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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3월 21일 토요일
[(자)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아 악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이들에게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말을 먼저 들어 보고 하는 일을 알아보고 심판하자고 한다(복음).
제1독서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18-20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그들에게 다가올 불행을 선포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진 예언자였습니다. 오늘 독서에는 그가 마주한 가장 쓰라린 장면이 펼쳐집니다. 잠시 머물던 고향집에서 누구보다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던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그를 죽이려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알려 주신 덕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예레미야는 충격과 배신감 속에서, 자신을 아무것도 모른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그는 폭력 앞에서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예언자의 길을 걷는 사람답게 그는 순순히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며 걸어갑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복수’를 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 분노에서 비롯된 복수가 아니라, 정의로우신 만군의 주님께서 당신 기준으로 판단하시고 이루시는 ‘의로운 복수’였습니다. 억울함을 폭력으로 갚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의 정의에 내맡기는 신앙인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시대의 예언자입니다. 자기 민족에게 닥치는 불행이라 할지라도 진실을 침묵 속에 묻어 버리지 않고 기꺼이 외쳤던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께 고백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로 우리 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억울함과 상처가 우리를 흔들어도 그 감정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주님의 정의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저마다 맡겨진 예언자적 삶에 성실히 응답할 수 있기를 다짐합시다.(김재형 베드로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보급부대입니다. 아무리 용감한 군인도 먹을 것과 무기가 끊기면 싸울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러시아에서 패배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길게 늘어진 전선에 보급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이후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전세가 뒤집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 보이지 않는 지원이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혼자 피지 않습니다. 땅속에서 보이지 않게 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가 있고, 햇빛을 받아 묵묵히 광합성을 하는 잎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을 때 비로소 꽃이 피어납니다.
지난 2월 저는 플로리다 키웨스트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즐겁게 쉬고 왔지만, 그 여행 뒤에는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었습니다. 항공권과 숙소를 준비해 준 신부님, 운전해 준 신부님, 음식을 준비해 준 형제님, 늦은 밤 지친 저희를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 주신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저는 꽃처럼 즐거웠지만, 누군가는 뿌리처럼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수고가 없었다면 여행의 기쁨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하느님께 자신의 송사를 맡깁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주님,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억울함과 고통을 하느님께 맡기는 신앙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은 국제사회의 연대를 통해 도움을 받았습니다. 불의한 침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정의는 더디게 보일지라도 결국 하느님께서 세우십니다.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사랑이 실천되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자주 혈연, 세대, 지역, 학연이라는 틀에 갇혀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틀을 넘어 모든 이를 품으셨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좁은 틀을 허무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단식, 희생과 자선을 통해 우리는 ‘보이는 꽃’이 되기보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는 법을 배웁니다. 달라스에도 봄꽃이 피고 있습니다. 말없이 싹을 틔우는 새싹을 보며 묵묵한 충실함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뿌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누군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위해 나눌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꽃이 되기 전에 먼저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박수 받기 전에 먼저 섬겨야 합니다. 드러나기 전에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나에 대한 말들보다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있으니
나에 대한 말들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나에 대한 말들이
빚는 내가 아니라
나에 대한 말들을
빚는 나이기를
내가 있으니
나에 대한 말들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나에 대한 말들을
좇는 내가 아니라
나에 대한 말들이
좇는 나이기를
내가 있으니
나에 대한 말들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나에 대한 말들이
품는 내가 아니라
나에 대한 말들을
품는 나이기를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이 갖가지 반응들을 전해줍니다. 곧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율법학자들 중에는 갈릴래아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고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 의존하면서 완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곧 내 생각과 경험과 다른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들입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증세가 심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그렇게 그 완고한 마음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 생각과 내 뜻에 따라서만 살아가는 ‘완고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에 언제나 따를 수 있는 ‘열려진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그 완고한 마음을 통해 사람들을 소외시켰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로부터 소외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이들을 다시 회복시키고 구원하시려고 오신 사랑의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늘의 성인
성녀 베네데타 (Benedetta Cambiagio Frasinello)
신분 : 설립자, 수녀
활동연도 : 1791–1858년
같은이름 : 베네데따, 캄비아조
성녀 베네데타 캄비아지오 프라시넬로는 1791년 10월 2일 이탈리아 제노바(Genova)의 란가스코(Langasco)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고 이는 그녀의 믿음에 깊숙이 뿌리를 박았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아직 어린 소녀였을 때 파비아(Pavia)에 정착했다. 성녀 베네데타는 20세 되던 해에 신비한 체험을 겪고 기도와 속죄의 삶을 살며 하느님을 위한 축성된 삶을 갈망하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녀는 1816년 조반니 프라시넬로(Giovanni Frassinello)와 결혼하고 2년 동안 함께 지냈다.
1818년 남편 조반니는 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각자 '형제와 자매로서' 순결하게 지낼 것을 약속하고 대장암으로 투병 중인 성녀 베네데타의 여동생 마리아를 간호해 주기로 하였다.
1825년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후 조반니는 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Hieronymus Aemiliani, 2월 8일)가 설립한 '소마스카(Somascha)의 성직 수도회'에 입회했고, 성녀 베네데타는 카프리올로(Capriolo)의 우르술라회에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였다.
그녀는 일 년 후 건강상의 문제로 파비아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에 의해 기적적으로 완전한 치유를 받았다.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주교의 허락하에 어린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성녀 베네데타는 도움이 필요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파비아의 토시(Tosi) 주교는 조반니에게 소마스카의 성직 수도회를 나와 성녀 베네데타를 도와주도록 권고하였다.
둘은 서로에게 온전한 순결을 맹세하고 도시의 가난하고 소외된 소녀들의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교육적인 활약은 파비아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성녀 베네데타는 여성 최초로 이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기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녀를 '공교육의 장본인'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녀는 젊은 여성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생활 규칙을 만들어 교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성녀 베네데타는 일반 교육과 더불어 교리교육을 실시하였고 요리와 바느질 같은 유용한 기술을 가르쳐서 학생들을 '그리스도인 삶의 모범'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고 또 가족의 형성을 돕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녀 베네데타의 업적은 당시에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유력한 인사들로부터 반대를 받았고 몇몇 성직자들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1838년에 자신이 만든 조직을 파비아의 주교에게 넘기고 조반니를 포함한 5명의 동료들과 함께 제노바 지방의 론코 스크리비아(Ronco Scrivia)라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비아에서 했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여학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녀 베네데타는 베네딕토 섭리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소녀들에게 학업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곤 했고, 가난과 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수녀회는 그 규모를 점차 확대시켰고 성녀 베네데타는 죽을 때까지 수녀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1858년 3월 21일 론코 스크리비아에서 생을 마감한 성녀 베네데타는 초자연적인 모성애의 모범이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용기와 충성심을 보여준 좋은 본보기였다.
오늘날 베네딕토 섭리 수녀회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부룬디(Burundi),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 페루, 브라질에 퍼져 있다. 그들은 어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나약한 이들을 돌보고 있다.
설립자인 성녀 베네데타는 보게라(Voghera)에도 수녀원을 세웠는데, 그녀가 생을 마감하고 40년이 흐른 후 그곳의 주교는 그 수녀원을 나머지 수녀회와 분리하여 설립자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하느님 섭리의 베네딕토 수녀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녀는 참된 아내이자 설립자였다.
성령께서 그녀를 이끌어 결혼 생활에서부터 교육과 종교적 정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남편의 관대한 도움으로 그녀는 젊은 여성들을 위한 학교와 종교 단체를 세울 수 있었다. 성녀 베네데타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가정을 만든다는 것과 여성들이 완전한 교육을 제공받아야 할 의무를 활성화시키고 젊은 여성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개척자로 여겨진다.
그녀는 1987년 5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세라피온 (Serapion)
신분 : 주교, 교부, 증거자
활동지역 : 트무이스(Thmuis)
활동연도 : +362년?
같은이름 : 세라피언, 쎄라피온
성 세라피온은 4세기 중엽에 이집트 나일 델타 지역의 트무이스 주교로 활약하였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젊었을 때에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의 제자로 지냈고,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친구이자 후원자로 활약했다는 것뿐이다.
성 니콜라오 데 플뤼에(Nicholas de Flue)
신분 : 은수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 1417-1487년
같은이름 :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스위스의 옵발덴 칸톤 삭셀른 교외의 비옥한 평야에 위치한 플뤼얼리 태생인 성 니콜라우스 데 플뤼에(Nicolaus von Flue, 또는 니콜라오)는 도로테아 비스와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고, 5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439년의 취리히 전쟁에서 주민들과 합세하여 싸웠고, 1453년의 전쟁에서는 대장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공직자가 되는 것을 꺼렸다
1467년 그의 나이 50세에 때에, 그는 아내와 자녀들의 동의를 얻어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고향 근교인 란프트 움막에서 9년 동안을 지냈다. 이때부터 그는 성덕과 지혜로 명성이 드높았고, 주민들과 지도자들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481년의 스위스 연방을 확립할 때 프리부르와 솔레르의 합병에도 큰 공을 세웠고, 부르고뉴(Bourgogne)의 찰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도 한 몫을 하였다. 그는 스위스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수도자의 상을 정립하였고, ‘클라우스 수도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487년 3월 21일 자신의 움막이 있던 란프트에서 선종하였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 (Pius XII)에 시성되었다. 그는 스위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스위스와 독일에서는 그의 축일을 9월 25일에 기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