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본에서 귀국하는 시간이 늦은 오후였다.
어둠이 내리고 영종도 공항을 운행하는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버스가 지나오는 바다 주변 도로에 가로등들이 켜져 있었다.
거기를 지나오는 동안 쓸쓸할 정도로 단정한 주변 야경에 마음 차분해지던 기억이 난다.
야경이 유명한 거리들이 있다. 오사카의 야경이 유명하고
또 우리나라 롯데월드 전망대에서의 야경도 볼만하다지만 난 그런 화려함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고교시절 가끔 지나가는 서울 퇴계로 삼일로 주변의 하얀 가로등을 좋아하곤 했다.
또 한적한 공원에서 나무들 사이에서 질서정연하게 서있는 가로등에 애련미를 느낀다.
겨울 늦은 저녁 어느 공원에서 잎 떨어진 나무 사이에 서있는 주황색 아르곤 가로등,
거기에 내리던 눈이 멈추고 나무 사이에서 하얀 눈밭에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은
내 안에 뭔가 사무치는 감정을 일으킨다.
기나긴 겨울 고독한 침묵 속에 밤을 지새는 벌거벗은 나무의 모습에도,
그 나무와 더불어 혹한을 지내는 몇 개 안 되는 가로등의 모습에도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재래식 시계를 잘 차지 않는다.
전자 시계에서 각종 다기능 시계가 등장하다가 요즘은 스마트 워치가 대세다.
그런데 나는 단 한번도 다기능 시계나 스마트워치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여
선물 받은 고가의 시계가 고장나자 지금은 날짜도 요일도 표시되지 않는 40~50년 전
단순형의 시계를 차고 다닌다.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단순미와 애련미가 깃들어있는 것이다.
활짝 피어나는 국화나 장미도 아름답지만
절정을 지나 시들어가는 국화와 장미에겐 애련미가 있다.
수십년 전에 읽었던 막스 밀러의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책.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짧은 분량의 그 소설에 빠져들어간 것은
그 안에 등장하는 병색 짙은 마리아라는 여주인공 때문.
병이 깊어 죽어가는 그 아가씨는 순결한 백합 같은 형상이었다.
그런가 하면 춘희에 나오는 마르그리트 고티에.
폐병 걸린 매춘부였지만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아르망의 헌신에 마음이 움직여
매춘부 생활을 청산하고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아르망의 부친의 부탁으로 아르망과 절연하고 죽기까지 그녀는 시들어가는 국화와 같았다.
방금 출간되어 나온 책은 힘차고 싱싱하여 젊은이의 육체와 같고
내 서재에 꽂혀있는 40~50년 지나 노후된 종이 냄새마저 나는 책들은 노인과 같다.
그래도 그 책들은 그 책들에게만 독특한 권위도 보이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속에는 화려한 기능도 필요하겠지만
가끔씩은 마음을 잔잔하게 하고 아련한 옛날과 이어주는 애련미도 필요하지 않을까?
2025. 4. 5
이 호 혁
첫댓글 공감의 글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멘~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은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