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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피라미드의 비밀을 찾아서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 유역에서 발달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다. 구석기시대 말인 약 1만 2000년 전부터 기상 변화로 인해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점차 사막으로 변해가자 사람들은 나일 강 유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나일 강은 해마다 범람하여 처음부터 사람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범람에 대처하는 토목과 관개 기술을 습득했다. 또한 자연 현상에 기초한 그들만의 신화를 창조해 나가면서 후세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문명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집트가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이집트보다 먼저 선진 문명을 갖고 있는 지역이 여러 곳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다른 문명에 비해 현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아직도 4천 년 이상 오래된 거대한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는 피라미드는 압권이다. 피라미드라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그리스어의 ‘pyramis’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것은 기제에 있는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의 깨로 만든 의식용 과자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음성학적으로 ‘m′r’ 또는 ‘mer’로 표현했으며 피라미드 형태를 상징하는 상형문자로 그렸다.
지난 수세기 동안에 사막의 유목민들은 피라미드에 도착하기 수 일 전부터 아득히 멀리 보이는 거대한 규모의 기념물을 볼 수 있었다. 지평선 상에 자그마한 삼각형으로 보이지만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피라미드는 점점 더 완벽한 기하학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쿠프의 대피라미드(이하 대피라미드는 쿠프의 피라미드를 뜻함)의 바닥 면적은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석회석 돌덩어리 230만 개가 사용되었다. 중량으로 거의 7백만 톤의 돌을 사용했다는 얘긴데 1천 톤의 열차 7천 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피라미드를 보자마자 놀라는 사람들은 곧바로 의문에 잠기게 된다.
신석기시대를 막 거친 고대 이집트인들이 왜,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기념물을 건설하였을까? 바퀴도 발명되지 않았고 말이나 노새 등 하역 동물도 없었던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의 밑변이 0.1퍼센트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대형석재를 운반하기 위한 썰매와 끌기 위한 밧줄, 도르래, 미끄러져 내리기 쉬운 진흙과 경사로를 만들기 위한 벽돌 등 모든 도구와 재료는 어떻게 조달했을까?
학자들이 거대한 피라미드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문명이 없었던 4500여 년 전에 건설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류의 발전사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피라미드에 ‘척도의 기준’이 들어있다는 말도 있고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킨 것이라는 설명도 전해져 많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피라미드를 철저하게 연구하도록 유혹했다.
또한 피라미드를 둘러싼 인간들의 속물근성에 따른 호기심도 피라미드 신드롬을 부채질하는데 기여를 했다. 피라미드를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 만들었으며 피라미드에는 신비한 ‘피라미드 파워’가 존재한다는 말도 있다. 피라미드에 대한 환상을 부채질한 것은 대피라미드 안에 아직도 엄청난 보물이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 보물을 찾아낼 수 있을까. 피라미드에 숨어있는 과학 및 신비에 관하여 다섯 회에 걸쳐 설명한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
피라미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의 역사와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각과 생활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신관 마네토가 분류한 31왕조 방식을 따른다. 그는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메네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르메르부터 이집트 출신의 마지막 파라오 넥타네보 2세의 죽음(기원전 343년)까지를 기록했다. 그가 기술한 이집트 역사는 그가 태어나기 2700년 전부터의 이야기이므로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많이 있지만 그의 분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상하 이집트로 나뉘었던 이집트는 기원전 3200년경 전설적인 나르메르 시대에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트리니트 왕국: 1, 2왕조). 그 후 기원전, 2780~2280년까지의 500년간을 ‘고왕국’이라 하며 이 시대의 제3왕조에서 제6왕조까지를 이집트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피라미드 혹은 파라오 시대라고 한다. 유명한 이집트 기제 피라미드 및 스핑크스도 이 시대에 건조되었다.
제6왕조 이후 분열이 계속되어 기원전 2060년부터 중왕국을 이루다가 기원전 1700년경 제13왕조 때 말과 철을 사용하는 기마군단 힉소스인에게 점령당한다.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점령을 당한 것이다. 정복자인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의 찬란한 문화에 동화되어 이집트화되었고 이집트인들의 끈질긴 독립 운동으로 물러나게 된다.
기원전 1550년부터 기원전 1070년까지를 ‘신왕조’라고 부른다. 아부심벨 신전을 건설한 람세스 2세, 영국인 카터에 의해 인류 최대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황금관, 황금 마스크가 발굴된 투탕카멘의 묘, 이집트 철학 및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이크나톤, 최초의 통치 권력을 가진 하셉수트 여왕 등이 모두 이 왕조에 포함된다. 이 시대는 이집트 최후의 번영기, ‘신왕국’ 혹은 ‘제국시대’라고 불린다.
그 후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지배 하에 있다가 기원전 6세기 말에 페르시아에 점령당한다. 기원전 33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인들을 축출하고 이집트를 차지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그의 방대한 영토는 부하들에게 분할되는데, 우여곡절을 거쳐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게로 돌아간다. 그가 이집트의 최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이다.
이집트 최후의 파라오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51~30년)로 기원전 31년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여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였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이집트를 로마의 한 주로 편입한다. 이로써 3200년간 31왕조에 이르는 고대 이집트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
이집트를 방문하여 피라미드나 거대한 기념물을 보고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압제에 억눌린 사람들이었다고 상상하기 쉽다. 죽음의 관념에 항상 사로잡혀 있고, 감독자의 난폭하고 잔인한 채찍 밑에서 평생 거대한 돌덩어리를 끌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그릇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 가축의 사육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했다. 그들은 소, 개, 염소, 고양이 등 모든 동물을 신성시하여 미라를 만들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인생을 즐긴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 또한 행복한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또 수많은 고대 민족 중에서도 가장 근면한 사람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이자 지배자인 파라오의 지배 하에서 이집트인들의 생활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나쁜 생활이 아니었다. 3200년 역사 동안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기근 등으로 불안한 기간도 있었으나 평소의 생활은 대체로 평온했다. 지리적 조건상 정치적으로 침입자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하는 다른 고대 민족들에 비해 이집트인의 생활은 훨씬 평안하고 근심도 적었다.
고대 이집트의 농부는 노예가 아니었다. 파라오나 귀족, 신전의 신관을 위해서 땅을 경작하기는 했지만 신분은 자유로운 소작인이었다. 수확한 작물 대부분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나머지를 자신의 몫으로 사유화할 수 있었고 절약한 작물로 사후에 가지고 갈 인형(우샵티 혹은 샤웁티)이나 일상용품 등을 물물 교환할 수 있었다(이집트에서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점령하기 전까지 화폐가 없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의 계급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대를 내려가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가계에서 파라오가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서 재상이 나오며, 장군의 가문에서 장군이 나온다. 벽돌공이나 상형문자를 새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직업이 세습되었다.
파라오 가문에서 파라오가 세습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파라오가 임명하는 재상이나 장군도 한 가문에서 계속 이어받는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파라오는 언제든지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을 재상이나 장군으로 임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 앞에 정해진 벽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순종하려고 했다.
▲ 우샵티, 이집트인들은 내세를 믿었기에 사후에 노동을 대신할 우샵티나 샤웁티를 지참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이집트인들은 언제 사망하더라도 이들을 살 수 있는 현물을 지니고 다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파라오는 파라오며, 재상은 재상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놀이도 한다. 그들이 먹을 식량도 재배하여야 하고 물고기나 가축도 길러야 한다. 죽어서 신하나 하인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면 살아서 대우를 잘해주어야 한다. 공연히 제도적인 틀을 바꿈으로써 잡음을 내어 신하들을 화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파라오의 선조가 어떻게 해서 왕이 되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더구나 관례적인 모순을 타파하여 파라오나 고관이 되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쿠데타나 세습 제도의 변경은 중요 사항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면 죽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세계의 중심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바로 세계인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문명을 본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집트를 따르려고 노력하였으므로 그들이 야만인으로 생각하는 다른 문명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집트의 찬란했던 고대 문명이 과거만을 되씹는 문명으로 자리 잡게 되자 더 이상의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들 스스로 자신 앞의 높은 벽을 깨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의 역사>
이집트의 피라미드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기제에 있는 3개의 피라미드를 연상하는데 이들은 이집트의 제 4왕조(기원전 2613~2494)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140여 개의 대‧소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으며 현재 그 위치가 확인된 것만도 80여 개가 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다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먼저 피라미드와 깊은 연관이 있는 미라와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미라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인공적으로 보존하는 방법이다. 물론 고대 이집트가 유일하게 미라를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이집트 미라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므로 미라 하면 거의 모두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연상하게 된다.
▲ 마스터파, 피라미드의 기원인 마스터파는 왕족이나 고관의 무덤으로 지하에 미라를 안치했다.
왕조 시대 이전의 고대 이집트에선 사망한 사람들을 사막의 약간 깊은 구덩이에 놓고 모래로 덮어 매장했다. 그러면 건조한 공기와 더운 모래 때문에 시신은 급속히 탈수되어 수의가 썩기도 전에 자연적인 방법으로 완전하게 보존 처리가 되곤 하였다. 이렇게 매장된 미라를 우연히 발견한 이집트인들은 죽은 후에도 살아가려면 시신 보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구덩이에 시신을 매장하던 원시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차츰 커다란 무덤을 만들고 관을 사용하자 시신이 모래와 직접 접촉하는 자연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미라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던 미라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시신을 영구히 보관하는 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공들여 사자(死者)를 미라로 만들고 모래나 자갈로 커다란 봉분을 만들었음에도 끊임없이 불어 닥치는 사막의 바람이 무덤을 파괴하거나 자칼 등의 동물이 돌을 파헤쳐 시체들을 훼손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덤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용도로 개발된 것이 진흙 벽돌로 상부가 평평하고 옆이 경사진 무덤 마스타파였다. 피라미드의 기원이 되는 마스타파란 현대 아랍 말로 ‘벤치’라는 뜻의 직사각형의 묘로서, 무덤 모양이 이집트인들의 집 앞에 놓여 있는 흙벽돌로 만든 벤치와 유사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마스타파 무덤들은 아비도스, 나카다, 사카라, 기제, 메이둠, 아부시르 등지에서 발견된다. 초기의 마스타파들은 암반을 파고 내려가서 매장실을 만든 다음 장례가 끝난 뒤 천장을 나무 등으로 메우고 그 위에 흙벽돌로 직사각형의 언덕으로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큰 마스타파가 만들어져 지상 또는 지하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들고 그 중 한 방에는 죽은 사람의 미라를 안치했고 다른 방에는 사자를 위한 물건들을 넣었다.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것도 나타났는데 마스타파를 다 만든 다음에 매장하기 쉽도록 매장실로 통하는 계단식 통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 마스타파는 곧 피라미드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 조세르 피라미드, 제3왕조 두 번째 왕인 조세르는 연마된 돌을 사용하여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지하에서 무려 4만여 개의 병과 돌식기들이 발견되었다.
제1왕조(기원전 3,000년경)의 파라오 중에는 가까운 사막의 절벽에서 절개한 석회암을 묘혈(墓穴, 무덤 구멍) 바닥에 깔았고 제2왕조의 파라오는 묘실 내부 전면을 석회암으로 두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곧 석회석들을 대규모로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세계 최초의 돌로 된 피라미드는 사카라 지역에 세워진 것으로 제3왕조(기원전 2,600년경) ‘죠세르’ 시대에서 시작되었다.
죠세르는 제3왕조 두 번째 왕인데 연마된 돌을 사용한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제4왕조의 스네프루는 쿠프의 아버지로 피라미드의 전형을 세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반적으로 3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이루어 놓은 피라미드의 건설 방법을 토대로 이집트의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건설될 수 있었다.
스네푸르를 상속한 쿠프(기원전, 2551~2528년) 때부터 피라미드의 석조술은 더욱 발전하여 쿠프, 케프렌, 미케리노스의 3대 피라미드가 세워진다. 소위 기제의 3대 피라미드로 카이로(카이로 이름은 기제에서 따왔다) 교외에 있으며 이 중에서 쿠프의 피라미드가 가장 크며 피라미드의 비밀이나 신비, 과학성을 이야기할 때는 대부분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기제의 대피라미드라 불리는 쿠프의 피라미드가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로 이 글에서도 대피라미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중세 시대에 카이로와 기제의 건물을 짓기 위해 무분별하게 석회암으로 된 외부 피복이 벗겨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일명 파라오의 현실(玄室)에는 반암으로 된 대형 석관이 비어 있는 채로 놓여 있다. 현실 안의 보물들은 모두 도굴당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도 피라미드 안에 있는 다른 공간에 부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장례를 집전하는 계곡의 신전은 나스레 엘 시만 마을 아래에 묻혀 있으며 앞으로 대대적인 발굴이 계획되고 있다.
쿠프의 아들(동생이라는 설도 있음)인 케프렌(기원전, 2520~2494년)은 쿠프와 비슷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214.5×214.5미터의 바닥 면적에, 높이는 143.5미터, 경사각은 53도 7분 48초이다. 이 경사각은 직삼각형 3:4:5 비율을 사용한 것이다. 케프렌의 피라미드는 쿠프의 피라미드보다 약간 높은 지면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원래 높이는 쿠프의 피라미드보다 3미터 낮지만 더 높게 보인다.
일반적으로 두 번 째 피라미드라고 불리며 아직도 반들반들한 외피가 정상 부분에 있어 현존하는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케프렌의 ‘계곡의 신전’은 스핑크스 옆에 있으며 어떠한 장식도 없다. 각 방의 벽체는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시공되었으며 바닥은 알바트르 석재로 되어 있다. 계곡의 신전에서 발견된 디오리트 석재로 된 케프렌 조상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조상 중 하나다. 케프렌의 피라미드는 1000년 전 아랍인들에게 약탈당했는데 그들이 침입했었다는 낙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미케리노스(기원전, 2494~2472년)의 피라미드는 쿠프와 케프렌의 피라미드에 비하여 10분의 1 규모밖에 안 될 정도로 매우 작다.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는 그 높이의 3분의 1까지 시공하기 매우 어려운 화강석으로 피복되었다. 내부의 하향 경사로와 시신이 있는 현실도 화강석으로 되어 있지만 석재들이 다듬어져 있지 않고 난삽한 것이 많아 졸속하게 완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라미드 건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13왕조까지 지속되었으나 대형 피라미드들은 사실상 제4, 5왕조(기원전, 2475~2323년)를 포함하여 500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그 후 파라오의 절대 권력이 땅에 떨어지고 실질적인 지배자로 지방 제후들이 등장하면서 수난을 당한다. 파라오의 권위가 떨어지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피라미드가 조직적으로 약탈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대에 들어서 도굴은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는 자신이 건설하는 피라미드의 부장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파라오가 직접 선대의 피라미드를 공개적으로 파헤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도굴되었느냐의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는 쿠프의 대피라미드도 기원전 2000년 이전에 약탈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피라미드 건설이 쇠퇴한 또 다른 이유는 비실용적이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미라를 영구히 보존하는 데도 문제점이 발견되었지만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하여 엄청난 대지 면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테베의 신왕국은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경작지를 전용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미라를 영구 보관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나일강 서쪽 절벽 밑의 바위를 파고 현실을 만들어서 매장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무덤이 있다는 어떤 증거도 외부에 남겨놓지 않았다.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투탕카멘 파라오를 제외한 모든 무덤이 도굴되었다.
<쿠프의 대피라미드>
피라미드의 내부는 건설 중에 최소한 두 번은 계획이 변경되었다. 이것은 공사가 완료되기 전에 왕이 죽을 경우에 대비해서 두 개의 묘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입구에서 조금 내려가면 상향 경사로와 하향 경사로로 나뉘는데 각도는 똑같이 26도이다. 하향 경사로 마지막에 첫 번째로 계획된 장례방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은 지표면에서 약 30미터 하부에 있다.
이 장례방이 완성되기 전에 더 이상 공사를 하지 않고 제2의 장례방을 건설하기 시작한 듯하다. 이른바 왕비의 방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하로부터 21미터 높이에 있으며 10꾸데(이집트의 척도 단위로 약 52.4센티미터)의 길이로 천장은 궁륭으로 덮여 있다. 이곳에서 수평 갤러리와 대회랑이 연결되는데 이 갤러리는 장례 후에 화강석의 틀어막기로 차단하게 되어 있다.
대회랑은 돌출부가 있는 높은 천장으로 길이 46미터, 폭 1.2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높이는 8.5미터나 된다. 이 회랑을 거쳐 허리를 구부려야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복도의 끝에 입구를 폐쇄하기 위한 용도의 공간이 있다. 이것은 상향 통로를 경사지게 하여 화강석 석재가 미끄러져 내리도록 계획된 것이다.
대회랑을 따라가면 세 번째 방인 파라오의 현실에 도달하는데, 현재는 뚜껑이 없이 비어 있는 석관만 남아 있다. 쿠프의 현실은 지상 42미터 높이에 만들어져 있다. 현실의 입구는 좁은 통로이므로 쉽게 막아버릴 수 있다. 현실 자체는 폭 5미터, 길이 10.5미터, 높이 6미터인데, 천장은 총 중량이 400톤에 이르며 9개의 석재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대피라미드가 다른 피라미드보다 특이한 것은 천체창이 있다는 것이다. 1638년 영국의 수학자 존 그리브가 길이의 척도가 대피라미드에 숨겨져 있다는 믿음을 갖고 대피라미드 안을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쥐들이 살고 있었다. 낯선 인간들이 대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오자 박쥐들이 공격을 해왔지만 총을 쏘면서 박쥐를 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윌리엄 해리는 박쥐들이 살고 있는 것을 근거로 대피라미드 내에 외부와 통하는 구멍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추측은 옳았다.
대피라미드의 현실에는 남쪽과 북쪽으로 높이 20센티미터, 폭 22센티미터의 환기 구멍이 있다. 미국의 천문학자 트림블은 남쪽의 환기 구멍이 기원전 2600년에서 기원전 2400년경의 오리온자리 세 별에 정확하게 조준되어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 이것을 근거로 환기 구멍이라기보다는 천체창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실제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에서 완성된 천체창은 쿠프의 대피라미드에만 있다. 왕비의 방이라고 알려진 곳에도 천체창이 있으나 미완성이며 카프레의 피라미드도 천체창을 계획하기는 하였으나 완성하지는 않았다.
피라미드를 왜 지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 아직까지 어떤 확정된 결론이 내려진 것은 없다.
이집트 종교학자들은 피라미드 형태가 태양 숭배와 관련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피라미드의 각 모서리는 구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태양빛을 묘사하는 것으로 피라미드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를 표현한다. 즉 피라미드는 태양의 기념물이라는 주장이다. 매의 머리를 가진 태양신 ‘레’의 숭배가 고대 이집트 종교의 중추를 이룬 것도 증거로 제시된다.
▲ 피라미드완성 추정도, 학자들은 피라미드 외피로 반질반질한 대리석을 붙였고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881년에 발견된 피라미드 텍스트인 『우스나』와 파라오의 피라미드 석주(石柱)에는 하늘에 이르는 성스러운 계단 또는 사다리의 개념이 적혀 있다. 텍스트 267과 619에는 파라오가 하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계단을 건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제의 경우 구름 사이로 태양빛이 비춰질 때 종종 대피라미드와 각이 똑같아진다. 기제의 대피라미드는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태양 광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홀과 같은 학자들은 피라미드는 상부로 향하는 비밀 통로의 기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홀에 따르면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 내에서 신비스런 의식을 거친 선택된 사람들만이 신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피라미드 안에서 3일 밤낮을 누워 있는 동안 그들의 카(ka, 각 사람의 영혼 또는 본질)가 육신의 몸을 떠나 정신적인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이 과정을 거친 사람만이 신이 된다고 믿었으므로 이 의식은 파라오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영생을 위한 신탁의 장소라는 뜻이다.
피라미드의 건설 이유를 명확히 대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서 건설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라미드는 단순하게 한 가지 목적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복합 건축물이라는 해석이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피라미드를 왜 건설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건설 당시의 사회상과 연결한다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가 국가 운명을 걸고 건설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설에 관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폭군 파라오가 수많은 노예, 주로 이스라엘인들을 채찍으로 혹독하게 부리는 것이다. 심지어는 엄청나게 커다란 돌을 잘 미끄러지게 하기 위한 도료로 나이 많은 여자나 어린아이들의 피를 발랐다는 유언비어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과장된 것이다. 영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과 같이 채찍이나 노예를 부려서 피라미드를 건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많은 기록에 나타나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노예 제도가 없었으며 노예라는 말은 가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했다. 영화와 같이 혹독한 조건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면 1000년이나 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각종 자료에 의해 밝혀진 피라미드의 건설 요인과 작업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했다. 이 범람기는 최소한 3~4개월가량 지속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거의 모든 농부들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경작이 가능한 나일강 연변이 모두 홍수로 잠겨버렸으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파라오는 범람기 동안 이집트 국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바로 이 대책이 피라미드 건설이었던 것이다. 즉, 건장한 인부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안식처인 피라미드를 짓게 하고 그 보답으로 곡식을 지급한 것이다. 보수는 현물로 직접 지급했는데, 이는 인부들이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인부들은 보수를 받는 대신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주요 작업 내용은 돌을 캐어 배에 싣거나 예정된 위치로 운반하는 것 등이었다.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지원자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지원자들이 많아 선발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자원자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부들이 보수를 제때에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업을 했다는 기록으로도 증명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파업 기록이기도 하다.
범람기가 끝나 물이 모두 빠지면 나일강 연변은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퇴적물에 의하여 더없이 비옥한 땅이 된다. 이때는 피라미드 공사가 중지되며 모두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러나 홍수 때문에 잠겼던 경작지에서 물이 빠진 후, 농민들이 예전의 자기 땅을 되찾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측량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 나일강의 홍수로 잠긴 세라피 사원, 나일강은 매년 반드시 홍수가 일어나므로 고대이집트인들은 자연과 싸우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일단 씨를 뿌리고 나면 땅이 비옥한데다가 기후까지 적당하므로 별다른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항상 풍년을 이루었다. 특별히 홍수량이 적어 경작지가 줄어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급자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곡식을 수확한 후 다음해까지 저장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사막의 세찬 바람 때문에 창고를 견고하게 짓지 않으면 제대로 곡식을 저장할 수 없었다. 피라미드가 곡식 창고의 역할을 했다는 설이 대두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건설은 매우 적절한 통치 기법 중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선왕이 죽으면 그의 피라미드는 곧바로 공사를 마감하고 선왕을 안장한다. 그래서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완성되지 못한 채 시급히 마감이 된 것이다.
새로운 파라오는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우선 나일강변 중에서도 범람기 동안 침수되지 않을 높은 곳에 피라미드를 세울 대지를 선정한다. 그리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종사할 인부들을 모집하는 것이다. 인부들을 모집할 때는 많은 농부들이 지원하여 경쟁률이 아주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군대의 막사 같은 곳에 묵으며 양식과 옷을 지급받는다. 피라미드 건설의 노동자로 뽑히는 것은 매우 큰 혜택이자 영예였다.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피라미드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비단 물질적인 보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 왕조에서는 파라오만이 미라가 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파라오는 평소에 아끼던 신하나 친족들에게도 피라미드 주위에 그들의 묘지를 건설하도록 은총을 베풀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정신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파라오에게나 제공될 수 있는 장례 집기를 보장받으며, 미라가 될 수 있고, 영원한 음식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농부들은 미라가 되지도 못하고 또 좋은 무덤에 매장되지도 못했다. 단지 모래를 판 구덩이에 장신구 몇 점과 함께 묻힐 뿐이다. 그러나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지하의 신이 된 파라오에 의하여 지하에서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피라미드 건설의 90퍼센트는 기아를 막는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나머지 10퍼센트는 종교적인 열정에서 건설되었다고 보는 것도 타당한 이야기이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회와 정신 모두가 결합된 결정품의 소산이라는 뜻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당시의 사회 생활상과 통치 철학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시스템이다. 즉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나일강의 범람기에 농부들을 기아에서 해방시켜 굶주림에 따른 국민들의 소요를 미연에 방지하고, 또 파라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처인 묘지라는 개념보다도 이집트인들을 위한 대형 근로 사업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국력을 쏟을 수 있었다. 즉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추진했던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의 사회 생활상과 통치 철학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가 전 국가적인 에너지의 집합체로 만든 대피라미드와 같은 대형 건축물이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며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파라오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취득한 모든 것을 피라미드 안에 갖고 가기 때문에 피라미드는 당시의 국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왕이 사망하자마자 선왕의 피라미드를 미완성으로 밀봉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선왕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라오들은 파라오로 선정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죽어서 피라미드에 가져갈 것을 준비하였다.
〈피라미드 건설 방법〉
▲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방법.경사로에 교수가 제안한 방법으로 피라미드 상단부까지 단일 경사로를 이용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가장 놀라는 것은 신석기 후반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커다란 피라미드들을 건설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금이나 구리는 발견되었으나 철은 고사하고 청동조차 고왕국 초기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 원시적인 기술만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죠세르의 피라미드를 보면 그 완벽한 시공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건축가인 임호테프(기원전 27세기에 멤피스에서 활동한 이집트 제3왕조의 대신)가 완성시킨 죠세르의 피라미드가 이집트인들에게 어찌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지 임호테프는 파라오가 아니었음에도 후대에 돌을 사용한 건축의 발명자로서 신격화되었을 정도이다.
① 사용된 장비 및 공구
▲ 피라미드 작업공구
이집트인들이 사용한 공구는 디오르트나 도르리트와 같은 단단한 돌덩어리가 주류였다.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끌이나 자귀, 혹은 날카롭게 갈은 칼 등을 이런 돌들로 만들었다. 동과 같은 금속류의 칼이나 가위 등도 사용되었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아마도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 가지 불순물을 사용하여 강도를 높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② 위치 선정
거대한 건축물을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평을 고르는 것인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수준기(水準器, 어떤 평면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가를 조사하는 기구)를 사용했다. 우선 피라미드를 건설할 장소로 비교적 평평한 바위를 고른다. 그 후 측량 기사의 지시 하에 바위에 물길을 파고 물을 부은 다음 막대를 꼽아 물높이를 시해 놓는다. 그리고 이 바위의 표면을 수면의 높이까지 깎아내면 평탄한 대지, 즉 기초 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측량 기사란 줄을 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정확한 방위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여러 가지 제시되었다.
우선 소머스 크라크와 R. 엥글백은 피라미드를 안치할 정확한 방위는 별이 뜨고 지는 것을 측량하면 얻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북쪽 방향을 측정하여 얻은 두 점이 만드는 각을 둘로 나누면 방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의 단점은 수평면 주위가 불규칙할 경우 오차가 많다는 것이다.
I. E. S. 에드워드는 원통형 벽으로 만든 인공 수평면을 이용하면 보다 정확한 방위를 알아낼 수 있다고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의 여건을 감안해 볼 때 곡선과 벽 상부를 완전한 수평면으로 만들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V. 마라질 그리오와 C. 리날디는 해가 뜨고 지는 깃대의 그림자가 만드는 각을 둘로 나누면 된다고 제안하였는데 그것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정확치 않음은 물론 수평면을 정확히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마르텐 이스레가 제안한 태양의 그림자를 측정하는 방법도 원칙적으로는 그리오와 리날디의 제안과 같다. 해가 천정점에 오면 작은 깃대의 그림자는 매우 짧아진다. 그 점을 미리 파악한 후 그림자가 가장 긴 점도 알아낸다. 그 곳에서부터 북쪽으로 땅에 원형 호를 그리면 깃대는 중앙이 된다. 태양이 서쪽으로 지기 시작할 때 그림자의 점이 새로운 호에 도달하는데 이 두 점의 이등분이 남과 북의 방향을 가리켜 준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원시적인 기구로 방위를 알아내는 데는 가장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여건을 볼 때 정말로 이러한 방법이 채택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몇 천 년 전부터 태양, 달, 별, 행성들의 운동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있었음은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이 태양을 관측하여 방위를 알아내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지 현재로서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상술한 방법 중에 1~2가지를 사용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③ 채석장
피라미드에 사용되는 돌들은 대체로 현장에서 가까운 채석장에서 운반했다. 기자 지역은 대부분이 사암(沙岩) 지역으로 대부분의 피라미드는 이들 재료로 건설했다.
그러나 쿠프의 대피라미드의 경우 3곳의 채석장에서 채석된 돌을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했다. 기자 지역에서 나오는 사암은 내부의 심재(心材)로 사용되었다. 외벽용의 매끄러운 석회석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투라에서 채석되었다. 그리고 회랑과 묘실의 내부에 사용된 화강석은 900킬로미터나 떨어진 나일강의 첫 번째 카타락트(급류) 부근에 있는 아스완에서 가져왔다.
④ 운반
▲ 거중방법, 피라미드 상부로 돌을 올리는 방법으로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샤두투의 원리를 사용했다고 믿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채석장에서 돌을 추출할 때에는 쐐기를 밖은 후 뜨거운 물을 부어 돌이 부서지게 한 후 떼어냈다. 나무 쐐기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여 바위가 갈라진다. 석영 가루를 물로 축여 연마제(硏磨劑)로 사용했다.
돌을 운반할 때는 목재로 만든 바구니, 썰매나 특정 모양의 거중기를 제작하여 사용했다. 대형 돌덩어리나 조상을 운반할 경우에는 주로 썰매가 사용되었는데 드제우티에텝의 알바트르로 된 거상을 운반하는 경우 172명이 4줄로 나뉘어 앞에서 끌고 있다. 조상의 무게는 약 60톤으로 추정되며 썰매 앞에서 미끄러지기 쉽도록 물을 뿌리고 있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그러나 쿠프의 대피라미드의 경우 평균 중량이 2.5톤, 큰 것은 70톤이나 나가는 화강석을 아스완에서 운반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나일 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거대한 거룻배를 제작하여 항구까지 운반한 다음 그곳에서 피라미드 현장까지 썰매를 주로 사용하여 운반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선박 건조 능력을 감안 할 경우 이 정도의 돌덩어리를 운반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집트인들의 배 건조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제18왕조의 하셉수트 여왕(기원전 1473~1458년 재위) 시대에 카르낙의 아몬 대신전을 위하여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단 한 번의 항해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오벨리스크 하나의 길이가 30미터에 700톤이므로 이 배는 채석장인 아스완에서 카르낙까지 1천400톤의 돌을 운반하여야 했다. 그 당시에 사용된 배는 2천 톤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는 뜻이다.
⑤ 재료의 선별
대부분의 피라미드는 중앙 핵을 둘러싸는 축대(계단) 형태의 연속적인 구조로 시공한다. 이 벽들은 위로 올라가면서 줄어들고 중앙에서 외부로 쌓는다. 계단을 채우는데 이용되는 돌이 외부 측벽 전면부에 쌓아 지기도 하며 외피용 마감재로서는 주로 질이 좋은 석회석이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외부 피복 부분에 상형 문자와 채색된 그림을 그리거나 돋을새김으로 조각을 했다. 쿠프의 대피라미드도 채색된 그림이 그려졌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제12왕조와 제13왕조에서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매우 간단한 건설 방법이 사용되었다. 현대적인 건물의 기초 부분에서도 종종 사용되는 방식으로 약간 저급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돌로 된 벽(줄기초)들을 먼저 만든 후에 연마되지 않은 돌이나 점토, 굽지 않은 벽돌 등을 채우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매우 빨리 건축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대신 장기간 보존하는데 문제가 있어 현재까지 완전하게 보존된 것은 없다.
⑥ 운반로
원하는 높이까지 거대한 돌을 옮기는 방법은 피라미드 건축가에게 어려운 숙제였을 것이다. 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론을 제시한다.
독일의 루이스 크룬은 이집트에서 지금도 쓰이고 있는 용두레 샤두프(통나무 배 모양으로 길쭉하게 파서 몸통을 만든 뒤 그 가운데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가는 나뭇가지를 끼우고 여기에 끈을 맨 뒤, 긴 작대기 3개의 끝을 모아 원뿔 모양으로 세운 꼭대기에 이 끈을 묶어 몸통을 적당히 들어 올리게 하는 기구)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간단한 방법으로도 커다란 돌을 임의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용두레 샤두프와 같은 방법을 사용할 경우 번거로운 경사로를 구태여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소규모 건축물에서는 적용 가능할 수도 있으나 대형 피라미드인 경우는 불가능하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고대의 기술 수준을 감안할 경우 알려진 유일한 방법은 비탈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로 벽돌을 사용하여 경사로를 미리 만든 후에 썰매로 돌덩어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비탈길의 길이와 기저 부분의 폭은 늘어나지만 비탈길이 주저 않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경사각은 항상 거의 10도 정도로만 유지해 주면 대형 피라미드라 할지라도 피라미드 정상까지 운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경사로를 만드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제시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유력하다. 피라미드 주위를 돌아가면서 경사로를 만드는 이론과 단일 경사로 혹은 4면에서 같은 크기의 경사로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로에 교수는 밑변의 길이가 150미터 이상으로 긴 경우 첫 번째 방법은 불합리하다고 지적하면서 단일 경사로를 주장했다. 주위를 돌아갈 경우 상부와 하부가 같은 폭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경사로로 올려져야 하는 돌들을 손쉽게 다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경사로로 즉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더욱 길고 좁아지는 경사로를 만들면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근래의 대피라미드에 대한 연구 조사에서 로에 교수가 예측한 경사로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또 경사로의 길이도 정확히 합치하였다.
물론 아직도 주위로 돌아가면서 올라가는 경사로를 이용한 피라미드 건설 방법에 대한 가설도 심심치 않게 이야기되고 있다. 결국 피라미드의 규모와 현장 사정에 따라 두 방법 중에서 적절한 방법을 선별하여 채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⑦ 거중 방법
일단 경사로로 필요한 돌을 옮긴 다음 필요한 위치에 대형 돌들을 정확하게 안치시키는 작업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지렛대와 굴림대 그리고 경사면 이외에는 대형 돌들을 쉽게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돌을 옮기는 방법으로 흔들리는 배라고 불리는 나무로 만든 ‘파텐’이라는 시소 개념도 제시되었다. 이 파텐에 돌을 올려놓고 측면으로 쐐기를 넣어 조금씩 밀어내면서 올려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거대한 돌을 계획된 어느 지점까지 올릴 수는 있지만 몇 백만 개나 되는 많은 돌들을 운반하는 기본 방법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크룬은 전술한 물을 푸는 기구 즉 용두레 샤두트 원리를 다소 개량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론은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문제는 이를 증빙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목격하거나 직접 수행한 작업에 대해서 철저하게 기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거중 방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료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거중 방법에 특별한 방식이나 기구를 사용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프랑스의 로에 교수는 거대한 운반용 경사로를 만들어 여러 명의 일꾼들이 돌덩어리를 경사로 끝까지 끌어올린 후 그것을 모르타르로 도장한 바닥으로 미끄러뜨렸다고 주장했다. 이 역시 특별한 방법이 아니므로 이집트인들이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과 부합된다. 거중 방법은 헤로도토스도 적었다. 그는 짧은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기계들을 이용해서 돌들을 끌어 올렸다고 적었다.
‘계단을 만들어 놓은 후 길이가 짧은 목재로 만든 기중 장치로 돌을 우선 첫 번째 계단으로 들어올린다. 돌이 이곳으
로 올라오면 첫 번째 계단에 준비되어 있는 별도의 기중기로 이것을 두 번째 계단으로 끌어올린다. 이것은 계단 수만큼 기중기가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동하기 쉽게 만든 기중기 하나만을 사용해 돌을 내리고는 차례로 위쪽 계단으로 옮겨 갔는지도 모르겠다(두 방법이 모두 전해지고 있으므로, 나도 전승에 따라 두 방법을 모두 기록한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피라미드의 상부가 완성되면 다음으로 그에 접속되는 부분을 완성하여 가는 식으로 하여 최하단의 지면에 접하는 부분을 최후로 완성한다.’
스트뤼브 로에스러는 헤로도토스의 설명에 따라 외피용 돌덩어리를 올릴 수 있는 커다란 기중기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즉각 제기 되었다.
① 길이가 한정된 목재로 이렇게 큰 기중기를 만들기가 어렵다
② 피라미드 각 층 토대의 시공 상태를 추정해 볼 때 기중기를 안정되게 설치하기 어렵다.
③ 100미터 이상 높이에서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 이를 안정하게 붙들어 매기 위해서는 밧줄의 길이가 최소한 150~200미터가 되어야 한다.
결국 헤로도토스의 자료 자체가 틀렸다고 결론을 지었으며 크룬과 로에가 제시한 방법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중 방법이 어떠했던 간에 피라미드가 완성되면 석공들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부터 경사로를 철거시키면서 정교하게 다듬은 석회석으로 외장 공사를 하였다.
⑧ 공사의 마감
피라미드는 장례용 복합건물이다. 그러므로 피라미드가 완성되면 피라미드 주변의 성곽을 두르고 부속 건물을 건설했다. 부속 건물은 일반적으로 나일강에 위치한 ‘계곡의 신전’과 피라미드 앞에 있는 ‘장례신전’으로 구성되는데 두 신전을 기다란 경사로로 연결했다.
파라오가 사망하면 70일간의 공들인 작업으로 미라로 만들어져 생전에 머물던 나일강 동쪽의 왕궁에서 출발하여 항구에 기다리고 있는 배(일명 태양의 배)에 태워진다. 많은 의식을 치른 후 파라오를 태운 배는 자신이 건설한 피라미드 앞의 계곡의 신전에 도착한다. 다시 성대한 의식이 치러지고 파라오의 미라와 부장품은 피라미드로 옮겨진다.
파라오의 미라와 부장품들을 피라미드 내부의 정해진 현실과 부속 공간에 안치시킨 후에 도굴꾼에 대비한 올가미 장치들을 작동시킨다. 쿠프의 대피라미드의 경우 도굴꾼에 대비한 보안 조치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석관의 육중한 돌뚜껑이 제자리에 맞추어지면 돌 빗장이 석관의 움푹 파인 홈통으로 떨어지면서 단단히 잠긴다. 작업 인부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지주를 무너뜨리면 3개의 거대한 돌이 떨어져 내려 쿠프의 현실 전면에 있는 대기실의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다시 대 회랑의 지주들을 제거하여 3개의 커다란 화강암 덮개가 승강 통로로 미끄러져 떨어져 입구가 봉쇄되었다.
입구를 봉쇄한 돌로 된 문은 너무나도 교묘하게 설계되어 일단 닫히면 전연 구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그다드의 칼리프 알 라시드와 알 마문이 대피라미드를 약탈하고자 할 때에도 대피라미드의 입구를 찾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돌더미 속을 마구잡이로 뚫고 들어가야만 했다. 현재 관광객들이 쿠프의 대피라미드 내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입구는 바로 그들이 뚫어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