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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시절에는
꽃구경 떠나는 분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꽉 막힌 도로, 부대끼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천하의 양귀비꽃인들 제대로 눈에 들어올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그런 생각했냐는 듯
여기저기 꽃 잔치 소식 들려오니
꽃구경 하러 어디든지 떠나고 싶습니다.
차가 막히든지 말든지, 꽃 보다 몰려든 사람이 더 많든지 말든지
감상이네 뭐네 하는 그런 고상한 거 말고
그냥 자연 속에서 꽃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아, 그때 그분들도 이런 마음이었구나... 뒤늦은 이해를 합니다.
벚꽃이 피나 했더니 어느새 꽃비가 되어 내립니다.
부드럽고 다정한 그 꽃잎 곁에서
투명한 복사 빛으로 함께 물들고 싶었는데
골고루 쳐다볼 틈 한번 없이
쓸쓸한 흔적만 발아래 채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봄이 오는 것을 반가워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인가 봅니다.
꽃이 피는 것을 두근거려 하기 보다는
꽃이 지는 것을 애끓어 하는 사람,
그래서 봄이 서러운가 봅니다.
똑 부러지는 행선지도 없이 남쪽으로 냅다 달리다 내장산 입구에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오토바이 동우회(폭주족 비스무리...) 무슨 축제가 한창이었습니다. 너무 소란스러워서 절 초입에서 겨우 요기만 하고는 무작정 휑하니 내빼다 도착한 곳은 백양사였습니다.
『백양사로 들어가는 길은 걱실걱실한 갈참나무와 여릿여릿한 단풍나무 우거진 사이로 계곡을 끼고 걸어가는 기분 좋은 흙길이다. 어느 곳보다 수량이 흡족한 계곡물을 왼편으로 끼고 절을 향해 들어가노라면 아담한 이층누각, 쌍계루가 저 앞에 모습을 보인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지만, 뒤편에 높이 치솟은 회백색 바위절벽과, 계곡에 둑을 막아 만든 못물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더불어 쌍계루의 모습은 그대로 오려내어 그림엽서를 만들어도 될 만큼 아름답다.』
는 답사안내 책자의 소개 글처럼 산등성이를 타고 슬금슬금 올라가는 연초록 잎들과 계곡물에 담긴 연둣빛을 바라보며 걷는 흙길은 참으로 부드러웠습니다. 그런데 절 집 입구에는 축대를 다시 쌓는 공사에다 ‘템플 스테이’용 건물을 증축하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적당히 마신 술에 기분 좋게 취한 사람마냥 걷다가 그 모습에 그만 확! 술이 깨는 듯한 느낌!
산사를 내려오는 길에는 갑자기 발 앞에 지나가는 허연 비얌 뱀 때문에 놀라고, 비얌은 내 비명 소리에 놀라고...
연초록을 받쳐들고 선 저 느티나무를 참 장하다
산등성이로 자꾸 연초록을 밀어올린다
옮기는 팔뚝과 또 넘겨받는 팔뚝의 뻣센 힘줄들이 다 보인다
여기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더 가져가겠다는 뜻없다
저수지에도 몇 국자씩 퍼 주는 것 보기 참 좋다
( 연초록의 이삿날, 안도현 )
천왕문을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보리수 한 그루가 서 있고 좌우로 스님들이 공부하는 방과 요사채, 그리고 고루와 종각이 늘어서 있다.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 이규보
모란꽃 이슬 머금어 진주 같은데
신부가 꺾어 들고 창가를 지나다
빙그레 웃으며 낭군에게 묻기를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장난기 가득한 낭군이 답하기를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그 말을 듣고 토라져버린 신부
꽃을 밟아 뭉개며 말하기를
꽃이 저보다 더 예쁘다면
오늘 밤은 꽃을 안고 주무세요
- 담양 소쇄원 -
소쇄원은 중종 때 사람인 양산보(1503~1577)의 별서정원(別墅庭園)입니다. 별서정원이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가 좋은 곳에 정자와 더불어 조성된 정원을 말합니다.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자 스승을 따라 능주로 갔던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55세로 죽을 때까지 고향의 자연에 묻혀 처사(處士)로 지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정자문화가 발달해왔습니다. 주로 따뜻한 남쪽에서 더욱 발달했는데, 정자는 홀로 조용히 쉬거나 마음을 정리해 보는 휴식처이자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었습니다.
소쇄원은 멀리 남쪽으로 무등산을 바라보며 장원봉과 까치봉을 잇는 산줄기를 뒤에 업고 남쪽으로 슬슬 흘러내린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뒤편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폭포와 작은 소를 만들며 정원 가운데를 가로지른 후 대숲으로 빠져나가 창계천으로 합류한다. 계곡물 양쪽 비탈에 축대를 쌓아 꽃계단을 만들고 정자들을 올렸으며, 동쪽과 북쪽, 서쪽 일부에 직선 담을 두르고 남쪽은 틔워놓았다. 들어서면서 바로 보이는, 짚으로 이은 정자가 대봉대이고 왼쪽으로 계곡 건너에 있는 것이 광풍각, 그 뒤로 서너 단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제월당이다.
그러나 자연 자체를 뜰로 삼으면서 꼭 필요한 곳에 인공을 가했던 조선 시대 정원에서는 이러한 인공적 축조물이 아니라 터전 전체가 종합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실상 소쇄원은 찻길을 벗어나며 바로 이어지는 대밭에서부터 시작된다. 햇빛이 얼금얼금 무늬를 만들며 스며드는 대숲은 들어가는 길 좌우로 빽빽이 이어지며 서늘한 바람을 일군다.
매화를 심었다는 매대(梅臺) 위의 담장으로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 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박혀 있다.
매대 앞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제월당이 있고, 아래쪽으로 가면 옛적 선비들이 앉아 즐기던 너럭바위를 지나 광풍각이 있다.
제월당이 주인의 사생활적인 공간이라면 광풍각은 사랑방 격으로, 소쇄원의 풍광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중심 공간이다.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공간을 나누어 주는 얕은 담과 작은 문이 있다. 광풍각에서는 주로 물의 흐름과 폭포, 바위에 부딪는 물방울, 맞은편에 있던 물레방아의 정취와 물소리 등 수경을 즐기도록 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인데, 가운데 한 칸에 방을 들였고 빙 둘러 가며 마루를 깔았다. 불을 넣는 아궁이가 뒤편에 있어서 그곳 마루가 다른 것보다 한 단 높게 달려 있는 점이 색달라 보인다. 물론 방문은 여름에는 모두 들어 열도록 되어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왼쪽에 치우쳐서 한 칸 방이 있고, 나머지 두 칸은 마루로 트여 있으며, 마루 뒷벽에 활짝 열 수 있는 문이 달려 있다. 이 마루에 앉아 내다보면 시선이 광풍각 지붕 너머로 쭉 뻗다가 앞산에 가 닿는다.
양산보는 도연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스승 조광조를 따라서 주돈이를 존경했다. 제월당이니 광풍각이니 하는 이름도 송나라 사람 황정견이 주돈이의 사람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볕이 나며 부는 바람과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 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는 고경명, 김인후, 송순, 정철, 김성원, 기대승, 백광훈, 송시열 등 당대의 이름있는 문인, 선비들아 자주 드나들었다.
소쇄원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살리면서 꼭 필요한 부분에 적절하게 인공을 가하였다고들 말한다. 그 안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더듬다 보면, 함부로 손대는 것을 아꼈을 뿐이지 어디 한 군데도 배려하지 않은 구석은 없음을 느끼게 된다.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란 엉성한 자연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완벽한 배려와 애정 속에 인공을 가함으로써 오는 자연과의 동화일 것이다.
양산보는 자기의 마음이 샅샅이 닿은 이 정원을 매우 아껴서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이며, 하나라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도 말라” 고 유언했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는 이 조선 시대 민간 정원의 백미를 비교적 원형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 글, <답사여행의 길잡이5 전남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인용 ―
섬진강 길 따라 가다 만난 영산홍..., 벚꽃은 흔적도 없고...
청소부 김씨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 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 빗자루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물 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 어느 봄날, 나희덕 )
화엄사 이른 아침의 고즈넉한
영산홍에 취한 그날 밤,
내일은 꼭 숲 속으로 산벚꽃을 만나러 가리라 다짐하며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6시... 무거운 몸뚱이 겨우 일으키고, 졸린 눈 비비며 화엄사에 들렀습니다.
이른 아침의 인적드문 절집의 고즈넉함을 참 좋아합니다. 하여 가능하면 절집은 이른 새벽녘에
댕겨옵니다. 오롯히 나만의 절집... 그 고유의 모습을 간직할 수도 있고, 시간도 절약되고,
또........ 무엇보다도 절집 입장료 안 내도 됩니당~~ ㅎㅎ
촉촉히 봄비 내리는 이른 아침의 절집 분위기... 상상에 맡깁니다.
대찰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이
중창했다고 책에 적혀 있었습니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이다. 보물 제299호로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물인데도, 거대한 규모에 안정된 비례를 갖춘 뛰어난 각황전으로 인해 조금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신세이다.
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대웅전과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영역이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서 있는데, 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음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금당 쌍탑 구조가 아닌 일금당 일탑 구조, 동오층석탑은 남향한 대웅전과 서탑은 동향한 각황전과 각기 짝을 이룬 구조가 아닌가 짐작된다.
화엄사를 화엄의 근본 도량답게 만드는 각황전은 그 뜻만이 아니고 규모로 볼 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고졸하면서 당당산 위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건물을 받들고 있는 석축은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바른층쌓기를 한 장대석위에 장방형의 돌들을 역시 바른층쌓기로 하고 두꺼운 판석을 덮은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안정감이 있다.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원통전 앞 사자탑도 흥미로운 석조물이나, 쓰임새를 알 수가 없다.
각황전 앞에 서 있는 석등의 위풍 역시 각황전의 웅장함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 글, '답사여행의 길잡이5 전남'에서 인용 )
그런데 새벽녘부터 흩뿌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아침이 되자 펑펑 쏟아졌습니다.
오늘은 지리산 자락을 밟기로 했는데...
덕분에 산벚꽃도 못 보고, 세찬 비에 남은 산벚꽃도 다 져불겠지만,
그래도 가뭄 끝이라 오시는 비가 얼마나 반갑던지요.
농부님들에게 천금같은 고마운 단비입니다.
산에 오르지 못한 우리는 일정을 바꿔서 19번 국도를 달리다
하동에서 뜨끈한 재첩국으로 주린 속을 달랜 후 바다로 고 고 생~~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 젖지 않는 마음 - 편지3 , 나희덕 )
※ 지난 달, 짧은 일정으로 번개불에 콩 볶듯이 다녀온 여행입니다.
이미 다른 카페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요즘 글 소재가 쪼들려서요... ^^;;
첫댓글 고시랑님^^..너무 반갑습니다^^....여행 다녀오셧네유^^..글을 읽으면서 저두 함께 한 기분이어유^^...........옆에 호박꽃..들구....고시랑님.꽃이이뻐유......제가 이뻐유?
제 몸에 화르르 꽃물 드는 줄도 모르고.....고시랑님도 그리되셨었는지요?
난 저번에 내소사 갔더니 절앞 길이 정말 기가 막히게 좋더라구요...오래된 절도 참 아름다웠고요...담에 한번 가보셔요~
상록수홈에서 보았는데도 또 보아도 새롭네요...^^ (제 기억력이) 여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맘이 설레는데 혼자 떠나는 여행을 언제나 해보려나요...부럽다요
고시랑님.. 덕분에 꽃구경, 절구경. 조상님들의 따스한 온기까지 두루 만났어요.. 마음이 조용하고 평안해졌어요..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