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동(遼東)은 창해(滄海)의 동(東)쪽에 있다.
해동제국(海東諸國)이란 또 어디를…
○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로 보면 :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는 태생적(胎生的)으로, 천자(天子)의 교화(敎化)를 받아들이고 사대(事大)하고, 제후(諸侯)로써의 책무(責務)를 다해야 하는, 갑을관계(甲乙關係)의 “을(乙)”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반도(半島)의 수천(數千)만 국민(國民)들은 이러한 사실(事實)들을 어떻게 알았을까?〉 대한제국(大韓帝國)도, 이런 역사교육(歷史敎育)을, 백성(百姓)들에게 실시(實施)한 적이 없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사실이다. 열도(列島)에 있었다는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이 천황(天皇)을 앞세워, 〈불쌍한 반도(半島) 백성(百姓)들을 교화(敎化)시키기 위해, 소학교(小學校)에서부터 제후국(諸侯國)의 역사(歷史)를 가르치기 시작(始作)한 것이 그 시초(始初)라 할 수 있다.〉
불쌍한 반도백성(半島百姓)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문맹(文盲)을 퇴치(退治)하기 위해 언문(諺文)을 가르쳤고, 제후국(諸侯國)의 역사(歷史) 얘기는 반도(半島) 삼천리(三千里) 방방곡곡(坊坊曲曲)에 울려 퍼졌다.
지금의 우리나라 국민(國民)들의 생각은 어떨까? 일제(日帝)가 지들의 식민지(植民地)지배(支配)를 공고(鞏固)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맹퇴치(文盲退治) 필요성(必要性)이 대두(擡頭)되었고, 그것은 한글보급으로 실시(實施)되었다. 이건 식민지(植民地)시대(時代)를 살아온 우리들의 부모(父母)님과 누님들, 형님들이 직접(直接) 겪은 일이다.
○ 일제(日帝)식민지(植民地) 36년! 이때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을 오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천조국(天朝國)에서 하루아침에 추락(墜落)하여, 제후국(諸侯國)이 되었으니, 그리 표현(表現)한 것이다.
==================================================================================
〈21세기(世紀) 창해(滄海)에 대한 학설(學說)〉
○ 창해(滄海) : 넓고 큰 바다. 창명(滄溟)과도 같은 말이다. 단어(單語)의 뜻대로라면 넓고 넓은 큰 바다 곧 태평양(太平洋)이나 대서양(大西洋)같은 바다를 말한다고 보아진다. 인터넷을 검색(檢索)해 보자.
➀ 다음 국어사전 : 창해 3 [滄海] : [역사] 지금의 강원도 지방에 있던 옛 군(郡)
➁ 다음백과 / 창해군(滄海郡) : 중국의 한(漢)나라가 랴오허 강[遼河]의 동쪽에 설치한 최초의 군현. 위만조선의 성립 이후 고조선이 한과 만주·한반도 지역의 여러 세력과의 직접 접촉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자 한과 만주·한반도 일대의 세력들은 고조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두 지역간의 직접교역을 꾀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을 중심으로 한 28만여 구(口)에 이르는 동방 예맥세력의 일부는 BC 128년 요동군에 귀속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漢)은 이 사건을 동방진출의 좋은 기회로 여겨 그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팽오(彭吳) 등으로 하여금 요동군에서 창해군에 이르는 교통로를 뚫게 했다(→ 한사군). 그러나 인력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되고 공사진척도 지지부진하여 BC 126년 무제(武帝)는 공손홍(公孫弘)의 건의를 받아들여 창해군으로 향하는 교통로 개척을 중단시키고 창해군도 폐지함으로써 동방진출을 포기했다.
이후 한은 동방진출에 장애가 되는 고조선 세력의 제거와 이를 통한 직접적인 동방지배를 꾀하게 되었다. 비록 창해군은 설치 2년 만에 폐지되었으나 교통로 개척공사는 중국의 허베이[河北]·산둥[山東] 일대 주민들을 동방으로 쉽게 유입하게 만들어 BC 108년의 고조선 멸망과 3군의 설치, BC 107년의 현도군설치 등 이후 전개되는 중국세력의 동방진출에 있어서 전제조건을 마련해주었다. (다음백과/인용/끝)
➂ 네이버 / 영어사전 / 창해 (滄海) the vast blue sea, the ocean, the deep, the vast expanse of waters
➃ 한국고전용어사전 / 창해[滄海] : 동해(東海)의 다른 이름. 발해(渤澥). 발해(渤海).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➄ 2007.05.07.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동해의 명칭을 결정하는 국제수로기구(IHO) 총회가 7일 모나코에서 개막된 가운데 `동해의 원래 명칭이 `창해(滄海)였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학을 가르쳤던 육당 최남선이 펴낸 조선역사지도에 수록된 고지도 가운데 고려중기 이후 `동해를 창해로 표기한 지도를 발견, 이날 공개했다. 친일 문인인 최남선이 직접 제작한 `조선역사지도는 모두 16쪽으로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받아 편찬돼 고등학교 지리교과서로 사용됐으며 수차례 재 발행되면서 해방이후까지 사용됐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또 일본 육군성이 러.일전쟁을 앞두고, 1904년 출판한 고대반도부근지형도(古代半島附近地形圖)에도 동해를 `창해‘로 명명했다며 고지도를 추가로 공개했다. 2천년 내지 1천 년 전까지 동해가 창해로 불렸다는 것을 이 고지도들을 통해 알 수 있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김 교수는 창해는 넓은 바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옛 부터 우리 선조들이 지은 고유명사며 조선시대에는 `조선해와 `동해를 혼용해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본이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맞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동해라는 명칭보다는 옛 부터 사용해왔고 국명이 들어간 `조선해(SEA OF KOREA)라는 이름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ccho@yna.co.kr. (끝)
- 창해(滄海)에 대한 기존학설(旣存學說) 인용(引用) / 끝 -
==================================================================================
(1) 자치통감(資治通鑑) 후한기(後漢紀) : 孝獻皇帝己建安九年(甲申,公元二零四年):《(韓)忠曰:我遼東在滄海之東,擁兵百餘萬,又有扶餘,濊貊之用.當今之勢,強者為右,曹操何得獨為是也! : 자치통감 효헌황제 건안 9년 (204년) ; “한충”이 말하기를 ; “우리 요동(遼東)은 창해(滄海)의 동쪽에 있으면서, 병사는 백여만을 보유하고 있으며, 또한 부여(扶餘)와 예맥(濊貊)을 부리고 있는데, 현재의 세(勢)는 강한 자가 승상을 받으니, 조조만이 어찌 홀로 옳다고 합니까?》하였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대로라면 : 요동(遼東)은 발해(渤海)의 동(東)쪽에 있고, 발해(渤海)는 곧 창해(滄海)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위 글에서,〈부여(扶餘)와 예맥(濊貊)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였는데, 〈예맥(濊貊)은 곧 융적(戎狄)의 땅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융적(戎狄)이란 서방(西方)과 북방(北方) 땅’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지금(只今)의 발해(渤海) 동(東)쪽’이란 말은, 〈엉터리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맥(濊貊)은 예(濊)와 맥(貊)이고, 뒤에 부여(扶餘)가 이 땅에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 〈부여(扶餘)나 예맥(濊貊)은 같은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이다〉라고 봐도 무리(無理)가 없다고 보아진다. 이들의 거점지(據點地)는 반도(半島) 또는 그 북방(北方)지대(地帶)가 아니다. 예(濊) 또는 맥(貊)=맥(貉)은 :
➨ 서방(西方)과 북방(北方)사이에 걸쳐 살고 있었다면 : 서북방(西北方) 땅에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융적(戎狄)의 땅에 산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발해(渤海)가 창해(滄海)였고, 그 동쪽의 요녕성(遼寧省) 땅이 요동(遼東)이라고 했다면, 그 서(西)쪽 수천(數千)리 밖에 있었다는 예(濊)나 맥(貉)을 어떻게 부려먹을 수 있었을까?
이런 예(例) 하나를 보아도, 오늘날의 발해(渤海)는 창해(滄海)가 될 수 없고, 창해(滄海)가 발해(渤海)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渤海)는 내륙(內陸)의 바다(內海)이니 더더욱 그렇다.
“창해(滄海)의 동(東)쪽이 요동(遼東) 땅”이 될 수 있나?
“창해(滄海)”가 오늘날의 발해(渤海)가 될 수 있나?
➨ 창해(滄海)가 발해(渤海)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발해(渤海)는, 창해(滄海)가 될 수 없으니, 창해(滄海)의 동(東)쪽은 요동(遼東)이 될 수 없다.
----------------------------------------------------------------------------------
(2) 자치통감(資治通鑑) 후한기(後漢紀) / 孝桓皇帝下永康元年(丁未, 公元一六七年):《春,正月,中略.夫餘王夫台寇玄菟: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夏,四月,先零羌寇三輔,攻沒兩營,殺千餘人. : 부여왕 부태가 현토를 침구하니 현토태수 공손역이 이를 공격, 깨뜨렸다. 여름 4월, 선령의 강족이 삼보를 침략하여 두 개의 군영을 공격하여 없애고, 천여 인을 죽였다. 秋, 八 月, 中 略, 六 月 大 水, 勃 海 海 溢. : 가을 8월, 중략(中略), 6월 큰 홍수(大水)가 나서 발해(渤海)가 넘쳤다.》고 하였다.
➊ 〈六 月 大 水, 勃 海 海 溢 : 6월에 큰 홍수(大水)가 나서 발해(渤海)가 넘쳤다.〉라고 하였는데, 〈“월(月)”은 “주(州)”의 오자(誤字)다.〉 원문(原文)을 보면, 〈六 月 이전(以前)에, 가을(秋), 8월(八月)이 기록(記錄)되어 있기 때문이고, 다른 본(本)에는 “월(月)자가 주(州)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六 州 大 水, 勃 海 海 溢 : 여섯 개 주(州)에 큰 홍수(大水)가 나서 발해(渤海)가 넘쳤다.〉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➋ 〈六 州 大 水, 勃 海 海 溢 : 여섯 개 주(州)에 큰 홍수(大水)가 나서 발해(渤海)가 넘쳤다.〉는 말은, 발해(渤海)가 내륙(內陸)의 큰 “호수(湖水)=내해(內海)”였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이야기다. 주변의 6 개 주(州)에서 큰 홍수(洪水)가 나는 바람에, “발해(勃海=渤海)의 물이 넘쳐흘렀다.”는 것으로 이해(理解)되어야 정답(正答)이랄 수 있다.
해일(海溢) 곧 “물이 넘쳤다”는 뜻이므로, 발해(渤海)주변(周邊)의 6 개 주(州)에서 홍수(洪水)가 발생(發生)하여, 많은 물이 한꺼번에 발해(渤海)로 유입(流入)되니, 발해(渤海)가 넘쳤다는 이야기다. 발해(渤海)는 육지(陸地)속의 바다(海)로 큰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이다.
➌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 현(現) 하북성(河北省) 남(南)쪽에 있는 바다를 “발해(勃海=渤海)”라고 설명한다. 이 사람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따르면 : 산동성(山東省)이나 하북성(河北省)등에 있는 6 개의 주(州)에서, 홍수(洪水)가 나 큰 물이 바다로 들어가니, 발해(渤海)바다가 넘쳤다는 이야기다.
발해(渤海)바다에서 넘친 물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게 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한계(限界)다. 겨우 6개 주(州)에서 홍수(洪水)났다고 바닷물이 넘친다면? 그 넘친 물은 어디로 갈까?
➍ 그렇다면 〈“창해(滄海)…발해(渤海)”는 바다(海)가 아닌 내륙의 “큰 호수(湖水)=내해(內海)”를 말하고, 같은 곳에 있으며, 이름만 다르게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➎ 그런데 위 현재(現在)의 역사(歷史)학설(學說) 〈➃ 와 ➄〉를 보면 : 〈동해(東海)의 다른 이름이 “창해(滄海)”였다〉고 한다. 이곳은 열도(列島)와 조선반도(朝鮮半島)사이의 바다를 말하는데, 이곳을 창해(滄海)라고 했다는 말이다. 이런 설명(說明)대로하면 현재(現在)의 열도(列島)에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어야 하고, 반도(半島) 및 북방3성은 중국(中國)의 기전(畿甸) 땅이어야 한다. 이게 가능(可能)키나 한 소린가?
----------------------------------------------------------------------------------
(3)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左將軍荀出遼東,誅右渠. : 천자(天子)는 죄인들을 모집하여 조선(朝鮮)을 쳤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를 따라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니, 군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 순체(荀彘)는 요동(遼東)으로 나가서 우거(右渠)를 토벌하였다. 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多率遼東士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 : 우거(右渠)는 군사를 내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은 요동(遼東)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가서 먼저 공격했으나, 패하여 흩어졌다. 많이 되돌아왔는데, 법에 저촉되어 참형(斬刑)당했다. 樓船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卽出擊樓船,樓船軍敗走. : 누선(樓船)장군(將軍)은 제병(齊兵)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王險)에 다 달았다. 우거(右渠)가 성(城)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엿보고는, 곧 나가서 누선(樓船)을 치니, 누선의 군사는 패하고 달아났다. 將軍僕失其衆,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 : 장군(將軍) 양복(楊僕)은 그 무리들을 잃고, 산 중에 숨은 지 10여 일에, 차츰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 다시 무리를 모았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 패수(浿水) 서쪽 군사를 쳤으나, 깨뜨리지 못했다. 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右渠遂堅城守,數月未能下.中略. : 좌장군(左將軍)은 패수(浿水) 위의 군사를 파(破)하고, 앞으로 나가 성(城) 밑에 이르러, 성(城) 서(西)쪽과 북(北)쪽을 포위하였다. 누선(樓船) 역시 달려와 만나서, 성(城) 남(南)쪽을 차지하니, 우거(右渠)는 성(城)을 굳게 지키기만 하였다. 수개월이 되도록 성(城)은 함락되지 않았다. 중략(中略).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贖爲庶人. : 좌장군(左將軍)을 불러 들여 와, 아무 일도 않고 있다가 자기들의 공로를 다투다가 서로 미워하여 계교를 어그러뜨렸다 하여 기시(棄市)에 처했다. 누선장군(樓船將軍)도 역시 군사가 먼저 열구(列口)에 다다랐으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옳은데, 멋대로 먼저 쫓다가, 많은 군사를 잃어버리니, 마땅히 죽여야 되나, 속(贖)을 바치니 용서하여 서인(庶人)을 만들었다. 》
➊〈루선장군(樓船將軍) : 제(齊)를 따라 발해(渤海)을 건너〉하였으니, 수군(水軍)일 것이다.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였으니 말이다.
제(齊)는 산동성(山東省)지방을 말하는 것이고, ‘발해(渤海)는 창해(滄海)’로, 산동성(山東省)앞 바다를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면 평양(平壤)의 대동강(大同江)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기원전(紀元前) 108년 당시(當時)의 루선(樓船)이란 전함(戰艦)은 어떤 선박(船舶)일까?
《최광남 : (문화재연구소 목포보존처리장 학예연구소) 논문(論文) 인용(引用) / 루선(樓船) : 광주(廣州)에서 출토된 동한(東漢)의 목선모형은 창방이 2층으로 된 간단한 누선(樓船)이다. 그러나 월절서의 기록으로 보아 누선은 이미 전국시대에 생긴 것으로 파악된다. 후세에서도 누선은 계속 만들어져 전선 또는 유람선으로 사용된다.》고 하였는데,
루선(樓船)이 풍랑(風浪)이 심한 바다(海)를 운행(運行)할 수 있으며, 전함(戰艦)으로써 가능한 선박(船舶)인가? 이게 사실(事實)은 중요(重要)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발해(渤海)는 내륙(內陸)의 호수(湖水)” 다.
➋ 위 원문(原文)을 보면 : 발해(渤海)를 건너가면 평양(平壤)으로 갈 수 있는데, 당시(當時) 평양(平壤)은 강(江)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는 발해(渤海)를 건너, 고구려(高句驪) 땅에 닿고, 거기서 강(江)을 따라 상류(上流)측으로 전진(前進)해야 평양성(平壤城)으로 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또 하나는 발해(渤海)가 아닌 육지(陸地)로도 평양(平壤)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육로(陸路)로 가는 길은, 아주 멀고, 고구려(高句驪)의 내륙(內陸)을 통과(通過)해야 평양성(平壤城)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수군(水軍) 공격(攻擊) 역시(亦是) 걸림돌이 있다. : 발해(渤海)를 건너오는 전한(前漢)의 적함(敵艦)들을 보면서, 고구려(高句驪) 수군(水軍)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또 서(西)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동(東)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적선(敵船)을, 고구려(高句驪)군대(軍隊)는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 이게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이다. 아래를 보자. 아래와 같이 생겼지 않았을까? 추정(推定)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 그대로 본 자(者)가 없기 때문이다.
① 고대 선박 / 루선(樓船)
② 고대 선박 : 루선(樓船) : 사진 출처 : 인터넷
※ 바다(海)와 그리고 전쟁(戰爭)은 바로 해전(海戰)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것들은 전문적(專門的)인 공부(工夫)와 지식(知識)이 있어야 설명(說明)할 수 있는 것이므로, 생략(省略)키로 한다. 다만 인터넷에서 소위(所謂) 루선(樓船)이라고 말하는 사진을 참고(參考)로 퍼온 것이다. 저렇게 높다랗게 생긴 배가 파도가 있는 바다에서 적함(敵艦)과 싸운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들 것 같은 모양이다.
… 위의 사진(寫眞)①② 출처(出處) :〈다음 카페 /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서 복사(複寫)한 것임을 밝힙니다.
➌ 아래의 그림은 〈조선(朝鮮)말기의 평양감사(平壤監司) 연회도(서울역사박물관소장)〉라고 한다. 아래의 성(城)은 대동강(大同江) 변(邊)에 설치된 외곽성(外廓城)으로 외적(外敵)의 침략(侵略)을 방비(防備)하기 위한 것이라 보아진다.
③ 조선(朝鮮)말기의 평양감사(平壤監司) 연회도(서울역사박물관소장)
위의 평양성(平壤城)을 보면, 장관(壯觀)이다. 이게 바로 성(城)이랄 수 있는 것이다. 일개(一介) 감사(監司)의 연회(宴會)가 저 정도(程度)였다면, 평양(平壤)이란 곳은 조선(朝鮮) 말기(末期)에도 대도회지(大都會地)였으며, ‘평양성(平壤城) 곧 장안성(長安城)’은 조선말기(朝鮮末期)에도 그 대단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성(城)을 잘 만들고, 수성(守城)을 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성(城)을 쌓기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성(城)을 지키고, 공격(攻擊)하는 것에도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들이 바로 조선인(朝鮮人)이다.
➍ “해동제국(海東諸國)”이란 무슨 뜻일까? 〈바다 동(東)쪽의 여러 나라? 넓고 넓은 동(東)쪽의 여러 나라?〉현대(現代)의 역사통설(歷史通說)은 첫 번째 설명(說明)이다. 곧 〈해동(海東)이란 발해(渤海)바다의 동(東)쪽인 한반도(韓半島) 땅을 말하고, 그곳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라는 책을 보면 :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란 : 일본(日本)이나 유구국(流球國)등을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韓半島)는 포함(包含)되어 있지 않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➍-1)《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는 조선 초기의 학자 · 문신 · 정치가인 신숙주(申叔舟)가 성종(成宗)의 명을 받아 작성한 일본국과 유구국(琉球國)에 대한 정보를 기술한 한문 역사서이다. 그는 세종(世宗) 25년(1443년)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으로서 일본을 방문했으며, 성종 2년(1471년)에 간행되었다. 책의 제목은 '해동의 여러 나라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지만, 그 범위는 대체로 일본과 유구국으로 한정되어 있다. 중략(中略)》이라고 하였다.
➍-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해동제국’이란 곧 일본의 본국·구주 및 대마도·이키도(壹岐島)와 유구국(琉球國)를 총칭하는 말이다. 찬술 당시의 내용은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일본의 본국도(本國圖)·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이키도도(壹岐島圖)·대마도도(對馬島圖)·류큐국도(琉球國圖) 등 6매의 지도와 일본국기(日本國紀)·유구국기(琉球國紀)·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등이었다. 중략(中略).》
➍-3) 다음백과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2책. 필사본. 1471년(성종 2) 영의정 신숙주(申叔舟 : 1417~75)가 일본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왕명에 의하여 저술했다. 여기에 언급된 해동제국이란 일본 본국, 규슈[九州], 이키 섬[壹岐島], 쓰시마 섬[對馬島]과 함께 유구국(琉球國)을 말한다. 중략(中略).》
➍-4) 해동(海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동(海東)은 한국에 대한 별칭이다. 중국인이 '바다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불렀는데, 이를 한국 사람들도 많이 사용했다. 특히,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 많이 쓰였는데, 이는 해상으로 중국에 내왕하던 시대의 특징으로 보인다.
해동증자(海東曾子) : 해동에 살고 있는 증자. 즉, 백제인이 의자왕을 칭하던 말
해동요순(海東堯舜) : 해동에 살고 있는 요임금, 순임금. 즉, 세종을 칭하던 말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 : 원효의 별칭이다.
해동소(海東疏) : 원효가 지은 대승기신론소를 중국에서 부르던 말이다.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 의상의 시호이다.
해동서성(海東書聖) : 김생을 칭하던 말이다.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 :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864∼917년),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30년),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870∼936년), 법경대사(法鏡大師) 경유(慶猷, 871∼921년) 등 선승(禪僧) 4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해동성국(海東盛國) : 해동에 있는, 성하고 성대한 나라. 즉, 발해를 뜻한다.
이 밖에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해동'이라는 표현의 대부분은 고려시대 일연 자신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해동종(海東宗) : 법성종의 다른 이름이다.
해동유본현행록(海東有本現行錄) : 고려 승려인 대각국사 의천이 편찬한 불교 장소(章疏)의 목록을 수록한 책인 교장총록 각 권의 내제(內題)에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초기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를 의천은 해동삼국사로 인용해 쓴 바가 있다.
해동공자(海東孔子) : 해동에 살고 있는 공자. 즉, 문종 때 교육에 많은 노력을 경주한 최충을 당시 사람들이 칭하던 말이다.
해동중보(海東重寶) : 고려 때의 화폐로서,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철전(鐵錢)의 하나이다.
해동통보(海東通寶) : 1102년(숙종 7)에 처음으로 주조된 화폐의 명칭이다.
해동고기(海東古記) : 인종 23년인 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사료로서 기록된 역사서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 고종 때 각훈(覺訓)이 편찬한 책이다.
해동치납혜허필(海東癡衲慧虛筆) : 고려 승려였던 혜허가 수월관음도를 그리고 쓴 묵서이다.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 1376년 나옹화상 혜근(나옹 혜근)이 창건한 사찰이다.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海東曹溪宓庵和尙雜著) : 고려시대 원감국사 충지가 저술한 책이다.
해동비록(海東秘錄) : 고려시대의 음양지리서(陰陽地理書), 곧 도참서(圖讖書)이다.
해동장량(海東張良) : 해동에 살고 있는 장량. 즉, 정도전을 칭하던 말이다.
해동 육룡이 날으셔 : 조선 용비어천가 제1장에 있는 표현이다.
해동(海東)의 기재(奇才) : 명나라에서 서거정을 찬탄하며 부른 말이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성종 2년(1471년)에 신숙주가 간행한 한문 역사서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 : 조선 중기의 학자 권별(權鼈)의 문헌설화집이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 조선 인조 때 전하는 저작자 미상의 도교서이다.
해동가요(海東歌謠) : 1762년(영조 38년)에 김수장이 엮은 가곡집이다.
해동악장(海東樂章) : 가곡원류의 이본(異本)이다.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 : 1777년(정조 1년)부터 1787년(정조 11년) 사이에 제작한 지도이다.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 김홍도(金弘道)가 금강산의 절경을 그린 초본첩이다.
해동이적(海東異蹟) : 조선 후기에 홍만종이 쓴 한국의 역대 인물들의 사적을 모아 엮은 전기(傳記)이다.
해동농서(海東農書) : 조선 후기에 실학자 서호수가 편찬한 농서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 조선 말기에 실학자 한치윤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기전체로 서술한 사서이다.
해동거사(海東居士) : 흥선대원군의 호이다.
해동삼국도(海東三國圖) : 연대·작자 미상의 동북아시아 지도이다.(인용/끝).
➍-5) 위의 “해동(海東)이나 또는 해동제국(海東諸國)”에 대해서, 〈현재(現在) 대한민국(大韓民國) 학계(學界)의 대표적(代表的) 설명(說明)들이다.〉라고 봐도 틀림없는 이야기들이다. 문제(問題)는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말 그대로 뒤죽박죽, 무엇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해동제국(海東諸國)이, 일본(日本)의 여러 나라와 유구국(流球國)등을 지칭(指稱)한다고 하면서, 《해동(海東)은 한국(韓國)에 대한 별칭(別稱)이다. 중국인이 '바다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불렀는데, 이를 한국 사람들도 많이 사용했다. 특히,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 많이 쓰였는데, 이는 해상으로 중국에 내왕하던 시대의 특징으로 보인다.》고 말하는 자(者)가 누구냐?
식민사학(植民史學)=반도사학(半島史學)은 똑같다. 아무리 아니라고 항변(抗辯)한다 해도 그 영역(領域)이 똑같다. 땅이 똑같은데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한계(限界)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해동(海東)이란 발해(渤海)의 동(東)쪽의 넓고 넓은 땅을 말하는 것이고, 해동제국(海東諸國)이란 동(東)쪽의 여러 나라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의 통전(通典) 서융(西戎)편에 기록(記錄)의 “해동제국(海東諸國)”이란 말을 생각해 보자.
➎ 통전(通典) 변방(邊防)전 / 대진(大秦)【 대진(大秦)은 한(漢)나라 때 로마(Roman)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大秦,一名犁靬,一云前漢時犁靬國也.後漢時始通焉.其國在西海之西,亦云海西國. : 대진(大秦)은, 일명 리간(犁靬)인데, 일설에 전한(前漢)때 리간국(犁靬國)이다. 후한(後漢) 때에 처음으로 왕래하였다. 그 나라는 서해(西海)의 서(西)쪽에 있는데, 또 해서국(海西國)이라고 한다. 其王理安都城,宮室皆以水精為柱.從條支西度海曲萬里,去長安蓋四萬里有類中國,故謂之大秦,或云本中國人也.中略.其色又鮮於海東諸國所作也.中略. : 그 나라의 왕(王)은 안도성(安都城)에서 다스렸는데, 궁실(宮室)의 모든 기둥은 수정으로 만들어졌다. 조지(條支)의 서(西)쪽을 건너 해곡(海曲)따라 만리(萬里)를 간다. 장안(長安)으로부터 4만리 떨어져 있는데 중국과 닮음이 있어, 고로 대진이라고 하였는데, 혹은 본래 중국인이라고 전한다. 중략. 그 바다의 색깔이 너무도 깨끗하여, 해동제국(海東諸國)이라 하게 되었다. 중략(中略).》이란 구절(句節)이 있다.
이 말대로라면 〈해동제국(海東諸國)이란 서해(西海)의 동(東)쪽에 있는 여러 나라(諸國)〉란 뜻이 된다. 서해(西海)의 서(西)쪽, 해서국(海西國)! ‘대진(大秦)을 로마(Rome)’라고 한다면 곧 이탈리아(Italy)를 말한 것이고, 이곳이 서해(西海)의 서(西)쪽이라면, 〈서해(西海)는 지중해(地中海)〉를 말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해동제국(海東諸國)이란 : 지중해(地中海) 동(東)쪽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럴 때 위 ➍에서 말하는 〈위키백과 또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말하는 해동제국(海東諸國)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說明)할 수 있겠는가?
➏ 지중해(地中海) 동(東)쪽의 터키(Turkey)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대륙(大陸)과 한반도(韓半島)와 현 열도(列島)와 유구국(流球國)까지를 아우르는 해동제국(海東諸國)과
➏-1) 어디에도 근거(根據)없이, 지들 내키는 대로 말하는, 한반도(韓半島) 해동제국(海東諸國)과
➏-2) 열도(列島)와 유구국(流球國)을 말한다는 해동제국(海東諸國)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
(4) 발해(渤海)는 왜 넘쳤는가? 그렇다면 전한(前漢) 때에 큰 바다였던 발해(渤海)가 후한(後漢) 때에 천지개벽(天地開闢)에 버금가는 엄청난 지진(地震)과 지각변동(地殼變動)으로 인하여 내해(內海)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사이 또는 후한(後漢)때, 외척(外戚)과 환관(宦官)등의 국정(國政)농단(隴斷)으로 파멸(破滅)지경(之境)을 만들어 놓았어도, 천지개벽(天地開闢)에 버금가는 자연(自然)재해(災害)는 없었다고 하였다.
조선사(朝鮮史)는 새롭게 쓰여 져야 하고, 진실(眞實)은 밝혀져야 한다.
〈2017년 05월 14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동사강목의 저자는, 한 무제가 조선을 치러오는 상황에 대하여,...... 루선은 요좌를 따라 내려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발해 창해는, 연행 사신들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말씀 하시는 바와 같이 요동의 서쪽에, 발해인 창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액이제사하가 흐르는 지역에 사는 사람중에 이런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아주 대놓고 이 지역이 고려의 평안도 지역이라고 말하면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중에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들어내 놓고 자랑 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르느냐고 오히려 반문을 합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그 분의 모습이 생생 합니다. 조선이 망하고 나서 지금의 신강성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연환경의 변화도 당시와 지금과는 차이가 많다고 합니다.
예를들면 사막화가 당시보다 빠르게 심화되고 있으며, 예전에 바다라고 부르던 호수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의 기록과 패수와 대동강 등의 물줄기를 보는데 있어서, 이러한 변화가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 기록속의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800년대 중반에 찍은 평양성 대동문의 사진을 보면, 비록 흑백이지만, 당시의 평양성이 얼마나 웅장한 성이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게 합니다.
반도의 역사 해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아비아의 황당한 꿰변들 뿐이지요. 그러니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러하지 않겠습니까 ?
동방, 동국, 해동에 대한 반도 사학자들의 설명은 역사에 대한 모욕이며 망발일 뿐입니다. 고조선과 삼한도 구분 못하는 자들이 무슨 무슨 석학이니, 무슨 사학자니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그 저 할말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문무 선생님의 끊임없는 노고 하심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직전에 님께서 올리신 "묘량산 중"편을 읽으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액이제사하 유역의 토착민들이 "그곳이 조선의 평안도"지역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그동안 "우리들만 무식쟁이로 살아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놀랍고, 놀라운 이야깁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강성은 1800년대 이후로 너무도 많이,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합니다.
'신장의 역사'라는 책을 보았는데, 물론 현대의 해설이지만, 지형지세는 변할 수 없지요. 이 책을 봐도 신강성지방은 너무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여기에 핵실험등으로 급격하게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ㅇ
해국도지를 보면 액이제사하 유역에 대한 당시의 기록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 합니다.
신강성지방의 유적과 유물과 종족과 부족은 1800년 이후 급격한 변화과정을 거치는데, 반란과 진압과 또 반란, 또 진압등으로, 여기에 러시아와 영국등의 개입과 청의 정복과정등으로 인한 혼란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일들이었다고 합니다. 수백, 수천의 죽음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조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또한 평양성(장안성)이고, 패수입니다.
평양이란 지명은 고구려가 이동하면서 함께 따라 다닌 지명으로도 생각이 듭니다만.......패수 또한 고구려와는 뗄 수 없는 운명을 가졌다고 봅니다.
반도에서의 조선사 해설은 식민사학의 연장이요, 부역이라고 보아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봅니다.
언젠가 이에 대한 대대적인 청산작업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