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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사랑함의 최종보스, 천국에 가기 위한 순종
딤후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해주시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깨달아
회개하여 돌이킨 후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내 자신보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장 우선하게 되었기에
이 땅에서의 출세와 성공이었던 인생의 목적이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그 분의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으로 확정하고,
이제 자기를 부인하여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 배설물, 물거품으로 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를 힘써 그 교훈을 따라 순종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와 같은 전인격적 변화와 거듭남의 과정 없이
무섭다는 지옥을 피해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서,
혹은 이 땅의 것들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돈과 성공과 건강과 안전을 얻거나 보장받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그 마음에서 나오는 순종은
‘아직 부족한 신앙’이 아니라 애초에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알고, 예수님께서 자기 대신 죽어주신 것도 알며,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해주시며 인도해주시는 것도 알고,
천사와 마귀,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
즉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긴 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천국이든, 돈이든
뭔가 얻어내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한 자리씩 차지해서 출세하기를 바라던
(예수님의 수난, 부활, 승천 이전의) 예수님 제자들과
그저 육신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기대감으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순종과 완전히 같아 보이거나 비슷해보여도
마지막의 결과는 정반대,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과극의 차이로 벌어질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에 출석만 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외적으로 볼 때엔(사람의 눈으로 볼 때엔) 확실히 순종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 순종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우상숭배에서 비롯된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마음에서 나오는 ‘다른 의도를 가진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잘 살았지만 나와 함께 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자.”,
혹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해주고 계신 것처럼
“너는 나의 참된 자녀가 되고 싶구나.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여러 모로 힘겨운 고난의 삶을 나와 함께 통과할 수 있겠니?”라고 하셔도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쁘게 순종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로
자신의 신앙이 과연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그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나님과 함께라면 장소가 어디든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인생의 목표를 가진 사람은
주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최우선적으로 즐겁게 순종하는 것을
가장 큰 행복, 자신의 존재의미, 정체성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든 상관없이 오로지 천국에만 가고 싶어 할 것이고,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와 고난 없는 안락한 삶을 사랑하여
어떻게든 절대 놓지 않고 붙들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으로 자신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에만 계시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신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더라도 무조건 천국에 가고만 싶다고
대답하기는 싫기에 이런 말로 논점을 흐리며 회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인생에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나는 반드시 큰 고난 없이 평생 부유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맡고 싶어. 힘든 건 딱 질색이야.”
마 19:20-23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을 정말로 가진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순종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자신의 삶속에서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기가 싫은 것이 있다면,
그리고 순종하기 싫은 이유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자신의 기분과 자존심과 돈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에)
그 사람이 지금껏 해온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관계없이 시작된 그저 흔한 종교생활,
이 땅에서 잘 되는 것과 내세의 안식을 얻기 위해 모이는
다른 종교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기복신앙이었던 겁니다.
예를 들어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관심을 가지며 잘해주는 이유가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돈이 탐나서라면,
혹은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기 위함뿐이라면
그것은 애초에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것도 어떤 목적이냐에 따라,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결국 지옥으로 향하는 우상숭배가 될 수도(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숭배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참된 신앙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애’라는 것은 자기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불쌍하게 살아온 나, 상처를 많이 받은 나,
누군가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받아야만 하는) 나,
즉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보호하려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이 자기애는
어린 시절 겪었던 정서적/육체적 학대나 학교폭력, 군대에서의 부당한 폭언 폭행,
억울한 누명,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배신당함, 착취, 정신지배 등의
충격적인 일을 경험한 이후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처음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그 모든 일들과 평생 함께 했으니
그것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는 것’ 중의 하나이며,
많은 경우 바로 이 부분이 성화의 최종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심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위치해있기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자각하거나 인정하는 것을 너무나도 어려워하기에,
또한 가장 근본적인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일이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정의 거의 마지막 페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부분은 각 사람마다 다르고,
어떤 이는 아직 최종단계를 말할 수 있는 영적상태가 아닐 수도 있기에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단계는 막바지의 성화단계라고 봅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그동안 그토록 되지 않던 것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하게 순종하기가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지던 것들이
성령님의 주도로 하나씩 ‘되어 지기 시작’하는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었던 주권을
이제는 성령님께 완전하게 드리는 과정이 바로 이와 같은 ‘자기를 부인함’입니다.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는 복잡하고 심란한 일들과 그와 관련된 생각들,
자꾸만 발목을 잡는 과거의 일들에서 비롯된 너무나 마땅하게 느껴지는 나의 주장,
그 누구에게 질문해도 다 내 말이 옳다고 동의해줄 것 같은
나의 굳은 생각과 가치관, 고정된 관념들,
또한 나에 대한 여러 가지 변명과 자기 방어적 주장, 자기합리화, 변명을 넘어선 궤변 등등
나라는 존재, 평생을 살아오면서 굳어진 모든 생각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 세우는 과정이기에 단순하지 않고, 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벧전 2:21-25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뜨겁게 기도를 하는 집회를 할 때에
엉엉 우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누군가 울면서 뜨겁게 기도를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그 중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자기연민, 자기애에서 오는 눈물입니다.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잔인하게 죽인 당사자이기에 너무 죄송해서,
자신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조차 정말로 송구스럽고,
그 죄들을 범한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변함없이 지켜주시며, 사랑해주시며, 기다려주셨던 하나님께 감사해서,
어떻게도 그 은혜를 갚을 방법이 없기에 정말로 감사해서
이제는 자신을 부인하고, 인생의 목적을 180도 뒤집어
예수님을 따라가기로 작정하는 마음에서 오는 참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기도회 이후에도 좀처럼 변화와 성장이 되질 않는,
새롭게 거듭나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없이
여전히 자존심을 중요하게 세우고,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건드리는 자를 증오하며 용서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의 것들을 너무나도 사랑하며, 그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만 열심히 기도하고,
같은 죄를 반복하여 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명확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보호하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확고하게 굳어진 ‘자기애’이며,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모든 이가(불신자들도) 그토록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노래 말고도 찬양예배 때에 부르는 CCM들 중에는
‘그 누구도 몰라주는 나의 상처를 알아주시는 하나님,
어루만져주시며 위로해주시고 다시 일으켜주시는 하나님‘
이런 내용의 가사를 가진 노래들이 많고,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자기연민에 깊이 빠진 채 불쌍한 나, 인생이 괴로운 나,
슬픈 나, 위로를 필요로 하는 나, 이제는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하는 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배설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을 은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모습으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깨달음과 성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예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찬양을 정성껏 올리지도 않는 자들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당신의 자녀들을 각각 모두 이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노래들을 찬양이라면서 불러선 안 되고,
꼭 불러야 한다면 예배가 아닌 오로지 기도집회 때에만 짧게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가사를 가진 노래만 예배이며,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오직 성령님께서 임해주셨을 때에만 나타나는데
성령님께서 사람에게 임해주셨을 때에는 자기연민에 감정이 복받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덜덜 떨면서 뒤로 나자빠지는 것도 아니라
진실한 회개가 마치 화산이 분화하듯 터져 나옵니다.
(한국교회 성도라면 다 아는 어떤 대형교회에서는
기도할 때에 뒤로 넘어져서 눕지 않으면 그게 바로 성령님에 대한 악한 불순종이라며
자동으로 뒤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누우라고 가르칩니다.
제가 청년 때에 가본 어떤 교회에서 직접 목사로부터 들은 내용이며,
이런 가르침은 신사도 운동을 하는 이단교회들의 특징으로서
그런 외적인 현상을 대외적으로 자랑하며 지금도 성도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요 16:8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일 1:9-10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성령님께서 임해주심으로 나의 숨겨진 크고 작은 죄들이 밝히 드러났을 때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여 철저하게 회개하고,
이제는 완전히 돌이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은혜를 받은 자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마 7:18-21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자기연민에서 출발한 자기애에 사로잡혀 엉엉 울면서 두 손을 들고
자신을 위로하는 노래들을 줄곧 부르고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이런 것들이 바로
과거의 일들에서부터 학습된 가치관이 겹겹이 쌓인 ‘자기를 사랑함’이며,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경험에서,
그리고 책이나 영화 등의 계몽을 품은 것들을 통해,
즉 다른 사람의 주장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높고 두꺼운 벽을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 혹은 마귀가 주입한 악한 가치관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모두가 품어야 하는 중요한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강조해주시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시 새롭게 태어나서(거듭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원래의 존재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더해진,
예수님을 닮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과 죄악에서 온 잘못된 가치관들,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학습한 고집들,
시대에 따라 쉽게 바뀌는 사회적 고정관념 등이 다 버려지고,
원죄 이전의 순수한 피조물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제는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가 더해진 선함,
나의 주장이 중심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과 합한 마음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각과 가치관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입니다.
요 3:3-8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거듭나고 나면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고난을 통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 그것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괴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의 선함을 닮아가며, 사랑하면서 자비로운 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천국에 합당한 자의 모습을 점점 갖춰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깊숙하게 숨겨진 자기애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창 38:6-26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는 ‘엘’, ‘오난’, ‘셀라’라는 세 아들이 있었고,
유다는 장남을 위하여 ‘다말’을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엘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했으므로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그런데 엘은 아들을 낳기 전에 죽었으므로 계대결혼제도에 의해
동생 오난이 형을 대신하여 다말과 동침하여 아들을 잉태시켜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와 동침하던 중에 형수의 몸 안에 사정하지 않고 땅에 사정을 합니다.
이 행위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오난을 죽이셨습니다.
이제 다말은 유다의 셋째 아들인 셀라와 동침을 해야 하는데
유다는 셀라까지 죽을까 염려하여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친정에 가서 기다리라고 말하는 방법으로 다말을 내쫓습니다.
유다의 아내가 죽음을 맞이한 후 양털 깎는 시기가 되어 유다는 딤나로 가게 됩니다.
시아버지가 딤나에 왔다는 말을 듣게 된 다말은
과부의 의복을 벗고 얼굴을 가리는 창녀의 의복으로 갈아입은 후 시아버지와 동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유다가 규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에게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받은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와의 동침으로 인하여 임신을 하게 되었고,
석 달쯤 후에 임신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결국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불태우라고 명령합니다.
당시 간음을 하거나 간음으로 인한 임신 사실이 밝혀지면
화형에 처하는 규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의 재판장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소유한 족장, 유다였습니다.
당시에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소유한 사람은 부족의 족장으로서
사법권과 행정권을 모두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말은 자신을 임신시킨 사람이 바로 시아버지라는 증거물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제출하여 무죄를 인정받습니다.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며
족장답게 용기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잘못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여 진상을 밝혔습니다.
유다는 계대결혼제도라는 하나님의 언약규례를 자기 마음대로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며느리인 다말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규례를 지킴으로써
족장인 유다보다 옳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끊어질 뻔 했던 메시아의 계보가 다말을 통하여 계속 이어짐으로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에 많은 분들이
다말을 음란한 근친상간의 부끄러운 여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은 다말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을 담은 설교도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규범,
혹은 개인의 판단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봅니다.
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사별의 슬픔도 많고, 아들들을 둘이나 잡아먹은 여자라는 취급을 받던
괴로운 시집살이를 끝내버리고 멀리 떠나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을 것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평안한 인생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최우선적으로 순종하는 선택을 목숨 걸고 했습니다.
솔직히 어떤 젊은 여성이 아버지뻘의 늙은 할아버지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하지만 다말은 자신의 원대로 하는 것보다
계대결혼제도라는 하나님의 언약규례를 지키는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함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기 위한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을 선택,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해낸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애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경외하는 것을 선택한 다말로부터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졌고, 그녀는 의로운 자로 성경말씀에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애에 빠져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모습으로 기분을 따라 행동했다면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가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거나, 악한 자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 또 한 명의 멋진 여인이 있습니다.
요 19:23-25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품에서 평생 키운 귀여운 아들이며, 사랑스러운 효자였습니다.
죄 없는 그 아들이 모두의 미움과 멸시를 받으며
잔인하게 찢기고, 찔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의 시간을 끝까지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모성애는 하나님의 사랑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말도 있듯
자신의 아들이, 그것도 사랑스럽기가 한이 없는 효자가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아마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서
“야 이 독사의 새끼들아! 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나 하는 짓들이냐!
당장 멈춰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안 된다 이놈들아!
차라리 나를 밟고 가라!! 으악!!!“ 이렇게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던 내용, 전에 없던 일,
즉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는 믿기 힘든 말씀에도
순전한 모습으로 순종을 했던 여인답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그 사명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눅 1:38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행동마저 다 내려놓은 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우선하며 인내로 순종을 한 그녀도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자기를 부인한 멋진 분들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떤 이들은 그런 마리아를 보며
“저 봐, 저 봐 아들이 저렇게 심하게 당하고 있는데 어미라는 사람이 가만히 잠자코 있네?
참 지독한 여자다. 혹시 어디 문제 있는 사람이야? 지능이 부족한가?
아니면 자기도 당할까봐 무서워서? 그것도 아니면 아들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나보네?“하며
함부로 수군거린 자들도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사회성 결핍으로 보이거나 항변도 못하는 바보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면 그만입니다. 오히려 대만족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시선들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고전 2:14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골 3:2-3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평생토록 품어왔기에 마치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 것 같은
자기의, 자기연민, 자기애, 굳어버린 가치관, 변명 등을 다 버리는 모습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새롭게 거듭나서 이제는 오직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최우선하여 순종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마음,
그리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 나아가야 합니다.
억지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싫지만 참으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멋진 믿음의 선배님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인간적으로 슬플 때마저 마음의 중심으로부터는 늘 감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을 인생의 행복으로 느끼며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실만한 산제사로 올려드리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이
당신의 자녀로 확정되는 것을 바라시는 분이심을 꼭 잊지 마십시다.
벧전 4:1-2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진리의성령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또한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내 자신을 자신도 귀하게 여김으로서
함부로 막 살지 않는 모습으로 소중히 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진 않습니다.
고전 6:19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기연민, 자기애에 깊이 심취하여
마치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듯 과도하게 높은 울타리를 쳐서 보호하려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방해가 되는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때의 징조 중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내용,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의 적절한 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자신을 죄로부터 지키는 사랑,
그리고 자신의 소유권, 주권도 전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완벽히 인정하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천국에 들어가고자, 세상의 것들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귀로부터 나온 세상의 문화는 이 선의 경계를 최대한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라고 반복하여 가르치면서 세뇌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자기를 가장 사랑하여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끼지 말라고,
자신에게 선물을 주라고, 스스로를 외압으로부터 지키라고,
감정을 숨기지 말고 막 표현하라고 가르칩니다.
특별히 아직 가치관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청소년들이 이런 세뇌에 민감하여
학교 선생님들을 비롯한 어른들에게도 함부로 대하고,
해도 되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도 가리지 못한 채 막 내뱉으며,
한 마디의 교훈도 절대 듣질 못하는 ‘순종을 모르는 세대, 복종을 거부한 세대’가 된 채
“MZ세대는 원래 이런 거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내에 참된 믿음을 가진 순종의 청소년들, 영적으로 사랑스럽고 귀한 학생들은
점점 줄어만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젊은 세대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귀의 가치관에 세뇌를 당해서
“사랑하는 나의 인생을 즐기자!”며 돈과 쾌락을 점점 더 사랑하고,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심판의 날이 가까울수록 그렇게 양과 염소가 확연히 가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며, 사랑해주시기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올바른 신앙에서 자라가지 않고,
이제는 선을 마구 넘어 스스로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기애에 빠져버린 채
기도를 해도 자기를 사랑하기에 하는 모습으로,
너무나도 소중한 자신은 반드시 천국에 가야한다며
그것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심히 일그러진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고 싶다면,
심판의 날에 염소의 무리가 아닌 양의 무리에 속하고 싶다면
성경말씀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묵상하여 그 안에 담겨 있는 구원의 메시지가 과연 무엇인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짚어본다면
우리는 자기연민에서 시작된 자기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삶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할 것들이
과연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함으로 그것들이 하나씩 되어 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좁은 문과 협착한 길,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길로 나아가십시다.
우리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선
최근 계속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은 내면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무엇인지, 우리를 옥죄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교훈해주시며,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마치라고 재촉해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따르는 것에는 어떤 후회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새기고 즉시 삶에 적용함으로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라고까지 느껴지게 된 자기애에 관해 오늘 깊이 생각해보며,
과연 나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여 그 분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아니면 여전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면서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숱한 변명만 내뱉으며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저 그런 피조물 중의 하나로서
지옥을 피해 천국에 꼭 가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겨우 하나님을 섬기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행복하게 지내고 싶어서 순종의 모양만 내고 있을 뿐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의 준비를 잘 마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일 4:19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고후 7:9-12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진리의성령교회 윤경훈 목사 올림
진리의성령교회 2024.08.04. 주일설교
감사와 다짐의 노래
498장 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1.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 원한 내게 은사의 주님
신유 구한 내게 신유의 주님 나의 마음속에 지금 오셨네
2. 말씀 위에 서서 내 뜻 버리고 감정을 버리고 말씀에 서니
불완전한 믿음 완전해지고 내가 이제부터 주만 붙드네
3. 내가 염려하며 계획하던 것 믿고 기도하며 주께 맡기고
나의 모든 소원 던져 버리고 주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네
4. 믿음으로 닻을 주께 던지고 끊임없이 주를 찬송하면서
전엔 나를 위해 일해 왔으나 이제 주만 위해 힘써 일하리
5. 나의 소망되는 구주 예수님 이 세상에 다시 강림하겠네
나의 등불 밝혀 손에 들고서 기쁨으로 주를 기다리겠네
[후렴]
나의 생명되는 내 주 예수님 영원토록 모셔 내 기쁨 넘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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