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단독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조하에 한국 지배뿐 아니라 중국 분할에도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과 영국은 교섭을 거쳐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이에 대항해 러시아는 3월에 러시아-프랑스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국제외교에서 수세에 몰렸다.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후인 1905년 7월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어 8월 12일 일본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하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은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했다.
이어 1900년 6월 중국의 의화단(義和團)이 만주에서 러시아가 건설중이던 동청철도(東淸鐵道)를 공격하자, 러시아는 자국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18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주요지역을 점령했다. 1901년 1월 러시아 공사 이주볼스키는 일본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에게 한국을 열강의 보장하에 중립화할 것을 제의했으나, 일본은 "만주는 러시아에, 한국은 일본에"라는 한만교환론으로 대응했다.
이에 러시아는 람스도르프-양유[揚儒] 밀약을 체결, 만주의 보호령화를 꾀했으나, 영국·일본·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이 항의함으로써 밀약을 포기했다. 러시아의 남진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1900년 독일·일본과 양쯔 강[揚子江] 협정을 체결하여 청(淸)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는 만주지역에서 러시아의 기득권은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결과 영국은 일본과 연결하여 동아시아에서 자국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일본 내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정치인들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그리하여 같은 해 12월 영국 주재 일본 공사 하야시[林董]와 영국 외무대신 랜스다운 간의 교섭을 거쳐 1902년(광무 6) 1월 30일 런던에서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동맹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는데, 주요내용은 ① 영·일 양국은 한·청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 ② 영·일 양국 중 일국이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 동맹국은 중립을 지킬 것, ③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할 것, ④ 본 협약의 유효기간은 5년으로 할 것 등이었다.
영일동맹의 체결에 대항해 러시아는 '중국과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강조하면서 같은 해 3월 러시아-프랑스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국제외교에서 크게 수세에 몰렸다.
이어 같은 해 8월 12일 일본은 영국과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하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는 정치상·경제상·군사상의 이익을 보장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를 취할 것 등이었다. 이렇게 하여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