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명의! 내 고객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고장 난 차량을 족집게 같이 정확히 진단하고 그 처방을 빠르게 한다고 해서다. 나는 20년째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정도 기간 동안 경험을 쌓는다면 누구나 ‘명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일을 좋아하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다. 난 이것을 군대에서 배웠다. 내 사수, 윤 병장한테서다.
난 운전병으로 근무했다. 어릴 때부터 차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운전을 엄청나게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군 생활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운전은 내 유일한 취미였다. 군 생활은 어찌 보면 취미생활의 연장이었다. 이 취미는 외삼촌 덕분에 생겼다. 그 분은 지방도시에서 카센터를 운영했다. 집에서 가까운 그 곳은 내 놀이터였다. 자동차 관련 온갖 부품과 다양한 장비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승용차들이다. 그 당시는 차가 귀했다. 삼촌 정비소에 가면 그 귀한 차들을 만져보고 가끔 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삼촌이 코로나·브리사·포니 등을 뜯어내고 재조립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삼촌이 외출할 때는 자주색 포니 조수석에 타는 행운도 있었다.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삼촌한테 차 기능과 조작법을 배웠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빈터에서 삼촌 포니차를 혼자 운전할 수 있었다. 3학년 때는 한적한 시골길에서 삼촌이 조수석에 앉아 있을 정도로 숙달되었다. 물론 부모님께는 비밀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자동차 1종 면허증을 땄다. 군대 운전병은 당연한 순서였다.
나는 수송부에서 근무했다. 군용 트럭을 운전했다. 주로 전방에 부식을 전달했다. 산길은 대부분 비포장도로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고 경사가 심하다. 차량에 무리가 많이 간다. 트럭을 수시로 점검하고 정비해야 한다. 이동 중간에 차량에 이상이 생기거나 고장이 나면 아주 곤욕을 치른다. 운전병도 기본 차량 정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수송부 차량 정비소를 자주 찾은 이유였다.
차량 정비소에는 항상 ‘윤 상병’이 있다. 그는 나보다 1년 정도 고참이다. 그는 항상 차와 함께 있다. 해체·교체·조립을 반복한다. 닦고 조이고 기름 친다. 정비소 구석에 그의 책상이 있다. 차에 관한 책들이 책꽂이에 꽂혀있다. 30여권 정도다. 외국 차에 대한 잡지도 있다. 그는 한가할 때는 이곳에서 책을 본다. 휴일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고 무언가 노트에 적고 스케치를 한다. 차에 미친 사람 같았다. 아니 ‘차 마니아’란 말이 어울렸다. 그가 궁금했다.
윤 상병은 엔지니어였다. 차량 정비 전문가였다. 입대하기 전에 이미 차량 정비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카센터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차가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차를 해체하고 수리한 후 조립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다는 얘기였다. 고장 난 차량이 자기 손을 거쳐 시동을 건 후, ‘부웅~!’ 하는 작동 소리가 들릴 때 느끼는 쾌감은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라 했다.
차량 정비사는 의사와 같다고 말했다. 모두 생명을 다루기 때문이란다. ‘자동차 정비는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실수하면 차에 타고 있는 사람 생명을 위협한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그의 얼굴이 얼마나 진지한지 지금도 생생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강한 울림이었다. 마니아 옆에서 반드시 마니아가 생긴다. 낚시꾼 옆에는 신참 낚시꾼이 생기듯이, 열정은 전염되는 속성을 지녔다. 나는 윤 상병 열정에 감염되기 시작했다. 근무가 끝나면 수송부 차량 정비소에서 지냈다. 그에게 기본부터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정비관련 책도 보고 외우고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수백 가지 부속품 이름과 기능을 숙지했다. 자동차 작동원리, 차량 고장 진단법, 소리로 판별하는 법, 육안 판단법 등을 배웠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법과 유사했다. 차량 정비 기술자는 바로 ‘차 의사’였다.
나는 차량 정비 자격증을 획득했다. 윤 병장이 제대를 6개월 정도 남겨 놓았을 때였다. 휴가를 시험기간에 맞췄다. 운도 따랐다. 윤 병장 코치 덕분이었다. 나는 그의 부사수로 근무했다. 운전병에서 정비병으로 전과한 셈이었다. 군 생활 이모작이었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그가 전역하는 날이었다. ‘자동차 정비는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끊임없이 공부해라!’ 그가 남긴 말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내 직업 철학이 되었다.
제대 후 복학을 포기했다. 법학과는 내가 좋아서 선택한 전공이 아니었다. 아버지 권유(실제론 압력^^) 로 마지못해 선택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막강했다. 그 분은 대학교수였다. 4형제는 아버지가 원하는 과를 모두 선택했다. 초·중·고등학교 때부터 워낙 귀에 박히게 들어온 말이다. 모두 당연히 생각했다.
나는 군대에서 윤 병장을 만난 후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은 즐겁게 한다. 결국 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솔직히 차가 좋았다. 남이 보면 기름에 찌든 작업복을 입고 얼굴에 땀과 얼룩으로 범벅된 모습이, 힘들고 기피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다르다. 나는 차량 정비가 놀이다. 아이가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나는 실제 차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나에게는 일과 놀이 경계가 불분명하다. 놀이와 일이 동의어다. 나는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즐기고 싶었다. 인생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아도 짧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정중하게 ‘막내 독립’을 선언했다. 집을 나왔다. 고향을 떠났다. 윤 병장이 일하는 정비소에 취직했다. 군 전우가 사회에서 다시 뭉친 셈이었다. 우연한 인연이 필연으로 연결되었다. 차량 정비업 선택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군 생활은 어떻게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인지 윤병장을 통해서 배운 시절이었다.
5년 후 개업했다. 내 주특기는 10년 이상 된 중고차를 수리하는 일이다. 그것도 공식 서비스센터에서 ‘도저히 못 고친다’라고 포기한 차들이 나에게는 도전 대상들이다. 이런 차량일수록 열정이 더 솟는다. 밤을 새워 원인을 찾아내고 단종된 부속품을 다른 차량에서 구한 것으로 대체하며 수리했다. 자기 차를 사랑하는 외제차 마니아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차가 아무리 오래되고 고장 나더라도 꼭 수리하고 싶어한다. 서비스센터에서 포기하더라도 그들은 포기할 줄 모른다. 진짜 마니아들이다. 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런 차를 수리하는 게 너무 좋다. 아주 멀리서 견인차로 실려 온 차도 내 손을 거치면 그 차는 다시 쌩쌩하게 달린다. 웃음 짓는 차주인 얼굴을 볼 때 이 일에 대한 자부심이 저절로 생긴다.
논어에 ‘지호락(知好樂)’이야기가 나온다. ‘좋아하는 게 아는 것보다 낫고, 즐기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낫다’란 뜻이다. 나는 이 뜻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했다. 즉, 자신이 하는 일이 점차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다. 나의 경우, 자동차를 알게 되었고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 일을 즐기는 단계까지 되었다. 후배들한테 무슨 일을 하든지 우선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당부하는 이유다. 좋아하는 일을 배우고 자주 하면 잘 하게 되고 결국은 즐기는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지금은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에게 내 노하우를 기꺼이 전수해 주고 있다. ‘자동차 정비는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끊임없이 공부해라!’ 윤 병장 얘기를 반복하며, 나는 오늘도 미래 ‘자동차 명의’를 키우고 있다. 나는 이 일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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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춘예찬 원문보기 글쓴이: 굳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