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수다를 떱시다.
얼마전 신문에는 한국의 핸드폰
(미국에서는 Cellular Phone 이라고 부르지만)을 쓰는 인구가
삼천 백만명이 넘는다고 보도 했습니다.
한국인구의 삼분의 이가 넘는 사람들이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말이니
정말 놀랄만한 보급율입니다.
그러니 시골에서 농사를 짖거나 배를타고 멀리 떠난 선원들,
개인전화가 금지된 군인들,
전화를 별로 쓰지않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외에는 거의 모두가
핸드폰을 들고 다닌다해도 틀린말은 아닙니다.
그러니 핸드폰을 쓰는 사람의 반한테서만
표를 얻었어도 대통령이 되고도 남았을것 입니다.
하기는 얼마전 서울에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지하철이나 뻐스를 타고 있으면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고 전화가 울리면 대여섯사람이
자기의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는 진기한 모습을 보며
나는 신기했습니다.
어린 중학생들, 대학생들, 사무원들, 상인들,
살림살이를 하는 아주머님들,
심지어 나같은 임시 방문객들까지 핸드폰이 없으면
사람축에 끼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이나 뻐스에서 전화를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통화내용을 듣던지 말던지
상관을 않하고 큰소리로 떠들어 댑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남의 전화를 도청(?)하곤 했습니다.
"얘! 그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그렇게 바람을 맞히면 어떻게하니 ? 호호호호
그래 다시 전화 않왔대?
바람맞은 그얼굴이 어떠했을까?" 하고 깔깔대는 여학생.
그옆의 자리의 중년 남자는 "그래 그날 못나오겠대? 자식.
누구는 마누라 없이 사나? 티를 내기는 ...... 괜두라 그래.
그럼 우리끼리 하지뭐..." 하고 투덜댑니다.
앞의 사람이 내리고 그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는
"그래 또 점심을 라면으로 때우면 어떠커냐 하루두 아니구.
XX는 하루 종일 집에서 뭘한대?
내일 점심에는 집으로 와라" 하고
아들인지 동생인지의 점심 걱정을 합니다.
본의 아닌 공개도청 내용에
꼭 핸드폰을 사용해야 할만한 긴급하고 중요한 내용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핸드폰은 여기 저기서 울리고
전철에서 뻐스에서 그리고 길을 걸으면서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귀에서 뗄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또다시 놀랜 것은
핸드폰의 사용료가 별로 싸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중고등학생의 월간 핸드폰 사용료가 10만원 20만원 이나 한다니
만만한 돈이 아니고 핸드폰의 새로운 모형이 나올때
마다 새로운 유행으로 바꾸어야하니
웬만한 사람은 비명을 지를만한 돈 입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십대의 젊은 여자들이
핸드폰값을 벌기위해 원조교제를 했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핸드폰이 뭐길래"하고 아연했습니다.
"사랑에게 묻는다" 라는 소설의 등장인 영아는 한달의 전화
값이 2000불이나 됩니다.
한가정의 한달 생활비를 전화값으로 지불한다는 말이
픽션이 아니라 우리 이웃에 있는 사실입니다.
하기는 나의 아내도 전화를 한번 붙들면
그집의 부모님의 안부에서
자식들, 손자들의 근항까지 살피고 남편들의 흉까지 보느라고
반시간의 통화는 짧은편이고 한시간의 통화는 보통입니다.
그것이 장거리 전화이던지 로컬 전화이던지간에 상관이없이
수다를 떠는 아내를 보면서 몇번은 화를 내다가
이제는 " 그래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외로움을 달래야지.
아무리 전화값이 비싸더라도
병원에 가는것 보다야 낫지 않겠어?"하고
포기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현대인들은
점심을 굶더라도 핸드폰을 갖이고 다녀야 하나?
왜 핸드폰에다가 대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쏟아 부으며 수다를 떨어야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외롭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고독합니다.
인구가 많아질수록, 개인의 프리이버시가 존중되고
문화가 발달될수록 인간은 고독해 집니다.
옛날 가난하던 시절, 한방에 다섯식구가 우굴거릴때는
언제나 나도 내방을 한번 갖어보나하는 것이 소원이였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사람들이 자기방을 갖는 시대여서
모두 자기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면
형무소의 독감방처럼 어느틈엔가 가랑비처럼 내리는 고독에
몸은 축 젖어버리고 사람들은 외로와 외로와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거리에 나와 군중의 물결에 휩슬려도,
마음문을 꽁꽁 닫은 현대인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을려고도 남과 눈을 마출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비록 감옥의 독방같은 자기방에서 컴퓨터의 채팅방을 찾을지언정.......
사람들이 우굴거리는 명동거리나 압구정동거리는
십대와 이십대의 젊은이들만의 광장이고 50대의 사람들은
군밤이나 오징어를 파는 상인들외에는 볼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디에 갔을까?
이시하라 긴따로의 말대로
"문명이 갖어온 가장 유해한 할머니들"
"긴상자매 할머니(100살까지 살았다는 자매들)나이때까지 사는 것은
지구에 심각한 폐해 라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모두 어디로 유배가 되었을까?
모두 감옥의 독방같은 자기방에 같혀서 TV나 보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을 유배시킨 젊은이들은 정말 행복한것일까?
아닙니다.
그들은 " 나는 외롭다"고 고함을 침니다.
소외를 받은 노인들도 외롭지만
노인들을 자기의 주위에서 고려장을 지낸 젊은이들도
모두 고독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러길래 월드컵의 페스티발을 만들어 몸부림을치고
일거리만 있으면 거리에 뛰어나가 데모를 합니다.
장갑차에 깔려죽은 두여학생의 추모데모는
슬픔의 데모인지 아니면 젊은이들이들의 축제인지
분간이 안되도록 데모에 참석한 젊은이들 모습에서
슬픔과 분노보다는 축제에 참석한듯한 표정을 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모군중속에서도 그들은 외로움을 풀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끼리 끼리 수다를 떱니다.
핸드폰으로 자기가 아는 친구끼리만......
자기가 말할수 있는 패거리를 만들어
자기들만의 언어로 수다를 떨어야 합니다.
"얘 그거 해두 해두 너무 했다"라고 수다를 떨면서....
소외당한 어머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 걱정을하고 젊은이들은 무슨팅이라도 만들어 수다를 떨고
나이든 아저씨들도 "우리 만나서 한잔하세" 하고 전화를 합니다.
수많은 군중속에 싸여서
수다를 떨 친구를 찾아 핸드폰으로
"너 너디있니 ?"하고 찾아 헤메입니다.
그래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정신병원들과 요양원 과 너싱홈들은 미친사람들로 넘처 흐릅니다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환자들은 수다를 떨줄을 모릅니다.
초점이 없어진 눈동자로 먼곳을 보면서
말을 할줄 모릅니다.
외롭습니까?
핸드폰을 사십시오.
그리고 친구를 찾아 수다를 떠십시요.
우리들이 하는 대화가 심각해야할 이유도 없고
우리들이 고론준담을 한다고 세상일이 해결되고 좋아지는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핸드폰을 사들고
친구에게 그저 수다를 떨면서 고독을 털어내고
외로움을 이기면서 살아가는것입니다.
"야! 후(who)꼬. 토크 (Talk)좀하자 하면서 수다를 떱시다.
이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