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16일 우크라이나 지원 항목이 빠진 미국의 임시 예산안에 서명했다. 직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서방의 지원이 없으면 우크라이나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다"고 '죽는 소리'(?)를 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이 초안을 잡은 2번째 임시 예산안이 상원을 거쳐 백악관으로 넘어오자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이에 따라 미 연방 정부의 '셧다운' 위기는 일단 내년 1월 19일까지 피할 수 있게 됐다.
미 백악관/사진출처:위키피디아
2번째 임시 예산안에도 공화당 측의 반대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 항목이 포함되지 않았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일찌감치 제출한 1,060억 달러 규모의 대(對)이스라엘·우크라 지원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는 상태다.
◇ 미, 두번째 임시 예산안 확정
그 대신, '셧다운'을 막기 위한 추가 임시 예산안이 하원에서는 찬성 336, 반대 95표, 상원에서 찬성 87, 반대 11표로 가결돼 백악관으로 넘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하원의장 석에 앉은 존슨 의장은 자신에게 맡겨진 첫번째 숙제(연방정부 셧다운 관리)를, 비록 공화당 일부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무난하게 처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반응에서 보듯, 우크라이나에게는 실망 그 자체다. 하원의 예산안 처리를 앞두고,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 등 우크라이나 정부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 "서방의 지원 여부에 따라 앞으로 전쟁의 향방이 갈릴 것"이라며 추가 지원에 대한 불씨를 살려보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분석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워싱턴을 찾았으나, 우크라이나 지원 항목을 첫 임시 예산안에 넣지 못해 실망했던 지난 9월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지난 9월 미국을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상원에서 의원들과 간담회를 갖는 모습/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여름철 반격에 사실상 실패한 우크라이나는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자칫하면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2024년 반격'이 작전 계획 수립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기해야 할 판이다. 어쩔 수 없이 전면적인 방어 전략으로 작전을 바꿔 개전 초기와 같은 '버티기'에 나서야 할 지도 모른다.
◇ 실망한 표정 가득, 젤렌스키 대통령
그 가능성을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입에 올렸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그는 17일 미국의 임시 예산안 확정 뒤 서방 언론과 만나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지원이 없으면 후퇴할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은 서방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으나, 중동 사태(하마스-이스라엘 충돌)로 서방의 시각이 바뀌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나아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제 3의 마이단'(대규모 민중 시위)을 일으켜 자신을 축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 백악관도 대 우크라 지원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 소통관은 지난 15일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할 능력은 갖고 있으나, 할당된 예산이 소진됨에 따라 우리도 막판으로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미 백악관은 무기 공급 등 모든 분야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배정된 예산의 96%를 이미 사용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제 2차 임시 예산안의 기한이 끝나기 전 꼬인 매듭을 풀 수 있을까?
미 블룸버그 통신은 17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 규모가 내달(12월)에도 확정되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했다. 일러야 12월 중순께 대충 윤곽이 잡힐 것으로 내다봤다. 우크라이나의 '돈 가믐'은 연말까지 계속되고, 우크라이나의 불안감은 증폭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존슨 미 하원의장/사진출처:SNS인 엑스(X, 옛 트위트)
◇ 우크라이나의 독자 생존법은?
스트라나.ua는 17일 하루를 결산하는 기획기사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전망' (Помощь Украине и перспективы) 코너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자금 지원이 없다면, 우크라이나 경제는 모래성 처럼 무너지고, 군사 지원이 없다면, 우크라이나군은 무기도 없이 빈손으로 싸워야 할 것"는 전문가의 시각을 전했다. 또 바이든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페니 프리츠커가 최근 젤렌스키 대통령와 만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할 때'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 경우,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 등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내든가, 자국 화폐인 흐리브냐를 더 많이 찍어내는 수 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고언(苦言)이다. 세르게이 마르첸코 우크라이나 재무장관은 "내년 예산안에서 예상되는 재정적자가 290억 달러에 이른다"며 "(EU의 지원 규모 확대 등) 다른 방법이 없다면 흐리브냐화를 평가절하하는 방식으로 버틸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미국의 군사지원이 중단되면, 유럽이 이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지적이다. WSJ에 따르면 유럽 고위 관리들은 "미국의 지원이 우크라이나에 필수적"이라며 "유럽이 미국의 자금과 군사 물자를 대체할 수 없다"고 말했다. EU에서 가장 부유한 독일마저 사법당국의 잉여예산(쓰고 남은 예산/편집자) 전용 불가 판결로 내년 우크라이나 지원 계획을 수정해야 할 판이다.
가뜩이나 수세로 몰리고 있는 최전선에 추가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말처럼) 우크라이나군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15일 비교 분석한 러-우크라 양측의 군사력을 보면 더욱 그렇다.
◇ 러-우크라 군사력 비교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러-우크라 군사력 비교. 매달 보충되는 군사 장비 규모/사진출처:스트라나.ua
포브스가 공개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양국의 군사력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상대(우크라이나군)보다 월 평균 3배나 더 많은 군사 장비를 공급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0개월 동안, 우크라이나군은 매달 탱크를 약 28대 받았으나, 러시아군에게는 100대가 보충됐고, 장갑차(보병 전투 차량)는 우크라이나가 35대, 러시아가 100대를 받았고, 자주포는 7대 50, 재래식 포대는 13대 200 이상으로 차이가 났다.
또 우크라이나군은 다연장로켓발사시스템(MLRS) 제공이 끊어졌으나, 러시아는 매달 23기 이상이 보충된다. 미사일은 우크라이나가 수십 기, 러시아는 2천 기 이상 보급됐다.
포브스지는 “서방의 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올해 1, 2월에 정점에 도달했다"며 "이후 추가 무기 지원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장기 전략의 부족과 각국의 정치적 이유로 사실상 중단됐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현재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아브데예프카에서는 우크라이나군의 포탄 사용량이 이전 격전지인 '바흐무트' 전투 때보다 10배나 적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스페인 최대 일간지 엘파이스(El Pais)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제 47여단에서 미국의 곡사포 부대를 지휘하는 부대장(알렉산드르)은 "지난 봄 바흐무트 전투에서, 또 여름에는 오레호보 전투에서 하루에 100~150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나, 현재 아브데예프카 전투에서는 15발 정도"라며 "러시아 정찰 드론이 끊임없이 전선을 감시하고, 목표물을 발견하는 순간, '란셋' 자폭 드론이 날아온다"고 현지 상황을 설명했다.
◇ 핵심은 병력 보충 문제
병력 보충 부문에서도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린 우크라이나에 뒤지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소뱌닌 모스크바 시장은 최근 러시아군과 입대 계약한 시민의 수를 올해 들어 2만2,000 명이라고 발표했다. 스트라나.ua는 "모스크바 거주 남성 600만명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군 입대 계약 비율은 0.37%이고, 이를 러시아 남성 인구 전체(6.840만명)로 확대하면 25만명"이라면서 "비수도권 남성이 입대할 확율이 높기 때문에, 계약 군인은 3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반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은 최근 올해들어 41만 명이 계약을 맺고 군에 입대했다고 발표했고, 우크라이나 군정보국은 지난 9월 우크라이나에 주둔 중인 러시아군 병력이 42만 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올해 계약한 군인이 모두 우크라이나 전선에 배치됐다고 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 입대 군인들/사진출처:우크라 합참 페북
우크라이나군 병력은 얼마나 될까? 우크라이나는 개전 직후 계엄령과 총동원령을 발령해 꾸준히 후방에서 병력을 동원해왔다. 루스템 우메로프 국방장관은 취임 초인 지난 9월 초, 우크라이나군 병력이 개전 당시인 2022년 2월 26만1천 명에서 80만 명 이상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자원 입대자와 동원된 예비군 등을 모두 포함하는 병력 수로 보인다.
스트라나.ua는 "우메로프 장관이 전체 병력 규모를 공개했을 뿐"이라며 "우크라이나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벨로루시나 러시아와 국경 등에 배치된 일부 병력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확한 정보는 알 길이 없고, 언론에 따라 대략 30만에서 50만명으로 들쭉날쭉하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서방측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장기 소모전' 전망이다. 자금 지원이 끊어지는 징후와 겹쳐지면서 증폭되는 불안이기도 하다.
WSJ은 17일 "러시아의 패배에 대한 '마술적 사고'를 멈출 때"라며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러시아가 장기 소모전에서 패하고 있다는 징후가 없으며, 전쟁을 뒷받침하는 러시아 경제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 확대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고, 푸틴 대통령의 군사적 야망을 꺾을 것이라는 서방의 대러 제재도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패배에 대한 마술적 사고를 멈출 때'라고 쓴 WSJ 웹페이지/캡처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NATO) 사무총장의 발언도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 그는 16일 브뤼셀에서 에드가르스 린케비치 라트비아 대통령과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전황이 예상보다 어렵다"며 "러시아는 평화가 아니라 아브데예프카 등지에서 새로운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트라나.ua는 "스톨텐베르크 총장이 얼마 전에만 해도 '러시아가 방어선을 튼튼하게 구축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이 성공을 거두고 더 많은 영토를 해방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며 "그의 이날 발언은 우크라이나군의 어려움을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