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행열차
고 윤 자
어머니는 저 뒤에서 쫓아오신다. 종종걸음 치면서 가슴을 몇 번씩 손으로 쓸어내리신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차마 말 못 하시고, 어머니는 연신 먼저 가라며 손을 내젓는다.
전에도 숨이 차고 가슴이 뻐개질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시지만, 속도를 넘어서 보려는 어머니의 시도에 나는 번번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같다. 어떡하든지 상황을 초월해 보려는 어머니의 노력에, 넘겨주고 건너뛰는 여유 한번 없이, 인생의 시계는 가슴에 견디기 힘든 통증을 가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그런 시도를 저지하고 있다.
‘딱 삼등 완행열차네, 왜 좀 더 빨리 다리를 움직여 나를 따라오지 못하실까.’
젊음의 오기에 빠져 있던 나는, 어머니의 늙음과 뒤처짐을 한 번도 감싸 안지 못하고, 그때마다 완행이라고 타박을 주었다. 그때 나는 너무 젊었고 철이 없었다. 그래서 역마다 쉬고 가야만 하는 삼등열차를 참아주지 못했다. 나도 뒤를 따라 그 길을 가게 될 줄을 아셨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나를 다 받아들이셨다.
완행열차는 느리다.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역마다 쉬어간다. 급행과 특급열차의 시대인 지금은 차라리 ‘따돌림’의 열차가 되어 있다. 차례차례로 앞지르는 빠른 열차를, 그저 바라보고 기다려 주는 열차일 뿐이다.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왜 패배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변화가 눈부신 현세에서는 속도가 삶의 적응과 도태의 지렛대가 되어가고 있다. 길고 지루한 인생 경기에서, 결국엔 승자를 만들어내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 지랄 같은 속도다.
완행열차는 과거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새로운 세대에 진입하지 못해서,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는 낙오자이다. 낙오자들은 앞을 서기보다는, 그 세대에 너무 뒤처짐 당하는 것만은 피하려고 애쓴다. 팍팍한 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젊고 활동적이었던 과거를 회상하길 좋아한다.
그들도 한때는 급행으로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마르고 앙상하고 노후 되었지만, 프랑스의 TGV나 RER의 무한 질주를 소유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강변한다. 누구도 그가 한때 지녔던 금송아지 대해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자신은 그 시절을 그만의 것으로 여기며 뿌듯해 한다.
급행으로 달릴 때는 모든 일이 급했다. 명예도 급하고, 재물도 급하고, 자신에 대한 욕망이 바로 손에 쥐어질 것만 같아서 급했다. 자신도 쫓아가지 못 할 정도로 앞서서 달아나는 형체 없는 욕구 때문에, 늘 숨차고 힘겨웠다. 뒤에서 천천히 쫓아오는 완행열차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느리고 비능률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도가 더 빠른 열차가 나오는 동안, 자기도 점점 노후화하고 어쩔 수 없이 완행열차가 되어 뒤로 밀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계산에 없었다. 자신은 선택되어 제조되었으며, 열등해서 뒤쫓아 오는 열차와는 전혀 다른 부류라는 우월감으로 우쭐댔다.
완행열차는 열차 여행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뭔가 푸근하고 인정이 넘친다. 눈앞에서 천천히 흐르는 풍경, 소박한 행상과 여유로운 역무원의 웃음이 있다. 스프링이 튀어나온 의자, 어둠침침한 전등,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누운 사람, 가축을 들고 탄 손님의 자루 속에선 돼지 울음소리가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입석 좌석 구분이 없어서 개찰구가 열리면, 너 나 없이 뛰어서 먼저 도착한 사람에게 자리가 주어지기도 했다. 가는 내내 선풍기는, 가뜩이나 초라한 아버지의 숱 없는 머리칼을 이리로 저리로 나부끼게 했다. 그때의 완행열차는 서민들의 애환을 가득 싣고 달렸다.
KTX나 급행열차 속에서는 조용하게 소곤대는 말씨거나 아예 침묵만 허용된다. 간혹 커피를 홀로 마시는 낭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할 수 없는 차디찬 교양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긴 아픔이 있어, 침묵이나 교양이 별것이 아님을 미리 깨닫고 있다.
‘사생활 침해라고……, 삶은 머리만으로는 살 수 없는 거야.’
계란과 호두과자와 고향에 들고 갈 시끄러운 인생사가 있는 곳에는, 그런 생각은 웃기는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고통을 넘나드는 그들의 삶이었기에 앞서가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넉넉함이 있다.
이제 삶을 통해서 속도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두르지 않는다.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며 시간 속을 헤매보기도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끝내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황급하게 화장실을 찾고 있는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도 젊었을 때는 어머니의 시어머니를 위해서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그때는 어머니도 지금 볼일을 봐 도 되고 조금 있다 봐도 급하지 않았다. 속도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이 주연이었던 시대를 보내고, 조연으로 남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신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어진 작은 배역마저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날들을 위해, 젊음과 무지의 힘을 빼고 있는 것이다. 더 빠른 급행열차가 지나가면 양보하느라 멈추고 또 멈추어도, 그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도록 겸허하게 낮춘다. 아직도 열차라는 자긍심을 잃지 않기 위해, 완행열차는 열심히 달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혹시 피로하고 지친 영혼이 찾아주지 않을까. 그들을 위해 아직도 마음껏 달리고 싶은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속도를 자랑하다 사고를 내기도 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다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 젊은 혈기의 급행열차를 늘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혹시 그들의 만용으로 기차가 달릴 수 없을 때, 느리고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고 참여하고 싶은 꿈이 있다. 용솟음치는 비상이 노인을 함락시킬 수 없듯이, 그 어떤 추락도 노인을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갈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대피하는 감정의 회오리조차도, 노인의 삶을 비켜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크나큰 충격을 흡수할 두꺼운 해면 층이 형성되어 있기에,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급히 가느라 거쳐야 할 것을 놓쳐버리는 급행열차가 더 이상 부럽지 않다. 목표에 늦게 도달한다고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차창 너머 논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삶을 제대로 느껴볼 수 없는 삭막함은 가라. 누구 네가 어디 땅을 붙여먹고 살고 있고, 올해 같은 흉년에 몇 섬을 거둘 수 있는지, 일일이 궁금한 것이 삼등열차이다. 완행열차는 느린 삶의 미덕을 가르친다. 달리는 차창으로 달려드는 한 줄기 바람에도 감사하게 되는, 낮은 자리의 삶이 그들의 것이다.
이제 나는 인생의 간이역에서, 첫사랑의 그대처럼 더디게 다가오는 완행열차를, 고운 자태의 은사시나무가 되어 기다리고 있다.
첫댓글 고다원샘, 잘 읽었습니다. 저는 느려서 아름다운 완행열차를 타고 이 시점까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짜배기 고다원님 글이네요.
여기 펜이 한사람 더있읍니다. 자주좀 올려주세요
예향에서 고다원님의 글을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때에 따라서 급행이나, 직행 또는 완행을 골라 타야죠,
그런데 나이들 수록 인체의 생체시계가 느려지니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완행열차로 갈아탈 수 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