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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류 최초의 추수감사절(김요셉)//나균용 목사님
창세기 4장 3절-7절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모든 것이 풍족하고 죄가 없을 때에는 감사의 제사라는 게 사실상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사람이 감사한 것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죄가 없었을 때에는 인간들은 감사에 대해서도 깊은 그 감격과 이런 느낌을 가지고 살지를 못하는데 사람이 타락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은 아는 사람이 되었다 하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중요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게 될 때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았다면 죄가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때에는 감사를 드릴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죄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더욱 깊은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열매를 많이 맺어야 우리는 감사를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쓴 것에 대한 열매가 나타나야지 하는 거예요.
그런데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하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누구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가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은 대관절 누구인가 하는 거를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누가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가인이 왜 실패했는가. 첫째는 가인은 어리석은 자였다 하는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는 자는 누굴까 우리 성경에서는 누구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까? 우리 구약성경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말씀이 시편 14편 1절 53편 1절에 똑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어리석은 자는 하고 이 제목이 그거예요. 어리석은 자는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 없다고 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예요.
또 성경에선 누가 감사하지 못한다고 하는 거니 죽은 자는 감사할 줄 모른다 그랬어요. 시편 6편 5절 말씀에 죽은 자는 사망 중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자가 없고요. 음부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자가 없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천국할 백성들의 권입니다. 천국 갈 사람들은 감사할 줄 알고 사는 사람,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이고 이렇게 둘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역경을 거쳐도 짐승들은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짐승 얘기를 많이 했어요. 마태복음 7장 6절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네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말씀하셨어요. 개돼지는 거룩한 것이 뭔지를 모릅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 이 사람들은 어릴 짐승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제사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기를 원합니까? 받아주시지 않기를 원합니까? 우리가 이걸 먼저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 우리 예배를 꼭 받아주세요. 이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벨의 제사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히브리서 11장 말씀하면 그렇게 설명하고 있죠. 4절에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다, 어떻게 나은 제사 되겠어요. 믿음으로 믿음장이기 때문에 믿음으로라는 말을 앞에 내세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제사를 드려야 된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 있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 말씀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왜 안 받으셨느냐 가인에게 말씀을 하세요. <네가 분하여 하면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하면 어찌 되느냐> 하고 물으시고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악을 행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부지런히 선을 행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무엇이 선인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그래서 하루하루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 복을 받는 거라는 거죠.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그의 예물에 대하여 하나님이 증언하신다, 말씀했어요. 예물이라는 게 대관절 뭐냐, 아벨의 예물이 어떠했다는 얘기냐 하는 거죠. 가인의 예물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시는 것이었고 아벨의 예물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이었다 하는 거예요. 아벨은 무엇으로 제사를 드렸습니까?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그게 내게 무슨 뜻이냐? 양의 첫 새끼라고 하는 거죠.
첫 새끼를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가 왜 이렇게 귀하게 보시는가 하나님의 첫 새끼 하나님의 맏아들 첫 아들 이 아들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기 때문에 그러시는 거고, 이렇게 너무나 귀하게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물로 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이 거룩한 제물이 되게 만드시므로 우리에게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시면서 <내가 나의 맏아들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너희도 너희의 맏새끼를 나에게 바치지 않겠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을 그래서 처음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귀한 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데 여기 그가 드린 어린 양에게는 여러 가지 귀한 의미가 들어있죠. 우리가 이것을 잘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예물은 피가 없는 제사가 아니고 피가 있는 제사였다. 아벨이 무슨 큰 죄를 기억했습니까? 그렇지만 아벨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본래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피가 있는 제사를 드렸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죄를 짓고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또한 피가 있는 제사를 드리지도 못한 것입니다. 또 아벨은 즉 피와 기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성령을 상징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성령으로 제사를 드렸다 하는 것이고 기름을 태우는 냄새를 하나님은 향기롭게 받으셨다, 그래서 향기가 있는 예물이다, 기뻐 받으시면서 너희는 기름을 먹지 말라 말씀하시죠. 기름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지//나균용 목사님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이 우리의 왕으로 오셨다 우리의 목자로 오셨다 할 때에 그러면 항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도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감사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하는 걸 볼 때에 우리는 그것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 오셨을 때에 초림하셨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병도 고쳐주고 죽은 자도 살려내주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먹여주기도 하고, 이렇게 큰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셨지만 결국 인간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악인들의 거짓말에 속고 악인들이 선동질 하는 것에 속아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짓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인간은 똑같아요. 바른 것을 가르쳐줘도 바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바른 말을 가르쳐주면 오히려 싫다고 배척하고 거짓말을 가르쳐주면 그걸 좋다고 따라갑니다.
가장 첫째로 선한 목자가 하는 일은 양들을 먹이는 것이고 둘째로 인도하는 것이고, 셋째로 양들을 아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는 일이 중요한데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우리 육신의 연약함도 아시고, 육신이 생각하는 것도 아시고, 걸어가는 방향도 아시고, 잘못된 길을 가지 아니하도록 우리를 채찍질하시고 돌이키게도 하시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도록 인도해 주시잖아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분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이 나를 아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깊이 아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만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8절 이하에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내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 세상에 많은 지식이 있지만 그 지식 가운데 최고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우리 속에 시작되어야 하는데 이 지식의 시작 출발은 어디에 있느냐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지식의 근본이다. 이렇게 근본이라는 말은 영어로 비기닝 시작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해서 바른 지식이 시작되는 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으면 인간의 지식이라고 하는 건 다 거짓된 것입니다. 바른 지식이 되지 못합니다. 출발점부터 잘못됐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참된 지식이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아신다, 그래서 나에 안고 일어섬을 아시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내가 가는 길을 아시고 모든 걸 아세요.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진 잘못된 길을 갈 때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죠. 그래서 바른 길을 가도록 역사해 주신다 하는 것입니다.
또 선한 목자가 하는 일은 양을 위해서 인도하시는 것이죠. 양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보호하는데 어디서 보호하시느냐? 추위와 더위, 폭풍, 지진, 이 세상의 모든 재난 이런 속에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칼로스라고 하는 말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성경에 보기에도 아름답다~라고 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 어떤 말이 있는가 아니오.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들인 여인의 이야기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 여자가 나에게 좋은 일을 행하였다> 그때는 선한 일을 행하였다 라고 번역도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했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가 나에게 착한 일을 행했다. 우리 말로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이라고 한 것이 칼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할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 모습이 우리들 개인에게 유익하고 좋기만 할 뿐 아니라 인도하시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옛날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인도하셨는데 그때 인도하신 그 모습도 우리는 똑같이 합성할 수가 있죠.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니까 하나님은 선한 목자이시니까 광야 40년 생활도 하나님은 선한 길로 인도하셨어요. 칼로스 목자였습니다. 그러면 칼로스가 어떻게 역사했느냐,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랬어요.
또 우리가 생각하기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지 마시고 그냥 곧장 지름길을 내셔서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가나안 땅 족속들 뭐 싸울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그냥 다 멸망시키시고 다 쫓아내 주셔가지고 그 땅을 차지하고 이렇게 살아가게 하셨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우리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님 잘 섬기고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살기 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려주시되 평안한 복을 주시고 어려움 같은 건 하나도 없게 하시고, 어려움이 생겨도 하나님이 다 막아주시고 그 가운데서 다 해결해 주시고 좋게만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안 그러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라> 말씀하셨는데 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까? 십자가 같은 거 지지 말고 나를 따라오면 너희에게는 범사가 형통하고 날마다 좋은 일만 일어나고 소원하는 게 다 그냥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아요. 예수님 잘 믿는 집안의 자녀들은 다 학교 공부해서 할 때 1등만 하고 좋은 대학 원하는 데 들어가고 제일 좋은 직장 들어가고 돈도 잘 벌고 건강하고 그리고 좋은 가정도 이루게 하시고 좋은 자녀들 낳게 하시고 다 형통하게만 하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 잘 믿는 사람에게도 저 불신자에게 임하는 그런 재난 같은 것이 다 임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어려운 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이런 가운데서 우리가 새롭게 뭔가를 깨달아야 되잖아요. 광야에서 왜 40년 동안 고생고생하면서 이렇게 살아가게 하셨고 결국에는 그 기성 세대들,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이었던 그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멸망당하고 말았고 약속의 땅에는 그때에 20세 이하였던 사람들 또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 하나하나를 우리 인간들이 볼 때에는 하나님이 인도를 잘못하시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을 주시는가 그리고 왜 자꾸 이렇게 심판을 하시고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가 이런 의문이 들고 불만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바로 선한 목자가 역사하시는 방법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말씀했는데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은 이 모든 일이 변한단 말이에요.
우리가 더욱 힘써서 예수 그리스도 선한 목자이신 이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길에서 만나면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찾아오신다면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모습, 목마른 자의 모습, 병든 자의 모습, 또는 나그네의 모습, 또는 이렇게 감옥에 갇힌 자의 모습, 외로운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데 알아보는 사람은 사실 많지가 않아요. 그래가지고 환영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는 그 사람들은 환영하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는 그 사람들이 실은 예수님이실 수 있다 하는 이런 깨달음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잘 섬김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사람, 고난 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잘 돌보고 잘 돕고 이런 사람이 될 때에 정말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게 되시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요 하고 칭찬해 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런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써 예수를 알자. 힘써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자. 예수님은 나를 자세히 아시는데 나는 예수님을 모르고 산다고 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 예수님이 누구세요? 이 성경에 나오잖아요. 이 성경이 다 예수님 얘기하고 있는 거다.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이에요.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 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꾸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모르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돼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네가 나를 아는구나 이렇게 말씀해 주실 거예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교회 다니긴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진짜로 아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우리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을 잘 섬기는 복된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11. 히스기야의 감사기도
이사야 38장 17절-20절
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19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20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추수감사절입니다. 거의 모든 교회들이 이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 주일로 이렇게 지키는데 미국은 원래 넷째 주 목요일이니까 다음 주일 목요일날이 되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오늘 이 복된 날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면서 추수에 대한 감사가 기본이지만 히스기야는 무슨 추수를 했느냐 자기의 생명을 추수했어요. 죽을 병에 걸려 가지고 다 죽어가는 사람,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와 가지고 너는 이제 곧 죽을 테니 집안을 정리해라 이렇게 선고를 하고 떠났는데 그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가 얼마나 통곡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내가 평생 이렇게 선하게 살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살아왔던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 나는 조금 더 살고 싶습니다. 이 젊은 나이에 벌써 죽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사야가 가는 길에 그에게 말씀이 임하시고 그래서 <너는 다시 히스기야에게 돌아가서 너의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그러므로 너의 생명을 15년 동안 더 연장해 주겠다> 이렇게 약속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사야가 다시 돌아와서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당신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잘 섬기는 일을 하시오> 하고 말씀을 전달하고 떠났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히스기야가 중병에서부터 살아나는 어마어마한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1년 동안 땀 흘려 농사 지어 가지고 추수해서 거두어 들인 것보다 생명을 15년 연장받았다고 하는 건 사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입니까. 그래서 만약에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걸 택하겠어요? 추수 많이 해가지고 창고를 크게 짓고 가득가득 곡식을 쌓아놓는 그 감사를 택하겠습니까? 내가 죽을 병 걸렸다가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15년 동안 수명 연장을 받은 그런 거를 택하겠습니까?
히스기야는 15년 동안 수명 연장받는 이 놀라운 약속을 받고도 마음의 기쁨과 감격이 막 넘쳐가지고 하나님 앞에 오늘 읽은 이 말씀과 같이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15년만 연장받는 게 아니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사람들인데, 이 약속을 받은 사람들인데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이런 감격이 없고 이런 기쁨이 없다면 정말 우리의 삶은 삭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참 좋은 것은 죽어도 천국 간다는 소망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금년에도 우리 주변에 많은 목사님들이 세상을 떠나시고 이렇게 했지만, 그래도 죽어도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다. 이 꿈이 이 믿음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우리가 한참 더 살 것이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감격이 사실 솟아나지 않지만 히스기야 왕처럼 내가 지금 죽을 병 걸려서 몇 개월 못 산다, 집안을 다 정리해야 된다, 그리고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너의 생명을 15년 동안 더 연장해 주겠다 이렇게 약속을 하신다면은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기쁨과 감격을 가지는 추수감사절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논밭에서의 추수를 많이 해냈고 그래서 부자가 되어서 이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의 생명을 수확할 수 있는 이런 복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를 해야 되는데 오늘 제목이 히스기야의 감사예요. 히스기야는 어떻게 감사를 했는가? 히스기야가 무엇을 감사했는가? 농사 많이 지어서 부자된 것에 감사하는 게 아니고 자기의 잃어버릴 뻔한 생명을 다시 찾아내가지고, 이것이 부활의 은총입니다. 부활의 은총을 받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음부가 저 스올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만이 감사할 수 있느냐? 산 자만이 감사할 수 있어요. 우리가 죽어서 저 음부에 내려가면 스올에 내려가면 거기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했던 일이 한 번 있어요. 그게 언제입니까?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가셨을 때 그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아버지께 감사하옴은> 왜 감사하다고 그랬죠? <항상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들어주시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기도를 하면 그 기도하시는 거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는 얘기잖아요. 내가 무엇을 구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아버지께서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 있으면 무엇을 구하든지 다 다 이루어주신다> 이 어마어마한 약속을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거는 첫째,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기도 안 하니까 그러죠. 둘째는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히스기야 왕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17절에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나에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그래서 내 영혼을 사랑하셔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 던지셨다> 히스기야 왕의 감사기도는 큰 고통을 체험하고, 사망을 체험한 후에 그 속에서 건짐받은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놀라운 것을 말씀해 주셨어요. 유대 땅에 유대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을 내가 아나니 이것은 재앙이 아니고 너희에게 장래의 소망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평안이다. 이것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다> 개역성경에는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이다> 그렇게 말했는데 우리 개정판에서는 <너희에게 미래를 주고 또 희망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에게 감사하게 하시느냐? 사망 가운데서는 감사할 수 없어요. 음부에 내려가서는 감사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육신 가지고 사는, 요 동안만 감사합니다.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자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오직 산 자들만이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죽은 부자들의 감사를 드리는, 그래서 많이 바쳐가지고 많이 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그런 사람들 되지 말고 먼저 내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과 맞닿아서 하나님의 생명을 끌어들여서 내 생명이 살아나는 사람, 그래서 천국의 소망이 확실해지는 사람, 이 세상에서도 아직 내가 생명이 있는 것은 첫째, 감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도 생명을 남겨주신 것이고. 둘째, 하나님께서 무언가 큰 일을 시키시려고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고. 그래서 나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나균용 목사님
요11:25-27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것을<네가 믿느냐>그러고 물었더니 마르다가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주여 나는 주님이 부활이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대답하지 않고 27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이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하고 같이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뭐라고 그랬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이 신앙 고백은 이제 두 가지예요. 첫째 예수님은 그리스도라 하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는 이 두 가지입니다.
오늘은 첫째 시간으로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만 잠깐 하도록 이렇게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다라고 말씀의 중요한 뜻을 찾을 때 첫째 예수님은 실제로 죽은 자를 세 번이나 살려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간음하고 현장에 잡혀온 여자를 살려내주신 후에 에수님이 선포하시기를 <나는 세상에 빛이다> 그리고 바로 9장에 가서는 날때부터 소경인 청년의 눈을 뜨게해 주심으로 <나는 빛이다>하신 말씀을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여주셨다고 하는 거죠.
부활의 사람이란 뭐냐?
첫째, 근심 걱정, 두려움, 낙심하는 것,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 따라서 광야의 백성들처럼 범사에 불평 불만하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지금 추수 감사의 계절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욱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산 사람이라 그 말이죠. 첫째 증거는 죽었던 새 사람을 살려내시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이시라고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이셨다는 거죠.
회당장, 야이로의 딸, 아직 살아있을 때 예수님께 찾아와서 가서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의 집을 향해서 가시는데 그 사이에 죽어 버렸어요. 예수님이 그의 집에 도착 가졌더니 사람들이 다 그 아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어요. 예수님은 그 소녀를 살려내셨습니다.
둘째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 이 아이는 상여를 메고 지금 무덤에 가는 중에 예수님께서 길에서 만나셨어요. 그래서 이 아이를 “청년아 일어나라” 해가지고 살려내셨다.
셋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 이미 죽어서 나흘이나 되었어요. 장사 지내가지고 그의 육체는 지금 썩어 무드러지고 있는데 무덤 속에 갇혀 있는데 가서 무덤 앞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나 하고 불러내시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가지고 나오더라. 근데 이 이야기 속에서 공통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살려내셨을까, 누구를 살려내셨어요? 다 청년들이라는 거예요.
이 말씀의 중요성 둘째로는 예수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도 세 번을 하셨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도 깨닫지도 못했고,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언제냐? 마태복음 16장 베드로의 신앙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인데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어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시고 칭찬하시고 <너는 이제부터 시몬이 아니라 너희의 이름은 베드로다.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인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칭찬을 이렇게 해 주신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이제 예루살렘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처음으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칭찬도 잔뜩 듣고, 기분이 좋아 한껏 뽐내고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그런 일이 절대로 주님께는 일어나지 아니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나를 위하는 자고 네가 나를 세워주는 자고 네가 나를 보호해주는 자가 아니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라는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다.
둘째는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 올라가서 거기 이야기도 해야 되죠. 산상에서 세 성인이 만나셨죠. 모세와 엘리야가 오고 예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고 하고 들어봤더니 무슨 이야기예요?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또 하나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변화산에 내려와서 보니까 아래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어떤 아버지가 간질병 들린 자기 아들 녀석 하나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예수님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시고 제자들 9명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내 아들이 이만저만 해서 이렇게 병을 고치러 왔습니다~ 하고 얘기했더니 제자들이 9명이 다 달려들어가지고서 열심히 사탄아 물러가라고 열심히 기도했겠죠. 그런데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무섭게 책망하시잖아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요.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 되겠느냐> 그러고 나서 귀신을 꾸짖으니까 귀신이 쫓겨나가고 이 청년이 온전해졌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께서 이 부활을 두 번째로 말씀하신 거예요.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고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긴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죠.
셋째로 한 번 더 말씀하신 것은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제 들어가시게 되는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을 또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행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의 빛이다> 말씀을 하시면 구체적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빛이라고 증명해 주셨고, <나는 부활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으면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부활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실제로 입증해 주신 것이고 그 일을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미리미리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더라. 첫째 증거는 죽은 사람을 살려낸 것, 둘째 증거는 세 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부활하실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신 것, 세 번째 증거는 번화산 위에 올라갔을 때에 모세와 엘리아 같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이런 두 분이 나타나셔서 그 중요한 자리에서 예수님과 같이 회담의 주제가 바로 부활이었다. 그래서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네 종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시험을 했어요.
마태복음 22장 29절 보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거로 오해하였구나> 하고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부활할 때에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럼 이 세상하고 같은 세상이 아니야 저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야 부활하면은 우리는 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거 하나도 없다> 그리고 예를 들어서 뭘 말씀하시느냐? <너희가 성경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다섯째로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우리 기독교의 두 기둥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의 핵심적인 기둥이고 우리 교회도 기둥이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두 번째 기둥은 그리스도의 부활,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십자가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능력이 있도다 주의 보혈> 그 피가 우리를 용서하게 해 주시고 그 피를 통해서 우리가 세 사람이 되고 그 피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이 보혈이 얼마나 중요한 거예요. 또 하나는 성령이에요. 이것이 기독교의 두 기둥인데 부활이라고 하는 이 말은 이렇게 중요한 기둥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십자가 보혈이 없는 설교, 사도 바울이 말한 그대로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장 1절 말씀부터 설명이 나가고, 또 [갈3:1-2]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그렇지 않으면 율법을 지켜서 그렇게 된 것이냐>
이것을 깊이 생각해서 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일에 우리가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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