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驪興閔氏 大宗會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민병권[閔丙權]
양주조씨, 연분홍 치마가 궁궐에 언제 휘날릴꼬!
장희빈은 다시 궁궐에 들어가 연분홍 치마를 휘날릴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귀한 손님 한 분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뜻밖에 귀빈을 맞은 장희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감께서 왠일이세요?"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뒤를 살핀 귀인은 "쉿, 이 사람 조용하게" 라고 말하며 대문 안을 바람처럼 들어섰다. "어서 이리로 오세요. 황송한 걸음을 하시다니" 안으로 안내된 사람은 바로 동평군 항이었다. 동평군의 할아버지는 인조이고 아버지는 숭선군 징이다.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도 동평군을 반겼다. 윤씨는 숭선군의 궁저에 침모로 있었던 관계로 동평군과 한집에 살면서 친숙했다. 윤씨는 장희빈과 함께 대감의 행차에 어쩔 줄 몰랐다. 동평군은 "자네가 아무리 중전한테 쫓겨 났더라도 전하가 사랑하시는 한 재소입의 희망은 있다네. 그리고 조사석 대감이 자의 대비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려고 입궐했다네." 이 말을 들은 장희빈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사석! 자의 대비 조씨가 가장 신임하는 친정 4촌 동생이다. 조사석은 형조판서 충정공 조계원의 아들이며, 인조 국구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조카이고, 이 양주 조씨 가문의 파조 호조판서 소민공의 손자다.
장희빈은 좋은 소식 오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그런데 조사석 대감이 고요한 달밤에 찾아왔다.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가 더 반겼다. 윤씨는 장희빈과 같이 얼굴이 고왔다. 기러기가 우는 달밤 장희빈을 물리고 대감과 마주 앉은 윤씨의 자색은 더욱 아름다웠다.
"대감, 좋은 소식이라도...." 흐느끼는 듯한 장희빈의 어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대감은 흐르는 달빛에 젖어 우수에 잠긴 어조로 "상감께서 수라도 들지 않으시오. 왕비 마마께서 만삭의 몸으로 역질을 앓으시다 갑자기 세상을 뜨셨으니 그 슬픔이 오죽 하시겠소? 대비 마마께 잘 말씀드렸지만 궁중 안밖이 창황하니 좀 기다려 보구려!" 장희빈 어미를 위로하고 조사석은 달콤한 월색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떴다.
장희빈 모녀는 원수 같던 왕비가 죽었다니 통쾌하게 여기며 오히려 궁궐로 들어갈 길이 트였다고 좋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궁궐에서 조대비가 장희빈을 입궐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조대비는 장희빈을 보자 "너가 깊이 뉘우치고 근신한다기에 다시 불렀느니라. 앞으로는 매사 행동을 조심하여 전과 같은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대비는 바로 임금을 불러 " 상감, 너무 상심 마시요. 용안이 무척 수척해지셨구려."라고 위로하였다.
장희빈은 꿈만 같았다. 음식과 주안을 차려준 대비의 하해 같은 성은으로부터 궁궐에 나부낄 연분홍 치마를 내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다시 한번 짓고 있었다.
양주조씨 , 즉시 처형하소서
좌의정 충헌공 조사석의 적은 아들 조태구[소론]는 우의정으로 영의정 김창집[노론]이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공격했다. 노론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등의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입궐하여 "전하! 환후가 침중하시오니 세제를 세우시고 동궁으로 책봉하소서."라는 상소를 했다.
왕의 동생 연잉군[장차 영조]을 세제로 삼으라는 노론의 주장에 대해 소론은 강력히 반발했다. 임금이 생식 불능 상태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소론측 선두에 유봉휘가 나서서 왕자를 낳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경솔한 결정을 하느냐고 따졌다. 우의정 조태구도 세제 동궁 책봉 문제를 한사코 반대했다.
조태구는 왕비[함원부원군 어유구의 딸]를 통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것을 안 왕대비 인원왕후 김씨는 "왕실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주상의 춘추가 아직도 젊은데 어느 누가 양자를 논한단 말인가?"라며 망령된 짓을 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로써 노론의 주장대로 임금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조태구를 비롯한 조태억 [호조참판, 조태구의 사촌 조태억], 최석항[최석정의 아우] 등이 반격에 나섰다. 특히, 조태구는 밤중에 임금을 알현하고 "전하, 영의정 김창집 등이 왕세제를 싸고돌며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다." 라며 왕세제의 대리 청정이 부당하다고 역설했다.
한편 소론의 책략가 이조참판 김일경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내시 박상검을 행동책으로 하여 어비[왕비]의 후원을 도모하면서 이진유, 박필몽 등과 함께 상소를 했다. "대신 아무개, 아무개는 왕세제를 추대해서 왕위를 엿보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사오니 이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고 주청을 하였다.이 상소는 노론 4대신을 즉시 처형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를 먼저 접한 어비가 병석에 누운 임금에게는 나중에 아뢰기로 하고 4대신을 잡아들이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에 4대신은 죄를 받게 되고 우의정 조태구는 영의정에 오르게 되었다.
양주조씨 즉시 처형하소서. 2
노론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잡아들인 다음 임금에게 어비는 보고를 하였다. 병석에 누운 임금은 귀찮아 하면서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이리하여 김창집은 거제도로, 조태채는 진도로, 이이명은 남해도로 귀양을 보내고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는 이건명은 돌아오면 처벌할 계획이었다.
이로써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예조판서에 이광좌, 대사헌에 유봉휘로 소론 정권이 들어섰다.
신변의 위협을 크게 느끼는 세제[연잉군]는 소론으로부터 감금된 상태에서 탈출하여 대비 처소로 달려갔다. 통곡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김일경 일당이 세제를 환궁시켜 달라고 요구하자 인원 왕대비는 동궁을 모해하려는 무리를 처단하라는 엄한 교지를 내렸다.
영의정 조태구는 소론 중에도 온건파로 노론 4대신의 하나인 조태채와 4촌간이다. 조태구는 일이 아주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론을 위해 일했던 궁녀와 내관 몇 명을 처단하는 것으로 매듭 지으려 했다.
그러나 목호룡이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 노론 4대신을 대역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전하의 환후를 기화로 불측한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다. 신은 멋모르고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ㅇ여명이 기회를 보아 전하를 시역코져 하는 반역행위에 가담하였습니다. 시가 급하오니 그들을 즉시처형하소서"라고 고변을 하였다.
목호룡의 고변을 신호탄으로 김일경은 노론에 대한 철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유배 생활을 하던 조태채를 비롯한 노론 4대신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김창집, 이건명은 서울로 올라오던 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이명도 서울 까지 올라와 사사되었으며 조태채 역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양주조씨 인조 국구 조창원의 생전 발복, 사후 공허.
조창원은 호조판서 조존성의 아들이며, 성종 부마 조무강[숙혜옹주 남편]의 현손이고, 태종 때 대제학 조말생의 8대손이다. 조창원은 호를 만휴당 혹은 향산이라 한다. 만휴당 조창원은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3년 벼슬 길
에 나가 여러 고을 수령을 지내고 치적이 좋았다. 1638년 인천부사로 있을때 딸이 인조의 계비[장렬왕후]가 되자 돈녕부 도정을 거쳐 한원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에 이르렀으며 1646년 64세로 별세했다.
조창원은 부인 최씨[대사간 최철견의 딸]가 딸[장렬왕후]을 임신했을 때 아주 밝은 달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조창원이 1624년 직산현감 재직시 관아에서 그 딸이 태어나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니, 조용하면서 욕심이 없었고,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동기간에 우애가 돈독하고 비복을 은혜롭게 살폈다.
그 딸이 중전[인조 계비]의 자리에 않게 되자 대궐의 웃어른들을 정성으로 섬겼으며, 예로써 행하고 검약과 겸손으로 근신했다. 중전은 친정 어머니[완산부부인 최씨]가 궁중 일에 대해 궁금하여 물으면 "비록 저에게 어머니이시기는 하나 궁궐로는 외인이시니 내전의 일을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부부인은 집에 돌아와 "왕후의 분부가 이러하니 진실로 왕실과 나라의 복이다."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였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장렬왕후를 왕대비로 높이고 1651년 존호를 "자의대비"라 하였다. 1659년 36세로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효종의 계모로서 복상문제가 서인과 남인간에 치열한 예송으로 비화되어 조정이 시끄러웠다.
1674년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가 승하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조정을 뜨겁게 하였다. 1688년 65세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조창원의 맏아들 윤석은 문과하여 우승지를 지내고, 맏딸은 영의정 상촌 신흠의 적은 아들, 예조참판 신익전의 아내가 되었다. 신흠의 맏아들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 동양위다. 조창원은 셋째 딸이 왕후에 올랐으며 맏딸이 상촌 신흠의 며느리가 되어 국구로서 광경이 좋았으나 맏아들이 당상관에 그쳤고 그 후손이 문과[조제로,필선] 한 장을 냈을 뿐이다.
양주조씨 조계원[인조 국구 조창원 동생]집 번창
왕후를 낸 조창원은 생전 영화에 비해 그 뒤가 쓸쓸하였지만 오히려 그 동생 집은 후손들이 번창하였다. 인조 국구 조창원의 아들 윤석은 외로운 가운데 문과 급제하여 당상관에 그쳤다. 그러나 그 동생 조계원의 아들 진석은 문과에 정언, 구석은 문과에 관찰사, 희석은 군수, 사석은 문과에 좌의정, 가석은 문과에 이조참의로 형제가 많고 벼슬이 넉넉했다.
정언 진석의 후손은 볼 것이 없다. 좌의정 조사석은 그 아들 태로[문과 관찰사]와 태구[문과 좌의정]를 두었는데 태구가 소론의 영수로 있으면서, 김일경 일당이 노론 4대신을 처형한 후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노론의 재집권에 의해 신임사화의 핵심 인물로 탄핵을 받아 관작이 추탈되었다. 이로써 소론이 영원히 몰락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내내 그 멍에를 메고 고단하게 살아야만 했다. 예조참의 가석의 아들 태억[좌의정]은 4촌 조태구와 함께 소론의 온건파로 활약했으며 형조판서, 호조판서 겸 대제학을 거쳐 1727년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1755년 관작이 추탈되었다. 그 아들 지빈이 문과에 대사간, 지빈의 손자 우규가 문과, 병빈[지빈의 동생]이 문과에 정언을 했을 뿐 소론의 몰락으로 그 후손들의 활동이 지지부진했다.
조계원[형조판서]의 아들 구석[관찰사] 집 번성, 희석[군수] 집 아주 번성
1, 구석[문과 전라도관찰사] 집 조구석은 기암 정홍명과 청음 김상헌에게 수학했다. 1648년 문과하여 1649년 춘추관기사관으로 [이조실록], 1659년 [효종실록] 편찬에 각각 참여하였으며 1663년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구석의 아들 태동은 1659년 문과하였으며 1697년 중시에도 합격했다. 그 뒤 지평, 교리를 거쳐 동래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가 섰다. 이어 각조의 참의를 지내고 충청도, 경상도, 함경도의 관찰사로 두루 다녔다. 그의 후손은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조구석의 적은 아들 태숭은 손자 대에서부터 왕기가 떴다. 손자 영국이 문과 급제에 이조판서를 지내고 정헌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영국의 아들 운규가 문과에 이조판서, 시호는 충간이고, 운규의 아들 종현은 문과에 예조판서이며 시호는 문헌이다. 이로써 3대 문과에 3대 판서가 났다.
조종현의 동생 정현[목사]이다. 조정현의 아들 제만[목사]은 그 아들 , 손자, 증손 3대에 문과 6장, 판서급[득림 이조판서, 병휘 이조판서, 중응 농상공대신] 3명, 이조참판[인희]1명, 당상관[헌섭 이조참의, 우희 좌승지, 중필 우부승지] 3명을 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중응은 일본 정부의 작위를 받아 문중에 불명예를 안기고 조국에 득죄하였다.
2, 희석[군수] 집
조희석의 아들 태래는 적은 아들 3대가 문과를 하였다. 적은 아들 도빈은 우의정, 손자 영로는 관찰사, 증손 현규는 설서를 지냈다. 조도빈의 장조카 영증은 문과에 우부승지를 지냈다.
조희석의 아들 태휘[군수]의 손자 영진[문과 형조판서 시호 정헌]이 현달하고 그 후손에 인물이 쏟아졌다. 문과 7장[창규, 의순, 진순, 병직, 충희, 중엽,중구] , 농상공대신[조병직], 참판[조병덕], 당상관 5명[창규 대사간, 진순 동부승지, 충희 이조참의, 중엽 우부승지, 중구 비서원승]을 냈다.
조희석의 아들 태과 후손은 볼 것이 없다.
조희석의 아들 태채[문과, 좌의정, 시호 충익]는 아들 정빈, 관빈[대제학 호조판서 시호 문간], 겸빈을 두었는데 이 세 아들의 후손이 모두 잘 되었다.
조정빈의 집은 문과 7장[헌철, 두순, 태순,병협, 병식, 동희, 영희], 영의정에 대제학[조두순], 판서급 3명[병식 이조판서, 영희 이조판서, 동희 좌찬성], 이조참판 2명[태순, 병협] 등을 배출했다.
조관빈[문과, 대제학, 시호 문간]의 집은 문과 4장[재순, 병세, 민희, 중목], 좌의정[조병세], 종2품[재순 참판, 민희 이조참판, 중묵 관찰사] 3명을 냈다. 조관빈의 손자 준철 후손에 현대 인물로 한진그룹 회장 조중훈 형제[한일개발 사장 조중건, 한일개발 부사장 조중식]와 중훈의 아들 형제[대한항공 회장 조양호, 한진중공업 부회장 조남호, 한진해운 부회장 조수호, 메리츠 증건 부회장 조정호]가 있다.
조겸빈의 집은 문과 7장[영순, 원철, 정철, 도순, 병학, 병숙, 신희], 좌참찬[정철], 이조참판[영순, 도순, 병학, 신희] 4명을 냈다.
양주조씨 까만 마음, 하얀 마음!
1, 까만 마음
조중응은 1860년에 태어나 1880년 전강 유생으로 경서를 강의했다. 1894년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외무아문의 참의가 되었다. 1895년 외부 교섭국장, 법부 형사국장을 지내고 1907년 아래와 같이 매국내각의 대신이 되었다.
아 래
총리대신------------------이완용
내부대신------------------임선준
탁지부대신----------------고영희
법부대신------------------조중응
군부대신------------------이병무
학부대신------------------이재곤
농상공대신----------------송병준
조중응은 이른바 망국내각의 일원이 되어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여 퇴위시켰다. 1909년 친일신문을 통해 일본에 충성을 요구했다. 1908년 농상공 대신이 되고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이화대수장을 받았다. 이완용과 함께 조중응은 통감 관저로 가서 데라우찌 마사다께에게 황제의 친임장을 내놓았다. 데라우찌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한일합방 문서를 책상 위에 놓고 먼저 서명했다.
[ 제1조, 한국의 황제 폐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일체 통치권을 영구히, 완전하게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이로써 500년 조선 왕조는 멸망하고 조선의 백성은 수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2,하얀 마음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영친왕] 이은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형인 순종의 후계자였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왕족 마사코[한국명, 방자]와 결혼했다. 마사코와 결혼식을 올리기 약 일 년전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터졌다. 일본의 모든 신문들이 [조선 독립 운동 시위].... [경성 시내에 20만 군중이 독립을 외치다.]고 연일 보도했다.
마사코는 자신이 사랑하는 조선의 황태자! 사랑하는 황태자의 나라 조선 ! 자기의 모국 일본! 조선을 사랑하는가? 일본을 사랑하는가? 몹씨 괴롭고 마음이 쓰렸다. 마사코는 단연코 사랑하는 이의 나라 조선을 선택했다. " 천지 신명이시여! 조선이 독립하게 도와 주소서. 우리 일본이 조선에 저지른 많은 죄악을 되풀이 하지 않게 하소서. 조선이 독립하여 저가 조선의 황태자비가 되지 못해도 좋나이다. 사랑하는 이의 나라가 행복하기를 비나이다." 마사코의 손에 들려 있는 신문지에는 그녀가 흘린 눈물이 흥건했다.
양주조씨 을사년의 의사 조병세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 아!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조정 대신이란 것들이 제 자신의 영리를 탐내고 일제의 위협에 짓눌린 채 ....4천년 강토와 5백년 종사를 왜적에게 바치고 2천만 한겨fp를 섬나라 노예로 만들었도다....아! 아! 슬프다. 하룻밤 사이에 4천년 국민정신이 졸연히 멸망하고 말았구나. 아프다. 아프다. 동포여!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라는 요지의 [시일야 방성 대곡]이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이와 같은 을사조약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을사조약에 서명한 5대신은 아래와 같다.
아 래
^^^^^^^^^^^^^^^^^^^^^^^^^^^^
1, 내부대신-------------이지용
2, 군부대신 ------------이근택
3, 외부대신-------------박제순
4, 학부대신 ------------이완용
5, 농상공부대신---------권중현
위의 다섯 대신을 [매국오적], [을사오적]이라 일컬었고 그들을 비난하며 처형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이완용의 집은 성난 백성들에 의해 불타버렸다.
일찍 좌의정을 지낸 조병세는 세상이 혼란하여 벼슬을 버리고 가평에 은퇴하여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병세는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급거 상경, 임금을 면담하려 했으나 일본군이 가로 막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비롯한 30여명이 " 저 도적들을 참수시켜 국민에게 사죄토록 하라."고 상소하였다. 조병세는 참정 심상훈, 시종무관장 민영환 등과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오적신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구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 해산 당하고 표훈원에 연금되었다. 곧 풀려났으나 대한문 앞에 나가 또다시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에 의해 연금되었다. 이미 대세를 뒤집을 수 없음을 깨달은 민영환이 전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며 순국 자결했다. 이어 조병세는 전국민과 일본공사 및 각국 공사에게 남기는 글을 썼다.
"2천만 백성이 장차 노예가 될것이니.....차마 눈을 뜨고 이 수치와 치욕을 바라 볼 수가 없다......한번 죽음으로써 위로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 국민에게 사죄하겠다....우리 전국 동포가....스스로 분발하여.....이 치욕을 설욕한다면 병세는 비록 구천의 밑에서라도 춤추며 기뻐할 것이다. 모두 스스로 힘을 닦기를 바라고 바란다."라는 요지의 부탁을 남기고 상소하였는데 일본군들이 가마에 태워 끌고 가자 가마 안에서 독약을 마신 채 조카 민희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