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선추(摺扇墜): 쥘부채에 달린 고달이.
사조제(謝肇淛)가, ‘취두선(聚頭扇)이라는 부채는 바로 동남 지방 외국의 물건이므로 중국에도 옛날에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원(元) 나라 이전엔 둥근 부채[團扇]만 있고 접는 것은 없었는데, 원 나라 초기에 외국 사신이 가진 접선(摺扇)을 처음 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우습게 여기면서도 이것이 풍속으로 되어 천하에 두루 퍼지기까지 하였다.
둥근 부채는 출입할 때 소매 속에 넣고 다니기가 알맞지 않기 때문이고 부채에 추자(墜子)가 있게 된 것은 궁중(宮中)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는 대개 부채를 사용하지 않을 때 의대(衣帶) 사이에 걸어 두기가 편리토록 하기 위한 것인데, ‘송 고종(宋高宗)이 대신(大臣)을 불러 잔치할 때 장순왕(張循王)이 가진 부채에 옥해아추자(玉孩兒墜子)가 있는 것을 보았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리라. 더러는 합향(合香)을 사용하여 여름철에 나쁜 냄새를 피하기도 하였으니, 중국에서 전래한 풍속은 이같은 데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강목(綱目)》에, “제 고제(齊高帝) 원년에 저연(褚淵)이 조정(朝廷)으로 들어올 때 요선(腰扇)을 갖고 얼굴을 가리니, 유상(劉祥)이, ‘부끄러운 얼굴로 남을 보는데 부채로 가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하였다.
그리고 그 주에서 호삼성(胡三省)은, ‘요선은 허리에 차게 만든 부채인데, 지금 소위 《접첩선(摺疊扇)》이라는 것이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이 접는 부채가 중국서도 유행된 지 역시 오랜 것이나, 다만 이 요선이 반드시 접첩선이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소동파는 “고려의 백송선(白松扇)이란 부채는 펴면 넓이가 한 자 넘고 접으면 다만 두 손가락 부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북송(北宋) 시대에 이미 이 접는 부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접는 부채만 사용하는데, 추자에는 투서(套署)를 만들어 찍게 되었는바, 그 한복판을 비워서 전문(篆文)으로 새긴 자그마한 도장을 간수해 두었다가 봉함(封緘)과 낙관(落款)으로 쓰도록 한다. 또 별도로 향추(香墜)라는 것이 있는데, 이도 역시 그 한복판을 비워서 이쑤시개[刺齒]와 귀이개[捎撾] 따위를 간수해 둔다. 이는 반드시 관작(官爵)이 있는 자라야 갖게 되는 것인데, 더러는 부채 하나에다 두세 개의 추자를 만들어 단 자까지 있다.
출전 : 성호사설 만물문
접는 부채의 역사가 매우 깊네요. 이왕이면 야운위원님께서 쓰신 글의 뜻도 소개해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동지에 책력(달력)이요, 단오에는 부채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채도 유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부채 꼭다리에까지 치장을 하였습니다.
당시 접이식 부채가 가히 유행상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접이식 부채는 보통 대나무 살을 붙여 제작을 하는데, 오죽하면 대나무 소비를 고려하여 나라에서는 신분에 따라 부채살 갯수를 제한했다고 합니다.
木之必花 花之必實
(목지필화 화지필보)
나무는 필히 꽃이 피고, 꽃은 필히 열매 맺는다.
*華=花
*芲=花
야운 위이환 님
결국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좋은 원인이 좋은 결과를 낳지요. 콩심은데 콩나듯이요.
잘보고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