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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성전과 예수님
예루살렘 구도시의 중심에는 제1성전과 제2성전이 봉헌되었던 성전산이 자리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신 뒤 광야에서 사십 일간 단식하실 때, 사탄은 예수님을 “거룩한 도성” 곧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라고 유혹하였습니다(마태 4,5-6).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던 그때의 성전은 없고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지만, 옛 성전을 지지하던 바깥벽이 어느 정도 남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곳에 성전을 최초로 봉헌한 이는 기원전 10세기의 솔로몬 왕입니다. 2역대 3,1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지었습니다. 모리야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이지요(창세 22,2). 그런데 솔로몬의 제1성전은 기원전 6세기 초 바빌론에 의해 무너지고, 그로부터 약 50년 뒤 유다인들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즈루빠벨이라는 지도자의 주도로 제2성전을 봉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기원전 1세기에 일명 ‘건축왕’이라 일컬어지는 헤로데가 개축하고요. 이때, 그가 행한 공사 규모가 굉장했던 것 같습니다. 성전에 쓰인 돌 대부분이 각각 2-3톤 정도였고, 가장 큰 돌은 무게 570톤, 길이 13미터에 달했습니다. 이 돌들은 모리야 산의 북쪽을 채석하여 마련했다고 합니다. 헤로데는 자기 건축물에 독특한 문양을 새기게 하였으므로,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은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묻힌 헤브론의 막펠라 동굴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어 헤로데가 재건한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가 개축한 성전에서 활동하십니다. 하지만 세속 시장처럼 변질된 타락상을 꾸짖으며 환전꾼과 상인들을 양과 소와 함께 몰아내십니다(마태 21,12-13; 요한 2,16). 즈카 14,21에 따르면, 성전에는 신약 시대 이전부터 장사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짐승을 성전에서 몰아내신 건 동물 제사의 폐기를 예고하시려는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희생 제사가 완성되면, 죄 사함을 위한 제물이 더는 필요 없을 터였기 때문입니다(히브 7,27).
유다인들의 기쁨이자 자랑이던 성전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마태 23,38) 파괴됩니다. 기원후 70년, 열혈당원들의 봉기를 진압하던 로마 장군 티투스가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뜨려 그 자리에 성전과 관련된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기원후 7세기부터는 이슬람의 예언자 모하메드의 승천을 기념하는 사원이 순금의 위용을 뽐내며 서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곧 예수님의 몸이고(요한 2,21), 주님께서 완성하신 단 한 번의 제사로 우리 또한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 되었으므로(1코린 3,16), 당신의 거처를 백성 사이에 두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에제 37,28)은 변함이 없습니다. 성전산은 이제 흔적만 남았지만, 예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조근조근 들려줍니다.
[성경, 하느님의 말씀] 침묵하시는 하느님
침묵은 말에 선재합니다. 동시에 침묵은 창조의 완성을 이룹니다.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 말씀이 있기 전에 하느님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세상 창조 7일 째, 종말까지 이어질 창조 사업에 하느님께서 큰 쉼표를 하나 찍으시며 ‘세상이 완성되어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말씀을 멈추셨습니다(창세 2,2 참조). 말씀의 멈춤은 온 세상 피조물의 안식과 복, 거룩함을 자아냈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말로 이루어지는 세상 창조에 앞서 있고 그것을 완성하는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온 세상 피조물은 하느님의 침묵에 참여하게끔 초대받았습니다. 웅장한 자연 환경에 압도되어 본 사람은 ‘침묵이 이루어내는 하느님 찬미’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압도하는 자연은 자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자기 본연의 자리를 지킬 따름입니다. 사람은 말이 아닌 침묵으로 아상(我相)을 넘어서는 존재인 자연을 마주합니다. 그로써 경이를 느끼고 한편으론 겸손해지며 그 가운데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는 온 우주의 질서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끊임없이 완성시켜 나가야 할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창세 2,19 참조) 그래서 자기 말을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입을 닫아야 할 시점에 계속 입을 벌려 자기 말을 늘어놓습니다. 그로써 피조물 본연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기도 하고, 애써 자기 본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른 이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창세기 3장의 뱀과 첫 인간들의 고통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안식, 복, 거룩함이 뿌리내릴 수 없는 어둠의 골짜기의 현신(現身)이라 하겠습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걷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시편 23,4 참조)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침묵하십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 성부께서는 구원의 길을 가시는 성자의 고통 앞에 침묵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의 침묵을 십자가 상에서 받아 안으십니다. 그 누구보다 힘 있는 말씀을 간직하신 분께서 하느님으로서의 자리를 내려놓으시고 죄인들의 자리를 취하시며 침묵으로 지탱하십니다. 무고하신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고 죽으셨다는 신앙고백에 맞갖게, 침묵하지 못했던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 대신 침묵해주십니다. 그렇게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을 통해 하느님의 침묵을 온전히 담아낸 십자가라는 자리는 온 인류의 재창조와 부활의 매개로 작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상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침묵에 기반을 둔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의 침묵에서 시작과 완성을 보듯이, 우리의 말 또한 하느님의 침묵에서 비롯되어 하느님의 침묵으로 귀결되어야 하겠습니다. ‘최대한 말을 줄여야 한다’라는 식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앞서, 우리의 삶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회귀하지 않고 하느님의 침묵을 지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침묵이 오롯이 하느님께 유보된 은총이란 사실입니다. 우리의 침묵은 피조물 본연의 자리에 늘 부족하여 과도할 따름인 스스로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먼지와 재로 돌리는 회개의 몸짓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몸짓을 십자가 상에서 침묵하시는 주님께서 이끌고 계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지키고자 애쓰는 모든 이를 하느님께서 강복하시기를, 그로써 하느님 침묵의 안식, 복, 거룩함이 우리 삶에 실현되기를 희망합니다.
[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마르 14,72)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더니 갑자기 허둥지둥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도망을 칩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베드로의 뒤통수로 마치 그를 비웃는 듯 울어대는 새벽닭의 소리. 행여 누가 볼까 봐 자신도 모르게 어두움에 몸을 숨깁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면의 소리가 그를 짓누릅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르 14,31) 다른 제자들에게 보란 듯이 두 손을 불끈 쥐고서 스승님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맹세합니다. 그런데… 스승님을 모른다고, 그것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그렇게 스승님을 버렸습니다.
순간,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예수님께 입을 맞추던 유다 이스카리옷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래, 그 녀석이 스승님을 배반한 거야. 그놈이 스승님을 팔아넘긴 거라고!’ 유다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화가 났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유다 때문이었습니다. 유다만 아니었다면, 스승님은 잡혀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망쳤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보낸 사람들이 무서워, 베드로는 스승님을 내버려두고 도망쳤습니다.
얼마나 달려온 것일까요.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권위 있는 말씀. 그분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렇게 3년이나 되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스승님이야말로 진정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라 믿었는데.
베드로는 자신이 왜 도망쳤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스승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많은 사람이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스승님이 그곳에 계시리라 생각하고 저택의 안뜰로 들어섭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수군거림으로 몸을 돌리고 맙니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마르 14,67) 한 여자가 그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녀 뒤에 서 있는 사람들과도 눈이 마주쳤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분을 가장 가까이 모셨던 터라,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이미 잘 알 것이란 생각에 온몸은 굳어지고 입술은 바짝 타들어 갑니다. 아니라고, 난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점점 몰려듭니다. 이러다가는 모든 게 들통이 나버려 자신도 잡혀갈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사람들의 집요한 추궁에 그렇게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스승님을 모른다고 소리를 지르며 대사제의 집을 뛰쳐나옵니다. 그 순간 닭이 웁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르 14,30) 내가 고통받을까 두려워, 사람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모욕을 당할까 겁이나 스승님을 모른다고. 주님의 수난 앞에 우리는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흘린 눈물은 우리도 흘려야 할 진정한 회개의 눈물이 아닐까요?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2) 베드로의 둘째 서간
거짓 교사와 불경자 경계하고 거룩한 사람이 돼라
베드로의 둘째 서간(이하 베드로 2서)의 가장 중요한 자료는 ‘유다 서간’(이하 유다서)입니다. 특히 2장 1절에서 3장 3절까지의 내용은 유다서를 중점적으로 이용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2서는 원본문인 유다서에 매여 있지 않고 내용상 독자적인 강조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예로 베드로 2서는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과 관련해 제기되는 이의를 부각하지만, 유다서에서는 이 문제 자체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표지는 베드로 2서가 유다교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유다서보다 후대의 집단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그래서 이 서간은 유다서에서 나타나는 배타적 경향과 바오로계 서간에서 볼 수 있는 개방적 경향을 조화시키려는 사목적 노력의 결과로, 곧 초대 교회의 여러 성향을 종합하려고 애쓴 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주석 성경」 931~932쪽)
베드로 2서는 글쓴이가 주님의 거룩한 변모 때에 그 곁에 있었던(1,16) 시몬 베드로 사도라고 밝힙니다.(1,1) 그러면서 자기 죽음이 가까웠다(1,14)면서 유언 형식으로 이 서간을 쓴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립니다. 하지만 베드로 2서에는 누구에게 이 서간을 보내는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이하 베드로 1서) 수신자와 같다면 소아시아 5개 교회에 보낸 편지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전한 글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베드로 2서는 베드로 1서와 문체가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두 서간에서 같은 낱말은 100개뿐이지만, 다른 낱말은 599개나 됩니다. 또 주님의 재림에 관한 내용도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두 서간이 꽤 긴 시차를 두고 쓰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증거로 베드로 2서는 교회의 첫 세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밝히고 있습니다.(3,4) 이는 베드로 2서를 쓴 이가 그 세대에 속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2서가 유다 서간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후대에 쓰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 2서는 성경 경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나 예언자들을 글과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이 이미 신자들에게 성경으로 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3,15-16)
이런 이유로 성경학자들은 베드로 2서가 125년께 헬레니즘 세계의 디아스포라에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에 의해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베드로 2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가장 먼저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Πετρου Β(페트로 베타)’,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Petri Ⅱ’,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베드로의 둘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베드로 2서는 모두 3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베드로 2서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생활을 하면서(1,4)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이입니다. 이 삶은 사도들의 증언과 성령의 감도를 받은 말씀에 바탕을 둡니다.(1,21)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3,14-18)
베드로 2서는 ‘거짓 교사들’을 경고합니다. 그들은 문란한 교리와 생활을 조장하고 퍼뜨리는 자들입니다.(2,1-22) 그들은 이단자들로 구약의 타락한 천사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처럼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불어 베드로 2서는 ‘불경한 자들’을 단죄합니다.(2,1) 이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정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거짓 자유를 퍼뜨려 신앙 공동체를 타락시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2,19)
이들은 두 가지 이단에 빠진 자들입니다. 첫째,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님을 부정하고 천사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신학적 이단자들’입니다.(2,10-11) 둘째,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도덕적 이단자들’입니다.(2,14) 성경학자들은 베드로 2서가 이단자로 단죄하는 ‘거짓 교사’와 ‘불경한 자’가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뛰어난 지식과 완전한 자유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자부하면서 육체를 멸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2서는 주님의 재림이 왜 늦어지는지 과감하게 제기합니다.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라고 묻습니다.(3,4) 베드로 2서는 이러한 신앙의 결핍을 단호히 단죄하고 구약 노아 시대의 홍수가 앞으로 닥쳐올 마지막 심판의 예형이라고 설명합니다.(3,6) 그러면서 지금의 세상은 불로 파멸되고 그 자리에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 합니다.(3,10-15)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께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라고 합니다.(3,8) 그래서 주님의 재림이 지체된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서 오는 인내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가 회개할 시간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종말이 오기까지 모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42) 에돔의 멸망을 전한 예언자 오바드야
1943년 이전에는 구약성경이 가톨릭 신학생들도 읽지 못하는 금서(禁書)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에 가톨릭교회는 구약성경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신자들을 구약성경에 접근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례 개혁 이전에는 주일 미사 때 구약성경의 독서가 없었으나 지금은 제1독서에서 구약성경을 꼭 읽게 되어 있다.
이단 교회는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생겨난다. 특히 구약 부분은 인간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어 있어 아예 전문가들 이외에는 접근을 금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 오직 하느님,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의 사상이나 성향을 극단적으로 거슬러 행동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구약성경를 읽는 것 자체를 소홀히 하게 되었고 구약성경을 읽는 대신 준주성범을 오랜 세월 동안 읽었다.
사실 구약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을 때 잘못 이해할 위험성도 많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은 1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 점차로 가톨릭 내에서도 활발히 성서학 연구를 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1943년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을 통해 정식으로 성경 문헌을 개방하고 성경 연구의 문을 공식적으로 열어주었다.
유다가 멸망할 때 하느님을 배신하고 갖은 나쁜 짓을 한 에돔의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가 오바디야이다. 오바디야 예언자의 정보는 아주 부족하여 작성 시기는 물론 많은 논란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오바디야 예언자는 에돔에 관해 분명하게 기록했다. 책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초기 시대에는 오바디야가 선지자 엘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앗시리아가 침공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 유배시켰다. 바빌론 유배의 전후로 해서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굳이 나누자면 바빌론 유배 전후로 구분한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 예언자들은 정착 생활을 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배반하지 말고 오직 자신들을 구원한 유일한 하느님만을 섬기고, 계약으로 맺은 율법을 지켜 신실하게 살라고 권고했다. 엄밀히 따지면 하느님을 믿고 있는 채 우상도 함께 주인으로 모신 죄였다. 종교혼합주의라 할까.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곳의 잡신을 섬기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이스라엘은 벗어나지 못했다.
예언자 오바디야는 지속해서 에돔의 멸망을 외쳤지만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고 멸망한다. 유다인들은 비참하게 바빌론으로 끌려가 50여 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오바디야는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언했다. 이제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들이나 이스라엘의 남겨진 이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후세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말씀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13) 죽게 해달라는 이들의 기도를 찬양으로 바꾸시는 하느님(토빗 3,16; 3,11-15; 13,1-14,1)
20번 정도 기도를 언급하는 토빗기에 따르면 기도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4,19;12,6.7.17.20), 건강과 안전의 청원(5,17), 보살핌과 축복의 청원(7,11;9,6), 후손의 기원(10,11), 부모 공경의 청원(10,13), 자비와 평화의 기원(7,11), 하느님 찬양의 권고(12,6), 조신함과 성공의 청원(4,19), 자비와 구원의 청원(8,4)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토빗기는 죽고 싶다는 이의 기도도 들려줍니다.
토빗은 고지식하다고 싶을 정도로 외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미 고향에 살 때도 집안 사람들과 달리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물을 드렸고, 이방인들 사이에 포로로 살면서도 까다로운 음식 규정을 지키고 동족에게 큰 자선을 베풀고, 그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1,6-20) 축젯날 주검에 닿아 부정하게 된 상황에서(민수 9,10;19,11) 하필 성결법을 지키고자 방이 아니라 담 옆에서 잠을 자다가 눈이 멀었습니다. 그의 고집스러운 신앙생활은 이웃은 물론이고 부인조차 불편하게 한 듯싶습니다.(2,14) 아내를 의심하고 그와 다툰 뒤 토빗은 자기 연민에 쌓여 죽기를 청합니다. “이제 당신께서 …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3,6)
일곱 남자와 결혼했지만, 신랑과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모든 남편을 잃은 사라는 이웃의 흉흉한 입담과 자기 신세 한탄으로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을 부잣집 딸입니다. 그녀로부터 매 맞은 여종들이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모욕하자 사라는 목을 매 죽으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남아계실 아버지가 받을 수모를 생각하여 하느님께 죽음을 청합니다. “분부를 내리시어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다시는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게 하소서. … 아버지에게는 저를 아내로 맞아들일 가까운 친족도 일가붙이도 없습니다. 저는 이미 남편을 일곱이나 잃었습니다. 제가 더 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제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저를 모욕하는 저 말이라도 들어 보소서.”(3,13-15)
둘 다 외로움의 낭떠러지에서 죽고 싶은 생각으로부터 올려진 절망적인 기도이지만 이는 하느님 앞에 다다르고 마치 극의 한 장면처럼 라파엘이 파견됩니다.(3,16-17)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토빗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책의 절정을 기도로 장식합니다. “그분께서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 내 후손 가운데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의 임금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나 얼마나 행복하리오? … 복을 받은 이들은 거룩한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미하리라.”(13,4.16.18) 그의 시선은 포로 생활과 나그네살이라는 현실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에 이릅니다.
재산이 많은 토비야 이야기는 나그네살이를 하면서도 재산을 많이 모으는 유다인들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 하지만 토빗, 토비야, 사라, 라구엘, 라파엘 등 앞 세대와 뒷세대, 남녀 모두가 기도하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띕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12,8;14,8-9)는 말씀은 기도하는 이로 하여금 선행을 잊지 않게, 재산을 지닌 이로 하여금 자선을 잊지 않게 도와줍니다. 기도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12,12)는 라파엘 천사의 말씀 자체가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