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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9:23~31, 11:25~26. 추석 명절과 바울의 고향 다소는? 2026. 9. 27.
오늘 본문은 바울이 그의 고향 다소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고향으로 돌아가는 때가 보통 언제입니까? 일본은 황금의 5일 연휴와 나고야 아시안 게임으로 들떠있었지만 태풍25호가 동경과 치바를 휩쓸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잠시라도 쉼을 얻고 Healing을 위하여 고향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지난 목요일부터 추석명절을 고향에서 보냈습니다. 감사해서 찾았습니다. 성공인생이 되어서 보란 듯이 고향을 찾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자기가 원해서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낙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가 아니고 강제로, 어찌 할 수 없고 떠 밀려서,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어린 시절, 성장하면서 정들었던 그의 출생지인 다소로 낙향을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지요?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삶이 권태롭고 지루해서,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들과 흐르는 세월에 할 일이 분명하지 않아 의미 없이 지난 시간도 있습니다. 명절도 싫고 고향도 추억으로만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Healing이 무엇입니까? Healing은 치유와 회복이라는 뜻의 Heal을 동명사화 해서 오늘도 주어진 삶 속에서 그러니까 세상의 이런저런 거센 파고에 상처를 입고 상처를 받은 영혼과 몸을 회복하고 치료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Healing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상황과 내일에 대한 신음으로 마음의 상처와 육체의 상처가 많습니다. 신앙의 삶과 믿음의 길에서 받은 상처들이 있고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나 깊습니다. 그래서 Healing과 회복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런 시간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여기서 해답이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고향 다소는 어떤 곳입니까?
1. 다소는 바울의 고향이었고 출생지 이었습니다. 고향과 고국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하지만 안식처와 고향의 의미로 다소에 귀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찾은 다소 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세계 전도여행을 세 차례나 다녔고, 성경을 13권이나 쓴 사도지만 그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부터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잡아 오려던 다메섹에서 바울은 오히려 각 회당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렇게 그의 인생이 바뀐 사울을 동족이며 함께해야 할 공동체인 유대교인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동료였지만 이제는 배신자가 된 사울을 죽이려고 다메섹을 샅샅이 수색을 했습니다. 결국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알고 바울의 제자들이 피신을 시켰는데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아라비아에서 3년 간 침묵의 시간을 갖고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아라비아 3년은 Healing의 장소이었고 시간이었으며 감사이었습니다. 거기서 Healing을 받고 다시 세워짐으로 복음의 사역자로 등장을 하게 되지만 주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또 다른 고난과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난과 훈련의 아라비아 은둔의 생활, 3년에서 스스로 일어나 담대하게 주님의 제자들과 동등하게 세워졌습니다. 물론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이 사울이 예수를 만나 회심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긴가민가해서 만나기를 꺼리는데 그때 바로 바나바가 사울의 신원을 보증해 줍니다. 바나바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12사도와 거의 대등한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바나바의 보증을 믿었습니다. 해서 사울이 제자들과 교제를 하게 됐고, 거기서도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방팔방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도 열정적인 유대교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의 사울은 배반의 대가를 치루어야 할 배신자이었습니다. 그 열정적인 유대인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믿음의 형제들이 사울을 데리고 항구도시 가이사랴로 이동을 시키고, 배를 태워 고향 다소로 보냅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입니다. 갈라디아 1장을 보면 오늘의 정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사울이 베드로를 만나고 다소로 내려갈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보름 동안 머물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고, 그 감격을 본격적으로 전하기 시작한지 불과 보름 만에 사울은 본의 아니게 출생지인 다소로 낙향을 했습니다. 여러분, 극적으로 변한 사람에게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사울 역시 얼마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이 앞에 계셨습니다. 별 말이 필요 없지요? 너무나 엄청난 증거가 있으니까 그냥 나사로만 봐도 그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도 그렇습니다. 당신들 저를 알지요? 가말리엘 문하생의 바리세인 중에 바리세인이었고 내가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거 알지요? 그런데 스데반이 죽을 때에 그 증인이 바로 나인데 그런 죄인을 예수님이 직접 만나 주셨습니다. 그 분은 정말로 살아계시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유대인 동포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시작한지 겨우 보름 만에 꿈을 접고 감사가 아닌, 좌절의 심정으로 낙향을 했으니까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다메섹에서 아라비아 3년 세월에 이어 두 번째로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다소로 가는 사울의 낙향은 잠시 피해가는 일시적 낙향이 아닙니다. 이후에 사울은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 교회로 가서 사역을 하고, 거기서 1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갈2:1을 보면, 그 때가 낙향한 지 14년 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에서 1년의 사역기간을 빼면 사울이 다소에 머물렀던 기간은 1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사울이 13년 동안 고향 다소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앞날이 창창한 청년 사울이 고향에서 13년 동안이나 칩거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상상이 됩니다. 감사해서가 아니고 도중하차해야 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한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때와 시간이 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끔찍한 때와 시간이지만 우리가 맞이할 시간 중엔 그런 시간도 있습니다. 지금도 고향이 아닌 타향에서 이런 시간을 보내시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사울 역시 유대교의 큰 지도자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고향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의 제자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엘리트가 되고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내일이 보장된 청년이었는데 겨우 3년 만에 낙향을 했습니다. 그 것도 자의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사역을 제지당하면서 낙향을 했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억울할까요?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사울은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와는 완전 절연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새 피조물이 되었지만 지난 3년 동안 특별히 한 일도 없습니다. 기대와는 관계없이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다 무산됐습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금도 딱히 할 일도 없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기다리는 일도 없습니다. 하는 일 없이 매일 시간만 소일하니 영락없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세월이 1년 2년도 아니고 13년의 긴 세월입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몹시 그리웠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처음에는 고향에 나타난 사울을 보고, 무슨 급한 용무가 있나? 잠시 쉬러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주일, 두 주일이 지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고향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의 삶에 일이 생긴 것을 알았지요? 그는 더 이상 자기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차마 고향 사람이라 문전박대를 할 수는 없지만 고향 사람 모두가 사울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유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허구한 날 집만 지키고 있는 사울을 보고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웃고 경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바울이 겪었을 모멸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현재와 내일에 관한 한 사울은 절대 무능한 사람이 아니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살아야 되는 기간이 13년입니다. 13년의 긴 세월입니다.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처럼 살아야 되는 청년에게 있어서 그 13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Tunnel의 시간입니다. 매일 태양이 뜨는 새 날을 맞는 것이 죽음 같은 고통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터널에서 의연하게 지냈습니다. 어떻게요? 왜 사울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왜 굳이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었을까요? 다소가 그의 고향이었고 출생지이었고 Healing의 장소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향은 결코 작은 삶의 자리가 아니고 꼭 필요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버팀목으로 Healing을 우한 준비된 장소입니다. Healing의 장소이며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괴롭고 힘들고 지치십니까? 따가운 시선을 받으셔야만 합니까? 그럼에도 다른 곳을 생각하시기가 싫습니까? 지금의 자리가 감사가 없지만 주님께서 어루만지시는 Healing과 믿음을 회복하고 치료받는 토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다소는 주님께서 친히 보내시고 거주하게 하신 고향이었습니다. 회복과 다시 세워지는 감사의 장소입니다. 사도행전 22장에 세월이 한참 지난 이후에 사울은 이때의 일을 회상하지요?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게 하신 이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주님이셨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침체되어 있고 아무 복음도 전할 수 없었던 사울을 고향으로 보내신 이가 주님이셨다면, 고향에서 13년을 거주하고 또 고향을 떠나게 하실 분도 주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주님의 다른 부르심이 있기 전까지는 다소를 지키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사울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런 은둔의 시간을 주신 것일까요? 사울뿐 아니라 믿음의 선진들도 이런 시간이 다 있었습니다. 구약에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이 있고 신약성경에 요한과 베드로와 오늘 사울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사람들에게 은둔의 시간이 없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 아니 오히려 없었으면 훨씬 더 유익했을 것 같은 세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렇게 한 것입니까? 회복과 동시에 다시 세워져 일어나야 하는 장소이고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쳤습니다. 40년이나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을 쳤으니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그 처량했던 40년 동안 그가 깨달은 것은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나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로구나! 오직 나의 시대는 주님의 손 안에 있구나!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이구나! 이것을 깨달았고 감사했습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요셉 역시 13 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하지요? 종으로 팔려가서 총리가 되기까지 구덩이와 물품창고와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예언을 해서 다시 왕궁으로 들어간 사람이 약속을 했는데도 잊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선하게 살고 삶을 위하여 별의별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도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감사했고 감사했습니다. 그 한 가지를 터득하는데 1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다윗 역시 기름부음을 받고 골리앗도 죽여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무려 10년 이상을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마지막 아둘람 동굴로 피신하는데 600명의 빚을 진 사람들과 환란을 당한 사람들과 원통한 사람들과 한에 맺힌 사람들을 붙여주었습니다. 설상가상이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다윗이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나를 인정하고 이끌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믿고 오직 이끄어 주시고 길을 내실 분은 하나님뿐 이신 것을 터득합니다. 이것을 알았을 때에 사울 왕의 추적이 멈추게 됩니다. 사도 요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했던 사도들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요한은 촌구석에서 늙은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를 자기에게 부탁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90세가 넘은 마리아를 모셨습니다.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 시간이 요한을 70세 노인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에게 무엇을 원하셨을까요? 요한아! 세상에 대단해 보이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이 소중할 때가 있는 거야!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거야!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의 일생이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지요? 위대한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 계시록을 남겼습니다. 사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과 사울이 깨닫고 얻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소명이든지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복과 다시 세움의 것들을 깊이 묵상하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속성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인간은 얼마나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지, 그러나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경이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를 알고 그 껍데기를 벗겨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울에게 다소에서의 칩거는 바로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회복과 다시 세움을 입고 감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에 히브리서 6장에 위대한 말을 남기는데, 한번 비침을 받고, 한번 은사를 맛보고, 한번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히6;14에서는 반드시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다시 세워 주시고 감사케 하신다고 열정을 토합니다. 여러분, 사실 사울이면서 바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의 고향 다소는 로마 제국의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이었습니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대단한 호황을 누렸던 곳입니다.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들이 발달했고, 한 때 동방의 지배자였던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겨울을 같이 날 만큼 기후도 좋았습니다. 당시의 다소에는 유명한 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소 출신이란 것을 대단한 긍지로 여겼습니다. 사울 역시 자기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이었고, 당시 세계의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고, 히브리어와 라틴어까지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세계인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정통했습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빌4;13,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이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다소에서의 그 긴긴 칩거이었습니다. 고향에서 회복과 다시 세움을 입는 장소이며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후;11:23~27에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는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습니다. 타고 가던 배가 세 번이나 파선해서 일주일이나 표류하기도 했고, 강을 건너다가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강도와 동족들과 이방인, 그리고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 등등 온갖 위험을 달고 다녔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얼굴에는 시무룩하거나 기죽은 표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용기가 서려있습니다. 왜요? 그런 능력이 어디서 나왔나요? 바울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바울은 다소에서 다시 세움을 입었습니다. 어떠한 고난도 위험도 죽음도 바울을 끌어 내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전부를 몸에 지닌 흔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알았고, 산상수훈과 기적과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복음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을 위하여 인간의 온갖 심정을 공유했습니다. 때로는 멸시를 당하고, 좌절도 하고, 조그만 것에 기쁨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고상해 보인 세상학문과 세상 모습을 버리고 보다 평범하고 보다 수더분한 사람이 되었고, 영혼의 더러운 찌끼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전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히브리어로 웨감 콜 하아담 쉐이오칼 웨사타 웨라아 토브(축복) 베콜 아말로 마타트 엘로힘. 여기에 나오는 토브는 하나님의 사랑, 축복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복을 수고함으로 얻습니다. 더하여 그 수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과 복을 받고 누리는 것이 선물입니다. 그러면 토브로 말씀하신 사랑과 복(福)의 핵심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모든 때와 일상을 감사로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가 있습니다. 전3:1-11은 때가있음을 밝힙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토브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더하여 때가 있다고 한다면 최고의 선물은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도 있지만 삶을 통하여 즐거움과 선을 행하며 먹고 마시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12~13절). 그러니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때를 따라 토브로 주시는 사랑과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고향으로 낙향하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자신의 몫을 즐기는 토브이고 사랑이고 복입니다. 나에게 주신 몫의 삶과 지경과 소명이 기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렇게 하십니까? 여러분의 내일과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새로이 세워지고 일어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다소에서 어떻게 세워집니까? 여러분, 신앙인에게는 항상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삶의 모든 것에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작고 소소한 것 일지라도, 침묵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대로 되어 질 때에 건강하고 build up이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build up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장기적인 안목과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사람을 준비하고 보내십니다. 준비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나바입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 구브로 출신입니다. 당시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곳으로,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며, 기름과 벌꿀의 유명산지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농장을 팔아서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는데, 바나바의 이 결단과 헌신으로 초대교회가 큰 위로를 얻었고, 가난하고 힘들게 홀로 사는 여인과 고아들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도 않았던 바울을 격려하고 보증을 통해서 제자들과 함께 있게 했습니다. 바울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고향, 다소로 낙향한 바울을 찾아가서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고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비로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런데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는데 찾으러 뜻은 샅샅이 찾는 hunt up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역할을 모두 내려놓고 적합한 인물을 hunt up했습니다. 그래서 다소의 사울을 안디옥으로 모시고 와서 1년 동안 함께 안디옥의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과 예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대교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때에 그들을 비로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괴롭고 힘들고 따가운 시선을 받으셔야만 합니까? 다른 곳을 생각하시기가 그렇습니까? 반드시 여러분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예비 된 가장 적합한 사람을 준비하시고 보내셔서 현재의 문제에서 더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주님의 장기적인계획과 작정인데, 그 작정과 계획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의 build up이고, 안디옥 교회의 build up이고, 이방인을 위한 build up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함이고 바울을 로마까지 보내야 하는 주님의 계획이고 작정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얼마나 장기적인 계획이고 작정입니까? 여러분, 바울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다메섹에서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택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여곡절 속에서 다소로 귀향을 했습니다. 13년의 세월을 견디어 내야만 했습니다. 행22:3에 바울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 같이 나 또한 하나님께 열정적인 사람이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왜요?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고.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난 일에 메이지 않았고, 지나간 시간과 공간들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다소의 삶이 그렇습니다. 이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과 공간과 사역의 의미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허락하신 인생의 텃밭에 비와 바람이 불고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어두움과 고난이 전개 될지라도 믿음 안에서 감사함으로 견디며 이겨내야 합니다. 평범한 방법과 굴욕적인 방법과 불명예로 다소에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이는 때가 되어야 하고, 안디옥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고,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주목이 바뀌고, build up이 되고, 로마로 가는 훈련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루하시고 이제 나는 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환경과 여건과 상황에서도 평안 가운데 먼저는 든든히 서가는 여러분이 되시고 또한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과 작정을 통해서 결국에는 위대한 일을 감당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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