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순절은 카톨릭으로부터 유래한 미신이다.
사순절(四旬節, Lent)을 행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정말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게 좋다'라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부활주일 전 40일의 기간 동안 지키는 사순절(四旬節, Lent)은 재를 이마에 바르며 죄를 회개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금식 등의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계산하면 40일 되죠.) 물론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풍습입니다.
과연 로마 카톨릭의 이런 풍습을 우리 개신교가 따라해야 하는가?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84회 총회(1999년 9월)에서는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 교회가 로마 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결의하여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사순절은 정통 기독교의 절기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로부터 3C까지는 사순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말하는데, 사순절기간 회개와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지내는 것으로 니케아공의회(325년)에서 정하였고 그레고리 교황 때 정한 재(灰)의 수요일부터 시작한다. 사순절의 의미는 그럴듯하지만 이것 역시 사사기 시대의 상황처럼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는 말씀과 다를 바 없다. 즉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이다. 사순절을 만들어 놓고 그 때에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아픔을 생각하며 이에 동참한다는 식의 의도 자체가 사람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사람의 뜻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성경의 진리에서 멀어질 때 얼마나 교회가 타락하였는가를 역사가 보여주었다. 바로 암흑의 천년을 보낸 중세 시대이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못 보는가? 그리고 초대교회와 중세 암흑의 시대를 지나 일어난 종교 개혁의 시대를 돌아보자. 오늘날 기독교는 다시 중세 암흑의 시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사순절을 절기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보면, 예수님의 광야 40일, 시내산에서 모세의 40일,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40일을 정한 것이다. 이 40일의 출처에 대해 히슬롭은 “니므롯의 아들 담무스가 40세 때에 멧돼지에 받혀 죽었는데 그가 살던 1년을 하루로 계산해서 40일간 애곡하기 위한 기간이 설정되었고 고대에는 이 40일 동안 그의 은총을 새로이 얻고자 즉, 그가 지하세계에서 나와 봄을 시작하도록 자기 스스로를 매질하는 풍습을 지켰고...이교도들 가운데서 이 사순절이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연례 대축제의 필수적 전제 조건이 된 것처럼 보였다”고 말하였다. 즉, 사순절은 성경의 어떤 부분과도 연관성이 전혀 없는 이교도의 풍습에서 나온 미신적 행위인 것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사순절을 지키었던가? 속사도 교부들이 사순절을 지키었던가?
2. 종교개혁자나 정통기독교는 사순절을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사순절에 대해 어떻게 말했던가?
칼빈은 기독교 강요(4권, 12장 20 참조)에서 사순절 준수는 미신적인 행위라고 하며, 그 시기에 특별하게 행하는 금식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관계가 없음을 얘기하였다.
스위스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도 사순절의 관심은 "복음에 대한 순종보다 로마에 대한 순종에 있다"고 지적했다.
마르틴 루터도 사순절 금식을 "선행으로 뭔가를 공로로 삼아 보겠다는 것"이라며 천주교의 가르침은 금식이 죄를 면제해 주고 구원점수를 따게 해 준다는 식의 허황되고 거짓된 개념이라고 질타했다.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을 왜 절기라고 만들어서 지키고 있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정통 기독교의 신앙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정통 기독교의 신앙은 성경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믿기에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버린 것을 왜 오늘날 다시 행하고 있는가? 이것은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굳이 사순절을 지켜야만 거룩한 성도가 되는가? 그 기간 동안만 거룩한 성도의 모습이고 나머지는 아닌가?.
성경의 가르침은 1년 365일 모든 날을 거룩하고 성도답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는데 왜 특별한 기간이 필요한가? 참 성도는 특별한 기간만을 정해서 위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루하루를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3. 향락을 무마시키는 위선적 이벤트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진실은 ‘카니발(carnival)’에 대한 것이다. 카니발은 사순절과 연관이 있다. 카니발이라는 말은 고기를 먹는 것을 감사하는 축제라는 ‘사육제(謝肉祭)’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여 죽으신 것을 기억하며 40일간 육식을 먹지 않고 단식하며 참회하고 희생하는 사순절 바로 전에 고기도 실컷 먹고, 놀고, 마시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카니발이란 뜻은 '육식이여 안녕'(farewell to meat)이라는 뜻이다. 카니발은 나라에 따라 시작은 달라도 끝나는 날은 언제나 화요일인 <기름진 화요일>(gras mardi>로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그 다음날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 곧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것이 브라질의 ‘리오카니발’이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가 하면 음주, 폭력, 그리고 성(性)적인 향락에 빠져 그 광란이 극에 달한다. 그리고 이 카니발이 끝난 다음날이 되면 사람들은 카니발 동안에 저지른 악과 성(性)적 죄를 단순히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 받기를 원하며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는 사순절을 지킨다. 이 얼마나 가증한 일인가......이래도 사순절을 지킬 것인가? 이래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순절이 고상하고 의미 있는 기간이라 생각하는가?
<재의 수요일>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사순 제1주일 전(前) 수요일로서 이날 미사 때 참회의 상징으로 사제가 재를 축복하고 머리에 얹는 ‘재의 예식’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그리고 이 예식에 쓸 재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했던 나뭇가지를 불에 태워 만든 것을 사용하며, 사제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상기시키며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는다고 한다. 재의 수요일에 대한 내용을 보면 사순절은 로마 카톨릭의 미사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은 로마 카톨릭의 예식인데 왜 정통 기독교가 그것을 따라 하는가? 무엇 때문에?...
4. 신앙생활은 특정기간만 행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09문을 보면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에 관해서 이렇게 답하고 있다.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 인정하는 것들이며, 거짓 종교를 용납하는 것과 하나님의 삼위(三位)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만든 것(그림, 조각상, 영상화)이며, 이 형상이나 혹은 이 형상 안에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일이며,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거나 또는 그것들에 속한 것을 섬기는 것이며,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고 취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의 명목으로 예배에 추가하거나 삭감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케 하는 미신적 고안, 성직 매매, 신성 모독,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 경멸, 방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여 드리는 것은 죄다. 고로 사순절은 금지된 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순절을 버려야 한다. 신앙을 어떤 특정한 시기의 종교적 행위로 국한시키는 용어사용을 늘 주의해야 한다. 미신적 행위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 매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고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순종으로 나아가는 삶. 이것으로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