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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묵상글 들 ( 연중 제6주일. - 행복 고차 방정식을 풀어주시는 주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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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행복 고차 방정식을 풀어주시는 주님
오늘 제6주일은 행복과 불행이 주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행복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과 비교하여
루카 복음은 행복과 불행에 대해 다 언급하고 첫째 독서도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그렇지 않은 나무를 얘기하잖습니까?
이 행복과 불행에 대해 성찰하면서
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행복하지 않을까?
불행하지 않은 정도로 행복을 살까? 하는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인간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인생의 목적이기에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살 텐데
그 길을 모르기에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릅니까?
그것은 행복의 구조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고차방정식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만족의 상태이고 두루 만족해야 행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두 만족스러워야지 어느 하나라도 만족스럽지 않고 불만이 있으면
그 하나의 불만으로 인해 우린 전체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만족에는 크게 세 가지 류의 만족이 있습니다.
소유의 만족이 있고,
일의 만족인 보람이 있고,
관계적 만족인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또다른 류의 만족들도 있습니다.
성취적 만족인 기쁨이 있고,
행위적 만족인 즐거움이 있으며,
상태적 만족인 편안함이 있습니다.
이렇게 만족의 가짓수가 많으니 다 충족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만족들이 얽히고 설켜 충돌과 갈등을 유발하기에
행복은커녕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만족의 가짓수도 문제지만 질도 문젭니다.
만족이란 욕구와 욕망과 욕심의 충족인데
이 욕구가 욕망과 욕심으로 발전하면서
그 욕망과 욕심의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늘 더를 바라는 것이 욕망이고 욕심이며
그래서 욕망과 욕심은 늘 그 허기를 느끼고 불만을 느끼기 만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만족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누가 그 길을 다 알고 있고 누가 그 많은 만족을 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불교는 다 자기에게 달렸다고 합니다.
곧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니 욕심을 버리든 수행을 하든
다 자기가 해결해야 하며 해결할 수 있다고도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그것이 사람에게 달렸다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 달렸다고 합니다.
자기가 그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없고
다른 인간도 그 많은 만족을 채워줄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만이 그 모든 것을 만족케 하시는 분이라고,
그러니 하느님께 의지하는 인간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지만
인간에게 의지하는 인간은 사막에 심어진 나무같다고 오늘 독서는 얘기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이것을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교 신자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하지만
이것을 믿지 않고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며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불행하다는 것이 오늘 가르침인데 이것을 믿습니까?
행복의 고차방정식을 풀어주시는 주님께 의탁하여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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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2월 13일 연중 제6주일 고 도미니코 ofm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4가지 부류의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한 사람들 중에 첫 자리에 두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여기에서의 가난은 영적인 가난을 말합니다. 보통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때 행복감을 경험하고 궁핍한 가운데 행복을 체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의 가난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궁핍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의 나의 존채 자체만으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지니고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 굶주림은 진리에 대해 목말라 하는 이들이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 인간적인 마음으로 자만자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참된 사랑만을 갈망하는 이들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우는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로 보고 계십니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함을 보고 우는 사람들이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영예와 칭송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이 가리워진 것을 보고 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만든 자신의 행동에 울며 탄식하는 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주님 때문에 배척당하고 모욕과 중상을 받는 이들을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이나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 오는 첫 감정은 상대방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고립과 소외감입니다. 이것을 미움 자체로만 받아들이고 고립감과 소외감이 계속 남아 있게 될 때 심한 경우는 타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고 자신에 대해서는 우울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타인의 미움안에 숨겨진 사랑을 보게되면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기에 그런 미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미움이 미움이 아닌 것이 되고 사랑으로 보여지는 행복의 눈이 열립니다.
주님으로 인해 배척당하고 모욕과 중상을 받을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모욕과 중상을 받는 것처럼 마음이 괴롭고 참고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경험합니다.
인간적인 경험으로는 반발하고 복수심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정상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지닐 때 이 모든 것들을 품어 안을 수 있으며 이것들을 견뎌내는 가운데 참된 행복이 있다는 행복의 신비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2월 성령 열매성월 2주간 인내 / 친절 /성실 ✝️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19-21장 /마태 1-4장
✝️ 1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만자네다(Manzaneda) 의 전교 강론 중에 나타나신 아기 예수
북스페인 -1903년
우리 모두 다 열마나 감동되었던지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성 암브로시오의 찬미가의 마지막 구절을 부를 때 아기 예수의 현현은 사라졌습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을 지속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만자네다의 전교 십자가 위에 아기 예수께서 나타나셨던 것과 똑같은 자세로 아기 예수를 형상화해 놓았습니다. 십자가는 성당 안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존경하올 아스토르가의 주교님께서는 즉시 정확한 조사를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수석사제 돈 안토니오와 주교님의 공증인인 토마스 데 바리를 조사단으로 해서 만자네다로 보내셨는데, 맹세를 한 증인틀의 진술을 받아들여 기록하라는 위임과 전권을 그들에게 부여 하셨습니다.
조금 후에 주교님은 그분 교구의 교회 관보에다 이 조사의 결과를 발표하실 수 있었습니다. “만자네다의 아기 예수의 현현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현현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만자네다의 주민들은 모든 사람들이 밤낮으로 교대하여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 주님을 흠숭하기 위한 성찬식의 형제회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아기 예수 현현의 순수성에 대한 가장 큰 증거는 아마 이전까지만 해도 교회와 신부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차 있었던 모든 교구의 사람들이 별안간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열렬하고 경건한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는 증거언 것이다.(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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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에페소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난민을 위한 기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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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
오늘 여러분은 행복하세요?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라는 두 길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예레미아서에서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에레 17,7)
그리고 이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이 덧없음을 말하면서’(1코린 15,17),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축복과 행복의 길은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행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선언은 현실을 넘어있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전환을 요청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축복은 첫 번쩨 축복, 곧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생명도, 건강도, 힘도, 돈도, 그 어떤 선이든 모두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행복해 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것,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에 대해서만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해주고 호의적으로 말해주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보고 있지 않는 까닭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손 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 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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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한 사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전 한 식당에 들렀는데 젊은 분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숫자를 조합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렀더니 복권번호를 선택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원을 가지고 복권을 사고 그 당첨발표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너무 행복하다” 고 하였습니다. 숫자 조합을 하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합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그 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씀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복권에서 행복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시적인 행복감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고 하였습니다. 성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오래 전 입니다만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 만난 사람 중에 배영희 엘리사벳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19살에 뇌막념을 앓고 나서 앞 못 보는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신 분입니다. 그는 온 몸이 마비된 채 누워계셨는데 얼굴이 항상 맑고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1999년 12월 서른 아홉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장애인이 된 후 ‘나는 행복합니다’, ‘소라의 꿈’, ‘당신이 머무는 곳’등 많은 영혼의 시를 쓰셨습니다. 그 중에 ‘나는 행복합니다’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 자매님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아주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는 데서 행복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들, 부요 하고 배부르고 웃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는 사람을 오히려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힘든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시대를 보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열심히 따랐던 사람들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갈망하였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유하고 배부른 사람들, 소위 한자리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매달아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은 구세주를 찾아 구원을 얻었고, 배부르고 등 따뜻한 사람은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불행하게 보였던 사람들이 주님을 차지하였고 부하게 보였던 사람들은 재물과 권력, 그리고 악에 지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 는 말씀 그대로 입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으로 자기 파멸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잠언30장 8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약속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참된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을 차지 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 1,1-3).
여러분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다면 말씀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차지 하십시오. 성모님께서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으로서 행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의 거죽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나라가 있고, 웃게 될 날이 있고,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곡식 단 들고 춤추게 될 날을 알기에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릴 줄 압니다.
사실 오늘날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습니다. 넘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고 남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포장하다가 불행해 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행복해 보입니까? 예. 왜 행복할까요?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도 저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보내신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옆 사람 좀 바라보세요! 그분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 행복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한번 쥐어박고 싶은 분도 계시고 때로는 밥맛이 떨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안 봤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단련시키시고 다듬어 주셔서 행복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은 종이 한 장에서 구름을 본다’ 고 하였습니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나무가 없고, 나무가 없으면 펄프가 없고, 펄프가 없으면 종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행복과 불행을 단정 지을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렵고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부디 하느님 안에서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루를 즐거워하려면 이발을 하고, 한 주간을 기쁘게 살려면 자동차를 사라. 그리고 한 달을 기쁘고 즐겁게 살려면 결혼을 하고 한해를 즐겁게 살려면 새집을 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생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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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1. 새 하늘을 열어젖히신 예수님께서 새 땅을 펼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루카 6,23)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의 참된 행복을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열두 사도와 함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도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모두 이 길을 보았습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이 배부르도록 먹을 것을 나누면 천국이 땅에 펼쳐집니다. 지금 우는 사람들이 웃을 수 있도록 위로해주면 천국이 땅에 펼쳐집니다. 나누고 위로해주는 선행을 하다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때에도 천국은 땅에 펼쳐집니다.
2. 일찍이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렇게 내다보았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시편의 시인도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1-2).
3. 이렇게 예수님께서 새 하늘을 여시고 새 땅을 펼치셨기 때문에,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아들로서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1코린 15,11-12). 이 말은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여신 새 하늘과 펼치신 새 땅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부활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4. 그러나 우리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부하고, 부활 신앙을 불신하며, “현세만을 위하여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장 가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1코린 15,19). 예레미야도 이런 가련한 사람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사람은,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예레 17,5-6). 이런 자들에 대해서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시편 1,6).
5. 악인들은 부유해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기 때문에 천국의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배불러도 굶주린 이들을 외면하기 때문에 지옥의 불행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죄악이 저질러져도 못 본 척하기 때문에 그 악을 키우는 자들입니다. 지옥이 여기에 있습니다.
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옥을 키우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부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눈앞에 보이는 현세에만 희망을 거는 자들도 있습니다. “늘 깨어 있어라.”(마태 24,42) 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7.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세상에서 부활한 삶을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기초로 청사진을 그렸으니, 그것이 사랑의 문명을 위한 파스카 과업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파생된 네 가지 최고선의 가치와 세 가지 공동선의 가치가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씨줄이 되어야 할 최고선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입니다. 날줄이 되어야 할 공동선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모든 이에게 공동선의 혜택이 고르게 주어지는 공정함의 가치와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이 혜택을 주어지도록 하는 배려의 가치가 있습니다.
8.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고발하는 인간형은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 사람에게 의지하고,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겼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상숭배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등장합니다. 반만 년 전 이 땅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 민족은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천손의식(天孫意識)으로 하느님을 섬겨 왔었습니다. 그리하여 받들던 하늘의 뜻이 바로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런데 지배층과 지식층이 불교와 유학을 들여온 이래 무려 2천 년 가까이 하느님 신앙은 잊혀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민간으로 숨어 들어간 하느님 신앙은 지배층과 지식층으로부터는 무속으로 취급당했지만, 민족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서 마치 거대한 지하수맥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민간 신앙을 흡수하여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가르치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칠성단을 세웠는가 하면 유학에서도 민간의 효 관념을 따라서 조상 공경을 하느님 제사 대신에 했던 것인데, 고약한 것은 조상제사를 양반 계층만의 특권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8. 조선시대 후기에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는 지하에 흐르던 신앙의 거대한 수맥을 터뜨려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도 교리로 제천의식을 일깨워 가족들이 모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바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기도는 제물 없는 제사입니다. 제사의 요체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등 교리로 천손의식을 일깨워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벗, 즉 교우로 지냈습니다. 당연히 노비로 데리고 있던 천민들은 모두 해방시켜 주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열심한 천주교 신자요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제사금지령 때문에 양반 신자들이 대거 떨어져 나간 후에도 천민 출신 신자들의 입교 행렬은 계속 이어졌으며 그 수효는 더욱 늘어났습니다. 치명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이 이 천민 출신 신자들입니다. 실제로 천민 출신으로 백정을 직업으로 지니고 있다가 입교한 황일광 시몬은 “나에게는 천당이 둘이 있소. 하나는 죽어서 갈 천당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서 양반 교우님네들이 나를 인간으로 대접해 주는 교우촌이요.”라고 고백하며 죽어갔습니다. 이렇듯, 천주교는 기도와 평등에 관한 교리로 우리 민족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소통이 우상을 숭배하던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제천과 천손으로 대표되는 민족 정체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9. 하느님과 소통하며 믿을 수 있는 자유는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자유의 기본입니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오늘날에도 평등의 가치는 더욱 요긴합니다. 정치적 평등은 이루었다고 하겠으나, 경제적 평등은 아직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이 주로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받는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10.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며 평등을 실천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저항하며 기도로써 하느님과 소통했다면, 유신 독재가 극성을 부리던 1970년대에 등장한 사제들은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일제 식민 통치가 되살아난 듯이 정치적 자유가 압살당하던 암흑 속에서 정의의 횃불을 들었는데, 이 당시 자유가 탄압받아 희생자가 날 때마다 사제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나서는 그 메시지를 알리려고 시민들을 향해 시가행진을 할 때마다 부르던 성가가, “장하다, 복자여!” 라는 제목의 순교자 찬가였습니다. 그야말로 순교정신을 이어받아서 정의를 외쳤던 것입니다.
11. 우리 사회에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화해를 실현하자는 담론을 촉구한 계기는 1989년에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 성체대회였습니다. 그 전에도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운동은 물밑에서 계속되어 왔었지만 당국의 탄압 때문에 여론화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로 방한하여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 성체대회를 요한 바오로 2세가 주관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우리 나라에도 평화의 가치를 여론화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 냈습니다.
12. 교우 여러분!
이제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또한 우리는 인간 존엄성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선의 혜택을 공정하게 누리는 사회를 만들 후보가 누구인지, 사회적 약자를 따뜻하게 배려할 후보는 누구인지를 가려야 합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는 물론 공동선의 가치를 후퇴시키지 않고 오히려 증진시킬 후보와 정당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선택에 있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비롯한 독서의 말씀들이 매우 선명하고 정확한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 줄 사람, 지금 우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설사 이러한 선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오해를 받는다 해도 우리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투표를 복음과 공동선의 기준에 따라 행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복음선포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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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키엣 대주교님.
행복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을 만든 하느님께서 행복을 누릴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생 동안 행복을 찾느라,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만 참 행복을 찾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이 세상에 없는 오직 하느님 나라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기에 세상에 집착할수록 행복과는 점점 더 멀어질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매달릴수록 더 불행해질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남을 향한 비난과 욕망을 멀리하는 사람만이 참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 행복을 초월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물질의 장막을 걷어낸 사람만이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행복이 아닌 하늘 나라의 행복을 지향하는 사람만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참 행복으로 가는 길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기위해 불행을 겪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얻기 위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가난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마음의 풍요로움
물질은 행복을 이루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닙니다. 만일 물질 그 자체가 행복이라면 부자들은 모두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유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물질을 사용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많은 물질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을 위한 것을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물질로 변화시킨 것은 우리의 행동과 태도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하시는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닙니다. 하늘 나라의 풍요를 얻기 위해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돈의 실제적인 가치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돈은 단지 수단일 뿐이므로 돈을 사용하되 너무 집착하지 말고, 돈을 소유하되 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돈이, 물질이 하느님이 뜻대로 인류를 위해 유익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는 발전하는 사회, 인간이 존중받는 따뜻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문명뿐만 아니라 사랑의 문화에 큰 발전을 가져 올 것입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고귀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잊혀지고 소외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시름에 잠겨있는 사람, 무시 당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믿음을 줄 것입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박약하거나, 비겁하고 나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영혼과 세계를 드높이기 위해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용감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것은 세계를 위하고 인류를 위한 행복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다이아나 왕세자비의 장례가 지난 1주일 후, 또 다른 장례식으로 세계는 떠들썩해졌습니다. 복자이신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장례식 때문입니다. 그분의 작은 방에는 한 개의 의자와 동으로 만든 세면기만 남겨두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후원을 했지만 그 돈은 장애자와 고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모두 쓰고 자신은 항상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인도를 방문한 교황님이 바쁘게 다니시는 수녀님께 승용차를 한 대 사드렸지만 수녀님은 그 차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가톨릭국가가 아닌 인도에서 수녀님을 기리는 뜻으로 국장을 거행했고 수녀님의 영혼을 비는 21발의 총성이 울릴 때 세계 각국에서 참석한 40여명의 각국 대표를 포함해 세계 많은 사람들이 평생 가난하게 사신 그분의 시신 앞에 깊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야말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너무나 위대한 그분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 분을 떠올리며 그 분이 하신 일을 되새겨보는 것도 ‘마음이 가난해지는 길’을 실천하는 시작일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늘나라를 위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돈 때문에 희로애락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금전에 대한 욕심으로 마음을 잃은 적이 있습니까? 돈을 양보함으로써 친구를 얻은 적이 있습니까?
2. 주님의 참행복에 따른다면 지금의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행한 사람입니까?
3. 행복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말씀의 실천
1.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가난하지만 행복한 생애를 살펴보고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보십시오.
2. 물질적 행복을 마음의 행복으로 바꾸는 일을 실천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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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직장에서 무척 엄격하고 무서운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격이 참 더럽다’라는 말을 직장 동료들이 뒤에서 많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 형제님이 드디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은 아주 잘하지만, 화를 많이 내는 직장 상사의 은퇴 소식에 모두 좋아했습니다.
이 형제님은 은퇴 후 가죽공예를 배웠고 후에 공방까지 열었습니다. 그런데 공방에 다니는 사람들의 이 형제님에 대한 평가가 이상합니다. 화를 전혀 내지 않고 언제나 다정다감한 유쾌한 ‘천사’ 선생님이라고 말합니다.
전 직장 동료들은 이 형제님에게 왜 이렇게 성격이 변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형제님은 “내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그래.”라고 웃으며 답하시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이유는 주로 하기 싫은 일,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 마음에 드는 일을 하게 되면, 화를 낼 수 있는 조건에서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어떤 조건도 좋기 때문입니다.
만약 화가 많은 자신이라면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어떻게 마음에 드는 일로 바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질적인 만족으로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길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일인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8가지의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루카 복음은 4가지 행복론에 짝지어 4가지 불행론이 뒤따릅니다. 루카 복음의 행복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이고, 굶주릴 수 있고, 울 수 있고, 박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이라고 불평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좋은 일, 마음에 드는 일로 받아들이기에 행복합니다.
제1 독서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행복은 어디에서든 얻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굶주리고 있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운다고 불행하지 않으며, 박해받고 있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라면 무조건 행복합니다. 하늘에서 받게 될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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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산다(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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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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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다이제스트에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흑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의 이야기입니다. 외모 때문에 따돌림을 많이 당했습니다. 변변한 직장도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운명처럼 한 여인을 만나고 겨우 자리를 잡았습니다. 둘 사이에 하느님의 선물로 예쁜 아이가 생겼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가정에 큰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감전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한쪽 눈과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아내는 간난아이를 업고 남편의 병수발을 들었습니다. 아내는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아픈 남편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남편은 열심히 하는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부부가 어머니처럼 따르는 수녀님이 병실에 자주 찾아왔고, 부부는 다시 힘을 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파도처럼 다시금 형제에게 찾아왔습니다. 남은 한 쪽 눈도 점차 시력을 잃어갔습니다. 다행히 수술을 하면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수녀님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의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애인들을 위한 상담을 하면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낸다고 합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가 제게는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원하는 것들이 채워지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성공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수영장이 딸린 넓은 집이 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 있고, 어딜 가나 존경받는 명예가 있고, 명품으로 치장하고 여행도 다닐 수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것 같지만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많은 시간 힘들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얻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기도 합니다. 반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마존의 원주민, 아프리카 내전의 주민,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난민,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주민들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그분들은 채울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꽃은 피고, 사랑은 열매 맺고, 희망이 함께 하는 것을 봅니다. 어린 시절입니다. 지금보다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했고, 잠자리도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해질녘까지 뛰어놀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둥근 밥상에 모여 기도하던 가족이 있었습니다. 꽃과 구름과 들판이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또 다른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가진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게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를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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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행복은 선택입니다.
- 하느님 중심의 삶 -
누구나의 보편적 소망이 행복입니다. 그러니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웃도 행복해야 합니다. 더불어의 행복이요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행복을 선택해서 살아야 합니다. 한 번뿐이 없는 유일회적 인생,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요 의무요 책임입니다.
과연 행복하십니까? 과연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소원도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갔을 때, 하느님은 단 하나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행복하게 살았는가?”
바로 하느님이 참 행복임을 말해 줍니다. 궁극의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연초에 써놓은 “평생 소원”이란 기도문 역시 참행복에 대한 갈망의 표현입니다.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마주하여 대화 나누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감히 참행복의 하느님이 되게 해달라는 소원의 기도입니다. 이 또한 참행복하고 싶은 영혼의 갈망을 표현한 겁니다. 다음 시편의 고백과 동정녀 축일 때 낮기도 후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주님, 당신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곳 나의 희망 주 하느님이시니이다.”(동정녀 축일 낮기도 후렴)
바로 행복은 선택임을 입증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참행복의 원천인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선택함과 동시에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생명을, 빛을 선택하는 것이니 저절로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진짜 이런 주님 보물을 모신 이가 내적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세상 행복이 채워줄 수 없는 영혼의 갈망인 행복이요, 바로 영원하신 하느님 만이, 하느님의 사랑만이 비로소 영혼의 행복에 대한 갈망을 해갈解渴시킬 수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참행복의 원천인 주님을 모시고자 이 은혜로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실 주님의 성체는 그대로 주님의 평화, 주님의 사랑, 주님의 행복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주님의 평지 설교중 참행복 선언도 궁극의 행복은 하느님께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선택할 때 이런 행복의 선물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참으로 역설적인 행복입니다. 세상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바로 참행복의 하느님을 모시기에,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런 하느님께 궁극의 신뢰와 희망을 두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 누구도 탐내지 않은, 앗아갈 수 없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행복 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처럼 이런 행복한 사람은 ‘그 뿌리를 하늘에 두고 땅을 향해 거꾸로 자라는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화답처럼 들리는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 통쾌하고 명쾌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의 영혼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혹은 하느님입니까? 새삼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은 참행복의 원천인 하느님 중심 자리에 깊이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여기 수도자들은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깊이 영혼의 뿌리를 내리는 영성훈련에 전념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누구나 하느님께 영혼의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한마디가 참 행복을 요약합니다.
반면 참행복과 첨예한 대조를 이루는 불행선언입니다. 새삼 우리의 행복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점검해 보게 합니다. 안개처럼 사라질 덧없는 피상적, 물질적, 일시적, 거짓 행복을 참행복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생각없이, 영혼없이, 참으로 천박하게 하느님이 아닌 세상에, 사람들에게 신뢰의 뿌리를 내릴 때 자초한 불행입니다. 이 불행선언은 저주도 아니고 형벌의 선고도 아닌 탄식이며 경고입니다. 하느님은 누구도 불행하길 원하지 않으시고 모두가 구원받아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불행선언은 그대로 회개의 촉구입니다. 부족한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가난하고 힘든 이들과 사랑의 연대를 이뤄 살라는 실천적 회개의 촉구입니다. 네가지 행복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네가지 불행선언입니다. 이들 불행한 이들에 대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주석이 참 적절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에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세상 광야에서 하느님을 잊고 이런 황량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황폐한 영혼으로 살아갈 때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도, 폐인도 되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은 이런 불행한 이를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은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이 모두가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의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런 불행이 아닌 참행복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하느님께 하루하루 날마다 깊이 정주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또 하나 참 행복에 결정적 요소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바오로의 열화熱火와 같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 넘치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도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요! 파스카의 주님은 끊임없이 성령을 통해 우리의 믿음, 희망, 사랑을 북돋아 주어 당신과 함께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며 더욱 하느님께 신망애信望愛의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얼마전 교황님의 “부활의 믿음만이 두려움 없이 죽음을 직면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란 말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죽음이 아닌 부활이 마지막 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참행복은 선택이자 은총의 선물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참으로 일편단심 참행복의 원천인 주님을 선택하여 오롯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참행복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제 자작 행복기도중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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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동경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돈’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유함이 행복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가뜩이나 힘들어진 요즘 같은 시기에 솔직히
돈만 있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돈이라는 것은 도통 만족을 모르는 듯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있어야 만족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대개 지금 자신이 보유한 자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앞으로 자산이 더 많아지면 그때 가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으로 행복해지는 때가 정말 오기는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행복도 아이러니하게 돈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하고 굶주리면 행복하지만,
부유하고 배부르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가난은 불행, 부유함은 행복’이라는 공식을 뒤집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하여 추구해야 할 대상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지
그 방향을 재설정해 줍니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나는 무엇을 더 신뢰하고 무엇에
더 의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신뢰하십니까? 돈의 힘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힘입니까? 도무지 만족을 주지 못하는 돈보다,
존재만으로 충만하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진정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는 이미 신앙생활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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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5,1-12)에서는 산상설교로,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의미이다.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복음에서는 4개의 축복이 나온 다음 4개의 저주가 나오는데 이렇게 축복과 저주가 쌍을 이루게 한 것은 ‘축복’의 의미와 효과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복음 내용을 잘 조명해주고 있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5-8절).
성서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따라서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 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하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 복음의 축복이 현재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즉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유하다. 이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개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23절).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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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텅비어 있는
가난한 마음에
하느님을 담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존재자체만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지극히 관계적인
행복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행복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지를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받아들임이 참된
행복입니다.
자신이 만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가난함도 굶주림도
울음도 미움받음도
추방도 모욕도 중상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행복의 여정이었습니다.
행복은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의미를 찾고
하느님 안에서
사는 모든 이들은
행복합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진정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한 하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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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참 행복』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0-23).”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뜻하는 말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기쁨, 평화, 안식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보다는 ‘복되다.’가 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은 ‘행복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입니다.
즉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행복’을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으로만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을 겉으로만 보는 것이 되고, 진짜 가르침을 놓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나중에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나중에’ 누리게 될 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지금’ 복을 내려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축복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가난하면 행복하다.’도 아니고 ‘가난하니까 행복하다.’도 아닙니다.
‘가난’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가난’은 극복해야 할 ‘고통’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면, 공동체가 힘을 모아서 극복해야 합니다.
(실제로 가난해 본 적 없어서 ‘가난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심정도 모르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는 것을 너무 쉽게 폄하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인간 세상의 경제활동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벌고 저축을 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
노동은 ‘선’입니다.
반대로, 노동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폐만 끼치는 것은 ‘악’입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은 실제로 굶주리는 사람들과
영적으로 굶주리는(영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배부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에서 복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다.” 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굶주림’이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행복이기는커녕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명심해서 실천해야 하고,
굶주리는 이웃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프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듯이(마태 12,1)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할 힘도 없을 정도로 굶은 사람에게
“하느님부터 찾아라. 기도부터 해라.” 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지금 우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사람들’(회개하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넓은 뜻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회개’이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웃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용서’와 ‘치유’를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넓은 뜻으로, ‘모든 슬픔’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슬픔’과 ‘울음’ 자체는 불행인데,
그러나 언젠가는 그 ‘슬픔’과 ‘울음’에서 해방되어서
웃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지금 웃을 수 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ㄴ-4).”
하느님(예수님)은 ‘바로 지금’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쫓겨나고,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것은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때문에(신앙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된다고 믿으면,
그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과
그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지금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예수님)과 이웃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기뻐하고, 하느님(예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니까 기뻐하는 생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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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예레 17,5-8)는 행복과 멸망은 어디에 희망을 두는지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와 시편 1장(화답송)의 저자들은 하느님과 지혜가 아니라 사람에게 의지하고, 하느님의 힘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죄에 머물게 되고,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날 것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산다면 사막의 덤불이나 인적 없는 소금 땅과 같이 쓸모없어 버려진 땅에 살려는 것이므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둔다면,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잘 자라서 줄곧 열매를 잘 맺는 것처럼, 약속된 축복의 땅(예루살렘)을 잘 간직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행복(하느님과 이웃사랑)과 멸망(악을 추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겉으로만 좋게 보이는 것에 믿음과 희망을 가지게 된다면 물이 고이지 않는 저수 동굴을 파는 것(2,13)과 같아 절망이 닥칠 것이고, 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신 주님께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루카 6,17.20-26)은 행복과 불행을 선언하는 종말론적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뒤에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열두 사도와 군중을 이룬 많은 제자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이 이룬 큰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기 위해 약속된 땅에서 예수님과 군중의 만남이 이루어졌음(루카의 공동체)을 말합니다(탈출 19장).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14,23)라고 하실 말씀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과 불행의 복음적 기준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굶주린 이들을 인도해야 할 제자들에게(집회 25,9)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6,39)라는 말씀을 위한 전제입니다.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 것(4,19)에 대한 확인이며, 동시에 굶주리고, 울고, 당신 때문에 미움을 받는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루카가 전하는 행복과 불행선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와 약간의 시간이 경과되었고, 교회가 시작되면서 겪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오의 행복선언(5,3-12)이 영적인 것에 치중했다면 루카는 당시 공동체 안에서(“지금”) 드러나는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회적 악 때문에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박해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루카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다.”(1,52-53)는 마리아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모두 함께 지내면서 공동으로 소유하였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고 합니다(사도 2,44-45; 4,34-35).
부유한 이들의 횡포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거나 저항할 힘도 없고, 생존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은(16,19-31) 불의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가난한 이들에게는 주님의 해(희년)가 실현된다는 선포가, 하느님 나라가 오면 의로움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가 사치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가난이란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마음이고, 부유함이란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 살 수 있다는 교만함(신명 8,14)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 막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이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선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위로를 찾을 줄 알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울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재물이 나빠서가 아니라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은 물론 인색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18,23-26) 때문입니다.
배부름이란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후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탈출 16,3-8) 전제합니다.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벗어났음에 감사드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배불리 먹을 것만 찾았지 구원에 대한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면서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배를 채울 것만 찾는 이들, 당장 즐거움을 주는 것만 찾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기 때문에 불행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은 많았지만 정작 구원을 기다리는 제자들은 매우 적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먼저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만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웃고 우는 이들은 바빌론 유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시며(이사 25,8), 바빌론에서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을 위로의 품에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이사 66,10-11). 그래서 비록 지금은 울지만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들은 크게 기뻐 웃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대로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세상을 즐기기만 하는 이들은 지금은 크게 웃으면서 살 수 있겠지만 머지않아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주실”(1.25)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받는 것과 좋은 말을 듣는 것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밀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1,71)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21,17)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된 것을 잘못이라 말하지 않고, 다른 이들로부터 좋은 말만 들으려고 애쓰는 이들은 지금은 좋을지라도 불행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총애보다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고 가식적인 행동을 하면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12.16-20)는 부활을 부정하는 코린토인들에 대한 반박입니다.
바오로는 자기가 전한 복음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기에 다른 복음을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15,11).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죽지 않는 분으로, 죽음이 더 이상 그분에게 힘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세상에 들어났기(로마 6,9)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린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만 죽은 이들의 부활을 부인하기 때문에 바오로가 반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하나는 인정하고 하나는 반대한다면 말로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며,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바오로 사도의 선포는 거짓 증언이고, 또 그런 믿음은 바탕도 목적도 없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거나,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에 불행할 것입니다.
비록 고통이 따를 테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이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약속해주시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머지않아 당신 때문에 많은 박해를 겪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박해가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된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으며, 현세적인 것에 집착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저버리고 불행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다가 불행을 끌어들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이웃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주 듣고 있습니다. 자기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자기도 되받을 것입니다(루카 6,38ㄷ).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드러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1베드 4,16)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바라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기에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이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울게 될지라도, 엉뚱한 모함으로 미움을 받기 때문에 슬퍼하게 될지라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극복하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런 희망으로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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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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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소멸의 아름다움
소멸의 아름다움(필립 시먼스 저, 도서출판 나무심는 사람들 출간)이란 책을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자는 한때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뜨기 시작하던', 문단의 샛별이었습니다.
그러나 힘차게 비상(飛上)을 시작하던 그에게 루게릭병이란 희귀병이 찾아옵니다.
장밋빛 꿈을 접기도 전에 죽음의 그림자는 소리없이 그의 옆에 자리잡기 시작했지요.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할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는 한 순간에 '죽어가는 기술'(Art of dying)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서서히 다가오던 죽음의 공포, 그로 인한 좌절감이나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몰골, 그럼에도 세상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자신은 극심한 고통 속에 번민하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즐기고 떠들어대고….
그 모든 것들이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극심한 고통', 그 앞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저자에게 어느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막다른 길에서 만난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깨달음이었습니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삶의 일부이며, 결국 성장을 위한 신비'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실로 용서하고 진실로 마음을 열면 이 세상은 문제 덩어리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깨달음이
그에게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왔습니다.
저자는 행복한 삶을 위한 첫째 원리로 '낙법(落法) 배우기'(Learning to fall)를 제시합니다.
머지않아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사라지므로 미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落法)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꿈의 좌절, 체력 저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 병고나 죽음 등 언제 닥칠지 모르는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미리미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 다시 말해서 '인생의 낙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眞福八端)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영원하고 참된 행복은
이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진복팔단을 인간 영혼이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할 여덟 계단으로 보았습니다.
이 진복팔단은 순례 길을 걸어가는 교회공동체가 올바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결정적 방향타 역할을 수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참된 행복'의 조건 한 가지 한 가지를 묵상하면서 제 삶을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여기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서야 솔직히 인정하는 바이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한계나 무력감을 철저하게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음을 알게 된 사면초가 순간, 막다른 골목 그 끝에 서서 괴로워하던 순간들이 오히려 은총의 순간이었음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순간만큼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하느님께 손을 내밀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가장 하느님과 제 자신에 대해서 솔직했던 순간, 겸손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현실적 불행, 그 안에는 묘하게도 진정한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 납득하기 힘든 진리를 하루라도 더 빨리 깨닫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닥으로 내려가야 올라가며, 죽어야 산다는 그 역설의 진리를 깨치는 순간,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순간은 우리 신앙이 한 단계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나 인간이 주는 기쁨들은 모두 순간적인 것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며, 얻었다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일시적인 것들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행복,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죽고 우리 자신이 없어져야만 우리 존재 전체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우리가 없어지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 전체를 당신 영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말끔히 비워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살아 숨쉬심으로 인해
행복한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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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복은 사랑해서 하는 고생이다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육신-마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속을 못 박는 것은 ‘가난’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십니다.
육신을 못 박는 방법은 절제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입니다.
또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은 세상에서 멸시받고 조롱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으며 웃지 맙시다.
울게 될 날이 있습니다.
오늘 행복선언을 한마디로 말하면 “행복은 사랑 때문에 고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100세를 넘기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인생을 깨우친 이들은 누구나 같은 행복론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 행복하려고 열심히 사는데 행복하지 못합니다.
고생은 하는데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린 왕자’를 한 번쯤은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린 왕자는 B612라는 작은 별에 삽니다.
어린 왕자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그 한 송이 꽃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의 행동방식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끊임없이 요구하는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결국,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자기 별에 뿌리내린 꽃을 떠난 것입니다.
첫 번째 도착한 별에는 위대한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왕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하기에 외로워짐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두 번째 별에는 허풍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손뼉을 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박수받을 사람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세 번째 별에는 술꾼이 살고 있습니다. 술꾼은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왜 마시냐고 물었더니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그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또 부끄러운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별에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 왕자가 와도 쳐다보지도 않고 계산기만 두드리고 장부 정리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중대한 일을 하는 가치 있고 정확하고 착실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자신이 소유한 별들을 잘 관리해서 그것으로 다른 새로운 별들을 사는 것뿐,
그 별들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별은 매우 작았는데 가로등 하나와 가로등 켜는 사람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의 명령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가로등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별이 1분에 한 바퀴씩 돌기 때문에 1분에 밤낮이 반복되어서 쉴 시간이 없습니다.
좀 쉬면서 하라는 어린 왕자의 말에 “내 평생에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거야”라고 말하며 계속 불을 켰다 끄기를 반복합니다.
여섯 번째 별은 넓은 별인데 나이 든 지리학자가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이 별에 살고 싶은 어린 왕자는 그 별에 강과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지리학자는 자신의 별을 단 한 번도 탐험해 보지 않아 모른다고 합니다.
자신은 지리학자지 탐험가가 아니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별이 지구입니다. 지구란 그동안 만났던 왕과 지리학자, 사업가와 주정뱅이,
허풍쟁이와 가로등 켜는 단순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씩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 설정은 지구에 사는 대부분 사람이 열심히 고생하며 사는데 행복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벌다가 이젠 왜 버는지도 모르고 그냥 출근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고생은 하는데 덜 행복합니다. 남편과 자녀를 위해 살다가 이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는데 일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렇게 항상 고생하고 남는 건 없고 항상 공허하고 피곤하기만 합니다.
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아무리 고생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귀한 친구 둘은 여우와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여우는 길드는 법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항상 4시쯤 오는 노력을 하면 여우는 3시부터 행복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자신을 위해 꾸준히 십자가를 져 달라는 뜻입니다.
어린 왕자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함을 알게 되면서 자기 별에 홀로 남은 장미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부족했기에 십자가가 힘들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조종사는 어린 왕자가 요구하는 까탈스러운 그림을 그려줍니다. 바로 양입니다.
조종사는 사막에서 빠져나가기도 어려운데 어린 왕자가 귀찮았지만, 그와 친해지며 사막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어린 왕자를 위해 그림을 그려준 고생이 행복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외톨이로 살던 그도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고생을 합니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듯이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고생이 헛것이 됩니다.
또 사랑만 외치는 이도 있습니다. 처음의 어린 왕자처럼 사랑은 없는데 자신만 고생한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니 고생하는 게 너무 싫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관계의 단절과 외로움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들로 키워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맞아야 하는 엄청난 가르침을 말했다가는
아이들이 다 도망가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위해 작은 십자가를 져야 함은 알려줄 수 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이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햄스터를 처음 키울 때 햄스터를 참으로 사랑한 것일까요,
아니면 햄스터의 죽음, 곧 진정한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때 햄스터를 사랑한 것일까요.
햄스터가 내 곁을 떠날 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사랑스러워 십자가를 져 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햄스터를 사랑하는 것이고 행복한 것입니다.
상대 때문에 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입니다. 자녀가 내 곁을 떠나고 자녀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며 자녀를 위해 나의 십자가를 질 때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가 죽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나중에 자녀를 통해 어떤 덕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말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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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6 주일-묵상과 기도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곧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사라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 그의 마음이 주님을 떠나 있는 이들은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물가에 심긴 나무 뿌리 같아 잎이 푸르고 가뭄에도 걱정이 없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되살아 나지 않았다면 믿음은 덧없고 믿는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지은 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되살아 나셨다. 믿는 이들의 맏물이 되셨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의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 굶주리는 이의 하느님 나라는 배부르고, 우는 이들의 하느님 나라 웃게 된다. 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 지고 굶주리고 우는 이에게 참 행복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예레 17,5-8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1코린 15,12.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17.20-26
실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주님을 믿고 고백하여 행복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영원한 생명과 그 구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고 그 은총의 충만함을 알기에 스스로 가난함을 선택합니다. 주님께서 풍성한 양식을 주시고 배부름을 믿기에 굶주립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웃음과 기쁨의 넘침을 알기에 웁니다.
부활의 은총과 축복은 우리를 예언자의 길로 인도하며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여 그 하느님 나라를 찬양합니다. 인간의 허물과 약함, 한계와 결핍을 넘어서서 그분의 은총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여 인간의 허약한 너울을 벗어 던지고 주님의 생명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고백하며 그 은총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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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개념과 서구권 사람들과의 인식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해피한 삶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사실 영어식 사고의 개념으로 행복이라는 개념의 어원은 바로 만족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만족시키는 정도에 있다는 개념입니다. 만족시키는 개념에서 행복을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어느 정도에서 만족을 해야 행복하느냐 행복하지 않느냐로 양분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설정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이런 인식의 기준도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일명 절대적인 행복과 상대적인 행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진정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행복한 거지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느끼는 척도나 감정으로 행복을 생각한다면 사실 조금은 이상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서울에서 한 지인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눈 대화가 생각납니다. 상당한 재력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주 가난하게 살아서 집안에서 간이 음식으로 우동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모친이 우동을 참 맛있게 끓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간혹 옛날 그 우동 맛이 그리워 우동 전문집을 찾아서 먹어도 그 시절 모친이 끊여준 그 맛을 느끼기엔 역부족이라고 했습니다. 어느날 지방 재래시장을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허름한 식당에서 우동 사리를 넣고 우동을 끓이는 분식점을 발견하고서 혹시나 옛날 어머니의 손맛이 나올 것 같아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우동 가격은 단돈 3000원이었지만 그때 그 맛은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끓여주신 그 맛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같이 동행을 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 투덜거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 우동이나 먹으려고 비싼 기름들여 운전을 하며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곳에 아주 좋은 맛집이 있어서 고급 음식이 있었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우동집은 배제를 하고 그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서도 어느 정도는 여행을 하면서 먹는 재미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는 만족을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가정이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모르긴 몰라도 물론 비싼 맛집 음식이 더 고급스럽겠지만 그 지인이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식탐의 만족도만 생각했을 때 맛집에서 먹은 고급 음식이 가져다주는 먹는 행복감이 더 행복했을 건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가령 그 가격이 30000원이라고 한다면 열 배의 가치만큼이나 더 행복한가입니다.
제가 봤을 땐 오히려 3000원짜리 우동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열배 더 했으면 더 했지 들하지는 않했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돈의 가치로만 그걸 재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3000원짜리밖에 되지 않는 음식이지만 그 음식으로 옛날 가난한 시절의 그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준 것에서 느끼는 만족감에서 오는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례에서 보더라도 행복도 어느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가난한 생활을 해서 돈을 절약해야 하기 때문에 우동으로 떼울 수밖에 없어서 우동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했을 땐 그런 우동은 절대 그 같은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상황도 될지 모를 일입니다.
같은 우동을 먹고도 느끼는 느낌은 완전 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때로 행복을 타인의 삶과 비교를 해서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재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일종의 상대적인 박탈감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이와 반대로 또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행복을 생각한다면 어떤 오류가 발생하는 것도 있습니다. 원래는 주변의 상황만 아니였다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서 그 격차에 대한 인식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결정하게 해 주는 단초가 된다면 조금은 우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오류라고 하긴 그렇지만 만약 그런 기준으로 행복을 바라본다면 그런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다 떠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행복지수는 높으면 좋겠지만 그 행복지수는 세상이 주는 행복감보다 먼저 자신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더 중요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인간 세상에서 흔히 보편적으로 말하는 행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복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에 나오는 말씀으로 본다면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4차원 같은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막말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 주님을 신뢰한다고 뭐가 나오냐 하는 것입니다. 이건 세속적인 기준에선 맞는 말이겠지만 신앙인이라고 해서 세속의 기준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신앙인은 세상보다는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게 신앙인의 본질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주시려는 행복은 이 세상에서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인간적인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잘 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걸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그걸 당연하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가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은 세상의 기준과 맞서 역행하는 생활이 신앙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화답송에 나오는 주님을 신뢰한다는 말씀도 이 세상에서도 통용되는 말씀이겠지만 실제는 그 말씀은 그 말씀을 그대로 신뢰하면 우리가 가는 하늘나라에서 그게 진정 행복의 길이 된다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만이 그 말씀을 신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로 힘들고 영적으로도 지치며 매너리즘에 빠져 영적인 무력감을 체험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둠의 긴 터널을 언제쯤 벗어나게 될까 하고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위로를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기도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시련과 역경의 시간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는 시간이며 물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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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연중 제6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6주일제1독서 (예레17,5-8)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도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7~8)
앞의 예레미야서 17장 5~6절에서는 사람의 힘을 의지하며 주님을 떠난 자에게 내릴 저주가 선언되었다.
이제 예레미야서 17장 7~8절에서는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내릴 복이 선언된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할 때 복을 받을 사람과 저주를 받을 사람의 차이는 한 가지다.
즉 복을 받을 사람은 오직 주님 만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서 17장 5절의 본문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그의 신뢰가 되는 그 사람은'이다.
여기서 예레미야서 17장 5절의 후반부 문장의 주어는 '주님' 즉 '예흐와'(yehwa)이며, '그의 신뢰'에 해당하는 '미브타호'(mibtaho; whose confidence; whose hope)는 '의뢰', '의지', '신뢰'(시편40,4), '희망'(시편71,5) 등으로 번역되는 '미브타흐'(mibtah)에 3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리고 이 명사는 '의지하다'라는 뜻의 동사 '빠타흐'(batah)에서 유래한 명사로 그 의미는 동사와 같다.
따라서 예레미야서 17장 7절은 한 어근을 중복적으로 사용하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축복을 받을 사람은 오로지 주님만을 신뢰하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 구절과 대조되는 예레미야서 17장 5절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사람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군대나 군사력이 아닌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그 마음이 주님만을 향하여 있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는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주 받을 사람 즉 '사막의 덤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은 축복 받을 사람의 상황이 예레미야서 17장 8절에 진술되고 있다.
'광야의 메마른 곳', '인적 없는 소금 땅'(예레17,6) 즉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서의 삶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무더위'나 '가문 해'에 그러한 곳의 삶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무더위'나 '가문 해'는 아무런 고통이나 걱정을 안겨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서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3)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에서 '두려워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례'(yare)는 예레미야서 17장 6절의 '보다'라는 뜻의 동사 '라아'(raah)와 함께 예레미야서에 자주 사용되어 언어 유희(word play)를 보여주고 있다.
저주 받은 사람은 좋은 일(예를 들면, 저주의 끝)이 찾아들어도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축복 받은 사람은 가뭄(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뭄이 올지라도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그의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반된 상황의 대조는 유사음을 지닌 두 히브리어 '야레'(yare)와 '라아'(raah)의 언어 유희를 통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2022년 02월 13일 일요일
연중 제6주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동경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돈’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유함이 행복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가뜩이나 힘들어진 요즘 같은 시기에
솔직히 돈만 있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돈이라는 것은 도통 만족을 모르는 듯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있어야 만족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대개 지금 자신이 보유한 자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앞으로 자산이 더 많아지면 그때 가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으로 행복해지는 때가 정말 오기는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행복도 아이러니하게 돈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하고 굶주리면 행복하지만,
부유하고 배부르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가난은 불행, 부유함은 행복’이라는 공식을 뒤집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하여 추구해야 할 대상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지 그 방향을 재설정해 줍니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나는 무엇을 더 신뢰하고 무엇에 더 의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신뢰하십니까?
돈의 힘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힘입니까?
도무지 만족을 주지 못하는 돈보다, 존재만으로 충만하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진정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는 이미 신앙생활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생명의 말씀 (2022년 2월 13일(다해)연중 제6주일 서울주보)
상대적 박탈감과 참 행복
김상우 바오로 신부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어부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입니다. 고기잡이에 있어서 어부를 따를 자는 없습니다.
지난날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어부에게 그물을 내리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잣대로는 따르기 힘든 말씀임에도 베드로는 그물을 내렸지요. 예수님을 향한 무한신뢰입니다.
살면서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주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제가 따르겠습니다.
운전 중 이쪽 차선의 차들은 꿈쩍도 안 하지만 반대 차선은 텅 비어 있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이쪽은 정체가 없지만, 맞은편 차들이 서 있을 때 묘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감정들은 ‘상대적’이며 참 행복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참 행복을 찾아야 할까요? 이번 주 성경 말씀에서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제1독서(예레17,5-8)는 저주와 행복에 관한 상반된 예언을 들려줍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는 주님에게서 떠나 있기에 교만해지기 쉽지만,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겸손 안에 머물기에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12.16-20)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믿음, 희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희망의 근거이기에, 이 믿음과 희망은 현세적 행복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이처럼 우리 신앙인에게 믿음과 희망과 행복은 현세가 아니라 영원을 지향합니다.
복음(루카 6,17.20-26)은 참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린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다른 이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느끼는 상대적 만족감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사람에게 의지하여 주어지는 일시 적 보상과 위로와도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고통의 현실까지 감내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에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인이라고 해서 ‘하늘’만 바라보며 현실에 무관심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되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나 만족만을 지향하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초대받은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김상우 바오로 신부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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