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
3년 전 중동 난민 취재차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는 시약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착한목자수녀회가 운영하는 시약소인데, 하필 이슬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의 수중에 들어간 빈민촌에 있어 잔뜩 긴장하고 마을에 들어섰다.
그 시약소 대기 행렬에서 배를 곯아 퀭해진 가련한 눈과 마주쳤다. 시약소는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넘어온 난민들에게 의약품을 나눠주다 어쩔 수 없이 빵을 배급하는 급식소 역할까지 떠맡았다. 시약소 책임자 타노우리 수녀는 “애들이 굶고 있다면서 훌쩍이는 엄마들을 어떻게 빈손으로 돌려보내느냐”며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난민들은 빵을 더 원하는 것 같았다. 난민 엄마들은 자기 앞에서 그날 준비된 빵이 떨어질까 봐 불안해했다. 만일 빵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알고 웅성웅성하는 사이에 대기 줄이 흐트러지면 잽싸게 파고들어 빵 봉지를 낚아챌 태세였다.
힐끗 훔쳐본 그들의 표정이 “먹는 것이 죄일 수는 없다. 먹는 것이 죄라면 삶은 천벌이기 때문이다”는 비장한 신문기사 한 줄과 겹쳐졌다. 이 기사는 1964년 경향신문 신모 기자가 찢어지게 가난해도 끼니때가 되면 식구들 입에 들어갈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하는 아낙네들이 드럼통에 담긴 꿀꿀이죽을 사가는 광경을 보고 쓴 것이다. 꿀꿀이죽을 서술한 부분은 옮기지 않는 게 낫다. ‘토(吐)할 것 같다’는 반응이 나올 게 뻔하다.
신모 기자의 말대로 먹는 것이 죄일 수는 없다. 새치기해서라도 아이들 입에 넣어줄 빵을 챙기려는 난민들의 몰염치, 돼지에게나 먹이면 좋을 음식 찌꺼기로 저녁상을 차리며 흘렸을 아낙네의 눈물…. 모두 무죄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의 신성한 권리인 동시에 냉혹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며칠을 쫄쫄 굶다 상점에서 빵을 훔친 사람을 법적으로는 몰라도 인정상 비난하면 안 된다.
사방 천지에 먹을 게 넘쳐난다. 그럼에도 밥 한 끼의 가치는 변함없이 유일하고 소중하다. 설사 치욕 섞인 밥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깃든 본질적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다. 특히 밥은 마음의 결핍까지 채워준다. 서럽고 헛헛할 때 누군가가 정성껏 차려준 밥 한 끼 잘 먹고 나면 힘이 솟는다. “밥 먹어라”, “밥 먹었니?”라는 말은 사랑과 관심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서울대교구가 오는 11월 명동 가톨릭회관 후문 쪽에 무료 급식소 ‘명동 밥집’을 연다는 보도(본보 9월 6일 자 7면)가 나간 이후 급식소에 봉사자와 후원자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전주교구는 이미 지난 1일 전북 익산에 노숙인과 홀몸노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 ‘요셉 식탁’을 차렸다.
저마다 살기가 팍팍하다고 아우성인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봉사와 후원에 나선 이들이야말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그분의 제자들이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유언 같은 정신을 이어가는 ‘김수환의 후예들’이기도 하다.
사랑으로 지은 따뜻한 밥은 노숙인들의 빈속을 채워줄 것이다. 또한, 밥 한 그릇에 담긴 정성과 관심은 외로운 이들의 헛헛한 마음마저 위로해 줄 것이다. 그 채움과 위로란 사고무친(四顧無親)인 자신의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배고프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하느님이다.
오랜만에 들려온 급식소 미담이 기운을 북돋아 준다. 뜨끈한 국물에 밥 말아서, 그 위에 잘 익은 김치 얹어서 배부르게 먹고 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