된 이른바 전통적 서정시의 관습을 근본에서부터 사뭇 뒤집어 엎는 느닷없는 돌풍이자 격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다수의 시작품들이 이질적인 로맨티시즘, 경박한 주지풍의 기교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실존주의 따위가 흩뿌려 대는 치기 만만한 몽롱성, 무책임한 언롱(言弄)에 빠져 있을 때, 민중적인 언어라는 보편주의의 원리를 철저히 지키며 마치 갈기를 의기양양하게 나부끼는 야생마처럼 우리들 앞에 당당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출현을 평론가 백낙청은 민중적 경사라고 시집의 발문에서 규정했다. 사실 신경림은 이때 신인이 아니라 1956년 『문학예술』지를 통해 이미 추천을 거친 기성시인이었고, 시집 『농무』를 발간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첫 시집을 발간하기까지 그의 문단경력은 등단 직후의 고작 2~3년간에 불과했다. 그는 등단한 직후 문단의 고질적 통폐 중의 하나였던 서구적 이그조티시즘과 반역사성에 대하여 크게 절망했던 듯하다. 이후로 곧 문단을 떠나서 근 10년 가까이 절필과 침묵의 시간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 절필과 침묵의 시간에 대하여 임헌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침묵의 기간이 신경림에겐 자신의 체질에 맞는 시적 정서를 효모화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이 미학적 누룩은 이내 1965년 「겨울밤」, 「산읍일지」등으로 나타나 이내 우리 문단의 서구적 난해시에 말똥말똥하던 독자들을 서서히 취하게 만들었다. (장시집 『남한강)』해설 중에서)
시집 『농무』의 작품세계는 대대로 시달릴 대로 시달려 온 농민들의 삶의 애사(哀史)를 리얼하게 묘사해 냄으로써 민중현실의 리얼리즘적 표현을 훌륭하게 성취해 낸 것에 그 주된 가치가 집중된다. 신경림은 이 시집 한 권으로 우리 시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70년대 민중문학의 힘찬 전진을 예고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시집 『농무』의 출현은 그만큼 한 시대가 물러가고 다시 새로운 한 시대의 등장을 선포하는 웅장한 종소리로 우리들의 가슴 속에 고동쳐 왔다.
시집『농무』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있는 작품은 「겨울밤」,「시골 큰집」,「파장」,「농무」,「눈길」,「그날」,「폐광」,「갈대」,「사화산 ·그 산정에서」등이다. 시 「겨울밤」을 휘감고 있는 것은 뒷방, 흰빛, 슬픔, 통곡과 자조 따위로 이어지는 기본적 질료이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30년대의 시인 이용악의 시에서 나타나던 눈 덮인 두만강 부근 지역의 정서, 백석의 시에서 특히 「주막」,「장꾼」등의 계열이 머금고 있던 토착민들의 정서가 70년대 초의 신경림에 이르러 고스란히 계승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경림은 백석과 이용악, 더불어 그를 문단에 추천시켜준 이한직을 포함하여 그들의 시에서 허전하게 느껴지던 민족적 민중적 정서를 거의 완전하게 통일시킨 모습으로 이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작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라는 말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눈이여 쌓여/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하는 식의 자기모멸적 어투로 슬그머니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작품 후반부에서 ~라도라는 식의 불특정 사물에 대한 충동적 의탁 쪽으로 이어져서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을 더욱 불편하고 갑갑하게 만든다.
시「시골 큰집」은 이미 감이 다 떨어져 버린 감나무, 을씨년스런 까마위 울음 따위로 가득 차 있다. 한마디로 불길하고 뒤숭숭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분위기의 암시를 통해서 파탄 직전의 농촌과 분해되어 가는 농민들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해 준다. 염세주의, 도박, 빈 닭장,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둑 따위의 장치들은 이 깨달음을 보조해 주는 상관적 부품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하는 좌우명을 작품 속의 적절한 부분에서 떠올려 보여 줌으로써, 이 시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을 슬그머니 일깨워 주기도 한다.
시「파장」의 첫 행은 시「겨울밤」에서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이라는 대목과 합일되고 있다. 말마따나 유유상종이라고나 할까. 도시와 농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갈등과 격차를 이렇게 애틋하고도 정감어린 표현으로 뽑아내었던 작품이 과거에 몇이나 되었던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시「농무」에서 징소리를 울리며 국민학교 운동장 가설무대의 한바탕 공연을 끝내고 술을 마시는 농악대의 대원들은, 모두 시「파장」의 표현처럼 서로 얼굴만 보아도 흥겨운 못난 놈들이다 .그들은 술에 취하여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고 일제히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원통함을 느끼는 자기인식이 어느 틈에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는 식의 자기푸념조로 떨어져, 의식은 둔화되고 예각은 해체되어 버린다. 시「겨울밤」에서 조금씩 나타나고 있던 자조 자괴적인 음조가 여기서도 전개된다. 농악대가 자못 신명이 나서 어깨춤을 들썩이고 하는 것도 사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어떤 결핍에 대한 스스로의 한과 악의 지받침 때문일 것이다.
시「눈길」의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은 뒷방이다. 이 뒷방의 음산한 정서는 「겨울밤」, 「시골큰집」등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일종의 무대 효과이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마약중독자가 웅크리고 있는 주막집 뒷방, 굶어 죽은 소년 원귀의 울음처럼 음산하게 불어 대는 뒷산의 바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삶의 구체적인 과녁을 잃어버린 작중 화자가 어이없이 흘려 대는 실소(失笑)가 이 작품의 전반적인 빛깔이다. 이 작품의 형성 배경에 대해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50년대 말 60년대 초는 내게 있어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먹고 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이때 비로소 절감한 셈이다. ……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 그런 어느 해 겨울 내게 알맞은 일거리가 생겼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시인에게 맡겨진 일거리는 약초를 수거하는 장사꾼들의 길 안내였고, 그들과 함께 충북의 북부지방, 강원도의 남서부 일대를 상당 기간 동안 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백여 리 이상을 걸어다닐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 떠돌이 생활은 내가 스스로를 정리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무렵에 내가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내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같은 글)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가난함, 세상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 체념으로 비뚤어진 성격들을 느끼며 그는 오랫동안에 걸친 산골 여행 중에 얻어진 내 생각과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삶을 두 집 마을의 주막을 무대로 나타내 보고자 애를 썼다.고 하며, 한편 우리가 증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에 대해서 분명히 드러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그날」의 경우에서도 이러한 그의 신념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젊은 여자가 혼자서/상여 뒤를 따르며 우는 그 고절함과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에서 느껴지는 적막감은 슬픔의 극치를 맛보게 한다. 시인은 이 12행의 짧은 소품 속에서도 시인 자신의 특이한 어법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5행과 6행에서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과 없는 거리
하는 표현을 통해 모든 관계의 소통이 완전히 절연되고 차단된 세상의 단면을 실감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시「폐광」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도 「눈길」에서의 표현양식과 합치된다. 그 둘을 서로 대조해 보면
Ⅰ)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눈길」중에서
Ⅱ)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 죽은 내 친구들의 하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
-「폐광」중에서
돌아오지 않는 마을 젊은이, 빈 금구덩이를 바라보면서 부엉이 울음은 귀신의 울음으로 환치되어 들려왔던 것이다. 이 「폐광」이라는 시는 시인 신경림의 창작 모티프를 짐작하게 해 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시인의 자작시 해설에 의하면 그가 맨 처음으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 준 것은 바로 광산이다.
어렸을 때 내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일들은 대개 광산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 뒤 언덕길을 지나가던 밤 대거리들의 칸델라 불빛, 장날이면 으레 싸전 뒤 밤나무 아래서 벌어지던 광부들의 싸움질, 콩을 팔러 집으로 찾아오던 광부의 아낙네들의 억센 사투리, 어머니를 따라가 들여다본 단칸 움막 속의 흐린 십 촉 전등, 금방앗간에서 흘러와 냇물바닥에 깔리던 복대기흙.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시인은 자신에게 글 쓸 기회가 주어지게 될 때 단연코 광산에 관계되는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중에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이후에도 그는 서정시라고 하는 제한된 형식의 틀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소설로 쓰려다가 종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20여 개의 기필고 빠져서는 안 될 광산의 소재를 집약시켜서 16행의 시로 만들었다. 그것이「폐광」이라는 결정체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슬픔과 쓸쓸함을 회고조로 노래하는 것들이다. 시집『농무』에서 「사화산 · 그 산정에서」와 같은 작품의 역동적인 자아극복의 힘이 받쳐 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회고조만으로 일관된 시집은 그 효과가 훨씬 반감되었을 것이다. 폭발하는 화산이 느끼는 희열이 점철되어 있고, 그 격정은 드디어 온 산이 흔들이게 한다.
나도 이제 불을 뿜던 분화구처럼 가슴을 헤치고
온통 바람 소리로만 가슴을 채우리라.
이렇게 결연히 다짐하는 대목에서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시집 앞부분의 우울하고 비판것인 색조를 일시에 벗어나게 해 준다. 사실 신경림 시의 온후함은 일찍이 그의 데뷔작인 「갈대」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연약한 갈대는 울음을 통해 자기발전, 자기의식의 단계를 경험하게 되고, 또 이러한 과정은 드디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조용한 울음의 연속이라는 자아각성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시 「갈대」는 시인 신경림의 전반적 성정이나 기질 같은 것을 은근히 머금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무튼 시집 『농무』는 백낙청의 말처럼 이제 우리는,보아라 이런 시집도 있지 않은가라고 마음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하는 평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3
시집 『새재』는 신경림 시인의 두 번째 시집으로 『농무』가 발간된 지 6년 후인 1979년에 출간되었다. 전체 33편의 구성으로 단형소품 서정시 32편에다가 장시「새재」를 뒷부분에 수록하고 있다.(장시 「새재)」는 1987년에 발간된 장시집 『남한강』의 제 1부에 해당된다.) 비록 민중적 가락이긴 하지만 슬픔과 쓸쓸함으로 일관되어 있었던 시집 『농무』에 비해, 『새재』는 우선 민중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역사에 대한 시인 자신의 확신과 민중적 삶의 슬기가 한층 고조되어 있다. 그리고 1시집에서 다소 추상적 구조로 얽어져 있던 민중적 가락이 2시집에 와서는 보다 단편적 서사성이 2시집에 와서는 보다 구체적인 민요조의 가락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1시집에서의 단편적 서사성이 2시집에 와서는 장편으로서의 호흡과 체격을 갖춘 장시의 규모로 모색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시집 『새재』에 수록된 단형소품 서정시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작룸을 고르라면 「목계장터」를 먼저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겠고, 다음으로는 「어허 달구」,「4월 19일, 시골에 와서」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시 「목계장터」는 민중문학으로서의 신경림의 시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서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는 이 제목으로 이미 두 번의 작품을 써서 발표했지만 종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것이 왜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나중에 목계장터의 현장에서 깨닫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투망을 어깨에 멘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젊은이 둘이 노랫가락을 흥얼대며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실패한 내 두 편의 「목계장터」는 민중문학으로서의 신경림의시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는 이 제목으로 이미 두 번의 작품을 써서 발표했지만 종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것이 왜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나중에 목계장터의 현장에서 깨닫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투망을 어깨에 멘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젊은이들이 둘이 노랫가락을 흥얼대며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실패한 내 두 편의 「목계장터」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실패작이 되고 만 까닭을 이내 깨달았다.
우리의 고유한 가락 - 그것이 빠져 있어서는 목계장터는 결코 한 편의 시로 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나는 민요에 적잖이 열중해 있었다. 민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첫째는 내 시가 또 한 번 껍질을 벗기 위해서는 민요에서 그 가락을 배워 와야 하고, 또 한 번 껍질을 벗기 위해서는 민요에서 그 가락을 배워 와야 하고, 또 참다운 민중시라면 민중의 생활과 감정, 한과 괴로움을 가장 직접적이고도 폭넓게 표현한 민요를 외면할 수 없다는 매우 의도적이요 실용적인 동기에서였으나, 민요가 보여 주는 민중의 참삶의 모습, 원중의 원한과 분노,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는 원래의 동기와는 관계없이 차츰 나를 깊숙히 민요 속으로 잡아끌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이런 과정으로 해서 형상화된 시 「목계장터」는 우리 민요의 기본적 율조인 4음보의 가락을 바탕으로 깔면서, 이 4음보율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3음보 가락을 적절히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동일 음보의 단순반복에서 오는 호흡의 지루함을 일정하게 조절하고 있다. 3음보율이 배치된 것은 전체 16행 중에서 5,6행과 12,13행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구름, 바람, 잔돌, 방물장수, 들꽃 따위로 상징되는 민중적 삶의 총체성에 관한 깨달음과 정서의 표출이 독자들로 하여금 민중에 대한 다한 다함 없는 연민을 느끼도록 이끌어들이는 묘한 흡인력이 이 시에는 깃들여 있다. 율격 형태는 4음보 행을 네 번 반복하고 난 다음에 3음보 행을 두 번 뒤따르게 하고, 다시 4음보 행을 다섯 번 반복한 다음에 3음보 행을 앞에서처럼 두 번 뒤따르게 했다. 그리고는 마무리 음보로서 원래의 4음보 율격행을 세 번 반복하고 있다. 이를 다시금 정리해 보면 4-4-4-4-(3)-(3)-4-4-4-4-4-(3)-(3)-4-4-4의 율격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가시적으로 정리해 보면 여기에는 이 시의 율격 반응과 그 효과를 염두에 둔 시인 자신의 조직적 배려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명히 짐작된다.
「목계장터」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감수성으로 씌여진 듯 보이는 시「어허 달구」는 격랑과도 같은 위기를 재치 있게 모면하는 민중적 삶의 지혜를 엿보게 해 주는 작품이다. 말 그대로 사람이 사는 일의 보편적인 한과 설움까지 담아 내고 있는 민요 「달구노래」의가락과 정서에서 이 작품의 모티프가 확정지어진 듯하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사람이 산다는 일 잡초 같더라
밟히고 잘리고 짓뭉개졌다
한 철이 지나면 세상은 더 어두워
흙먼지 일어 온 하늘을 덮더라
이 시에서의 저녁 햇살 서러운 파장 뒷골목이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언뜻 시집『농무』에 수록된 시「겨울밤」,「눈길」등에 설정되어 있는 뒷방 의식이 「어허 달구」에 와서 파장 뒷골목으로 연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바람이 세면 담 뒤에 숨고/물결이 거칠면 길을 옮겼다.와 같은 대목의 음영을 우리는 시 「목계장터」에서의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와 순조롭게 연접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목계장터」가 4음보를 기본율로 하고 있다면 「어허 달구」는 3음보가 기본이다. 전체 16행 중에서 3음보가 10행 가량이고, 나머지는 2음보와 4음보가 반반씩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의 음률은 「목계장터」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양식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벗어날 수 없다. 그 까닭은 아마도 민요 「달구노래」의 가락을 그대로 표제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어허 달구 어허 달구라는 네 차례의 매김소리와, 각 매김소리 다음에 4행씩의 사설을 붙여 놓음으로써 복고풍의 유형을 충분히 극복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요가락을 현대시에 수용하는 방법으론 우선 그것의 외적 양식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보다 작품의 가락이나 정서가 담고 있는 내적 양식을 육화시켜서 고스란히 정리해 내는 방법이 좋을 것이다. 일제 강점 시기에 요한, 파인, 안서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에 의해 제출된 민요시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은 모두 민요의 내적 양식보다도 외적 양식의 단순한 모방과 전승에만 주안점을 두었던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시 「4월 19일, 시골에 와서」는 4.19 기념사로서는 매우 성공을 거둔 격조 높은 작품이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불안한 공기에 휩싸여 있는 현실과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밤새워 문짝이 덜컹대고
골목을 축축한 바람이 쓸고 있다.
헐린 담장에 어수선한 두엄더미 위에
살구꽃이 피고 어지럽게
피어서 꺾이고 밟히고
그래도 다시 피는 4월
이 시에서는 대체로 두 가지의 서로 대립되는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가만히 놓아 두지 아니하는 바람, 축축한 바람 따위로서, 이들은 연약한 사물들을 모조리 꺾고 짓밟아 버리는 가학적 성질의 상징이다. 이 가학성에 시달리는 피학적 존재는 소리를 내는 문 , 쓸리는 골목, 헐린 담장 , 어수선한 두엄더미 , 살구꽃 , 4월 , 진달래 , 개나리 등속이다. 남한강 상류 외진 읍내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모두 농촌적 사물이자 상징들이다. 이처럼 소박한 소재를 동원해서 역사의 파행성과 굴곡을 절실하게 묘사해 내고 있는 것은 오직 신경림 시인만의 능력의 탁월성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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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첫 시집 『농무』에서 세 번째 시집 『달넘세』(1985)까지의 발간 터울은 모두 6년씩의 시간적 상거가 있다. 『달넘세』를 발간한 1985년 신경림은 시인 자신의 의욕과 발의로 창립된 민요연구회를 주도하면서 전통민요가 지니는 민중적 잠재력의 명맥을 계승 발전시켜 가려는 사업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1983년 초가을부터 1985년 이른 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노래를 직접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민요기행』이 산문으로 엮어진 결실이라면,『달넘세』는 본격적인 민요시 창작의 실험적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시집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집단적 삶의 구체성을 표현하려는 참뜻과, 또 그것을 통하여 민중적 서정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자 함이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전통형식이 결코 민족의 현실과 이탈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하나로 어우러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관계임을 보여 준다. 시집 『달넘세』에서는 우선 「씻김굿」,「열림굿 노래」,「소리」,「고향길」등이 선명한 인상을 주고 있다.
앞의 세 편은 모두 무가풍의 노래로서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각각 일정한 부제가 붙어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굳이 장르를 가르자면 굿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씻김굿」은 떠도는 원혼의 노래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씻김굿은 주해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호남지역, 특히 진도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해원굿의 가락을 반영하고 있다. 떠도는 원혼이라 했으니 이는 중음(中陰), 즉 중유(中有)를 일컬음이다. 사람이 죽어서 다음의 생을 받을 때까지의 기간으로, 차생(次生)에 태어날 여건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지 때문에 공중에서 떠도는 49일 동안을 지칭한다.
전체가 여섯 연으로 구성되어 각 연이 4-4-5-4-3-5의 행 배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음보율로는 주로 3음보가 기본율로 채택되고 있기 때문에 호흡이 급박하고, 슬픔과 원통함을 절절하게 흡수되어진다. 이승의 한을 풀지 못하고는 도저히 저승으로 편히 갈 수 없는 원귀의 푸념조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따분한 넋두리로 떨어지지 않고 어조의 일정한 긴장을 잘 유지해 가고 있다.
꺾인 목 잘린 팔다리로는 나는 못 가,
피멍든 두 눈 고이는 못 감아,
못 잡아, 이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을 나는 못 잡아.
목을 꺾어 버리고, 팔다리를 자르고, 두 눈에 피멍 들게 하고 손을 찢은 가학적 실체는 과연 누구인가. 시인은 그를 가리켜 한마디로 피 묻은 저 손이라고 규정한다. 그 피 묻은 손이야말로 잔인성, 반민족성, 반역사성, 봉건성, 외세의존성 따위의 구체적 민족모순의 상징으로 드러난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열거되는 골목길, 장바닥, 공장바닥, 도선장은 민중들이 깃들여 사는 장소로서, 그 구체적인 신분들은 시정잡배, 장사치(장돌뱅이), 공장노동자, 부두노동자 등이라 하겠다.
한편 우리는 이 작품에서부터 시작되는 추상적 관념화, 혹은 양식화의 고정에 머무르게 되는 현상을 조심스럽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어허 달구」와 같은 형태에서 이미 조금씩 그 기미가 느껴지던 것으로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다시피 시인이 민요나 무가의 외적 양식에 보다 큰 심리적 부담을 느끼게 됨으로써 초래되는 현상이다. ~라네, ~왔네 등의 서술어를 너무 빈번히 반복시킴으로써 문맥이 담고 있는 의미의 진실성이 주는 중량감과 그 부피가 상당히 탕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달넘세」나 「열림굿 노래」,「곯았네」,「병신춤」,「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겨」등 유사한 계열의 시에서 함께 지적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소리」에서는 외로운 고장, 썰렁한 장바닥, 엿도가, 옹기전, 달비전 등의 공간성에서 앞서 제기된 뒷방의식의 집요한 추구를 엿볼 수 있다. 「열림굿 노래」는 휴전선을 떠도는 혼령의 노래라는 부제가 암시해 주는 것처럼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분단과 동족 상쟁의 수치스러움, 궁극적인 통일조국의 성취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모더니즘 계열의 시에서 부제는 흔히 작품의 표제나 본문과 특별한 관련이 없이 단순한 트릭으로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경림 시에서의 부제는 대개 표제를 보조하면서 본문과의 순조로운 접합을 이루게 하는 정직한 역할을 담당한다. 「열림굿 노래」에서 구사되는 헌신적 이미지의 표현은 1920년대 단재 신채호의 국시 「너의 것」에 나타난 헌신적 이미지를 매우 방불하게 하는 데가 있다.
⑴네 뼈는 바스라져 돌이 되고
네 팔다리 으깨어져 물이 되어
……(중략) ……
네 살은 썩어 흙이 되고
내 피 거름 되어 흙 속에 배어
-「열림굿 노래」중에서
⑵시 「고향길」에서 툇마루, 쥐오줌 얼룩진 벽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우리는 작자 특유의 사상이 깔려 있는 뒷방의식을 느끼게 된다. 쫓기듯 우리는 시인의 데뷔작이었던 시「갈대」에서의 제 조용한 울음이 구체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현저히 느껴 볼 수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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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6년 간격으로 발간되었던 신경림의 시 중 『가난한 사랑 노래』(1988)는 제 3시집 『달넘세』이후 3년 만에 출간되었다. 물론 이 시집이 묶여져 나오기 한 해 전인 1987년에 「새재」,「남한강」,「쇠무지벌」의 3부작을 함께 엮은 장시집 『남한강』이 출간되기도 했었다. 시집 해설에서 유종호가 한 말처럼 시력 30년에 시인의 나이도 어언 50대 중반으로 그의 시는 지천명(知天命)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농무』에서부터 지속적인 주제와 소재가 되어 오던 가난, 쓸쓸함,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삶이 한결 깊어지고 정제된 가락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미 발간된 세 권의 시집에서 줄곧 농촌을 배경으로 민중적 서정을 가다듬어 오던 그의 시각이 드디어 4시집에 이르러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외곽지대 빈민 들의 삶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시인 신경림은 임현영의 말대로 농민시인이 아니라 민중시인이며, 운동으로서의 민요시인이자 의식으로서의 노동시인이 되었다.
급박한 현실을 바라보는 눈도 어느덧 지천명의 경지가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따뜻한 넉넉함과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넉넉함과 여유가 깊어지고 정제된 시의 가락으로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가락이 지난 날 신경림의 시세계가 지닌 호흡에 비해 하나의 변화라면 변화일 수가 있겠고, 다만 이것이 젊은 세대들에겐 미흡함과 불만요소로 작용되어지기도 한다. 후배 시인 이시영은 『가난한 사랑 노래』의 시적 심상의 전개와 분위기가 15년 전의 자기 시집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따갑게 꼬집는다. 이시영은 시집『농무』에 수록된 「산 1번지」와 그것과 발상, 전개구성이 유사한 4시집 속의 「밤비」라는 시를 대비하면서, 시인이 어딘지 모르게 가난의 현실을 느슨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나타낸다(「고은과 신경림)」,『창작과 비평사』1988 가을, 213면). 즉 신경림이 아직까지도 자신의 첫 시집『농무』가 주는 힘겨운 부담과 지속적인 간섭을 떨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누이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시「너희 사랑」은 도시빈민의 삶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며, 그들의 처지와 함께 하려는 청년학생들을 위해서 보내는 격려와 위로의 노래이다. 민요가락의 외적 양식을 특별히 채택한 것도 아니지만 가슴 속에 훈훈함과 애틋함으로 선연하게 전달되어 온다.
「밤비」에서는 이미 이시영도 그것을 지적한 바 있지만 지난 시기의 팽팽한 리듬과 정서의 긴장이 상당히 이완되어 있는 듯하다.
산동네에서도 듣는 남도 육자배기는
느린 진양조 밤비 소리라
세월한테 자식 빼앗긴 아낙네
숨죽인 울음이 되어 떠돌기도 하고
그 자식들의 원혼이 되어
빈 나뭇가지에 전봇줄에
외로이 매달리기도 한다
다소의 변용이 주어져 있긴 하지만 산동네에 오는 비는/진양조 구성진 남도 육자배기라라는 부분은 시 「어허 달구」에서의 경우처럼 일종의 매김 소리의 기능을 띠고 있다. 전체가 세 단락으로 구성되면서 두 행씩 되어 있는 각 매김소리 다음에 5~7행씩의 사설이 붙어 있는 형식이다. 이를 도식화해 보면 (2)-5-(2)-5-(2)-7의 배합이 될 것이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도시의 변두리에 와서 머물며 도시의 주변인이 되어 있지만, 땅 잃고 쫓겨온이란 대목을 보면 원래 그들이 농민들이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즉 오고 싶어서 온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서 등을 떠밀려 쫓겨나다시피 밀려와서 가난과 한숨과 울분 속에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70년대 이후 현재까지 줄기차게 계속되는 농촌파괴와 농민분해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추적하는 시인의 눈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시「가난한 사랑 노래」도 마찬가지의 관점으로 이루어진 시작품이다. 농촌에 고향과 홀어머니를 두고 혼자 바람 찬 도시로 떠나와 고향과 고향의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한 청년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시집『가난한 사랑노래』의 제1부는 대체로 이러한 성격들로 유기적 결합을 이루고 있는 일종의 연작시리즈 형태의 작품들이다.
시「강물을 보며」와 「산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우리는 시인이 온갖 험한 세월을 다 겪어 와서 드디어 지천명의 세대만이 가질 수 있는 투명한 시선으로 삶을 정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의 바깥은 물론이요, 물의 내부와 저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투시하면서 물이 저희끼리 지껄이는 말을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물의 전반적 시간성까지도 환히 끌어안고 말을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물의 전반적 시간성까지도 환히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랜 삶의 경륜에서만 터득될 수 있는 직관과 통찰의 세계임에 틀림없다. 김광섭의 시「산」의 발성법을 연상케 하는 「산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우리들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담담하고 유장한 시를 대하면서, 팽팽한 의욕과 긴장과 탄력이 살아 있는 시는 역시 이삼십대의 영역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시집에 대하여 이시영이 느끼는 불만도 세대로 말미암은 정신적 넉넉함과 여유로운 포즈 때문일 것이고, 시집의 발문에서 유종호가 말하는 기존의 자기 작품과의 연관 속에서 새로운 시의 충전을 기약해야 할 지점에 와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포즈에 대한 우려의 표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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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왕성해지는 그의 창작활동을 반영이라도 하듯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낸 지 2년만에 다시 제 5시집 『길』(1990)이 발간되었다.
이 시집에 수록된 66편의 시작품들은 거의 대다수가 시인 자신이 민요기행을 다니는 과정에서 착상을 얻고 있으므로 시집의 표제에서부터 기행시집으로 못박고 있다. 첫 시집의 시기에서 시인은 궁벽한 고향산천의 뒷방에 웅크리고 사람을 보았고 또한 그들의 쓸쓸함을 설담체(說譚體)의 시로 그렸다. 이러한 그의 시각이 유년이나 청년 시절의 기억을 되새김하는 회고조로 펼쳐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의 회고조는 비록 농도의 짙고 옅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4시집까지 계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5시집『길』은 이런 가락의 오랜 지속이 노출시킨는 이완과 단조로움을 거의 완전하게 극복하고 있다. 물론 이런 극복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승화시키고자 하는 시인의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노력과 이런 극복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더 이상 뒷방이나 산동네에 칩거해 있질 않고, 넓디넓은 세상의 길 위로 과감하게 뛰쳐나와서 행만리로(行萬里路)를 통한 구도적 장정(長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가 수년간을 줄곧 길 위에 떠돌면서 얻게 된 가슴 속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민요기행』의 서문에서 그는 막상 길에 나서서 다녀 보니 생각보다도 세상이 훨씬 더 넓고 크다는 데에 놀랐다는 느낌을 술회한다. 이번 시집의 후기에서 그는 자신이 길을 떠돌며 분명히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대체로 마음 편하게 살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라 편하게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러한 시인의 깨달음은 길이라는 관념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을 토대로 해서 성취된 것이다. 우선 중용이 가르치는 도론(道論)은 먼 데로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진리에서 그의 길 깨달음은 첫 시집 『농무』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문학의 소재는 낮고 짓눌린 민중적인 위치에서 찾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고, 또 그것을 시인 자신의 옛 고향 사람들이 찌들릴 대로 찌들린 삶에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림의 문학의 길은 진작 가깝고 낮은 데서부터 출발하여 드디어는 우리들의 범속한 상식이 감히 뒤따르지 못하는 멀고 높은 경지에 이미 다다르고 있는 것 같다. 『사문유취(事文類聚)』는 중국 진나라 때의 시인 완적(阮籍)의 문학기행을 전해주고 있어 이채롭다. 완적은 특별한 목적은 가지지 않은 채 말을 타고 여행을 하였다. 길은 언제나 넓은 길을 택하였으며, 그렇게 매일같이 다니다가 마침내 길이 끊기면 문득 한바탕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완적의 문학도 이러한 올바른 길을 찾아다니던 그의 품성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나라의 옛 조상들은 일 년 농사를 마무리짓는 가을 무렵 전국의 빼어난 산천경개를 두루 찾아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것은 단지 구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는 것이 진정한 목정이었다. 도중에서 어느 곳의 아무개가 세상을 위한 훌륭한 뜻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풍편에 들어면, 천릿길을 멀다 않고 그를 찾아가서 독대(獨對)하고 세상사를 두루 논하였다고 한다.
길을 갈 데 몰라 거리에서 바자니니
동서남북의 갈 길도 하도 할샤
앞에서 가는 사람아 정길(正道)어디 있나니
고금가곡에 나오는 작자미상의 옛 시조 한 수는 우리들에게 사람이 사람으로서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 일깨워 준다. 무수한 길을 두루 돌아다닌 시인 신경림이 소중하게 얻은 또 다른 깨달음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늘의 우리 시가 너무 크고 높은 것만 좇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자잘한 삶의 결, 삶의 얼룩은 다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어쩌면 민중을 노래한다면서 민중의 참삶의 깊은 곳은 보지 못하고, 기껏 민중을 이끌고 가는 혹은 이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는 힘을 힘겹게 뒤쫓아 그토록 욕심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시의 값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작고 하찮은 것, 못나고 힘없는 것, 보잘것없는 것들을 돌보고 감싸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낮고 외로운 자리에 함께 서고, 나아가서 그것들 속의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또 그것이 시의 참길이 아닐까.
-시집『길』의 후기 중에서
참으로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듣고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소중한 말이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의 거의 절대다수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 부제는 시인이 찾아갔던 곳의 지명, 혹은 만나 본 현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가홍에서라는 부제가 붙여진 「강마을의 봄」은 남한강 유역의 한 강마을인 가홍이라는 곳의 썰렁하고 음산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곳은 해마다 팀 스피리트 훈련의 중심지역으로 변해 버려서 이미 짐배와 뗏목이 강을 메우고/낯선 배꾼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왁자지껄하던 강마을은 죽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봄이 왔다고 그래도 담과 지붕은
개나리꽃 살구꽃으로 덮였는데
그물을 손질하는 늙은이들 두엇만이 보일 뿐
마을이 빈 것처럼 조용한 것은
사람들이 코 큰 병정들의 전쟁놀음이 무서워
어둑한 방에 박혀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분단시대의 을씨년스런 풍경의 전형성을 그대로 실감한다. 지사적 강개함의 어조가 이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파도」와 같은 시는 연전에 여의도에서 일어났던 농민시위를 보면서 그 감회를 쓴 것이다. 거친 바다, 파도를 농민이라는 민중의 잠재력으로 환치시키고 있는 발상은 그다지 새롭지만은 않다.
광산 노동자의 처참한 삶을 그린 「꿈의 나라 코리아」를 읽으며 우리들의 가슴을 칼로 저며 내는 듯하다.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대낮인데도 밤처럼 검은 집과 사람, 문 밖에 내리는 검은 비, 시커먼 손, 때와 먼지에 절은 술상의 처연한 광경이 눈앞에 그대로 보이는 듯하다. 또한 그들이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는 텔레비전 속 여자 가수의 목소리는 하얗게들려온다. 검은 빛깔과 흰 빛깔의 재치 있는 대조는 너무도 엄격히 구획지어져 잇는 계층간의 불평등, 지역간의 낙차, 모순투성이의 사회현실을 서슬 푸르게 말해주는 하나의 확실한 단서이다. 결국 이 시는 거짓, 위선, 우민화, 위화감, 몰이해, 조롱과 천시에 젖어 있는 일반적 통념을 실랄하게 꾸짖는 반향으로 되올려온다.
「가난한 북한 어린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의 작품과 이 작품에는 모두 텔레비전이라는 사물이 출현한다. 시인은 텔레비전이라는 차고 비정한 사물을 통하여, 사실 자체를 왜곡시키고 있는 각종 언론, 즉 매스미디어 전체의 위선과 허구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 노고단 아래」는 황매천의 사당 앞에서라는 부제가 암시하고 있는 바처럼 개결한 선비정신을 지니고 추악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일생을 살아간 황현 선생을 추모하면서 그 감회를 읊은 시이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높은 목소리만이 들리고
사방이 어두울수록
큰 몸짓만이 보인다
목소리 높을수록
빈 곳이 많고
몸짓 클수록 거기
거짓 쉽게 섞인다는 것
시「산그림자」는 2연 11행밖에 되지 않는 소품이다. 아침 한때의 잠시 동안의 경험이 그윽한 풍경으로 담겨져 있다. 이 시에서의 재미있는 구도는 창 너머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창틀 하래 웅크린 아낙의 어깨의 대비이다. 시인이 시집 해설에서 일컬은 작고 하찮은 것, 못나고 힘없는 것,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감싸안음이 짙게 배어 있다. 시인은 우리가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는 아낙의 존재야말로 하늘과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소중한 힘이라고 말한다.
비록 구체적이진 않지만 시「여름날」에 그려져 있는 여름 장마 끝의 산골 풍경화 한 토막도 삶을 끌고 가는 어떤 근본성과 그 아름다움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허연 허벅지를 내놓고 물을 건너가는 젊은 아낙과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는 듯한 비 온 뒤의 버드나무 광경이 이미지의 재치 있는 교합을 이루고 있다.
시「장자를 빌려」와 「소장수 신정섭씨」는 모두 독선과 아집과 위선에 가득 차 있는 세상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시작품에 구사되어 목소리의 결은 어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잔잔하며 나직하게 타이르는 어조로 들려 주는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⑴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자를 빌려」중에서
⑵백성의 어데가 아프고
어데가 가려운 줄도 모르면서
이랴이랴로 끌고 어뎌어뎌로만 다스리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밉다 못해 가엾다
-「소장수 신정섭씨」중에서
⑴에서 우리는 너무 크고 높은 것만 뒤쫓고 이는 오늘의 우리 문학에 대한 따가운 성찰과 비판을 느낀다. 시인의 경험에 의하면 대청봉에 올라서 바라보는 세상과, 산에서 내려와 원통 뒷골목에서 겪은 세상이 얼마나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삶의 원근에 대한 적절한 자기조절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다만 눈앞의 사람과 목적에만 골몰해 있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직핍하게 묘사되어 있다. ⑵의 경우도 ⑴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현실의 관습에 길들여져 있는 세태를 개탄한다. 정치와 민중이 서로 주고 받는 상호교신에 한 치의 착오도 없어야 진정한 삶의 평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방성, 강제성, 폭력성만을 일삼는 속물적 통치는 늘 민심을 이반하고 민족모순과 분단모순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농민과 소와의 관계에 비유해서 집권자와 백성 간의 관계를 풍자하고 있다. 사실 농민과 소와의 일체감이 주로 교훈은 우리를 얼마나 깊은 철학으로 이끌어들이고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생활설화 중의 하나는 강원도 정선 땅의 어느 농민과 소와의 관계이다. 이 농민은 자신의 소를 다룰 때 「정선 아라리」의 사설과 곡조를 빠르게 바꾼 말토막을 구사하고, 소도 주인의 말을 훌륭히 알아챈다는 것이다. 관계의 부드러운 합일, 무언으로서의 심정적 통합과 조화로운 일치가 정작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조건임을 이 시는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신경림은 기행시집 『길』을 통해서 근본이 결코 바뀌지 아니하는 우주적 불변성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하면서, 시인이 민중과의 관계를 스스로 어떤 위치에 설정해 놓고 창작에 임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었다. 이것은 현단계 민족 민중 문학이 새로운 성찰과 발견을 통해서 전열을 재정비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시인 자신의 우려와 다짐과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하여 지난날의 단조로운 회고조를 벗어나 드디어 완전한 구체적 현실을 길 위에서 발견하고, 거기서 민중과 하나가 되어 시를 쓰고 발표해 내는 한 시인의 적극적인 모습을 그윽한 눈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7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단계에 와 있다. 한 시인이 자신의 시 작품 전반을 통하여 드러내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시간성과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적 시간성의 의미를 알아보는 일은 시인의 시를 포함하여 인간의 보편적 삶이 지니고 있는 본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도움을 준다. 우리들이 추측해 낼 수 있는 시간의 성질은 우선 자연적 시간과 경험적 시간이 있고, 그 중에서 전자는 매우 과학적이고도 공리적인 개념의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적 시간을 기계적 시간이라고도 일컫는다. 후자의 경우는 주관적, 인간적 특성을 지니는 시간으로서 문학작품에 깔려 있는 구체적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신경림의 시작품 전반에 지배하고 있는 시간은 우리들에게 과거를 돌이켜보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과거의 모든 인간과 사물, 환경과 정황을 직접 정서적으로 경험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시인이 이끌어들이는 과거 시간 속으로 따라가서 슬픔, 쓸쓸함, 고통, 고뇌, 절망, 한 따위의 처연한 공간 속에 휑뎅그렁하게 놓여져 잇는 민중을 만나고, 현상의 본질을 경험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일그러져 있는 역사의 굴곡과 파행성, 그것에 너무도 무관심했던 우리들 자신을 반성하며, 드디어는 역사에 대한 확신과 슬기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첫 시집에서 네 번째 시집까지 거의 일관되게 과거 시간 쪽으로만 거꾸로 열려져 있었던 시인의 시각은 시집『길』에 이르러 과거를 지금 우리가 숨쉬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의 현실과 함께 튼튼히 비끄러매 놓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터널로 들어가서 현실로 나오기도 하고, 혹은 현실의 좁고 긴 터널을 통하여 과거의 어둡고 음산한 뒷방과 골짜기로 빠져나오기도 한다. 또 다르게는 과거와 현실의 생생한 장면이 양쪽으로 동시에 비치도록 장치해 놓은 시인의 집으로 들어가서 두 개의 시간을 일시에 체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주의에 절망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역사의 차원에만 한정시킴으로써 인간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가중시켰다고 말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시간의 재구성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며 그들은 역사주의 자체를 불신한다. 역사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끊임없는 냉혹한 변화뿐이었다고 투덜거리는 그들에게 시인은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신경림 시의 전개와 공간성은 대체로 삶의 종적인 면의 묘사에 그 노력이 바쳐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알아본 대로 그의 시의 발단과 공간적 배경은 광산과 산촌, 들판, 논 따위의 일터와 희뿌연 먼지로 뒤덮인 길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물들은 광부, 농민, 노동자, 빈민, 건달, 아편쟁이, 심지어는 한을 품고 죽은 원귀들까지도 등장한다. 이런 배경과 인물들이 엮어 내는 소재적 사건들은 거의 어김없이 슬픈 이야기, 못다 한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 한 맺힌 이야기, 노여움, 괴로움, 서글픔, 절망, 좌절, 실의, 낙담, 죽음 따위로 연결된다. 그의 시가 비극적 삶의 종적인 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별반 차이가 없는 현실의 압력을 맞서 견디며,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는 추구와 전망을 독자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느끼고 터득할 수 있도록 시인 자신이 어떤 기대를 가지기 때문이다.
신경림의 시적 공간이 삶의 종적인 면을 보여 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시의 구조적 측면에서는 삶의 횡적인 부면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의 문체가 시종일관 민중언어에 무르녹아 있는 철학성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평이한 문맥으로 하자를 배제하고, 해체되지 않은 관념성을 특히 경계하고, 그것을 극적 장면으로 처리하는 방법 등에서 우리는 시인 자신의 독자적 개별성을 흠뻑 느낀다.
그의 시가 나타내 보이는 형태적 특성은 연 구분이 없는 비연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 시집 『농무』에서는 거의 비연 형태를 기본으로 하다가 『새재』,『달넘세』등 민요의 보급과 민요시 운동에 적극적 관심과 활동을 펼쳐가던 시기에는 정형률의 구획이 지어지는 연 구분시를 차츰 선호하게 된다. 이 때 그는 외재율의 가락을 집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형태적 간결성을 체득하게 되었고, 이 간결성은 그 이후의 시작품들에서 다시 쓰고 있는 비연 형태에서 매우 중요한 힘으로 작용한다. 그는 자신의 시에 시적 효과를 북돋우는 특수장치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장치의 활용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범용의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의 토대에서 형성된 달관의 자연스러운 저력이다. 신경림 시의 율격 구조는 정형성을 지니고 있는 민요율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많고, 4음보율에 부분적인 변격을 주공 있는 무가풍의 형태가 많은 듯하다. 3~4음보 교환반복형도 자주 구사되는데, 이는 민중적 정서를 표현하는 일에 실제로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신경림 시의 총체적 의미와 무한정성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의 시에서 주로 채택되는 개별적 단어와 그 의미들의 결합을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검토를 시행의 의미와 연결시켜 분석해 보아야 한다. 전체 문장과 문장들의 시적 배합 과정에서 떠오르는 것이 시작품이라는 하나의 소우주적 공간성으로 다가오는 총체적인 의미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의 원리로써 우리는 신경림의 개별적 시작품들이 지니는 의미와 그 결합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 탐색의 과정에서 우리는 드디어 시집이 지니는 총체적인 의미와, 또한 그곳에 깃들여 있는 시대 정신의 의미를 끌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개별적 시인의 시작품과 시집이 지니는 의미야말로 우리들 과거의 삶이 파악되는 포괄적인 범주이다. 의미는 과거를 알려주고, 가치는 현재의 시간으로 직접 이어지며, 목적은 미래의 평화, 안정 행복 따위의 미덕들로 연결된다. 인간의 삶은 시인의 표현을 통해서 그 흐름을 일단 멈추게 되고, 시인은 모든 관찰자로서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표현과 시대정신을 탐구와 성찰의 유익한 재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표현,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재형성하고, 빈약한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간다.
신경림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시대 시인들의 곧고 참다운 시정신의 한 전형을 만날 수 있으며, 시적 진실의 올바른 좌표를 제공받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오늘도 우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 한 모퉁이의 길 위에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궁금증 많은 한 시인을 만날 수 있다. 그 어느 때건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