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부. 초기 기독교의 성장
1. 들어가기
초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 당시 로마의 초대 교회들은 문자 그대로 가정 교회였다. 신자들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주택 제일 큰 방에서 모였고, 참석 인원은 15명에서 20명을 크게 넘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3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인의 수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은 향상되었다. 여전히 가정 안에서 머물렀지만 건물은 공동체 생활을 위해 확장되었으며,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수를 반영하기도 했다. 오리겐은 몇몇 사람들이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듣지 않고 “주님의 집 한쪽 구석에 숨어서 세속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불평했다.
2. 초기 기독교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램지 맥멀렌에 의하면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5-8% 정도의 비율이다. 더 높이 보는 학자도 있다. 초기 기독교에는 박해가 있기도 하고, 없을 수도 있었지만 언제라도 박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젠가는 죽음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거나 높은 지위를 갖는 사람으로서 출세를 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당시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향한 직접적인 설교가 거의 없었다. 새로운 신도를 모집하는 일에 조직화된 적이 없었고 외부와의 관계에서는 어떤 엄격한 규칙도 발견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생활에는 분명한 체계가 있었다. 복음 전도에 대한 목회적 권고도 없었다. 키프리안의 「에드-에게- 큐리넘」이라는 책을 보면 형제들끼리 서로 도와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내용은 있지만 전체 교훈 가운데 불신자들에게 복음 전도를 촉구하는 내용은 단 한 구절도 없었다.(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고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주장)
3. 복음 전도 없는 예배
1세기 중반 이후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60년대 중반 네로의 박해 이후 초기 기독교는 외부인들을 제외시켜야 할 필요를 느낀 것 같다. 플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회신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은밀한 범죄 뿐 아니라 그 ‘이름’만으로도 처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비기독교인이 새 신자가 되려면 신앙 입문에 필요한 문답에 기꺼이 응해야 했다.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예배 중의 말씀을 듣는 것에만 참석할 수 있었고, 친교 의식인 기도와 성만찬의 정점을 이루는 평화의 입맞춤이 진행되기 전에 예배 장소를 반드시 떠나야 했다.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에 있었던 신자들은 예배 참석에 합당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 지키는 사람을 배치했다. 집사의 주된 책무 중 하나가 교회의 경비원이었다. 교회의 예배가 외부인들에게 매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배는 외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외부인들은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제 2 부. 초기 기독교의 예배와 복음 전도의 상관관계
4. 예배 : 잠긴 동산 가꾸기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새롭게 합류한 이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구별된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초기 기독교가 성장했던 이유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자유와 올바른 삶의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연합된 삶과 새로운 행동의 실천은 외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왜 저렇게 사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했다. 초기 교회는 ‘잠긴 동산’이었다.(아 4장 12절) ‘닫혀 있기’에 외부인들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반면, ‘동산’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꽃피고 번성하는 생명이 있는 곳이다. 성령께서 활발히 움직이는 장소였다.
5. 예수를 닮은 특징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변두리를 향해 돌아서는 것”이었다. ‘외국인 거주자’였다. 모든 곳이 집이었지만 어느 곳도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때문에 전 세계적이고 구원사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 삶은 보편적이고 전우주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압박이 가해질 때면 ‘나는 그리스도인이다’고 확언함으로 자신들의 주된 정체성을 표현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데 자신들을 필요한 도구로 사용한다고 믿었다. 오리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려 그분을 따랐다고 고백했다. 저스틴은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정직의 길에서 멀어졌던 사람조차도 경외심을 느끼며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6. 새로운 세상에 대해 배우기
초기 순교자들이 원형 극장에서 굶주린 곰에게 잡아먹히거나 불에 달군 철 의자 위에서 타 죽어갈 때 보여준 인내는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리옹 대학살(177년. 프랑스 리옹에서 벌어진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학살. 한숨도 잠을 재우지 않거나 24시간 내내 고문을 하였다. 채찍질, 달군 쇠로 몸 찌르기, 피부 벗기기 등. 맹수, 호형, 성녀 블란디나) 당시 ‘도대체 저 종교는 무슨 유익이 있기에 목숨과도 바꾼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구경꾼도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연립주택에 함께 거주하는 자신들의 이웃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대부분의 회심자들은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면서도 가끔씩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7.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속박으로부터 해방’은 ‘온 땅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주후 150년경 로마의 신앙 문답교사였던 저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명료하게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으로 설득 받은 후에’ 마귀와의 관계를 끊었다고 하고, 성적 유희에 탐닉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금욕의 기쁨을 누리고, 주술에 중독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한다.
자유를 경험한 사람의 좋은 예는 키프리안이다. 그는 카르타고 출신의 귀족이었고 웅변가로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청년시절에 명성을 누렸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키프리안은 세실리어스라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진다. 그 그리스도인 장로는 키프리안의 친구이자 영혼의 동료가 되었고, 키프리안이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확실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세실리어스가 키프리안의 친구가 되어 줌으로 키프리안은 신앙을 갖고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교도들은 구별된 방식으로 자유롭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끌리면서 ‘폭력과 횡포에서 돌아섰다.’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훨씬 더 ‘정서적 결속’을 통해 복음 전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결코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리스도인의 교회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친구관계였다.
8. 사회를 포용하는 공동체
그리스도인이 속한 모든 공동체는 자유의 공동체였다. 교회 안에서 여성이 더 많았고, 거기에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무식한’ 사람들도 많았다. 교회가 고대 사회에서는 유래 없을 정도로 사회 구성원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공동 기금을 통해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물질을 나눠줌으로 제한적으로나마 물질 소유의 평등이 이뤄졌다. 기독교는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집단의 사람들(여성, 노예,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진 사생아같이 버림받은 사람들)이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게 했다.
9. 평화의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형제, 자매,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로 모두 하나가 되었다고 보았다. 상호 겸손과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공통의 형제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사랑으로 결속하기 위해 발전시킨 방법이 서로를 묶어주는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함을 표현하는 ‘평화의 입맞춤’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공동체 생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 삶의 아름다움(매력) 때문에 외부인들이 그들의 대열에 합류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어떤 위대한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살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실하고 분명한 이상적 교회 생활에 대한 자신감이야말로 외부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10. 자비를 통한 증거
북 아프리카 최고의 도시인 카르타고의 그리스도인들은 252년의 끔찍한 재앙으로(전염병이 휩쓸었다. 죽음, 공포, 혼란이 있었다. 그 당시 시민들은 환자를 포기하고 시체들은 유기하고 탈출하였다.) 피해를 입은 이교도들을 돌봐주었다. 피해를 입은 이교도들을 환대하고 구제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품고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이었다.
11. 문답식 가르침 : 새로운 세계의 건설
교회는 세례를 절정으로 하는 문답 기간을 통해 신자들이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우정 때문이었으나 초기에는 신자들 스스로 예비 신앙인이 될 친구들을 문답식으로 가르쳤다. 신자들은 이교도들과 친분을 나누고 교회의 아침 모임 시간 전에 데리고 가서 신앙문답교육 교사들을 만났다. 이 문답식 단계에 대해 예배 신학자 로버트 웨버는 ‘추려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문답식 교육 기간은 3년까지 걸릴 수 있었다. 예비 신자는 일터에 가기 전 이른 아침에 교회에 나와 한 시간 동안 공부를 해야 했다. 예비 신자들은 신앙문답교육 교사들의 성경 봉독과 말씀에 대한 설명을 함께 경청했으며 대화식이었기에 중간에 개입할 수도 있었고 중간에 기도하는 순서도 있었다. 예비 신자들은 축도를 받은 후에 흩어졌다. 그 기간은 재사회화였고, 그들의 과거의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여 자유의 공동체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12. 새로운 역사
사람들이 기억하고 말하는 역사와 이야기, 그들이 존경하는 영웅들은 모두 공동체 의식을 형성한다. 문답식 가르침의 교사는 예비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게 준비시키기 위하여 히브리 성경이 들려주는 구원사를 가르친다. 이 구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가 초국가적 교회의 삶과 순교자들의 고난을 통해 이어져 온 것이다. 매일 있었던 오리겐의 구약 성경 강해는 신앙문답교육으로 이해할 수 있다.
13. 새로운 생활양식
문답식 가르침을 견뎌내는 이교들은 앞으로 닥칠 긴장되고 어려운 상황을 이교도의 방법이 아닌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구별된 방법으로 이겨내기 위해서 새로운 습관을(생활양식) 형성할 필요를 느꼈다. 신앙문답 교육 교사들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양식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의 신(神) 인격적 가르침에 관한 것이었다. 아리스타이데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심장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 새겨져 있고, 그들은 그 명령을 지킨다.”고 했다.
14. 세례 : 새 노래 부르기
어느 시기가 되어 부활절을 몇 주 앞두면, 예비 신자들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식 구성원이 될 수 있는지를 검증받기 위하여 자신들의 후견인들을 동반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야만 했다. 예비 신자와 후원자들에 대한 질문은 교리에 대한 이해보다는 오히려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의 삶의 방식이었다. 예비 신자들은 부활절의 세례의식에 앞서 몇 주 동안 매일 아침 자신들의 삶과 바른 이해를 위해 교리적 틀을 제공하는 복음 곧 ‘믿음의 법칙’을 배웠다. 최고 절정은 부활절 새벽닭이 울 때다. 세례를 위해 준비된 물에는 축복이 깃들여 있다. 예비 신자들은 낡은 옛 옷을 벗고 나체의 몸으로 물속에 들어가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때 과거의 자아는 죽고 이제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후 의복을 입은 후 마침내 교회의 문을 통과한다. 교회의 새 가족이 된 그들은 처음으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두 손을 들고 기도한다. 그런 후에야 평화의 입맞춤을 하고, 처음으로 성만찬에 참여한다. 3세기 초부터 세례와 성만찬은 새 신자들이 체험하기 전까지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던 비밀 의식이었다. 오리겐은 새 신자들에 대해 “당신이 물속으로 들어가고 … 다시 나오면 새 사람이 된 것이다. 새 노래는 부를 준비가 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제 3 부. 초기 기독교 예배 : 삶을 구별되게 하는 예배
15. 평화의 입맞춤 : 평등과 평화 만들기
평화의 입맞춤은 기도와 성만찬 사이에 행했던 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표현은 새로운 관습이자 새로운 인사법이었다.”(윌리암 클라센 교수) 203년 카르타고의 순교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귀족으로 자란 비비아 퍼페투아 뿐 아니라 노예였던 레보카투스와 페리시타스를 포함한 모든 새 신자들이 평화의 입맞춤으로 그들의 순교를 확증하였다. 입맞춤에 대해 교회 내부 사람들이 남용할 수도 있고 또 외부 사람들의 오해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초기 예배의 아주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교회가 성령의 임재와 교통하심을 축하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 평화를 만들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입맞춤이 없는 기도와 성만찬은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믿었다. 마 5장 23-24절(예물 드리기 전에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 3-4세기 동안에 기독교 저술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훈계할 때 이 본문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평화의 공동체로서 평화를 이룰 때만이 온전한 예배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널리 가지고 있었다.
16. 기도 : 한 마음으로 중재기도하기
회중들은 중재기도를 통해서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를 같은 차원에서 발전시켜 나갔다. 처기 기독교 교회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는 황제와 원수, 박해자 그리고 유대인을 위한 기도였다.
17. 성만찬 : 다양한 목소리로 축제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주일마다 성만찬을 행했다. 성만찬은 공동체의 공적 예배에 맞춰진 결속의 의식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동의하면서 찬양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면 이런 노력을 파괴될 수 있는 것이었다.
18. 연보 : 나눔의 백성 만들기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부의 위력이 사람의 영혼과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염려하였다. 율법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라고 말씀하셨다. 십일조는 의무였지만(그들은 십일조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음) 초기 기독교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인 나눔을 더욱 강조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기금은 상대적으로 빈곤한 그리스도인, 과부, 고아, 수감된 자 그리고 다른 일반 비기독교인들을 지원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경이로움 가운데 지켜보면서 “보라, 저들이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라고 하였다. 터툴리안은 카르타고에 있었던 그의 공동체에서 구제가 한 달에 한 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저스틴에 따르면 로마에서는 매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예배 시간에 돈을 가져왔을 것이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음식을 가져왔을 것이다. 봉헌은 부의 축적이라는 중독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나눔’과 ‘관대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한 어떤 특별한 예배 의식이었다.
19. 설교 : 그리스도인에 대한 권면
초기 기독교 주일 예배 상황을 보면 서로 잘 아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가정집 같은 곳에서 이른 아침 일터로 가기 전에 약 한 시간 동안 모였다. 일요일이 휴일이 된 것은 321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부터다. 말씀을 읽고 전하는 것 외에 기도와 성만찬이 있었다. 설교 시간은 제한되었고, 전형적으로 30분 이내였을 것이다. 저스틴의 첫 번째 『변증』을 보면 2세기 중엽 로마에서 예배를 드릴 때 공동체의 지도자가 설교 시간에 사도들의 회고록과 선지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낭독한 후 그들의 숭고한 행적들을 닮도록 강권하고 초청했을 것이다.『클레멘트의 두 번째 서신』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한 후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 권면의 글을 읽어주었다.”고 하였다. 클레멘트가 다루었던 내용은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 즉 지연되고 있는 재림, 그리스도인 자녀들의 차가워진 신앙, 돈에 대한 은근한 사랑 등이다. 그는 회중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복음 전도의 일부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키프리안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문답교육에서 답한 대로 행하라고 설교하였다.
제 4 부. 크리스텐덤의 도래
* 크리스텐덤(Christendom)은 문화적 의미로는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의미하며, 역사적 혹은 지정학적 의미로는 기독교가 주류인 나라, 기독교가 지배하는 나라를 말한다. 기독교국가체계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1세가 정통 기독교의 예배를 제외한 어떠한 공적인 예배도 비합법화 했을 때 기독교국가체계의 구성 요소들이 견고히 자리를 잡았다.
20. 교회 성장과 신앙문답교육의 쇠퇴
비기독교인들의 예배는 금지되었고 기독교로 인해 출세 가능성은 많아졌으며, 이교도의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4세기 초에 작성된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작성한 공동체에서는 세례 지원자들을 받아들이는 데 정밀한 조사 대신에 상투적 절차를 밟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앙문답교육을 위해 할당된 기간이 짧아졌다. 『사도의 전통』에서 3년이었던 것이 길어야 사순절 기간 정도로 바뀌게 되었다. 가이사랴의 바실은 370년에 “누구든지 세례를 받기 전에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은 신앙문답교육 수강자들에게 부와 폭력 같은 실제 영역에서 “이교도들과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했다. 몇 년 후 북아프리카의 어거스틴은 “세례를 먼저 받고 그 후에 생활방식과 행습을 바꾸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했다. 이런 상황이 전대되면서 유아세례가 퍼지게 되었다.
21. 예배의 확대
교회는 지배적인 기관이 되었다. 그전의 초기 기독교의 예배가 좀 더 관계적이었던 것에 비해, 이제는 예배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의식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었다.
22. 평화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크리스텐덤의 이해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기독교 시대가 진보하면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예, 이레니우스가 호소했던 부)에 대한 경고를 제한하기를 성직자나 각 종파의 엘리트에게만 해당되는 항목이라고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이방인 거주자’라고 불리었지만 더 이상 ‘외국인 거주자’가 아니었다.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나라의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뜻에서의 ‘교구민, 거주자’라는 뜻이지 그들의 이웃과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23. 콘스탄티누스 이후 기독교의 예배와 복음 전도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국가체계에 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서구국가에서 교회에 가는 것을 반문화적인 행동으로 보고 있다. 이런 시대에 교회의 생존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단순한 거주민으로서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서의 나그네 같은 외국인 거주자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예배로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