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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이 1:4-6
▣ 문안과 교훈-요한이서와 삼서-
▣ 요한이서
만년의 요한은 지교회에 속한 택하심을 입은 한 여인에게 이 간단한 개인적인 편지를 썼다. 어떤 연구자들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를 한 개인을 지칭함으로 생각하나, 다른 이들은 교회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2-3절은 소개하는 구절로, 이 여인이 진리(하나님의 말씀)를 실천하므로 널리 알려져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묘사한다. 진리와 사랑이 함께 하는 것임을 유의하자.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훈과 거짓말이 거하는 곳에서는 사귐을 가질 수가 없다. 요한은 두 가지 주된 문제를 다룬다.
1. 진리를 실천함(요이 4-6절)
행한다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에 주목하자. 진리는 우리가 연구하거나 믿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다. 진리를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진리를 나타내야만 한다. 요한은 이 여인의 자녀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 확실함을 알고 기뻐하였다. 이것은 요한일서 1장에서 논의했던 “빛 가운데서 행함“과 동등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어떤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순종이다.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사랑할 때 이들은 부모에게 순종한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지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사랑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때가 너무도 많다. 성도들이 성경의 어떤 구절들에 대하여 해석을 달리한다 할지라도 서로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일치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거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도 있을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과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분리될 수가 없다."
요이 1:7-11
2. 진리를 수호함(요이 7-11절)
속이는 자들(7절)-여기서 요한은 그의 첫 서신에서 논의했던 거짓 선생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거짓 선생들을 가려내는 시금석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한다면 그는 거짓되며 적그리스도로부터 난 자이다. 마지막 때에 한 큰 죄의 사람(적그리스도)이 나타날 것이지만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이다(요일 4:3).
소멸하는 자들(8절)-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들을 소멸하는 일이 없도록 그리스도인에게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의 행보에서 우회하며, 이미 얻은 신령한 모든 기초를 상실하는 최적한 방법은 거짓 교훈과 제휴하는 것이다. 사단은 파괴자이며, 성도들에게서 그들의 축복을 빼앗아 가려고 거짓말하는 자이다.
떠나가는 자들(9절)-여기서 “지내쳐“란 말은 “벗어나다“는 뜻이다. 즉, 이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도 내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진보적이고 현대적“이어서 성경으로부터 떠나는 것과 하나님이 쓰신 것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그릇된 종류의 진보이다! 그리스도인이 그의 행실에서 진보해 가는 동안 성경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것들을 확증하는 교리 안에 “거해야“ 한다.
요한은 거짓 선생들을 가정에 영접하지도 말며, 혹은 인사조차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거짓 선생들에게 주는 도움은 그 어떤 것이라도 그들의 악한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집에 들여 보내기 앞서, 또는 어떤 기부금을 내기 전에 그 사람이 무엇을 믿는지 알아야만 한다. 만일 어떤 의문이 생기거든 목회자와 상의하라."
요삼 1:1-8
▣ 요한삼서
요한삼서는 문제들을 안고 있는 지교회의 한 회원에게 씌어졌는데, 이 편지는 세 사람을 다룬다.
1. 가이오-잘 되어가는 그리스도인(요삼 1-8절)
우리에게 가이오와 같은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요한은 그를 지칭하면서 “사랑하는“이란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1, 2, 5, 11절). 2절은 그의 건강이 좋지 않거나, 또는 그가 병에서 막 회복된 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강건한 신령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외적인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적인 사람은 잘되어 갔었다!
가이오는 다른 사람들이 즐겨 거론했던 그리스도인이었다. 형제들(아마도 여행하는 전도자들이나 선교사들)이 가이오를 만나 그의 가정에서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가이오가 진리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는 것과, 그에게 찾아왔던 다른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을 돕는 데 신실히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요한의 시대에는 호텔이나 여관들과 같은 숙박 시설이 없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당시 여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은 음식과 숙박에 있어서 성도들의 도움을 받았다. 가이오는 형제들을 대접하고서 그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때 “저희를 전송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런 그리스도인이었다.
가이오는 왜 형제들을 도왔는가? 그것은 그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또한 한 가지 다른 이유는 그들의 사역에, 더 나아가서는 진리에 참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직접 복음 전파자가 될 수는 없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전파하는 데 도울 수는 있다!"
요삼 1:1-10
2. 디오드레베-교만한 그리스도인(요삼 9-10절)
이 사람은 회중들 내에 없어야만 할 부류의 사람이다! 그는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했고, 모든 면에서 으뜸이 되는 것, 곧 첫째가 되기를 좋아했다. 골로새서 1장 18절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으뜸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만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세례(침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다(요 3:30).
이 사람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 한 가지로는 요한의 지도력을 인정하기를거절한 것이었다. 어떤 교인이 지위나 특권을 원할 때는 은밀하든 공개적이든 목회자를 비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보통 “중상 운동“으로 출발하여 목회자의 성품과 사역을 훼손시키려 한다. 구약에 나오는 압살롬처럼 “현재의 지도력은 유능하지 않으나(삼하 15:1-6) 자기는 일들을 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히브리서 13장 7, 17절은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짓는다.
디오드레베는 요한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10절에 나오는 “폄론하다“는 뜻은 “거짓으로 고소하다“는 뜻이며,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 나오는 “망령된 폄론“과 유사한 말이다. 현장의 증거가 없이는 목회자에 대한 고발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을 교인들이 기억한다면 입에 오르내리는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딤전 5:19). 그는 또한 형제들을 돕기를 거절하였으며, 교회를 지배하고 교인들 중의 얼마를 내쫓기까지 하였다! 신약 성경은 어떤 권징의 경우에는 교인들을 내보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디오드레베는 그들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지도, 회중의 말을 듣지도 않고 사람들을 내보냈다!(벧전 5:3 참조)
교회를 파괴하는 교인들은 이러한 자들이다. 그는 권세와 권위를 열망한 나머지, 진리를 짓밟고 성경을 멸시하며, 성령을 근심케 하고 양떼를 흩어지게 한다."
요삼 1:11-12
3. 데메드리오-상냥한 그리스도인(요삼 11-12절)
디오드레베에서 데메드리오로 전환하는 것은 참으로 신선한 감동을 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본받기를(흉내내기) 원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형제들로부터, 그리고 말씀 자체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당신은 그의 생활을 성경으로 진단해 볼 수 있는데, 그의 생활은 시험에 통과했다.
오늘날 교회는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들과, 성경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필요로 한다. 우리는 디오드레베가 없이도 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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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1:3-4
▣ 믿음을 위한 싸움-유다서-
저자는 마가복음 6장 3절에서 유다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형제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야고보(그리스도의 또다른 형제)에게 나타나셨다(고전 15:7). 따라서 야고보와 유다가 거의 동시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오순절 전에 기도회에 참여한 것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1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가 그리스도와의 지상적 관계를 자랑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자.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비록 이 서신에서 유다가 심판에 대하여 말하지만,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1, 24절). 우리는 구원받은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다(21절).
1. 서신의 목적(유 3-4절)
유다는 “구원“에 관한 멧세지를 쓰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주제를 그만두고, 당시 교회 내에 있는 거짓 선생된 신자들을 경고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아마도 유다서에서 베드로후서 2장과 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될 것이다. 유다서가 나중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베드로가 이러한 거짓 선생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벧후 2:1/벧후 3:3), 유다는 이들이 지금 행동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는 베드로가 이미 그들의 유죄함을 알린 바 있다고 상기시킨다. 그는 이 사람들을 베드로가 묘사한 이들과 동류의 사람으로 말하고 있다. 그들은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요 거짓 교훈을 들여온 자들이며, 죄 중에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란 말은 그들이 사람들에게 “좋아하는대로 살 수 있도록 은혜의 문이 열렸다“고 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6:1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위험에 처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유다는 명한다. 성경이 “믿음의 도“라고 한 영감된 진리의 본체를 옹호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성채를 지키는 군사가 되어야 한다."
유 1:5-16
2. 논쟁(유 5-16절)
이 부분에서의 주제는 이러한 거짓 선생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요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일곱 가지 구약의 예를 인용한다.
이스라엘(5절)-하나님은 이들을 애굽에서, 그리고 그 재앙에서 구원해 내셨지만, 후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셔야 했다. 유다는 이 사람들이 믿는 자들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19절은 이들에게는 성령이 없다고 언급한다. 단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 민족 가운데“ 많은 유대인이 있었으나 자기들의 죄로 인해 멸망했다.
타락한 천사들(6절/ 벧후 2:4)-유다는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사람의 딸들과 어울린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것은 사단이 인류를 부패케 하여 약속된 후손의 탄생을 저해하려는 것이었다(창 3:15). 하나님께 대항한 이 천사들은 심판을 받아 지옥의 특정한 곳인 흑암에 갇히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7절)-“같은 모양으로“라는 말은 이 도시들의 죄가 6절에 나오는 천사들의 죄, 곧 간음과 유사하다는 것을 제시한다. 베드로후서 2장 6-8절은 이 문제를 다룬다. 유다는 이 도시들의 심판이 지옥의 한 예라고 말한다!
미가엘과 모세(8-10절)-미가엘 천사장은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천사이다. 여기 나오는 관련 구절은 모세의 장례식에 관한 것인 듯하다(신 34:6). 하나님은 환란의 때에 모세를 유대인들에 대한 증인의 한 사람으로 세우실 것이다. 그런데도 사단은 그 시체를 찾으려고 애썼다.
유다의 요점은 천사장이 사단을 꾸짖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런 일을 하려면 그가 가진 권위보다 더한 권위가 필요하므로,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맡긴 것이다. 이 거짓 선생들은 교만하여 권위를 경멸하고 그들의 죄와 무지로 인하여 거룩한 일들을 비방한다.
가인(11절)-이 사건은 창세기 4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가인은 피의 제물이 없이 제단에 나타난다. 가인의 길은 인간이 만든 종교의 길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대속의 피를 거절한다(요일 3:11-12/히 11:4 참조).
발람(11절/ 벧후 2:15-16)-발람의 실수는 개인의 이득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이끄는 데 연루되었다. 발람은 진리를 알고 있었으나, 왕으로부터 돈을 얻어 내려고 고의적으로 이스라엘을 죄 가운데로 이끌었다(민 22-25 장/ 특히 민 25:1-9 참조).고라(11절/ 민 16 장)-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모세의 신적 권위를 거부하고서 스스로 권위있는 체하였는데, 이러한 거짓 선생들도 스스로 높이며 하나님의 종들을 거절하였다. 그들도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처럼 심판을 받을 것이다.
12-13절에서 유다는 생생한 단어들로 이 사람들을 묘사한다. 정확한 묘사를 위해서 현대어 번역판을 읽어 보라. 물이 없는 구름, 열매 없는 나무, 유리함으로 여행자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별들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는 역사의 초기에 저들의 운명을 예언했던 에녹을 인용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끝맺고 있다. 이 구절들에 있는 “경건치 않은“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에 유의하자."
유 1:17-25
3. 권면(유 17-25절)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첫째로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벧후 3장 참조). 그리스도는 기롱하는 자들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그들이 여기에 와 있다. 배교의 증대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또하나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되 주 안에서 스스로 세워야 한다. 이들은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성령이 인도하심으로, 롬 8:26-27)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함으로써 그러한 일을 행하게 된다. 기도와 성경,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 이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거짓 선생들을 따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다르게 하라“는 것이 그의 권면이다. 다시 말해서, 각 경우를 분리해서 다루라는 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동정을 나타내야 할 필요가 있고 다른 이들은 불에서 구원받아 간신히 건짐받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도움을 받기에는 너무도 멀리 가버린 사람들도 있다.
유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할 때에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도록 스스로 살펴야 한다고 경고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기의 의복을 더럽히지 않아야 했는데, 신약의 그리스도인(역시 제사장임)도 세상에서 오염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유다는 놀라운 축복 기도로 끝을 맺고 있는데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구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끝 날까지 그들을 지키신다. 1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는 자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시는 일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24절은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다“고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이 이보다 더한 안전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말한다. 유다는 그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데 그것은 영광 중에 계신 아버지 앞에 그의 교회를 서게 하는 특권이다! 신랑은 어느날 흠이 없는 자기의 신부를 영광중에 서게 할 것이며, 그 날은 참으로 놀라운 날이 될 것이다!
이 서신을 읽으면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지켜야 하며 거짓 선생들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지만 또한 그가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깨어 있어 지키기를 바라신다(딤후 1:13-14/딤전 6:20). 무서운 심판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사단의 거짓말을 가르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구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은 다만 불쌍히 여길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주께서 오실때까지 신실한 자들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