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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의 배반
요한복음 13:18~30
우리가 지난 이 주일에 걸쳐 유월절 명절 저녁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과 그 때 베푸셨던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세족식에 이어서 주님께서 베푸신 교훈들과 더불어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배신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과정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오늘 본문 말씀 윗 구절인 16,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주님은 주인이 낮아져서 종의 발을 씻고 선생된 자로서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자기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제자들이 그 본보기를 따라 모든 일에 겸손한 마음과 진실한 사랑으로 행한다면, 참으로 ‘복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복이 있으리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마카리오이’라는 말로서,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로다 그는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의 ‘복되다’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의 본을 보여주신 대로 겸손함과 진실한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참으로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구주께서 바라보실 때에 미소를 짓고 바라보게 되는 은총을 입은 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말씀대로, 항상 겸손하게 교회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늘 하나님과 우리 구주로부터 우리를 향하여 미소와 사랑과 은총이 듬뿍 받는 복이 있는 성도들이 됩시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축복어린 말씀은 그 자리에 있는 열두 명의 모든 제자들이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곧 이어서 이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18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주님의 본을 받아 사랑과 섬김으로 행하는 복스러운 자는 제자 중에 모두에게 해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 택함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 누가 택함을 받지 아니한 지를 주님은 환히 아신다고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택함을 받지 아니한 자가 그렇게 주님의 사도단에 들게 된 이유에 대하여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다윗의 시편 41:9 말씀에,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 때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 놀랍게도 아히도벨이는 다윗의 지략가가 대적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아히도벨은 이스라엘이 외적들과 전쟁할 때마다 늘 다윗 왕 곁에 붙어서 지략과 모략을 짜서 적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히도벨을 친구처럼 대하며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떡과 포도주를 함께 먹고 마시던 절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압살롬 편에 붙어서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도망치는 다윗 왕을 신속하게 죽이기 위하여 치밀하고 냉정한 전략을 수립하여 추진하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 일을 기억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시편에 이에 대하여 기록을 해놓았던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도 그 선조 다윗이 겪었던 바와 같이 쓰라린 배신을 겪게 될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곧 친구처럼 함께 떡을 먹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을 겪을 터인데, 그것은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자기 제자들에게 설명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이 발꿈치를 제 주인을 들어 차듯이 예수님의 절친한 친구와 같은 자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자기 제자들이 동요하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갑작스럽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제자들은 몹시 놀라고 떨릴 것이고 낙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이를 미리 말씀해주심으로써, 그 일을 겪을 때에 예수님이 모르고 당한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과정을 알고 또한 그 모든 과정을 지배하시면서 의연하게 그 배신을 받아들인 것임을 제자들로 알고 준비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이 배신을 당하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내가 그다’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 말을 원문에 보면, ‘내가 그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을 ‘나는 ~이다’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이 말씀은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을 의미하는 문장입니다. 이는 술어가 없는 문장으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원문을 추적해보면, 동일한 문장이 요한복음 8:24에 쓰였습니다. 읽어드리면,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입니다. ‘내가 그이다’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28 말씀에서도 이르시기를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내가 그이다’라는 것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고 에이미’라는 이 문장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자존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 말씀을 다시 원문을 다시 그대로 말하면,
“아브라함 전부터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느니라’가 바로 우리 주님이 오늘 제자들에게 이르신 ‘내가 그이다’라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신성 모독의 발언으로 여겨져 돌을 맞을 정도의 자기 호칭이 바로 ‘에고 에이미’ ‘내가 그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주장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태초에 계신 하나님으로서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도 스스로 계셨고 세상을 모두 만드셨고 모든 구원의 일들을 친히 계획하셨고 그 일을 이루어오신 대주재자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자기가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할 것을 다 알고 계시기에, 이것을 지금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 알려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여기서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당할 것을 철저히 알면서 그렇게 잡혀 죽으신 것이고, 약해서, 혹은 깜빡 속아서 그렇게 제자의 함정에 빠져서 잡혀 죽은 것이 아님을 확실히 기억합시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 중에 하나로서 연약해서 죽은 자가 아닙니다. 그는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으로서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아시면서 기꺼이 잡혀 죽으시어 죄인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려고 자원하여 자기를 내어주어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해내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온전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그 말씀 후에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 중에 스승을 배신하는 악한 자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기고 떡을 먹던 자가 기름진 상을 베푼 주인을 냅다 발로 차듯이 무례한 일을 벌이는 일이 주님과 사도단 안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앟습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는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베푸십니다. 그러면 갑자기 여기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아무리 주님이 부르신 제자 공동체 내에서 스승을 배반하는 그런 참담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여전히 실망하지 말고 보냄받은 자기의 직분과 사명에 신실하게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기르고 훈련하며 사랑을 베풀었던 사도단에서조차도 악한 배신자가 나타나고 스승을 은 삼십냥에 팔아먹는 비윤리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우리가 섬기며 세워가는 교회 안에서는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일을 보면서, 우리들은 미리 낙심하고 주저앉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포기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아시는 주님께서 용기와 격려를 주시면서, 보냄받은 성도와 주의 종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며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계속해가라고 여기서 격려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많은 교회와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성직을 통하여 물질적 욕심을 채우려는 자도 있고, 신앙의 이름으로 정치적 야망을 성취하려고 덤비는 자도 있고, 경건의 모양을 가장하면서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려는 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돌을 던지며 교회가 비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거짓 성도들이 있고 타락한 목자들이 있어서 때로는 낙심되고 사명을 붙들기가 힘이 들 때 있을지라도, 우리들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님께서 하신 대로, 주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자의 사명을 결코 포기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바 겸손과 사랑을 굳게 지키며, 세상의 비난과 멸시를 받더라도 묵묵히 주님께서 주의 종으로서, 또한 성도로서, 보내주신 바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합시다. 그리할 때에 세상에서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우리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은혜가 있을 것이요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곧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구원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수많은 배교자들이 나타나는 이 시대에 우리들은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맙시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같이 낙심하지 말고 더욱 사명을 붙들고 삶의 자리에서 부름받은 자로서 사라갑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함께하신다는 은혜의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까지 말씀하신 후에 말씀을 잠시 중단하시고 마음의 괴로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폭탄 선언을 제자들에게 던지십니다.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그 동안 제자들에게 몇 번 암시는 해주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말씀은 한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예수님의 대적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줄 자가 자기들 중에 있다는 것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당황하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하나씩 근심하면서, 예수님께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가복음 14:1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라고 해서 거룩한 근심이 안 생기겠습니까? “혹시 내가 바로 그 배신자는 아닌가?” 하고 우리도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중에 오셔서 “너희 중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면, 마음이 철렁하면서 “혹시 내가 그 천국 문에 못 들어가는 탈락자는 아닌가?”하고 근심하며 우리도 자기에게 묻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도 제자들이 그 날 주님 앞에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라고 근심하며 물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 앞에 자주 나와서 진지하게 거룩한 근심을 가지고 “나는 아닌가요” 하고 묻곤 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하라는 이 도전을 우리도 명심합시다. 정말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결코 놓치 아니할 확고한 믿음이 있는가, 정녕 첫 사랑 때와 같이 뜨거운 열심이 지금도 남아 있는가 자신을 헤아려 봅시다. 조용한 시간에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찬송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쇠퇴하며 세상에 악이 점점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며 긍휼을 구하는 열정이 있는가,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품고 그 영혼을 구원해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전도하는 열정이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면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가 아닌가를 점검합시다. 이러한 질문을 던질 때에 주님의 그 제자들처럼 거룩한 염려와 근심이 있을 때에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한다는 증거가 있는 줄 믿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고 있고, 그 속에서 성령이 소멸되어 가고 있으며,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경건의 모양만 간신히 지키고 있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각각 주님께 근심하며 자신의 믿음의 터를 더욱 견고하게 갖도록 다시 한번 각오와 결심을 갖는 자가 됩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그 구원을 견고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성령의 은혜의 옷자락을 붙드는 거룩한 열심이 나타나길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시다. 오늘날 상황과 환경이 우리 자신의 믿음의 연약함을 핑계삼기 딱 좋은 때이지만, 우리가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만 바라보지 말고, 이 시대에도 앞으로만 전진하려고 결심하고 달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봅시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 말씀을 기억합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2~14)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했을 때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손에 결박을 당하고 꼼짝 못할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푯대를 바라보고 영적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영적으로 침체된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안에서 내가 바라보는 영적인 푯대를 하나씩 꼭 가져야 하겠습니다. 경건의 목표들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욕심을 가지고 가만히 있지 않고 달음질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가서 상을 받겠다는 거룩한 소망의 불이 마음에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데살로니전서 5:2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심령 속에 성령의 불이 꺼져가고 있다면, 다시금 힘을 내어 성령의 불이 심령에 타오를 수 있도록 날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차에서도 기도하면서 다시금 성령의 불을 내 마음에 내려달라고 매달리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 중에 누가 자기를 팔 자인지를 아직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베드로가 이번에도 나섰습니다. 23절로부터 2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여기서 ‘예수의 사랑하는 자’는 이 복음서를 쓰고 있는 사도 요한 자신을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머릿짓을 하여 사도 요한에게 누가 예수님을 팔 자인가를 물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기댄 채 머리를 돌려 예수님께 나직하게 “주여 누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떡 한 조각을 적셔다가 주는 자라”고 조용히 말씀하시면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전혀 생각하지 아니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요한의 눈에 항상 신실하고 책임감이 있고 주님이 시키는 일에 잘 순종하는 것으로 늘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사도 요한은 영적으로 가룟 유다에게서 한 가지 섬찟한 영적인 느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그는 27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절 전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그러면 왜 유다에게 떡 조각을 받은 직후에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을까요? 이는 그가 모든 주님의 호소를 의지적으로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은 계속하여 가룟 유다에게 돌이키기를 바라는 손짓을 하고 계셨습니다. 과거에 주님께서 광야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들 예수님을 떠날 때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그 때 사도들이 안 떠나면서, 사도 베드로가 “영생이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면서 그 중에 가룟 유다를 향하여 한 가지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무도 무슨 말인지 휘둥그레 하면서 잊어버렸지만 가룟 유다는 찔렸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가 하고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때 그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아니하면서도 다들 일반 추종자들이 떠날 때 같이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잇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 궤를 맡고 있었기에 자기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남았던 것입니다.
이번 저녁 시작 때에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과 다름없이 가룟 유다의 발을 정성껏 씻어주시고 친히 닦아주셨습니다. 그러할 때에 어찌 그 양심이 흔들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는 양심의 외침을 또 외면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를 다 택하지 아니하였다고 경고하시고, 주님께서 “내 떡을 먹는 자가 그 발꿈치를 들었다”는 다윗의 시편 말씀을 언급하실 때에 또 다시 유다의 양심이 찔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또 다시 자기 마음을 감추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마음에 심히 괴로워하며 얼굴에 그 괴로움이 역력히 드러나는 중에 입을 열어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폭탄선언을 했을 때에 유다는 더 이상 자기 정체를 숨기지 말아야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해주옵소서. 내가 주님을 팔 마음을 먹었습니다. 보소서. 여기 삼십 량의 은전을 주님 파는 대가로 받았습니다. 제가 죽을 자입니다.”하고 고백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 자기 마음을 속이고 주님이 모를 것처럼 “주여, 나는 아니지요?”하고 천연덕스럽게 주님께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계속하여 자기 마음을 속이고 양심을 억누른 체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 주님은 요한의 말을 질문을 받고 다시 한번 빵 조각을 찢어서 초에 적셔서 그에게 주셨으니, 이것은 주님께서 사랑의 의미를 담은 행위이기도 합니다. 룻기에 보면, 모압 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보리 이삭을 주울 때에 베들레헴의 유지 보아스가 그 연약한 이방 소녀를 불쌍히 여깁니다. 점심 때에 룻을 불러 종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게 하고 떡을 초에 찍으라고 말해줍니다. 이는 룻에게 대한 그의 긍휼과 자비를 보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직접 떡 조각을 초에 찍어 주는 것은 그를 향하여 회개하라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가룟 유다는 마음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돌처럼 더 굳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속적이며 간절한 회개의 요청을 유다는 끝내 외면하고 차갑게 뿌리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 사랑의 떡 조각을 아무런 찔림없이, 회개의 마음 가짐 없이 냉혹하게 받아서 입으로 씹어 삼켰을 때에, 그에게 쑥 들어온 존재가 바로 사탄이었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사탄에게 완전히 굴복되고 사로잡혀버리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을 만큼 그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버린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이 이렇게 강하게 사로잡을 만큼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우리 마음 문에 조그마한 틈만 열어 달라고 애걸합니다. 그러나 자그만 기회를 엿보고 조심히 들어온 후에는 그 다음에는 곧장 그 마음과 삶 속에서 폭군처럼 점점 제마음대로 횡포를 부립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우리 생각과 마음과 습관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자기에게 굴복시키고 자기의 종이 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드린 상태가 지속되면 나중에는 돌이키는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해도, 간절한 회개의 요청이 주어진다 해도, 가룟 유다처럼 끝내 멈추지 못하고 멸망의 길 끝까지 달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 마음과 삶에 다가오는 사탄의 공격과 유혹에 대하여 무신경하지 말고 항상 깨어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6:10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에게 경고합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에베소서 6:10~13)
마귀는 우리의 도덕적인 틈을 노립니다. 우리들의 신앙적 의무과 직분 수행의 틈을 노립니다. 영적인 무장에 허점을 노립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납하지 마십시오.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분노, 미움, 시기, 질투, 비방, 정욕, 음행, 우상 숭배, 무속적 행위, 이단, 분쟁, 다툼 등을 결코 범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런 일에 접촉되면 즉시 회개하고 거룩하고 정결함을 회복해야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 교회와 직분의 의무 이행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성실하십시오. 주일 성수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지키도록 힘쓰십시오.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의 영적 싸움의 전선에서 뒤로 물러서지 말고 계속해서 앞으로 조금씩 밀고 나가십시오. 마음에 성령의 뜨거움이 식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탄과 세상이 아니라 내 속에 주님과 성령과 주의 나라가 주인이 되도록 합시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유다의 눈을 바라보시면서 한 말씀을 하십니다. 27절 하반절부터 29절까지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문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예수님께서 유다를 향하여 정면으로 쳐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직역하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빨리 시행하라”는 의미입니다. 가룟 유다는 속으로 예수님을 아무런 장애 없이 대제사장 무리에게 팔아넘길 방법을 찾는 일이 가장 관심사였기에, 그 마음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계시기에,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빨리 시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이제 고난받을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 너는 네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 차례 가룟 유다에게 연민을 가지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그의 마음을 두드렸건만 끝내 그 마음을 열지 아니하고 주님을 팔아버릴 마음을 굳히는 것을 보면서, 이제 예수님은 그를 보내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더 이상 안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기꺼이 사탄에게, 죄와 악에게 저항없이 내어주는 자는 우리 주님조차 살릴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 조각을 초에 찍어주면서 애처롭게 유다의 눈동자를 쳐다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끝내 피한 유다가 빵 조각을 받아 삼켰습니다. 바로 그 때에 사탄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자 가룟 유다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3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러라”
이제 저녁은 깊어지고 어느덧 밤이 되었습니다. 캄캄함이 예루살렘 거리마다 깊게 스며드는 밤에 유다는 어둠 속으로 재빨리 내달리며 자기 몸을 숨겼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달려가는 유다의 주머니 속에는 대제사장에게서 받은 은전이 부딪혀 달랑거리며 소리를 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본래 어둠의 자식이었기에, 그는 그 어둠 속에서 자유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은전을 만지면서 만족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자유로움과 쾌감과 만족감은 사실은 마귀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성공했을 때 느꼈던 악마적인 기쁨과 자유와 만족과 같은 것입니다. 죄악이 일시적으로 가져다 주는 기쁨과 만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가지 못하여 고통과 두려움과 후회로 바뀝니다. 마귀는 자기의 포로가 된 자를 이후에 압박하며 괴롭혀서 결국 저주받은 슬픔과 괴로움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워버립니다. 그리고 아무런 소망 없는 미래, 영원한 형벌의 두려움 속에서 몸부림치게 만듭니다. 그것이 사탄과 그에게 속한 자들의 저주받은 운명입니다. 가룟 유다는 속인 자가 아니라 스스로 속은 자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을 우리가 살펴보는 이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분명한 점을 깨닫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가룟 유다의 피에 대하여 진실로 깨끗하다는 점입니다. 그 악하고 잔인하고 냉혹한 인간을 향하여 그토록 끈질기게 사랑과 연민으로 경고하시고 심령이 괴로워하시면서까지 돌이키기를 원하시며 끝까지 애쓰신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우리의 생각과 기준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한없이 사랑을 베풀고 믿고 사랑했으나 그토록 철저하게 위선으로 대하고 끝내 배반하여 모든 것을 다 망가뜨리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어찌 사랑을 끝까지 베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렇게 완악하게 스스로 멸망 길을 가고 있는 죄인들을 향하여 용서해놓고 돌아오기만을 끝없이 기다리곤 하십니다.
에스겔서 33:11 말씀에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에스겔 33:11)
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완악함, 그 차갑고 잔인하고 능청스러운 배신, 그렇게 완전한 가면을 쓰고서 한결같은 인애와 사랑과 신뢰를 거짓과 이기적인 욕심으로 악용하였던 사람,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 떡을 먹으면서 떡을 찢어 한 조각을 초에 찍어 건넨 그 사랑을 끝내 외면하고 어둠 속으로 나가 그를 팔아넘기려고 달려간 사람, 이렇게 악한 자일지라도 그를 그토록 쉽게 내어보내지 못하고 끈질기게 그를 붙들며 그 마음을 두드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이 안쓰럽고 눈물겹기만 합니다. 바로 이 주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이 그토록 많은 죄와 허물을 범하고도 버림당하지 않고 어둠의 밥이 되지 않고 사탄의 밥이 되지 않고 빛의 자녀로 주님 곁에 남아 있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려고 다가왔을 때에 빛이신 주님은 그의 자녀들을 다 도망치게 하시고 홀로 어둠에 잡혀서 그 밤을 홀로 씨름하고 다음날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피 흘리사 우리 대신 홀로 죽음의 여행까지 떠나셨던 주님,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빛 가운데 영원히 살아나신 주님, 그 덕분에 우리들은 어둠을 완전히 이기고 빛의 아들 딸이 되어 영원히 어둠을 이기는 승리자들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이 끝없는 사랑 안에 거합시다. 예수님의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랑의 포로로 기꺼이 남아 있습시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들도 기꺼이 용서하고 축복하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랑의 사람들이 됩시다.
지금도 마귀는 틈을 노리면서 자기 사람들을 만들려고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마귀는 주님의 사도들 중에서도 자기의 밥이 될 자를 찾아내었습니다. 처음에는 틈만 노렸고 나중에는 서서히 그 속에서 자리잡고 어둠의 힘을 발휘하여 빛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끝내 자기의 종으로 삼아 주님을 팔아넘기는 데까지 성공했습니다. 우리라고 해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방심하지 맙시다. “주여 내니이까” 하고 모든 사도들이 주님께 물었듯이, 우리도 두려움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마귀와 세상과 육신의 공격에서 지켜가도록 항상 깨어 있읍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은 아시니, 우리 모습 그대로 주님께 맡깁시다. 주님의 품에 기대어 누워 식사한 요한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따스한 품에 기꺼이 안깁시다. 우리 발을 그 손으로 씻어주신 주님은 우리에게 그 따스한 품까지도 내어주시고 우리 안의 두려움, 외로움, 상처, 괴로움들을 다 치유해주시고, 삶의 현장에서 배신의 괴로움까지도 친히 겪으신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당한 배신의 상처도 치유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끝까지 동행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어 빛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살게 도와주시고 마지막 날 다시는 밤이 없고 죄가 없고 마귀가 없는 빛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들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