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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저기."
쇼킹했던 등장과는 달리 아주 평범하게 현관을 이용해서 퇴장하던 아즈반이 뒤돌아봤다.
"근데 뭐라고 부르면 되죠?"
종족을 뛰어넘어서 외적인 나이도 많이 차이나니까 반말은 안 되겠고. 아즈반씨? 아즈반님? 아니면 벤델씨?
그는 내 질문이 쓸데없다는 듯이 현관문을 열며 무미 건조하게 대답했다.
"사람들과 있을 때는 벤델. 없을 때는 드래곤이라고 불러라."
오호... 그럼 지금은 드래곤님?
"네."
"그리고 넌..."
나를 체리색 눈으로 잠시 노려보았다. 마땅한 호칭을 찾는 것 같았다.
"아! 전 그냥 마닐드라고..."
"빵집에서 일하니까 빵을 굽는 소녀. 빵소녀라고 부르지."
그러곤 그는 자신의 외투에서 수첩을 꺼내어 몇 자를 적고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쌩하니 나갔다.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한동안 현관문 앞에서 멍하게 서있었다. 빠...빵소녀? 도데체 어느 시대의 네이밍 센스인지...
아즈반이 간 후. 드디어 진정한 자유시간을 가지게 된 나는 점심시간까지 뭘 하며 시간을 때울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
했다. 일단 아침부터 밥맛이 다 떨어져 버렸으니 아침밥은 글렀고. 아... 근데 정말 따뜻하다... 침대의 이불속은 너무 따뜻했다. 물
론 실내가 추웠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움직여야겠지? 여기까지 와서 잠만 자는 건 정말 아까운 짓이니까. 꽃구경이나 가자!
난 치즈처럼 늘어지는 내 근육을 다독이며 침대에서 나왔다.
1층 로비에서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향기로운 꽃내음이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왕궁은 나라의 남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벌써
봄기운이 만연했다. 따스한 햇볕을 받는 나뭇잎들을 감상하며 정원으로 향했다.
"우와~!"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오는 탄사. 아직 초봄이었지만 손님들을 위한 정원은 벌써부터 모든 꽃들이 만개했다. 파릇파릇한 잔디부터
벚나무에 공중을 동동 떠다니는 하늘날이 꽃들까지. 모두 저마다의 색을 뽐내고 있었다. 넓은 정원에는 커다란 연못도 있었다. 나
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나무로 된 아름다운 다리위로 올라갔다. 다리의 중간쯤에서 연못을 내려다보니 맑은 물속에서 형형색색의
자갈들이 반짝였다. 내가 자갈들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저 멀리에 가있던 물고기들이 내가 신기한지 나를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오~!안녕~"
내가 물을 향해 손을 뻗자 밥 주려는 줄 알고 물고기들이 수면위로 뻐끔거렸다. 한참동안 물고기들을 놀려주고 있을 때 갑자기 물
고기들이 흩어져버렸다. 영문을 몰라 물고기들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는데, 수면위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안경을 낀 신사였다. 솔직히 그의 푸른 머리가 짧지 않았다면 여자로 착각했을 법한 미인이었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이 아즈반의 모
습과 겹쳐 보였다.
그 신사는 내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마닐드 베커양?"
흐음...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가?
"네."
내 대답에 그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푸른 눈이 나를 탐색하듯이 빤히 쳐다봤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즈반보다는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외모였다. 겉은 이래도 속은 모르지만.
그는 다시 생긋 웃었다. 아까가 형식적인 미소였다면 지금은 좀 더 다정했다.
"착한 아가씨군요. 이때까지 중에 가장 적합한 분이네요."
"네?"
그는 다시 허리를 폈다.
"제 이름은 하프아센. 곧 다시 만날테니까 그때 정식으로 인사하죠."
그 순간 돌풍이 불어와 나는 얼굴을 가렸다. 얼마 뒤 바람이 사라져 고개를 들었을때는 벚꽃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분명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니. 인간의 머리색이 저렇게 파랄 수가 있나?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인간들의 머리색은 금발이다. 가끔 갈색이나 붉은색 매우 드물게 검은색의 머리를 가
진 사람도 있기는 있다. 코시같이 연두색 계열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엘프 혼혈들. 하지만 저런 새파란 색은 순수 엘프
들에서 조차도 없다. 옛날 책에서 본 기억으로는 푸른색 머리카락은 인어나 벰파이어, 늑대인간 같은 인간들이 보기 어려운 종족
들에게서 나타난다. 최고의 상황이라고 해도 타종족 혼혈이 분명하다. 벰파이어라니! 잡아먹히고 말거야! 엄마아아아아아! 엄마
보고싶어요오오오!
나는 더 이상의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져버린 머리를 이끌고 정원에서 나왔다. 저기에 계속 있다간 다음날 변사체로 발견 될거
야. 아니지. 평생 실종된 체로 남아 있다가 확장 공사할 때 백골로 발견되고 말거야. 그럼 사람들이 내 뼈다귀를 검사해서 우리 집
으로 찾아가겠지. 그럼 거기에는 백발의 호호 할머니가 된 쥬뮈랑 벳지가 증손녀 증손자들이랑 같이 살고 있을거야. 결국 내 백골
은 우리 집 가족묘에 넬리 언니 옆에 나란히 묻히겠지.
정말 내가 이때까지 잘못 살았나? 내가 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나? 하지만 막상 생각나는 거라곤 넬리 언니 빵에 겨자 넣은 것
밖에 없는데. 아... 그걸 쥬뮈가 먹었지... 불쌍한 쥬뮈. 겨자를 한통이나 넣은 걸 먹다니... 하지만 그건 실수였고 넬리 언니도 나한
테 잘한 건 없다구. 그때 만해도 내 곰돌이 인형 목을 댕강 잘라놨으니까. 불쌍한 곰돌이... 그거 성 엔제녜날에 받은 거였는데...
카뷔 언니가 수술해주긴 했었어도 잘못 붙는 바람에 목이 약간 돌아가버렸는데. 하지만 이렇게 가혹한 처사라니! 이건 말도 안 돼.
정말 불공평하다고!
혹시 누군가가 내 능력에 대해 알게 되서 날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적국의 스파이가 날 죽이려고 이런 일을 꾸민 걸거야. 드래
곤님이랑 같이 손잡고. 그래! 그런게 분명해! 하늘에 계신 자비로운 태양신 에체님이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 처사를 내릴리가 없어.
분명히 악의 신 프로톤의 검은 신도들의 짓 일거야!
"...하... 정말 의미 없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어이없음을 느끼며 마법사들의 성을 향해 걸어갔다.
20분쯤을 걸었을 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 중간 중간에 토끼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몇번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도 길을
잃지 않고 제시간에 도착했다. 내가 문 앞을 서성이자 안에서 문지기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전 마닐드 베커입니다. 언니 카뷔 베커를 만나러 왔는데요."
문지기는 서류를 뒤적이며 끄덕였다.
"네. 베커양. 들어가시지요."
"감사합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전에 봤을 때는 밤이어서 잘 몰랐는데, 유난히 창문이 많은 건물이었다. 복도에 늘어서 있는 동상
들을 구경하던 중 한 마법사 동상 앞에 섰다. 다른 것들에 비해 매우 젊어 보이는 남자 마법사였다. 십대 후반 정도인가? 그 동상
이 올려 진 단에는 이름과 연표가 새겨져 있었다.
케빈 엥글라우드. 이백년 전 사람이구나... 최연소 마법사 랭킹 1위. 오~ 스무살에 랭킹 1위가 되었구나. 대단한 사람이다... 근데
일년 뒤 스물 한 살에 사망. 쯧쯧 젊은 나이에 죽었네.... 마법사들이 위험하기는 하구나.
"마닐드!"
"어? 언니!"
"미안. 손님이 한 분 찾아와서 늦었어. 자! 방으로 올라가자~"
오즈 가르비아. 이건 인간들 사이에서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현 시대의 인간들 사이에서 불리는 이름이다. 본명은 오즈엔. 드래
곤에게는 성이 없다.
이 본명을 아는 인간은 거의 없다. 본명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신뢰의 증거이니까.
'아마 그 녀석의 본명을 아는 인간은 없을 테지.'
오즈는 자신 앞에 놓인 서류에 싸인을 하고 덮었다. 그가 다음 서류뭉치를 집었을 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하지만 오즈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계속 서류를 뒤적였다.
"뭐하는 짓이야!"
아즈반이 오즈의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그는 분노를 가득 담은 체리색 눈으로 오즈를 노려보았다. 무례한 행동에 오즈는
고개를 들었다.
"꼬마야. 내가 너에게 반말을 들을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제까지와는 매우 다른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아즈반은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블랙 드래곤 카신. 레드 드래곤 장로 오즈엔을 뵙습니다."
"뭐지?"
"제 일을 방해하신 겁니까? 그건..."
"규칙에 어긋나는 짓이지."
오즈가 아즈반의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난 내 오랜 친구를 부른 것뿐이다. 네 말대로 드래곤들은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게 규칙. 내가 내 친구를 만나는 것
에 간섭받을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아즈반은 매우 분한 표정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오즈를 노려보다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오즈는 닫힌 문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빙고~"
=============================================수정 완료.
첫댓글 나도 빙고~ 또 일빠를 했답니다. 역시 난 빨라! ㅋㄷㅋㄷ담편기대요~~
연속두번 일빠 축하드려요!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엔 제가 일빠할거에요 ㅎㅎㅎㅎ그동안 귀차나서 댓글안달앗는데 ㅎㅎㅎ죄송해여ㅠㅠㅠㅠ웃다가 울다가 뭥미라고 생각하시겟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