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1597년 일본군이 2번째 조선에 침입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의 재침략이 있기 직전인 그해 1월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해 통제사가 된 원균은 일본군에 대항했으나, 대패하고 전사해 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졌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정부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해 적을 막도록 했는데,
이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군사 120명과 병선 12척뿐이었다. 일본군이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해 서해로 진출하려 하자,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서 12척의 전선을 수습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으로 이동했다. 일본수군은 벽파진에서 기습작전을 전개했으나
조선수군의 철저한 경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명량을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아,
9월 15일 우수영(右水營 : 해남군 문내면)으로 수군을 옮겼다.
명량은 간만(干滿)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했다.
다음날 새벽 일본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玄字)·지자(地字)의 총통(銃筒)을 쏘았다.
그리고 이순신은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 등을 독려해 적진으로 돌진시켰는데,
적선 3척의 일본군이 안위의 배에 올라 격전이 벌어졌고, 이순신은 총통을 쏘아 3척을 불질렀다.
군사력은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고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일본수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일본 병선 31척을 격파했고, 일본수군은 달아나버렸다.
이 해전은 12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일본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전투상황설명
판옥선이 조선수군13척 빨간기가 왜군 구루시마[來島通總] 함대 133척
울돌목에서 이순신 군단13척이 일자진으로 왜군에게 돌격 하여 이순신 장군이 왜장 구루시마의 목을 쳐 높이
쳐 들자 왜군이 혼미백산하여 달아남
이날 진도 씻김굿 공연에 일본에서 구루시마 후손들이 와서 조상의 넋을 달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일본구루시마 후손들이 이날 행사를 참여 하기 위해 백 몇년만에 처음으로 진도울돌목 행사에 참여
조선수군이 전멸한 칠천량해전[현 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은 겨우 12척의 배로 우수영에 진을 쳤다.
왜군은 이순신이 있는 진도 울둘목에서 명량해전 에서 참패 ..
참고로 칠천량 해전 를 보면 울둘목 전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겁니다..
칠천량 해전과 원균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가지 말이 많은데...오늘 올린 글의 내용은 그냥 간단하게 압축 요약한 정도입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조금 더 자세하게 출동전의 상황과 전투 경과등에 대한 글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출동 배경은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상부로부터 부산공격을 지시받지만 여러가지 여건상의 불리함으로 연일 출동을 미루어오다가 당시 도원수였던 권율의 독촉으로 무리한 출동을 감행했다.
출동전함은 총 134척.
7월 5일 정오쯤에 통제영을 출항하여 견내량을 통과하여 그 날 밤 칠천량 외줄포에서 숙영한 뒤 다시 6일 낮에 거제도 북단을 돌아 옥포에 도착 숙영하였다.
7일 새벽 옥포를 출항한 조선 수군함대는 다대포에서 일본수군 8척과 조우하여 이를 격침시키고 계속 항해를 하여 부산 입구 절영도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문 다음이었다.
이날은 바람이 몹시 불고 파도가 높게 일어 정박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조선수군은 연일 무리한 항해로 노군들이 모두 지쳐있었고, 오는 도중에도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적함을 뒤쫓느라 더욱 피로가 쌓여 있는 상태였다.
(판옥선의 정원은 원래 164명이었나 이 당시에는 정원에 훨씬 못 미치는 90여 명으로 줄어 있었는게 더욱 큰 원인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며 파도가 더욱 높아져 결국은 강풍을 이기지 못한 전함 20여척이 파도에 떠내려가는 사고도 발생하였고, 이 배들의 일부는 일본군에게 나포되어 군사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사실 일본수군은 조선 수군함대가 출항한 뒤부터 줄곧 움직임을 정찰하여 조선수군의 공격목표가 부산임을 미리 알고 전함 1,000 여 척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 파도가 높이 일었던 탓인지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조선 수군의 남은 배들은 밤을 새워 후퇴하여 8일 낮 가덕도에 도착하여 물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올랐으나, 숲속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습격으로 4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채 다시 황급히 후퇴하여 9일 새벽 칠천량 외줄포에 도착하였다.
(원균은 다시 도원수부로 소환되어 도원수 권율로부터 패전책임을 물어 곤장을 받은 후 즉각적인 부산공격을 명령받고 돌아옴.)
7월 15일 저녁 사기와 기강이 극도로 저하되어 있던 조선수군함대를 일본쾌속선 5,6척이 기습해와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날 원균에게 안전지대로 함대를 이동하자고 건의해오던 배설이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그의 휘하전함 12척만을 거느린채 함대를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이 12척이 뒷날 명량해전의 12척입니다ㅡㅡ;;;)
7월 16일 조선수군의 최후의 날이 밝았다.
일본군은 새벽이 되면서 본격적인 총공격을 감행했다.
일본수군사령관은 토도 다카토라(1차출동시 패전한 일본수군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한산도해전시 일본수군대장),카토 요시아키등이 지난 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모두 참전했다.
일본수군은 1,000여 척의 대함대를 구성 조선수군을 3,4겹 포위하고 일제히 조총을 쏘며 공격해 왔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충청수사 최호등이 적의 대함대에 포위된 상태에서도 침착하게 주력함대를 지휘하며 물러나 견내량으로 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견내량은 이미 적함들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
원균이 배를 육지에 대고 도망치자 수많은 배들이 뒤를 따라 도망쳤다.
육지로 도망간 원균과 이하 대부분의 군사들은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전원 전사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조선수군은 결국 점차 지휘체계마저 와해되어 일본군에 의해 각개 격파 당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적함의 접근을 막지 못하게 되자 일본군은 조선전함으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어지기도 했다.
격전 속에 사투를 벌이며 포위망을 뚫을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뒤로 밀리고 밀린 조선수군은 적진포에서 다시 고성땅 춘원포까지 밀려 여기서 최후를 맞았다.
마지막으로 조선 수군 병사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으나 이미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모조리 참살당하고 바다위의 전함들도 하나둘 모조리 불 태워졌다.
이날 전투로 전라우수사 이억기,충청수사 최호, 조방장 배홍립은 함대와 함께 전사하였으며, 122척에 이르는 전함들이 모두 격침되어 조선수군은 사실상의 궤멸을 당했다.
이 칠천량해전은 상부의 무리한 출전명령에 따라 무계획과 기상상태마저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출동으로 단한번의 전투로 인해 조선수군이 전멸하는 사태가 벌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