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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레이[Man Ray, 1890.8.27~1976.11.28]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년 7월 28일 ~ 1968년 10월 2일)
존 케이지 (John Milton Cage Jr., 1912년 9월 5일 - 1992년 8월 12일)
구보타 시케코 (久保田成子) 1937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7.18]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1560~1609]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6.28~1640.5.30]
뭉크 [Edvard Munch, 1863.12.12~1944.1.23]
인류가 種을 유지해가며 나름대로의 규범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발전'할수 있었던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적인 '진화'의 과정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왠지 부족한 감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의 흐름을 거쳐가는 동안 우리는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변종' 또는 천재나 괴짜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러한 특이한 몽상가들에 의해 인류의 삶은 새로운 경지를 접할수 있는 문을 열수있게 됩니다.
이러한 몽상가들에 의한 특이한 경험이 우리에게 혼란을 주기도하고 새로운 장의 시작을 열어주기도 하는것은
인정하기 싫기도 하지만 기대도 되는 일입니다.
이글에서는 몇명의 몽상가들을(미술분야의) 만나보기로 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그들의 광기와 엉뚱함과 남다른 특별한 능력이 어떤 시간의 문을 여는지 한번 지켜보도록 하죠.
夢想家1
'로즈 세라비 Rrose Seavy'
위의 사진은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저명한 사진작가이자 다다이스트이며
초현실주의 작가이기도한 맨 레이[Man Ray, 1890.8.27~1976.11.28] 의 작품입니다.
전시명 20세기 사진의 거장전 파리 아방가르드, 빛의 세기를 열다
기 간 2009년 9월 10일~2009년 10월 29일
장 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이번 전시에 맨레이의 작품도 걸리는군요..)
여장을 한 남자의 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제법 우수에 젖은듯한 촉촉한 눈빛과 이쁜척 구부린
손가락의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반지도 끼었군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사진의 주인공은 누구 일까요?
사진의 여장 남자는 프랑스 노르망디지방 출신이며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습니다.
1902년부터 그림을 시작했는데 1910년까지는 후기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렸으며
그후 입체주의적 작품을 하기 시작합니다. 입체주의"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의 당시 그림들이
입체주의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정적인 큐비즘적 표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동적인 작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1912년에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라는 작품입니다.
당시 그는 이러한 큐비즘적 감성의 동적인 작품을 여러점 그리기도 했지만
1915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평면작업은 거의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삶 후반부에서 체스는 그의 인생에서 아주 커다란 부분이자 예술에 반하는
또다른 비예술적 예술행위 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작업을 하지않고 체스를 두는 예술가.
1955년 미국시민권을 얻지만 그는 1968년 프랑스 뇌이에서 사망합니다.
수많은 다다이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선두적이었고 뼈속까지 반항적이었던 그는 바로 마르셀 뒤샹입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년 7월 28일 ~ 1968년 10월 2일)
그는 실재로 프로체스 선수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구미의 여러 큰 대회에 출전하기도 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에서 그는 작업을 접고
체스판안에 자신의 일상을 집중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술과의 거리감은 그에게 또다른 예술활동이었습니다.
좌측에 앉아 체스를 두고있는 이가 뒤샹이고 오른편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이는 존 케이지 입니다.
(John Milton Cage Jr., 1912년 9월 5일 - 1992년 8월 12일) 소리의 우연성과 퍼포먼스로 유명한
전위음악가이죠. 지금그들은 체스판 퍼포먼스를 진행중입니다. 테이블 주위에 어지럽게 깔려져있는
전선들이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게임이면서 퍼포먼스인 두사람의 체스경기는 게임진행 과정에서 독특한 음향이 발생하며
하나의 창조적 행위를 하는데 의미를 부여 합니다.
이 퍼포먼스의 진행과정은 구보타 시케코(백남준의 아내-남편의 그늘에 가리워져 항상 손해를 보는듯한
또 하나의 위대한 비디오 아티스트)의 비디오 작품으로 탄생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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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Fountain)' 1917
뒤샹이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아무런 제약없이 작품을 전시할수있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소변기의
제목은 '바보얼간이'였습니다.(R. Mutt)
출품자도 본인의 이름이 아닌 소변기를 제작한 '리차드 머트'로 명명하였습니다.
'나는 현대미술이라는 얼굴에다 변기를 집어던졌다.'
1917년 그의 이 레디메이드(기성제품 ready mades) 작품은 그의 표현대로 기존의 미학과 예술계에
변기를 집어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변기 도발 사건은 이후 현대미술의 확장의 시발점이자 혼란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미술사학자들과 비평가들이 뒤샹의 <샘>(1917)이 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임에 동의합니다.
오늘날의 난해하고 복잡하고 혐오스럽기도한 대부분의 예술품은 뒤샹의 샘에서 솟아난 것이라고도 할수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다다이즘에 투철한 작가들과 여러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은 전위적 작가들이
예술의 근간을 뒤 흔들고 엎어버리려 했지만 뒤샹만큼 철저히 기존의 예술개념을 부정하고 비틀고 조롱했던
예술가는 당시에는 찿아보기 힘들었습니다.
1917년 전시회 후, Duchamp은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친구인 Alfred Steiglitz에게 샘을 사진 찍도록 했습니다. 그 이후, 오리지널 샘은 분실되어 버렸고 그때 찍은 사진이 리플리카를 위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샘은 1951, 1953, 1963년에 걸쳐 모두 15개의 인정받은 리플리카가 만들어졌고 1964년에 다시 12개가 만들어졌습니다.
夢想家2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7.18]
카라바조는 서양미술사에서 뒤늦게 발굴된 작가라고 할수 있습니다.
바로크 미술을 열었던 장본인중에 하나라고도 할수 있는 그였지만 바로크란 어원 자체에서 보여지는
느낌처럼 카라바조 또한 오앤세월동안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도 할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조명을 받기 시작하자 그의 작업뿐만 아니라 그의 고단하고 범상치 않은 일대기에 더욱 많은
관심을 받으며 그러한 개인사가 그림의 위대한 가치를 가리는 후광효과를 발휘하는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드라마틱한 그의 삶에대한 풍부한 이야기들은 실재와 가십과 추측으로 점점 부풀려져 이제는 기정 사실로
굳어진듯 하지만 - 살인, 불법무기 소지, 사기, 도박, 해외도피, 현상범, 암살, 신성모독, 파문, 동성애까지 -
그만큼 질곡많은 삶을 살았던 그에게 39세의 짧은 생애는 미술사적으로도 안타까울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처녀의 죽음(1601-1606)
붉은 휘장이 어지럽게 드리워진 아래 한 여인의 시체가 침상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비통해하는 한여인은 의자에 앉은채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할정도입니다.
여인의 시신 주변을 한무리의 남자들이 둘러싸고 서있읍니다. 발은 이미 경직이 이루어진 모습이고
배는 가스가 찬듯 불룩한 모습 입니다. 주위의 그럴듯한 늙은 남자들의 모습만 빼면 평범한 한 여인의
사망을 표현한 그림으로밖에는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죽음을 그린 장면입니다.
이미 매너리즘 시대때 부터 즐겨 사용 되어오던 빛과 그림자의 사용은 더욱 강하게 사용되고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마치 정확하게 세팅된 무대조명을 보는듯한 이러한 극적인 빛과 그림자 효과의 강조는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바로 다음세대인 루벤스부터 렘브란트에 이르기까지 로코코시대와 고전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이 이러한 극적이고 과도한 명암법에 의존하게 됨을 알수 있습니다.
안니발레 카라치가 그린 성모승천이라는 작품입니다. 제작연도는 1600-1601년
카라바조와 함께 바로크예술을 열었던 위대한 화가중 한명인 카라치의 그림입니다.
카라바조의 성처녀의 죽음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던 것인데 같은 마리아의 죽음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표현이 얼마나 다른지 알수 있습니다.
사실 카라치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재현하는것에
많은것을 투자했기때문에 이렇게 보기좋은 작품이 나올수 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이 두작가의 현실 감각입니다.
역시 같은 제목의 루벤스의 작품입니다. 1626년 작품입니다.
카라바조나 카라치보다 한세대 늦은 시기의 작가라고 할수 있는 루벤스의 성모승천 작품입니다.
물론 루벤스 다운 흘러내리는듯 화려한 붓터치로 장식된 이 그림또한 아름답고 숭고하며 사랑스럽습니다.
Edvard Munch - Madonna (1894-1895).
카라바조의 그림보다 약 300년 이후에 그려진 뭉크의 마돈나란 직품입니다.
당시 뭉크가 이 그림을 발표할때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미 교회는 300년전만큼 엄격하지 못했고
사람들도 이미 일부 받아들일수 있을 정도로 대범해지고 비 종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시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작품이 교회에 걸리자 많은 신도들이 분개했고 거칠게 항의 했으며 결국 그의 그림은 벽에 더이상
걸려있을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그림에대해 많은 사람이 분개했던 첫번째 이유는 아마도 '전혀' 성스럽지 못하다는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카라치나 루벤스 또는 이전의; 수많은 대가들이 완성했던 성모의 그림들은 보고있는 순간 감동이 일어나고
눈이 감기며 자연스럽게 기도가 드려지는 그런류의 숭고미를 최대화한 작품이었습니다.(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하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은 마치 사체 검안실과 같은 살벌한 풍경과 성모로 표현된 여인의 전혀 거룩하지 않은
표정, 붉은 색의 의상(보통 성모는 순결의 상징인 흰색으로 표현 합니다) 불룩한 배, 흑변하는 피부등의 너무나
사실적인 표현으로 인해 보는이들을 분개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그림을 계속 그렸고 그의 보이는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배짱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로 교회와 주문자가 원하는 성스럽고 천사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꽃을 뿌리는 비현실적 그림은
그릴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주관과 현실적 상상력을 더해 더욱 잔혹하고 더욱 현실적인
고통을 표현하여 그의 화폭에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이그림에서 마리아의 머리위에 보이는 희미한 후광(링)만이 그녀가 마리아임을 설명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곰브리치의 설명에 의하면 카라바조는 추(醜)를 두려워 하지 않고 본것 그대로의 진실을 원했다는 겁니다.
고전적인 규범과 이상적 미를 존중하지 않았고 인습을 타파하고 관중들에게 충격을 주고자한 최초의 화가들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카라바조였던겁니다. 사실 카라바조 이후에서 부터 거의 대부분의 근대미술운동은
카라바조가 지향했던 이러한 지향성으로 인해 불평과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뭉크나 위에서 업급했던 뒤샹, 또는 피카소 백남준 등도
몇백년전의 선배 카라바조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할수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많은 이들이 분개했던 두번째 이유는 마리아의 모델이었던 죽은 여인이 실재로 강에 빠져
자살한 창녀 또는 임신한 미혼모였다는 사실 때문 이었습니다.
가장 순결하고 숭고해야할 마리아의 모델을 자살한 여인으로 사용한 카라바조의 정신세계는 지금도 분석이
필요한듯 하지만 그의 사실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작품관을 살펴보면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시기 유럽은 로마카톨릭의 구교와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교간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던 신앙적으로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잘못 해석하면 카라바조의 이 그림을 신교의 구교에대한 공격용으로 이해할수도 있겠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오히려 철저히 돈독한 신앙심에 근거한 현실적인 카라바조의 종교관이 내재되었다고
보는것이 맞습니다.
비록 한때 카톨릭교회에서 파문까지 당할정도로 화해하지 못하는 성격의 카라바조였지만 그의 뛰어난 재주와
신앙심은 결국 교황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살인죄에 대한 사면까지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사면명령이 내려진것도 알니 못한채 도피생활을 하던중 39세의 젊은 나이에 자객의 칼에
찔려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물론 독실한 신자는 그러면 안되지만 신앙심이 깊지 못하거나 아니면 비종교인의 경우 예수의 부활에
관련돤 부분에서는 조금 의심을 갖을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성 도마의 의심이란 카라바조의 작품입니다.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 복음서에 의심이 많은 그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다가
예수의 상처를 만져본 후에 믿었다는 성서의 이야기를 그린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손으로 도마의 손을잡고
자신의 창에 찔린 부위로 이끌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사실 성서에 이러한 내용은 없습니다)
불경스럽고 반 성서적인 내용이지만 카라바조는 자기 나름의 성서의 해석으로 오히려 예수가 부활했다는
성서상의 사실을 실제 있었던 일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자기의 돈독한 신앙심을 표출해 내고 있습니다.
도마의 놀라는(약간 공포감이 보이는)감정은 잔뜩 주름진 이마의 주름이 충분히 표현하고 있고 그옆의 두 제자들도
이러한 광경을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성화에는 제자들이 멋진 의상과 외모로 마치 고대 귀족과 같은 모양새를 하며 나타내고 있지만
카라바조의 성화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남루한 옷차림 그대로 입니다. 진정 그가 생각하는 목수, 어부등의
고단한 생활을 하던 노동자와 하층계급 출신의 정말 있었을법한 제자들을 그렸던 것입니다.
그의 작업이 위대했다라고 말할수 있는것은 바로 이러한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기에 있습니다.
이전의 이상화되고 비현실적인 숭고미를 간단히 떨쳐버릴수 있었던 용기는 카라바조라는 인물의
특수성이 아니면 설명되기 힘듭니다.
또한 빛과 그림자의 적절한 사용과 배치는 오랜기간동안 후대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소재와 내용의 자유로운 사용을 화가가 할수 있었다는것은 당시의 화가에게는 또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려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였습니다.
비록 자유로운 창작작업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시기까지는 도래 하지 못했지만 완전 주문 수주방식의 작품제작
시스템에서 서서히 사전제작과 사후 판매가 이루어지던 시점도 바로 이즈음 입니다.
예술가들은 아주 천천히 주문자에게서 자유로워지며 진정한 창작의 길로 들어 서고 있었지만 이는 자유룰 담보로한
예술가들의 궁핍한 생활과 더욱 치열한 마케팅 그리고 화가의 분야별 전문화를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주셨네요
재미있겠읽었습니다. 간간히 일하다 쉴때 읽는데 시간가는줄 모르겠어요
가히 한편의 논문입니다.`^^
잘 읽고 배우고 느끼고....감사합니다. 도마의 의심 - 정경(Canon)에 없는 "도마복음서" 와 사해사본이 화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