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사이트에 연재되는 탈북녀 설죽화님의 글을 옮김>
가을하늘,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지만
내 고향 북녘에서는 벌써부터 풍년은 고사하고 남은 한해 어찌 살아갈지 걱정에
앙상한 어깨들을 기운없이 떨군채로 한숨을 쉬고계실 모습들이
삼삼히 어려옵니다.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입니다.
창너머 구름한점 없이 파아란 하늘바다는 날더러 어서 풍덩 빠져보라고
손저어 부르는듯도 하는데...
남한에서 살아온지도 어언 칠년차...
나도 모르게 가끔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싶은 생각과 함께
스치는 바람처럼, 떠밀리듯 흘러보낸 세월들을 떠올려 보군 하지요.
개중에는 정말 그 순간에는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던,
아무에게도 털어놓을수 없어서
깊은 밤 나 홀로 울면서 삭힐수밖에 없었던
아프고 쓰라린 기억들조차도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담담하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조차 띄워보는 여유도 생겼겠습니다.
내가 겪었던, 또 얼마나 더 겪어야 할지도 모를
무!수!한 오해와 비난과 불신과 편견의 눈초리들...
비단 나 하나뿐이 아닌 자유에 대한 벅찬 동경을
가슴가득 품고 환희와 기쁨속에 다달았던 만칠천명 탈북자들중
어느 누구 하나 감히 가벼이 비껴가지 못했을것이고,
지금도 끝도 없이 겪고있을 시행착오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것이기에...
힘들고 괴로울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었었습니다.
일하는 가게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불쑥불쑥
치밀때마다 나는 더 강하게 그런 생각을 패대기쳐버리군 했었지요.
여기서 내가 살아남지 못하면 다른 어디가든 마찬가지일것이라고,
여기서 내가 견디어내면 훗날 그것으로 인하여 또 다른 인생의
갈림길에서 부닥치게 될 시련들을 조금은 더 수월하게 견딜수 있을꺼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더 크게, 더 활짝 웃군 했었더랬지요...
이를 피나게 악물고 누가 뭐라든 나만의 목표를 위해 고집스럽게
묵묵히 걷고 또 걸었었습니다.
오늘의 나,
무엇이 나를 견디게 해주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힘들다고, 괴롭다고 현실에서 도피하자고 끊임없이 꼬드기던
내안의 나와 여기서 악착같이 견디면서 살아남는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에 적응하는 나날들이라면서 끊임없이 싸우고 싸웠던
또 다른 나와의 진정한 한판승이 아니였을까 싶어요.
또한 열심히 사는 모습 보기 좋다면서,
힘내라면서 따뜻이 격려해주시던 님들의 정어린 말 한마디 한마디 들이엿지요...
십년만에 만났던 고향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더랬습니다.
"너 완전 백팔십도로 변했어..."
일순 서글펐었지요.
과연 그 무엇이 한낱 가녀린 여인에 불과하던 나를 이렇듯
남자보다 더 남자답게? 만든것일까?싶은 생각에...
내가 친구에게 했던 한마디...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타향살이 십여년이 함축되어 있는 이 말의 깊은 의미를 친구도 어렴풋이 짐작을 했었을까요?
울듯,웃을듯 쓸쓸함이 감도는 옅은 미소를 띄웠었더랬지요.
종 종 귓가에 이런, 저런 가슴아픈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마음이 아파오네요...
견디어낼수있어, 넌 이겨낼꺼야, 기운내라고
고향의 혈육들을 생각해서라도 니가 쓰러지면 안된다고 이야기해줍니다.
가까이라도 있으면 함께 술 한잔 기울이면서 다독여주고 싶지만 마음뿐일뿐,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현실의 무게를
생각해볼때 녹록치 않은 일이기도 하지요.
사실 일이 힘든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에서는 멀건 죽물만 먹고도 아무런 댓가없는 부역(골재동원, 농촌지원 등등 온갖 잡다한...)
으로 이틀이 멀다 하게 끌려나갔었으니까요...
그러나...
안그래도 찢기고 멍들어 피투성이가 된채 형체조차 찾아볼수 없는
마음에 소금 한주먹씩 뿌려대는 생각없는 말! 말! 말!들때문에...
비아냥과 냉소와 힐난의 번뜩이는 눈초리들때문에...
힘들고 괴로워서 미치겠다면서...
수화기너머로 울먹이는 소리를 들을때면 나도 함께 눈물을 떨굽니다.
이겨낼수 있어, 우린 어떻하나 살아서 고향으로 가야해
여기서 니가 주저앉으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수도 있어.
마음 더 독하게 먹고 다시 일어나길 바래.
보란듯이 웃으며 씩씩하게 살아가는것이야말로
너를 비웃고 깔보는 일부 개념없는 사람들을 이겨버리는거야...
굴하지 말고 죽기살기로 견디어보자면서 다독입니다.
힘내라는 말한마디...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한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싶지만...
현실은 그렇지를 않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할뿐입니다.
둘러보시면 혹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어두운 얼굴빛에 어눌한 말투의 탈북자가 있다면
주저없이 다가가셔서 그저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님들의 그러한 손길, 정어린 말씀 한마디가
때론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는것인지
우리들은 정말로 잘 알고 있기에 말입니다.
백마디 비난의 말들보다 님들의 기운내라고 속삭이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선다면 그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어루만진 만큼,
따뜻한 행복이 당신의 삶을 어루만지게 될것이라는
어느 분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부디 이 가을에는 여러 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미소어린 모습들로써
우리 형제자매분들의 마음이 얼어붙은 봄날의 눈석이마냥 녹아내리는
풍요로운 가을로 다가올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건강하시고...
다들 미소와 웃음이 가득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2009-09-05 14: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