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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형성
일본이 '칼을 찬 무사의 나라'라는 점은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 등을 비롯한 소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문화이다. 무사란 원래 중세 초기 제후의 궁성에서 방위의 임무를 띤 군사들을 의미하였고, 그 뒤 봉건 제후에게 충성과 봉사의 의무를 가졌던 무사 계급전체를 포함하게 되었다. 고대의 주인공이 공가나 귀족이라면 중세의 주역은 무사일 것이다. 이제 까지 공가의 변견(番犬)으로 살아온 무사는 드디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력이라는 강대한 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힘을 가진 자신들이 왜 유약한 공가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라는 의문과 불만에서 무사들의 반항이 시작된 것이다.
12세기 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창건한 것이 본격적인 무가정권의 시작이다.한때 공가정권인 겐무(建武)정권이 부활했지만 곧 붕괴하고 무로마치 바쿠후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처 에도바쿠후로 이어져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을 맞이하기까지,약 700년에 걸쳐 무사가 일본정계를 주도했다.
무사 정권의 탄생-귀족과 무사의 이중정권
수도의 귀족은 권력유지를 위하여 무사의 힘을 인정했고 무사가 중앙정치에 나오게 된 것이다. 헤이안시대의 귀족들은 불교를 믿고 중요하게 여겨 큰절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귀족처럼 많은 장원을 가지고 있어서 세력이 강하였다. 그중 귀족과 사원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여기에서 무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래서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무사정권을 만들었다. 이 정권을 귀족정치와 차별시키기 위해 교토에서 떨어진 가마쿠라에 막부를 두었다. 이즈음 무사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었다. 예를들면 가마 쿠라 시대의 무사는 장군으로부터 부여밭은 토지에 살고, 농민을 이요하여 농업을 하고 있었다. 분쟁같은 것이 일어났을 때는 가마쿠라에 모여, 장군을 위하여 싸웠다. 이시대에 토지를 둘러싸고 지배하는자와 이에 복종하는자의 관계가 생겼던 것이다. 이것을 주종관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장군은'고온'으로 무사에게 토지를 주었다. 그리고 무사는 고온에 보답하였다. 이것을 '고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양쪽의 의무관계가 고대 사회와 다른점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힘으로 지배하는 형태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전국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서일본에서는 아직도 귀족의 힘이 강했고 교토의 조정(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의 정치권력)이 서국을, 가마쿠라막부(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무사의 정치권력)가 동국을 지배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귀족과 무사의 이중정권이다.
가마쿠라 막부는 3인의 겐지장군뒤에 호죠씨가 정치 권력을 갖게 되었다. 1232년 무사를 지배하기 위하여 무사 최초의 법률인 고세바이시키모쿠를 만들었다. 이것은 점점 서일본쪽으로 넓혀져갔다. 서로 지배권을 크게하기 위하여 무사와 무사 , 무사와 귀족사이에서 토지를 둘러싼 분쟁이 ??때로 일어나게 되었고, 이와 같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무사의 법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가마쿠라 시대는 무사의 헤이안 시대의 불교는 귀족중심의 불교로, 이해하기 여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가마쿠라 시대에는 누구라도 알수 있는 쉬운 불교의 가르침이 널리 퍼졌다. 분쟁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여러계급의 사람이 불교에서 구원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가마쿠라 시대의 새로운 불교의 특징이다.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는 조도슈, 조도신슈, 지슈, 린자이슈, 소토슈, 니치렌슈 등의 종파는 이시대에 새롭게 발생한 것이다.
사무라이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본래 귀인(貴人)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이를 경호하는 사람을 일컬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이후 무사계급이 발달하여 셋칸케[攝關家 :섭정과 관백벼슬을 하는 가문]와 잉[院] 등에서 경호를 위해 무사를 채용하게 되자, 점차 사무라이의 명칭이 무사 일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법[鎌倉幕府法]에서는 낭당(郞黨)을 거느리고 기승(騎乘)의 자격이 있는 무사를 일컬었고, 형벌도 낭당과 일반서민과는 구별되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있어서도 대체로 상급무사를 지칭하였는데, 에도[江戶]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신분이 고정되어, 그 가운데 사(士)에 속하는 자를 일반적으로 이렇게 칭하였다.
그러나 무가사회 내부에서는 보다 엄격하게 이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막신(幕臣) 중에서는 하타모토(旗本:에도시대 將軍家 직속으로 만석 이하의 무사)를 가리켰으며, 가치[徒]와 주겐[中間:무가의 고용인] 등의 하급무사와는 구별하였고, 제번(諸藩)의 가신 중에서도 주고쇼[中小姓:무사 직위의 하나] 이상의 무사를 이렇게 간주하는 등, 무사 중에서도 비교적 상층계급을 사무라이라고 하였다. 또한 무가(武家)를 주군(主君)으로 섬기지 않는 특수한 사무라이로 궁가(宮家)에 봉사하는 미야사무라이[宮侍], 몬제키[門跡:격이 높은 사원]에 봉사하는 데라사무라이[寺侍] 등이 있었다
무사도
1984년 이래 현제 까지 통용되고 있는 지페가 3종류 있다. 만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5천엔: 교육가 니토베 이나조, 천엔: 문학가 나츠메 소세키이사람들의 공통점은 명치시대때 무사도 정신을 앞장서서 긍정적으로 적극적 주장한 사람들이다. 일본에서는 종교나 도덕교육을 별도로 받지 않고 '무사도'를 통해 도덕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일본을 아는 핵심 KEY WORD를 뽑는다면 당연 일본특유의 봉건제도와 무사도를 뽑을수 있다. 이런 무사도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관념군(觀念群)이다.
-무사도의 사전적 정의
'일본의 무사계층에서 발달한 도덕. 가마쿠라시대에서 발달 해 , 에도시대에 유교 사상에 뒷받침이 되어 집대성, 봉건 지배체제의 관념적 지주가 되었다. 충성, 희생, 신의, 염치, 예의, 결백, 꾸밈없음, 검약 등을 중시한다.'
이런 무사도의 등장은 일종의 역사적인 역설로 무사도에는 기존의 무사를 떠나 문무겸비나 책임감필요성 등을 보여주 기도 한다. 전란의 시기가 끝나고 찾아온 평화스런 에도시대의 무사들은 급격한 경제발전의 틈에서 소외된 채로 400여년간 계속된 평화의 시대에 뭔가 할 일을 찾아야 했다. 다른 시대와 달리 에도시대의 무사들의 가계는 극 빈곤층을 형성할 만큼 가난했고, 그들의 허리에 찬 칼처럼 이상은 드높았다. 빈곤한 생활에서도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고 이를 지탱해 준 것이 기리스텐고멘(죄를 저지른 자를 바로 죽이 는 것이 허용), 묘지(名字-성), 다이토(帶刀)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의 사람들과는 다른 절제되고 검약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 바로 무사도이다.
-무사와 무사도의 성립
무사도(武士道)라 불리는 무사의 도덕이 생기기 시작한 것 은 에도시대 초기무렵이었다. 그것은 무사들의 생활을 규율 하는 도덕이 없이는 무사들의 생활이나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사의 도덕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무사들을 이끄는 총령(總領)은 기량의 유무가 제일 문제였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에도시대와는 다르게 가문의 장남이 대를 잇는게 아니라 일족의 단결과 통솔을 잘 유도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진자가 뽑혔다. 그와 더불어 무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항상 무예를 연마하고 적과의 싸움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일족의 총령은 가문의 대표일 뿐 만 아니라 전투 시에는 일족의 총지휘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무예밖에 모르는 무사들은 자칫 학문을 멀리하기 쉬웠다. 대부분의 무사는 책을 읽을 틈도 없었고 한자를 알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가마쿠라시대 후기에 이르면 무사들의 생활이 윤택해져 독서와 학문에 몰두하는 무사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무사시(武藏)의 가나자와(金澤)에 도서관을 건립한 호죠(北條)씨 일문의 명성은 높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사도란 무사가 없이는 설명하기 힘들다. 日本史에서 무사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가마쿠라시대부터이다. 그 후 메이지유신까지 일본은 '무사의 나라'였다. 이것이 시사해 주는 점은 일본이 '칼을 찬 무사의 나라'라는 점이다.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 등을 비롯한 소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만큼 독특한 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와 같이 '독서와 과거(科擧)'의 유교의 이상학적 철학을 실천적인 철학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은 의의가 크다.
사실 일본의 막부체제가 전국시대(戰國時代)라 불리는 사건을 계기로 획기적으로 변하여 그 이전의 무사와 에도시대의 무사는 개념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무사도라는 이름의 도덕체계가 확립한 것은 에도시대가 되고 나서였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에도시대의 성립은 日本史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거쳐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는 또다시 일어날 전란을 우려해 '부케쇼핫토(武家法制度)'를 제정, 신분의 유동성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또한 신분의 차이를 사·농·공·상의 네 계급으로 나누어 각 계급들간의 차이를 확고히 하였다. 에도막부가 시작되면서 무사들의 생활은 드라마틱하게 변하게 된다. 역시 무사들은 전장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 전란의 시기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해 무사들은 일상성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에도시대의 무사들은 급격한 경제발전의 틈에서 소외된 채로 400여년간 계속된 평화의 시대에 무엇인가 할 일을 찾아야 했다. 다른 시대와는 달리 에도시대 무사들의 가계는 극 빈곤층을 형성할 만큼 가난했고, 그들의 허리에 찬 칼처럼 이상은 드높았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의 사람들과는 다른 절제되고 검약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런 그들의 지위를 지탱해주는 것이 바로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과 '묘지(名字)','다이토(帶刀)'였다. 평화가 정착한 에도시대에 들어서 오히려 옛날 센코쿠의 무사를 그리워함과 동시에 이념형으로 '무사도'가 등장하게 된 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일종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은 물질을 초월한 이상을 만들게 되는데, 그 것이 '무사로서의 길' 즉, 무사도이다.
무사도에서는 무사의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하려고 한 흔적이 많다. 예를 들어 무가법제도 제1조에서는 문무겸비(文武兼備)와 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무사의 직분을 더 이상 전쟁의 도구가 아닌 '덕을 밝게 하여 이의를 행할 수 있는 존재'로의 전환을 말하고 있다. 이런 '무사의 유교화' 또는 '유교의 무사화'에 힘을 쓴 학자로는 나카에토주 (中江藤樹, 1608-48), 쿠마자와반잔(熊澤蕃山, 1619-91), 야마가소코(山鹿素行, 1622-85) 등 로닌(浪人)출신의 유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무사는 선비가 되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개가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비판하며 거칠고 흉폭한 무사기질을 유교에 의해 세련화시킴으로서 이상적인 무사도의 기틀을 잡았다.
그 중, 야마가소코는 '유교(儒敎)의 무교화(武敎化)를 실천, 종래의 무사도와 다른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무라이(士)의 직분은 자신의 몸을 닦고(修身), 주군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며, 인과 예를 지켜 의리를 다함은 물론이고, 농·공·상의 직업을 초월한 존재로서 세 부류의 백성들 사이에서 윤리를 져버린 무리를 처벌하여 인륜을 지키는 존재라고 역설 하였다. 때문에 사무라이는 문·무의 덕치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다시말해 무사는 인륜의 길을 실천해야 하며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직분을 자각하고 책임감을 가지는 동시에 다른 계급을 이끌어 가야한다는 점에서 무사는 곧 선비와 같다. 다만 허리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있을 뿐이다.
무사도의 형성에 관여한 이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고대에 서 중세로서 이행과 동시에 일본은 무사정권이 성립되어 10 세기간 일본은 무사의 지배에 들어간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무사정신과 일본 고유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신도, 그리고 고대에 백제와 신라에서 전파된 유교와 더불 어 에도시대에 중국에서 수입한 주자학 등 무사도는 그 본원이 어디인지 예측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한 사회를 떠받치는 관념으로서 무사도는 자연스럽게 나름대로의 도덕과 이념체계를 형성해왔다는 점이다.
-도덕체계
과거 일본의 사회체계를 형성해온 여러 요소 가운데 무사도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많은 문화를 중국과 한국에서 수입하였다. 때문에 무사도는 어떤 면은 유교와 비슷하면서 불교와도 닮은 점이 있다. 그와 더불어 일본은 섬나라라는 지형적 조건과 더불어 특이한 역사적 배경으로 일본은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때문에 무사도는 그 형성의 배경이 외지에서 전파된 많은 문화의 복합체이면서도 또한 가장 일본적인 도덕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무사도는 '에도시대에 성립된 관념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유교사상에 뒷받침되어 집대성된 봉건 지배체제의 관념적 지주'라 할 수 있다. 지난 10세기간 일본의 막부체제를 뒷받침해준 것은 사무라이와 더불어 잘 발달된 봉건체제였다. 봉건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급체제가 필요했고, 이는 무가법제도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전장에서 성장한 사무라이들을 법으로만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사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맞는 몸가짐과 더불어 정신의 가짐새를 바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니토베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는 "무사도란 무사가 지켜야 마땅한, 또 가르쳐야 할 도덕규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명무사의 이야기나 학자의 책 등으로 전해지는 말로표현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로 기초를 닦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수백년간 수 많은 무사들의 생애를 통한 유기적성장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시 무사도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찾기 힘들며 각자 개성이 있는 여러 사람들이 전쟁에 소집되어 생활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생겨난 행동규범이 발전하여 무사도가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무사도에 대한 도덕적 해석은 같은 동양인 보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 일본인들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절대로 상관을 욕되게 하는 법이 없다. 또한 전투에 임하면 죽을 때까지 싸우며, 항복을 모른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성향은 무사도에서 가르치고 있는 많은 요소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런 요소들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화랑'이란 집단을 통해 가르치고 있던 덕목이다. 또한 이러한 덕목들은 전후 일본의 발전에 기여한 일본적 사고를 풀이하는 데도 용이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사도에서 가르치는 것
무사도에서 중요하게 강조하는 덕목으로는 의, 인, 견인(堅忍), 예, 명예, 충의, 극기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충효는 무사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충성] 무사도 가운데서 충성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는 비단 무사도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일본사회의 도덕으로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충(忠)보다 는 효(孝)가 강조되고 있는 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충(忠)이란 어떤 개인이 국가 또는 주군(主君)에 대한 절대 적인 복종관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개인과 개인과 의 관계 또는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와는 틀린 즉 신과 인간 과의 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일본은 천황을 신격화시키고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다시 말해 군주와 국가는 대인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개인은 그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태어나는 순간 개인은 국가와 주군에게 크나큰 '온(恩)'을 입고 태어나기 때문에 개인은 충성의 도덕적 의무를 지게 되어 있다. 개인은 군주나 국가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충성을 다할 뿐이며 그것이 댓가를 전재로 한 상호교환적의미가 아니다. 때로는 상벌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충성심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 상을 바라거나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의무를 행한다면 이미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고 일본인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절대적 복종이 있기 때문에 폭군이나 불합리한상태 아래서도 신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로서의 충성은 국민으로 하여금 별다른 감시와 관리 없이도 국가에게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일본인의 국민성의 배경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편의점에서 야간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까지도 감독없이 주어진 일을 성실히 이행하는 충실함의 근원도 이런 배경에서 연유 한다고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효]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효(孝)는 충의 아래에 위치한다. 옛 학자인 '타이라시게모리(平重盛, 1138-79)'는 충과 효가 본디 같은 것이라고 하였지만, 많은 역사적 사례로 볼 때, 일본에서 효가 충과 동등한 입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일본의 유명한 담화집인 '하가쿠레(葉隱)'에서는 효에 대한 부분이 언급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충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같은 유교문화권에서 변질적인 특징을 지니게 된 것은 일본의 경우 이미 토대가 잡혀져 있던 '무사문화'에 유교의 지배이념을 도입해 재구성한 탓이다.
[의] 의는 다른 말로 의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의 범주는 너무나 광대하다. 어떤 의미로서는 '의무(義務)'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 틀리다. 베네딕트는 "의(義)란 자기 의무를 다하는것을 말한다"고 서술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의무에 대한 성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인 일본인들의 성향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예로서 주군에게 치욕을 입은 가신이 적군과 손잡아 주군을 배신했던 전국시대의 무사들이 있다. 이것은 모두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건이다. 그들은 주군에 대한 의와 자기 명예에 대한 의, 두 가지를 모두 지킨 것이다. 또, 의와 함께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온(恩)'을 들 수 있다. 온이란 '은혜(恩惠)'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것으로서 무의식적인 '의(義)'로서 입는 혜택이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일본인들은 이런 온을 꺼린다는 것이다. 그들이 얻은 온은 결국 언젠가는 갚아야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결국 부담이되어 온을 입은 사람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명예] 명예란 자신의 이름에 의무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는 의무는 크게 '주군을 섬길 의무'와 '이름에 대한 의무', '그 외의 의무' 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이름에 대한 의무는 매우 중요한 의무를 갖게 되며 뜻하지 않게 명예를 손실당하면 매우 수치스러워함과 동시에 이름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 이것은 복수나 자결 등 여러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로써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떡장수의 이웃집에 가난한 홀아비 사무라이가 아들을 하나 데리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아들이 떡집에서 놀다가 돌아간 후 떡장수는 떡 한 접시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사무라이의 아들에게 혐의를 두게 되었고 떡장수는 그에게 떡값을 내라고 하였다. 사무라이는 '아무리 가난할망정 내 자식은 사무라이의 자식이다 남의 가게에서 떡을 훔쳐먹었을 리가 없다'라고 극구 해명하였다. 그럼에도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떡장수에게 참다못한 사무라이는 마침내 그 자리에서 칼을 빼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을 먹지 않았음을 입증해 보인 다음 그 칼로 떡장수 를 베어 죽이고는 할복해 자살하였다.
[극기] 일본인들은 큰 업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서양인들 처럼 각각의 개성에 의해 자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보다는 자신을 절제해 한계가 있는 육체를 뛰어넘는 정신을 기른다.
만약 시험을 보거나, 검도시합에 나간다거나 하는 소년도 시험이나 시합에서 필요한 훈련뿐만 아니라 그와는 전혀 별개의 개인수련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 하다고 하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가다듬는다. 시험 공부중에 혹은 혹독한 훈련 중 그들은 펜이나 목검을 땅에 내려놓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렇게 해서 욕구투성이인 육체를 떠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정신의 수련에 열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현재 일본에서도 간간히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유치원에 가는 유치원생 등 으로 표현되는 일본 교육의 독립심 기르기의 훈련은 이런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사도의 의미
위에서 사려본 바를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결국 "무사도라는 것은 곧 죽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武士道と專ふは死ぬ 事と見付たり)"이 것은 바로 무사들의 마음가짐 즉,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적을 좀더 일찍 토벌하고 장렬히 죽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무사도와 일본인
근대적 의미에서 일본의 무사도는 메이지유신이나 제국주의의 발생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계급은 지방의 무사 계급이었으며 그들은 일본군의 주축이 되었다. 이렇게 융성한 무사도는 2차대전의 종전과 더 불어 대전함 '야마토'와 함께 침몰하였고 무사도가 의미했던 '대화혼(大和魂)'은 그 생명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무사도는 근대적 의미의 무사였던 대일본 제국 육군제의 폐지와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무사도는 일본인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 국민의 성격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요인의 집합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민족의 마음 속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무사도에 의해 가르쳐졌던 여러 유산들은 매우 독립적인 것이었고 외세의 어떤 나라도 침범할 수 없는 고귀한 영역이었다.
현대의 일본인에 있어 무사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쇼와천왕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중학교에서 의무적으로 '하가쿠레'를 가르쳤지만 종전 후 교육제도의 개편과 더불어 그것 마저 없어졌다. 현재 일본인 대학생에게 직접 인터뷰 해본 결과, "무사도는 구체적인 학문 으로 성립될 수 없고 현재 일본에서 가르쳐 지지도 않는다"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일본의 혼(The soul of Japan)'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 버린 것일까? 그렇 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 고도 성장기에 보여준 일본의 저력은 일본을 지난 10세기 동안 지배했던 무사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조직에 대한 헌신과 무조건적인 충성, 절 제와 검약 등 일본이 보여주었던 많은 미덕들은 과거 일본 인의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생각했던 무사의 그것과 다를바없다.
지금까지 무사도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웃나라 일본을 10세기 간 지배한 사무라이. 그리고 그들의 정신이었던 무사도! 그 정신은 지금도 일본의 정신세계와 조직 그리고 사회를 설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일본도
보통은 대도(大刀)·소도(小刀)·단도(短刀)를 가리키지만 넓은 뜻으로는 일본 청룡도나 창까지도 포함된다. '가타나카지(칼 대장장이)'가 제작하는 칼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칼을 말한다. 일본도는 날이 잘 들 뿐만 아니라 첫째로 혼(魂)이 들어 있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한다. 일본도의 역사는 곧 일본민족의 역사와 일치된다. 생산의 과학적 기술이나 공장(工匠)제도·전투방법·정치제도·경제기구·습관 등 많은 역사적 요인과 함께 변천해 왔다.
양식상으로 보면, ① 상고(上古)시대, ② 헤이안[平安] 중기∼가마쿠라[鎌倉] 초기, ③ 가마쿠라 중기, ④ 가마쿠라 말기, ⑤ 남북조기(南北朝期), ⑥ 무로마치[室町]기, ⑦ 모모야마[桃山]기, ⑧ 에도[江戶]기, ⑨ 바쿠마츠[幕末]기, ⑩ 메이지[明治] 이후 등 10기로 나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도검의 제작이 금지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문화청의 승인을 얻어서 일본도의 단련기술을 보존장려하기 위해 제작한다. 특징은 "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지지 않고, 잘 든다"는 3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독특한 단련법과 제작공정이 있다. 따라서 일본도는 제작연대에 따라 모양에 변화가 있고 단련법에는 각 계통의 특색이 나타나며, 각 도공(刀工)의 개성이 가미되어서 독특한 작풍을 나타낸다. 그래서 일본도를 감상하는 데는 모양, 칼날의 벼림새, 쇠의 단련도, 장식 등 여러 면으로 관찰하여 종합적으로 해야 하고 그 역사성에 비추어 감상해야 한다.
-직도시대
일본도가 오늘날 우리들이 늘 흔히 보는 것과 같은 휜 모양의 아름다운 것이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일본 민족에게도 필시 상고 시대부터 무기로서의 도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석검인지 청동검인지 혹은 동무(대륙으로부터 철을 사용한 대도(大刀), 허리에 차는 긴 칼)가 수입되고, 더구나 그 지역에서 도공(刀工)도 이주해 오고 그 후 귀화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라가는치(韓鍛冶)라고 부르고 원래 우리 나라의 대장장이들은 야마또가누치(倭鍛冶)라고 칭하였다. 이렇게 귀화한 사람이 가장 많이 각 방면의 일을 했던 것은 약 2세기부터 4세기에 걸친 때라고 말하여 진다.
나라시대는 물론 헤이안시대 초기까지의 일본도는 그 형태와 제작법을 대륙에서 배웠고 거기다 우리 나라 본래의 대장기술을 더한 것이었지만 이 시대까지의 다찌(大刀)는 모두 휘지 않는 것이었고 히라즈꾸리(平造)라고 불리웠던 것으로 그 횡단면이 (▽)모양이었다. 그리고 기리하즈꾸리(切刃造)를 생각해 낸 것이 언제쯤인지 명백하진 않지만 ( U ) 같은 다찌(大刀)가 생겨났다. 이것은 히라즈꾸리(平造)에 비해 칼날 부분이 예리해서 전투에 편리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기쯔사끼모로하(鋒兩刃造)라고 하는 앞부분만 양날로 된 것이 나왔는데 이것에도 히라즈꾸리(平造)와 기리하즈꾸리(切刃造)가 있다. 기쯔사끼모로하(鋒兩刃造)는 베는 것 뿐만 아니라 찌르기에 좋은 무기였다. 만엽집(万葉集)에 여러 차례 보이는 "즈루기(劍)다찌(大刀)"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기쯔사끼모로하(鋒兩刃造)를 말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다찌(大刀)는 각지의 고분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 중에는 도오스(刀子)라고 하는 고가따나(小刀)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특수한 것으로는 關東(관동), 北陸(북륙), 奧羽(오우) 지방에 걸쳐 특히 많은 것이 와라비떼노다찌(蕨手橫刀)라고 불려지는 것인데 이것은 자루 부분이 몸체와 함께 만들어졌고 자루 머리가 고사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한 손으로 휘두르며 싸웠던 것 같다.
칼 몸의 너비가 넓어서 35-36cm가 보통이다. 히라즈꾸리(平造), 기리하즈꾸리(切刃造)외에 기쯔사끼모로하(鋒刃造)로 된 것이 현존하는 것으로 보아 상장히 오랜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와라비떼노다찌(手橫刀)는 발굴품외에 정창원에도 전해져 온게 있는데 이것은 정창원 기쯔사끼모로하(鋒刃造)인 히라즈꾸리(平造)이다.
정창원에는 크고 작은 것을 합쳐서 약 70여구의 다찌(大刀)가 현존하는데 이것들도 모두 시대에 따라 가지각색의 차이가 있는 듯 하다. 히라즈꾸리(平造인 것, 기라하즈꾸리(切刃造)인 것, 기쯔사끼모로하(鋒兩刃造)인 것 등도 포함되어 그 중에는 무소오또(無壯刀)라고 하는 37-38cm의 큰 히라즈꾸리(平造)도 있다. 이것들은 특별히 자루를 붙여 만들지 않고 자루에 직접 등나무 덩굴이나 실을 감아서 사용한 듯 한데 와라비떼노다찌(蕨手橫刀)처럼 한 손으로 사용한 것 같다.
이 시대의 것은 정창원의 도검 외에는 극히 적어서 사천왕사(四天王寺)의 국보인 병자초림(丙子椒林)검, 칠성(七星)검, 토사(土佐, 지명)의 소촌(小村)신사 소장 중문환두(重文環頭)대도,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수룡(水龍)검 등에 지나지 않는 듯 하다. 정창원의 도검은 메이지시대에 새로 다시 갈아서 수리했던 것이지만 사천왕사의 다찌(大刀)2구와 소촌(小村)신사 다찌(大刀)는 모두 전쟁후에 처음으로 갈았던 것이다. 이들 도검의 종류는 매우 아름다운 것인데 그 중에는 大和(대화), 栗田口派(률전구파), 相州(상주) 등 훌륭한 작품의 지가네(地がね)를 방불케 한다기 보다 그 제작법이 후세의 도검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참으로 놀라운 것이 많다.
이 도검들에서 볼 수 있는 하몽(刃文)[야끼하(칼날에 있는 불에 그을린 자국)의 모양]은 거의 스구하(直刃)[직선의 야끼하]이지만 어지러운 것도 약간 포함되어 있다. 단 이것들과 달리 고분에서 발굴된 여러구의 가따나(刀)를 갈았던 결과에 의하면, 관동지방에서 출토된 것에 후대의 어지러운 야끼하 같은 모양도 많은 것에 주목해야하며 이후 도검 역사의 연구 과제이기도 하다. 덧붙여 말하면, 정창원 도검 및 사천왕사 칠성검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칼 몸체에 별이나 구름의 모양을 금으로 상감한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하늘을 숭배하는 중국과 그 외 다른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직도 시대의 전투는, 이 다찌(大刀)의 휘지 않은 모양에서 유추하건대, 주로 도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말 위에서 베기에는 아무래도 많이 휘지 않으면 무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시대에, 중간에 시노기(鎬)를 붙여서 좌우가 다른 즈루기(劒)가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데 정창원에는 한구도 없고 다른 데에도 전해져 온 유례가 없는 것은 어찌된 것일까. 이와는 달리 정창원에는 데뽀꼬라고 하는 짧은 자루를 가진 나기나따(刀)의 원시 형태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다섯구 있는데 이것이 과연 전투 무기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이후 연구해야할 것인데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에 무악(춤의 아악반주)용 도구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는 그 다섯구의 데뽀꼬중에서 창 끝에 약간 야끼이레(燒入)를 한 것이 한구 있지만 다른 것은 전부 야끼이레(燒入)를 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정창원에는 호꼬(무-옛말[이후 창(槍)])가 수십 자루 보존하고 있지만 이것들의 모양은 후대의 료시노기즈꾸리(兩鎬造)인 지요꾸(直槍)와 같은 모양인 것이 가장 많고 그 가운데는 상하의 가기야리(鍵槍)라든가 가마야리(鎌槍)등과 모양이 같은 것이 있는데 후대의 보통의 창과 다른 점은 이것들이 모두 후꾸로호(袋穗)인 점이다. 袋槍(대창)은 무로마찌시대이후 여럿 현존하지만 이것이 앞선 형태인 것 같다.
정창원 보물장부인 동대사 헌물장은 특히 국가진보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중에는 "가라다찌(唐大刀)" "고마쯔루기(高麗劍)"라 불리는 것과 "가라요우노타찌(唐樣大刀)" "고마요우노다찌(高麗樣大刀)"등의 칭호가 있는 걸로 보아 확실히 중국과 조선에서 수입된 다찌(大刀)와 그것을 모조한 것이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원래는 수입된 것과 일본도가 섞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라키리
'하라 키리' 라는 것은 칼로 스스로의 배를 가르고 뒤에서 제3자가 칼로 목을 쳐주는 일본특유의 자살법이다. 심정(心情)적으로 일본인은 하라키리에 대하여 조금도 혐오감이나 불합리함을 느끼지 않는다. 일본인은 인간의 영혼과 애정이 뱃속 어딘가에 머물고 있따고 생각하며 '나의 영혼이 더러운가 깨끗한가를 당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하고 싶다. '는 마음의 상징적 행동이 하라키리 인 것이다. 명예를 생명보다. 중요시 하는 무사들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자신의 권리이며 정당한 행위로 간주되어 왔다.
활복에 관한 사무라이의 정신이 깃들여 있는 일화로 어느날 빵가게에서 조그만 아이들이 빵을 훔쳐 먹었는데.그것을 본 가계 주인은 한 아이를 붙잡아 아이의 집으로 데려갔다. 마침 집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사무라이 집안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사무라이는 "사무라이 집안은 도둑질을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아이를 향해 "너 이녀석 빵을 훔쳤니?"라고 묻자 아이는 "아니요, 전 훔치지 않았어요"라고 했다.그러자 빵가게 주인은 "이런 녀석도..내가 분명히 봤는데 거짓말을해?"라며 다그쳤다. 이를 본 사무라이는 그자리에서 아들인 아이의 배를 칼로 가르고 만다.기겁을 하는 빵가게 주인 앞에서 위와 창자를 샅샅이 뒤지며 하는 말이 "이것 보시오 사무라이 집안은 도둑질을 하지 않소, 그대로 인해 나의 아들이 죽었으니 그대또한 나의 칼에 목숨을 내놓아야 하오"하고는 그자리에서 칼을 휘둘렀다 이렇게 사무라이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라키리의 여러 가지 의미
1. 자신이 진 죄를 스스로 벌한다는 의미
2. 자신의 잘못을 사과한다는 의미
3. 불명예를 씻기 위한 행위
4. 동료의 죄를 대신한 자신의 죽음으로 동료를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함
5.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는 수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