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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여울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문학평론가
늘 익숙했던 장소가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때가 있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장소가 갑자기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낯선 공간이 되는 순간. 추억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며칠 전 서울 강남 교보타워 근처의 한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신논현역이나 강남역 근처에 약속이 있을 때마다 무감하게 걷던 길이었는데, 그날은 왠지 대로변이 아니라 골목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스무 걸음도 채 걷지 않아 눈에 띈 분식집에 들어간 나는 메뉴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른바 '강남 물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김밥은 1500원, 라볶이는 2500원, 찌개류는 4000원이었다. 된장찌개를 시켰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찌개를 끓이며 이것저것 내게 물었다. 청양고추를 넣을까요, 넣지 말까요. 매운 거 잘 드시는구나. 그는 내 얼굴 어딘가에 나도 모르게 달고 다니는 '글쟁이의 표지'도 단번에 간파했다. "혹시 작가 아니세요? 딱 보니까 글 쓰는 분이네. 무슨 책을 쓰셨어요? 우리 독서 모임에서도 읽게." 그렇게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수다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래서였을까. 4000원짜리 된장찌개는 이 세상 모든 엄마의 그리운 냄새까지 한가득 품어 안고 있었다.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그 분식집에 "꼭 다시 올게요"라는 약속을 남겨놓고 나오는 순간, 이번엔 자그마한 동네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 보니 사장님은 "진열된 빵 하나하나 얼마든지 시식이 가능하다"고 했다. 얼굴에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든, 나의 빵집'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날 잠깐의 일탈로 접어든 골목길은 '비싸기만 하고 별로 정이 들지 않았던 강남'이라는 내 오랜 편견을 깼다. 이런 것이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 즉 뜻밖의 우연이 가져다주는 인생의 선물 아닐까. 아직도 그 분식집 사장님의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작가 선생, 오밤중에 갈 데 없으면 놀러 와요." 아무리 자주 가도 당최 정이 들지 않던 강남 땅에 이제 내게도 정붙일 만한 장소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