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유일의 이민사 박물관 최초이민선 갤릭호 사탕수수밭 이민자 노동
부제: 이민 100주년 기념 인천항에 이민사박물관 건립
음력 1902년 동지 달 스무날 잘 가세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전송 나온 제물포항 부두에서 내형제, 자매가 갑판위에서 이별의 눈물을 흘렸던 인천항에, 월미도 길을 따라 동쪽에서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한 바퀴 돌아간 모퉁이 해사고등학교 정문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한국의 최초 이민사박물관이 나타난다.
1900년을 전후해 생계가 어려웠던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하와이 등지로 이주 하려던 시기가 있었다. 때로는 망명 처로, 때로는 생활의 곤궁을 면하기 위해 신천지를 찾아 나선 선택이었다. 어떤 경우든 해외이주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시기에 있었다.
이 시기 미주지역의 이민 가는 이주민들은 주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취업되는 노동이민이었다. 제물포항에서 1902년 12월 22일에 121명이 출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7천2백여명이 이주하게 되였다. 물론 하와이 이민은 공식적이고 자발적인 이민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조직적인 계략에 의해 불법으로 팔려간 이른바 '노예이민'이 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반 많을 것 같지는 않다. 바로 1905년 2월 28일에 출발하여 단 한차례로 끝난 멕시코이민이다.
2010년 2월11일 인천항의 이민사박물관 전시실 김 정희(문화유적 해설 사)씨는 하와이 모형이민선 갤릭 호 안에 전시된 자료 1전시실-4전시실까지 전시품과 이민으로 배정된 농장의 찌는 듯이 뜨거운 열대지역의 사탕수수 밭, 노동자들의 천대받으며 고통스럽게 생활했던 합숙소 모형물, 사진, 영상자료들을 차분하고 성실하게 설명해 갔다.
한국이민사 박물관은 2003년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맞아 우리선조들의 개척적인 삶을 기리고 그 애환의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인천시민들과 해외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 박물관이다.
어렵고 고달 펐던 시절 조국을 뒤로하고 이역만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져미도록 애절하게 느껴지는 곳 인천항 처음으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 102명을 태운 갤릭 호가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지나 33일 만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보건 당국의 정밀검사에서 배 멀미에 시달린 환자 중 4명이 눈병으로 판명되어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고 1903년 1월13일 97명만이 몽골리아 농장에 취업하게 되었다.
- 지속적으로 이어진 이민선
최초 갤릭 호 하와이 이민 그 후 이어서 16척의 선편으로 1,133명이, 1904년에 33척의 선편으로, 3,434명이, 1905년에 16편의 선편으로 2,659명이 떠났다. 한인이민은 그 총수가 7,266명으로 그 중 남자가 6,048명이고 부녀자가 637명, 남녀아이들이 541명이나 되었다.
- 한국이민자들의 신분
한국의 이민자들의 직업과 신분분포는 다양했다 기독교인이 가장 많았고 미국유학을 기대하고 떠난 학생. 선비출신, 구한국 군인 출신 그밖에 농촌에서 머슴살이나 막벌이를 하던 날품팔이 노동자가 있는 반면 백수건달 출신도 있었다.
최초로 떠난 하와이의 이민 생활은 지상낙원에서 돈을 벌고 즐겁게 살수 있다는 선전문구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뜨거운 뙤약볕아래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노동환경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순간순간이 교차된 시간이 연속 되어 낮에는 노동을 밤에는 움막에서 하루하루 어려운 생활로 고국을 그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하루 10시간 고된 노동으로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받는 하루 임금은 남자 67센트 여자와 미성년자들은 50센트를 받았다. 모진 학대를 받으면서도 일한 대가가 너무 적어 일부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잊으려고 술과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기도 했다
이민자들은 열악한 노동의 고통 속에서도 계약기간이 끝나면 임금이 높은 본토로 가겠다는 기대 속에 인내하며 지내는 동안 대한제국의 나라운명은 끝났다. 1905년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하와이 이민도 시작한지 3년 만에 끝이 났다.
- 일제 속임수 불법적인 멕시코 노예 이민
그 이후 멕시코이민은 일제의 조직적인 계략에 의해 불법으로 팔려간 이른바 '노예이민'이다. 바로 1905년 2월 28일에 출발해 단 한차례로 끝난 멕시코이민은 일본인 이민회사‘대륙식민합자회사’의 속임수에 강제로 모집된 1천33명이 이주한 노동이민이다. 이들은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75일 만에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시에 24개의 어저귀 농장에 강제적으로 팔려갔다
- 한국이민사박물관
2003년 미주이민 100주년을 맞아 미주 한인들과 인천시민 등이 뜻을 모아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월미공원 안에‘한국의 첫 이민사박물관 건립했다. 규모는 전체면적 4,127㎡로 지하 1층~지상 2층에 상설전시실 4곳으로 각종 유물 4,400여 점이 수집돼 있다.
- 해외이민사 100년의 역사를40 여 분간 관람
제1전시실은 1902년 첫 이민의 출발지였던 개항 당시의 인천 제물포항 모습의 사진 전시물과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전개과정을 소개하고 이민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국내정세와 이민자들을 싣고 떠났던 갤릭호 모형을 통해 이민자들의 여정을 생생하게 체험해 볼 수가 있다.
제2전시실은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의 애환과 개척자로서의 발자취를 사진자료 및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사탕수수농장, 한인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생활, 한인학교를 연출해 놓은 이민자들의 교실, 당시에 사용했던 교과서도 전시되어 있다.
제3전시실은 멕시코·쿠바 등 중남미로 떠난 이민자들과 이민사회의 또 다른 삶과 조국광복을 위해 몸 바쳤던 선열들의 활약상,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생활비 절약으로 모은 독립자금을 고국으로 보냈다. 그들의 구국운동을 소개하고 있으며 하와이로 건너간 7415명의 생활모습과 미국전역에 뿌리내린 개척자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담고 있다.
제4전시실은 전 세계 각국으로 진출하여 국위선양 하고 있는 700만 해외동포의 근황과 염원을 그밖에 해외 한인 이민사를 재조명, 한인들의 정체성확립 각종기념사업과 축제, 문화 활동에 대한 요즘 모습을 전시하고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 파리이민사 박물관과 인천 이민사 박물관 차이
한국 이민사 박물관은 한국을 떠나 각지로 떠난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라면, 파리 이민 박물관은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프랑스에 이민 온 발자취를 역으로 찾는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재불 한인들에게는 이 두 박물관이 갖고 있는 의미가 직, 간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것도 사실이다.

공식적이고 자발적이었던 하와이이민에 비해 멕시코이민은 일제에 의한 강제이민이었고 일제의 한반도 강점책의 일환으로 진행됐던 점을 감안하면 그 실체를 재조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한국이민사 박물관은 '노예이민'으로 온갖 수모와 역경을 감내하며 조국해방을 위해 어떤 고통과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던 700만 재외교포들의 삶과 애환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우리는 한국인이란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후손들에 귀감이 되는 교육의 현장으로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茂松 김 정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