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동 쪽방촌에서 활동하다보면
최봉명 바오로 돈의동주민협동회 간사
“야, 니 뭔데 여기 와서 지랄이고, 니 자꾸 그람 뒤진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낸다. 칼이다. 과도도 안 되는 작은 크기지만 나에게 향한 건 분명히 알겠다. 내가 있는 게 싫다는 것도 알겠다. 나는 순간 화가 났고 사실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일이 더 커지면 내가 이 동네에서 일하기가 힘들겠다 싶어 일단은 답답한 마음을 실어 보는 앞에서 담배한대 물고 돌아섰다.
벌써 5년이 지난 사건이다. 처음 주민들과 뭘 해보겠다고 들어온 건 새뜰마을사업이라는 재생사업을 통해서였다. 당시 난 PM(project manager)으로 일하며 주민들이 참여하는 주민 주도의 지속가능한 마을을 만들겠다는 다소 거창한 꿈을 안고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일을 할수록 깊어지는 질문이 있었다. 난 주민을 쪽방에 거주하는 취약계층으로 생각해 왔는데 -이 새뜰마을 사업은 운동이 아닌 사업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관이 발주한 용역이었다. 난 용역의 일정부분을 담당하는 고용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용역 속에서의 주민은 내가 생각하는 취약계층이 아닌 쪽방의 집주인 혹은 관리자였다. 사업설명회를 해도 세입자인 취약계층은 보기 어려웠다.
“야, 니 먼데 여기 와서 지랄이고…” 하며 내게 친절한 가르침을 준 사람은 내가 생각한 주민, 취약계층이지만, 그는 나를 뜨내기로 생각했고, 용역에 관심이 있던 주민, 집주인은 나를 세상모르는 돌아이 정도로 취급했다. 그렇게 난 헛발질을 1년여 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그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출구전략을 찾기로 했다. 우선 내가 한 1년여 정도의 과정을 성찰하였다. 왜 실패하였는지 이유를 고민하였다. 내가 찾은 이유는 첫째 내가 취한 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용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용역은 타임테이블에 따라 일을 진행한다. 성과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난 너무 낭만적이었다. 그리고 좀 나이브했다. 둘째 내가 주민들을 잘 안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다 고려해보면 내가 양쪽에게 외면을 당한 것은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고 싶은 원의는 잊지 말자
그럼 향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2가지를 가져가기로 했다. 첫째 내가 들어오면서 가졌던 마음 즉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고 싶은 원의는 잊지 말자고 했다. 사업의 성과에 적합한 이웃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이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정의를 명확히 하자. 둘째 적절한 틀을 찾자. 그러기 위해 용역보다는 시민운동 속에서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난 시민운동에 대한 경험이 전무해서 아는 분들에게 물어물어 동자동사랑방 사례를 추동했던 한국주민운동교육원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최종덕 트레이너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 그와 종로3가역의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면서 장소에 다다랐다. 그는 생각보다 작은 체구에 잿빛 머리를 하고 가방을 메고 서있었다. 그와 가볍게 악수를 하고 어디를 갈까 잠시 고민하다 서로 식사가 필요한 걸 알고 6층의 청수장으로 갔다. 짜장면 2개를 시키고 바로 내 고민과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어차피 포장은 필요 없다 싶었다. 내가 한 말의 요지는 난 이런 이유로 들어와 일했고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관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난 혼자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신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난 욕심이 없다. 좀 멍청하다… 등이었다. 그는 나를 좀 바라보더니 “그럽시다. 그리고 같이 할 사람들도 같이 만나서 이야기해봅시다.”라고 했다. 덕분에 어찌어찌하여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이웃’을 계속 만나면서 그들과 술도 먹고, 놀고, 가끔 교육도 하고, 회의도 하면서 마을 안에서 일을 도모하면서 지내왔다. 지금은 그러한 이웃들이 ‘돈의동주민협동회’를 만들어 주민공제조합운동, 마을식당, 주민장례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공제조합을 통해 출자한 회원수는 158명이고, 총 출자금은 1700만 원 정도이다.
마을식당은 11~13시까지 점심을 제공하며 평소 때는 사랑방 안에서 식사를 하였지만 코로나사태 이후 4일간 중단되었다가. 주민들의 요구와 주민협동회 회원들의 위대한 헌신으로 오히려 연중무휴로 진행하고 있다. 물론 안에서 식사는 못하고 개인 식기를 가져와 외부에서 음식을 나눠주면 자기 방에 가서 먹는 걸로 하고 있고 외부인은 한동안 받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활동가인 내가 아닌 주민들이 결정하였고, 그들이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결정하고 그들이 실행하는 것이 중요
나는 지금 돈의동주민협동회의 간사로 일하고 있다. 웃을지 몰라도 간사라는 직함도 그냥 내가 만든 거다. 주민들은 나의 직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가 최근에 참여주민들이 늘어가면서 이제 나의 직함을 부르기 시작한다. 최 간사가 내 직함이자 이름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 도와드리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멋진 인생 행복하고 존경받는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난 그들을 사랑한다.
5년 전 내게 “시발…”하며 가르침을 주었던 그 양반도 형님하면서 마을에서 지낸다. 아직까지 그 기억으로 서로 어색하긴 하지만 서로가 패를 보았으니 지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최 간사, 좀 이리지마라, 그람 힘들어”하며 오히려 살가운 걱정을 해준다.
이곳에서의 활동이 해피엔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네버엔딩이었으면 한다. 주민들과의 갈등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좀 힘들뿐이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더 단단한 신뢰라는 자산을 만들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뭐든 할 것이다. 우리 주민협동회의 활동이 이를 증명한다. 아무런 보증도 없이 믿고 출자한 158명의 회원 그리고 1700만 원, 또 주민이 참여한 무보상, 무보수의 원칙으로 운영되고 있는 마을식당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요새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는 것은 주민이 출자하고 운영에 참여하는 주택이다. 기존 쪽방의 비싸고 적절하지 못한 주거환경을 주민들의 참여로 해결하는 주거를 구상하고 있다. 이른바 ‘사회적 주택(social housing)’이다. 그런데 이는 주민들만의 힘으로는 좀 어려워 보인다. 협력과 연대의 기회가 필요하다.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주세요.
돈의동 쪽방촌은 종로3가 단성사 뒤편의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서 위치해 있다. 고층건물 뒤편이라 큰길에서는 쪽방촌이 있는지 상상조차 어렵다. 돈의동은 쪽방으로 이용되는 건물이 85개, 쪽방의 수가 737개, 거주하는 주민들이 576명에 이를 정도로 서울 5대 쪽방촌 중에서도 그 규모가 서울역 쪽방촌 다음으로 큰 지역이다.(2019년 기준) 쪽방촌에는 취사장이 없는 주택이 8개, 세탁장이 있는 주택은 5개에 불과하고, 샤워실이 있는 주택 역시 7개에 불과하여 서울 5대 쪽방촌 중에서도 가장 적다. 심지어 화장실이 없는 주택도 5곳이나 되고 세면장이 없는 주택도 3곳이나 되는 비주택 주거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