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마지막 황제'는 초라한 어느 남성이 낡은 세면대에서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기억된 영화이다. 하얀 세면대에 흩어지는 붉은 피. 아마도 TV에서 해주는 주말의 명화쯤으로 이 영화를 본 듯 하다. 이 영화는 어린 나에게 매우 호기심을 가지게 한 주말의 명화 중에 몇 안 되는 영화 중에 하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보았던 영화로 기억된다. (물론 이후에 나이가 들면서 알아본 바로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거의 가식적으로 신화화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였다. 어린 나에게 각인된 불쌍한 푸이의 이미지가 그대로일 것이라고 굳게 다짐을 했던 것이다.^^ )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나에게 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재미를 주었다는 것과 이 영화 배경이 되는 근대 중국의 경제사를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청조의 12 대 황제로 즉위한 후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려 결국은 한 평범한 시민인 북경 식물원의 정원사로 여생을 보낸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이야기이다. 푸이는 3살의 어린 나이에 광서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금성으로 들어간다. 6세까지는 청나라의 황제로서 내시들과 궁녀들 사이에서 성장하지만, 즉위 3년째 신해혁명(1912년)을 당하여 궁중 생활의 마지막을 맞는다. 푸이는 황제라는 명칭의 사용과 궁정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한다. 말 그대로 이름뿐인 황제인 그의 연금 생활인 자금성에서의 거주 동안, 결혼을 하고 시대 상황을 깨달은 푸이는 영국인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유학에의 꿈을 가진다. 그러나 1924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일본으로 피한 푸이는 유학에의 꿈을 상실한 채 일본 특무기간원의 감언에 넘어가 만주국의 집정이 되고 2년 후에는 황제로 등극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패전한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하려던 푸이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중공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공산정권에 의해 10년 간 재교육을 받고, 형기 후 평범한 시민(식물원 정원사)이 된다.
'마지막 황제'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삶을 통해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몰락해 가는 왕조와 중국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청조 말기의 시대적 혼란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군벌의 난립, 일본의 만주 진출 그리고 민중 소란까지 영화 속에 담아있다. 중국은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1906년부터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부수고 대만으로 패주시킬 때까지 평화의 시기가 없었다. 이 난세에 한 개인이 황제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자금성에서의 추방과 망명,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갖가지 음모와 암투를 피하고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를 헤쳐나간 끝에 9년 간의 옥중 '인간 개조'를 통하여 중국 공산당 시대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영화 속의 푸이는 굉장히 연민을 갖게 하는 인물이다. 자신도 원하지 않던 황제의 자리에 올라 부모의 정도 모르며 자란 푸이. 황제로 떠받들어지기는 했지만 어린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던 어린시절의 안타까운 삶도 보여진다. 만백성에 군림했으면서도 인간으로서는 더없이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린 한 개인의 불행한 삶을 감독은 보여주었다. 감독은 푸이에 대해서 연민과 애정으로 다가섰고, 카메라의 앵글도 그렇게 푸이를 따라다녔다. 관객들은 감독이 보여주는 영상을 따라서 그의 무기력한 인생역전을 이해해 나간다. 그러나 많은 관객들과 비평가들과는 달리 ‘마지막 황제’는 역사가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였다. (결국 중국은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하는 비탄이 터져 나오도록 감독은 푸이의 신화 만들기에 철저하였다. 과연 실존하는 푸이는 어떤 인물이였을까? 푸이는 어린 시절 맛들인 부와 권력의 ‘중독증’에서 평생을 헤어 나오지 못하며 오직 자신을 위해 주변 인물과 민족을 모두 팔아먹은 무기력 자이었다. 또한 늘 자신이 지은 죄에 떨며 심한 약물 중독과 낭비벽에 시달린 인물이기도 했다. 진짜 청조의 마지막 황제의 자서전(이 책에 기반해서 영화화하였다.)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푸이의 한없이 여리고 시대에 희생된 불우한 개인으로만 나온다. 실제 푸이는 영화와는 달리 4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그가 함께 한 처첩은 황후 완용과 비(妃) 복귀인. 그러나 그는 누구도 ‘아내’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도주하며 당장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아들을 버렸다.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것이다. 영화는 또 푸이를 부정적으로 인식시킬 만한 역사적 행위를 빼먹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일본에서의 매국적 행위다. 만주국 황제 시절 그는 두 차례 일본을 방문해 중국의 적인 일본 천황을 ‘어버이’로 받들었다. 물론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1940년 5월 두 번째 방문중 그는 “만주국의 전력을 다해 어버이의 나라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겠습니다”라는 충성 서약을 맺기도 하였다. 그리고 푸이의 자살소동과 아들의 죽음은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낸 명백한 ‘조작’이었다.(이는 정말로 내게 큰 충격이었다. 내가 너무나 감명깊게 본 자살장면이 거짓이라니~~T.T) 푸이는 자살을 기도할 만큼의 용기도 없는 인물이었다.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조차 “푸이는 눈곱만큼의 동정도 매력도 갖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푸이는 확실히 기회주의자, 비겁자, 우유 부단자이다. 그리고 시대 개척능력도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을 타파 혹은 개선하려는 의지도 없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그의 아내는 푸이가 만주국의 허수아비가 되자, 참다못해 아편에 손을 대고 바람을 피우게 된다.) 하지만 세간의 평대로 푸이는 결코 무기력한 인물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는 그에게 닥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은 최후의 승리자(?)였다. (결국은 살아남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목숨을 위협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최대의 反(반)영웅으로서 자기 몸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배신까지 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바로 시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일련의 행동들은 난세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방법론적 모색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황제'의 배경은 몰락해 가는 황제를 통하여 중국이라는 나라의 몰락(정확히 말하자면 청조)을 보여준다. 하지만 청조의 몰락은 신해혁명이나 군사쿠데타처럼 어찌 보면 작은 사건의 영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좀더 세계사적인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아야겠다. 20세기 초반의 중국은 단순한 ‘격동기’ 이상이었다. 산업화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는 무엇보다 상품시장이 필요했고 10억 인구의 중국은 그 어느 지역보다 큰 시장으로 부각됐다. 그 당시 일본은 단순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한 저지선으로 이용하였고, 우리나라는 거의 안중에도 없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중국은 그 어마어마한 땅덩어리와 인구 물자 등으로 예전부터 서양과의 교류를 해왔다. (마르코폴로의 여행기를 생각해보자.) 개항당시 서양에서는 솔직하게 중국에 팔 물건이 없었다. 가장 발달한 서양의 면제품은 그 당시 중국의 수요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국은 오히려 더 뛰어난 비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개항 초기에는 중국은 모든 물자를 중국 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기에 서양의 물건을 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서구에서 중국으로 돈을 무더기로 가지고 와서 물건을 사가지고 갔다. 이런 무역의 일방적인 모습은 점차 서구에서 은이 줄어들자 중국의 은을 다시 회수하기 위한 노력으로 상황은 반전된다. 이 때 서구의 자본주의는 은의 회수를 위해서 아편을 풀었다. 이렇게 들어온 아편은 중국인의 건강을 해치고 중국 경제를 휘청 이게 만들었다. 서구와의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패배하고, 이제 서구 여러 열강들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는 여러 나라들이 청조를 갈라먹는, 즉 ‘중국 땅 따먹기’로 급진전했다. 아편전쟁 후 중국은 열강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맛본 적이 없으며 1894년 조선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전쟁에서마저 참패를 당했다. 청일전쟁은 배상금 2억냥을 지급하고 대만과 팽호열도를 할양하는 등 중국에는 ‘굴욕’ 그 자체였다. 19세기 말 ‘잠자는 호랑이’에서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의 20세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 한때 속국에 불과했던 일본까지 가세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 이들의 국토 분할, 공산당과 국민당에 의한 내란, 신구 체제의 교체, 교활한 매판자본의 할거등등... 이 같은 역사적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청조였다. 3백년을 이어온 절대 권력의 무능과 부패는 곧 중국 전체 민족이 겪었던 수난의 책임자이기도 했지만 청조의 비운은 많은 이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만 했다.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이라는 서양 자본주의와 중국의 구경제의 대충돌이 청조의 총체적 위기를 불러일으킨 주범인 것이다. 푸이는 이런 위기에서 몰락해가는 청조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 즉 ‘마지막 황제’의 역할을 담당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
이상 '마지막 황제'속에 보이는 중국의 근대사를 알아보았다. '패왕별희'같은 영화를 보면 이후 중국의 문화혁명 등 급변하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중국은 또다시 알아볼 수 없게끔 변하고 있다. 공산주의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이행은 시장이 개방되고, 외국계 기업들이 속속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중국을 변화시키고 있다. 아시아에서 최근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면서 이웃 경제대국 일본도 아니 미국도 위협을 느끼는 저력을 가진 중국.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곧 세계최대의 수요지인 중국은 그것을 무기로 이제 세계경쟁에 뛰어들었다. 이제 중국은 19세기의 아픔을 겪었기에 다시는 '종이사자'가 되는 수모는 겪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중국은 깨어나면 아무도 막지 못할 나라, '잠자는 호랑이' 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 역사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