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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44.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383항)
진정 성공한 인생 바란다면 이웃을 잊지 말아야
“실패에 의미가 있다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공에 위험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사람과 민족이 연승행진을 하다가 돌연 파국을 맞은 역사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폴 투르니에 「인생의 사계절」)
뭐가 우선일까
어느 신자분의 질문입니다. “신부님,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가 바라는 우리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건가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선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먼저 이뤄져 모든 이의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길 염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런 전제를 토대로 거기에 내 뜻도 이뤄지길 바라는 것은 크게 문제는 안 될 겁니다.
그런데 내 뜻이 무엇인지도 살펴봐야 하고, 내가 정말로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며 사는지가 관건일 겁니다. 가족과 이웃을 배제한 채 내 욕심만 추구함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으며,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하지만 간혹 그것에 관심없이 살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하신 분에게 저도 질문을 했습니다. “내 뜻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이웃,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시나요?”
내가 찾고 있던 것
이웃과 사회에 관심을 갖고, 서로의 곤궁함과 어려움에 도움을 나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삶입니다. 그런데 비대면, 각자도생이 유행하면서 이웃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물론 친한 사람과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웃이 되는 조건은 나와 친한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정도로만 그쳐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 저 역시 제가 좋아하는 이들만 사랑하기에 무척 부끄럽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기보다, 제게 기도를 부탁하는 친한 교우분들을 위해서만 기도해 드렸습니다. 어렵고 힘든 내가 모르는 우리 사회의 이웃들을 떠올리며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성공한 삶이란
연말연시 속에서 어수선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올 한 해 내 삶은 성공한 삶인가를 떠올려 봅니다. 성공 여부에도 여러 잣대가 있겠지요. 경제, 학업, 사업의 성취도 있고, 결혼이나 건강, 어떤 목표의 달성 등 다양합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하느님의 뜻을 우선으로 여기며 살았는가, 또한 내가 모르는 이웃을 얼마나 기억하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았는가, 성당이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친절과 미소, 봉사와 사랑, 따스함을 선물했는가, 한 해를 마무리하며 우리가 성찰해야 할 중요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받게 될 심판의 기준일 겁니다.
“교회는 죽음을 물리쳐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구원하신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선포한다. 그분의 나라는 지금 이 시대도 포함하며, 모든 것이 아버지께 돌아가고 인간 역사가 최후의 심판으로 완성될 때에야 끝이 날 것이다.(1코린 15,20-28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지배욕의 유혹을 받는 인간 권위에게 권위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봉사에 있음을 드러내신다.”(「간추린 사회교리」 383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44. 주님의 기도 ⑤ (「가톨릭교회 교리서」 2822~2827항)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지킬 때 하느님을 만난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한국에 선교하러 와서 귀화한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가 「사랑이 밥 먹여 준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여기에 그분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사연이 나옵니다.
1992년 맑고 화창한 계절의 어느 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한 분이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이에 적힌 주소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너무 어둡고 덥고 냄새가 나서 몇 초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방바닥에 누워있는 50대 아저씨가 보였습니다. 아저씨는 20대 시절에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어 그때부터 30여 년을 이 지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식사는 이웃 사람들이 가져다주면 먹고 아니면 굶는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이 “아저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고 했습니다. 방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고 요강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심해 우선 요강부터 닦았습니다. 방 청소와 설거지를 한 후 다시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었고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신부님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던 그 순간, 어떤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바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이 만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이가 구원받고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2822 참조)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지향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의 뜻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처소이고 땅은 인간의 처소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는 뜻은 그리스도에게서처럼 인간에게도 이루어지라고 청하는 것입니다.(2827 참조)
부부 관계로 따지면,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그분의 교회인 우리는 신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는 이는 신랑을 보듯 하느님의 얼굴을 봅니다. 결국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듯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이는 하늘을 품은 땅이 됩니다.(2827 참조)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르면서 자기 안에서 하느님의 심장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와는 뱀을 바라봤고 뱀과 대화했고 뱀의 뜻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뜻만을 바라보는 우리는 밤바다에서 오징어잡이 배의 빛을 따라 올라오는 오징어처럼 하늘의 빛을 품고 그 빛 속에서 살게 됩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대림 시기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오늘부터 4주간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고 재림하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대림 제1주일은, 주님 성탄 대축일인 12월 25일의 바로 앞 주일을 대림 제4주일로 하여 역으로 계산해 정합니다. ‘대림’(待臨)은 ‘임하시기를 기다린다.’라는 의미인데, 이를 가리키는 라틴어 Adventus [아드벤투스]는 ‘다가옴, 가까워짐, 도착’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역사적으로 대림 시기의 전례와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4세기 말경 스페인과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지방에서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6주 동안 참회 기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6세기 이후 로마와 라벤나에서 대림 시기의 전례를 공식적으로 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도 처음에는 6주간이었으나,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590-604년 재위)은 이를 4주간으로 조정하였습니다.
대림 시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고, 후반부는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입니다. 전반부에선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후반부에선 임박한 구세주 탄생을 더욱 깊이 준비하도록 이끕니다. 대림 시기의 각 주일에는 저마다 주요 주제와 전례적 성격이 있습니다. 대림 제1주일은 곧 오실 구세주를 깨어 기다려야 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자세를 강조합니다. 제2주일은 구세주 오심에 대비하여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제3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마지막 제4주일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그분이 누구신지를 밝힙니다.
대림 시기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기도문들은 주로 이사야 예언서와 세례자 요한의 설교로 구성됩니다. 그 이유는 이사야서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렵고 쓰라린 시기에 백성을 위로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약속한 예언서고,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며 신약의 시간을 연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자색 제의를 입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영광송도 노래하지 않는데, 다만 ‘알렐루야’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거라는 희망을 담고 있기에 생략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는 대림초를 켜는데, 대림초를 꾸미는 사철나무는 인간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을 뜻하고, 4개의 초는 구세주를 기다려온 구약의 4천 년을 의미합니다. 촛불은 구세주가 어느 정도 가까이 오셨는지 알려주는 표징으로 매주 하나씩 늘려갑니다.
간절함과 설렘, 속죄와 희망이 교차하는 대림 시기, 예수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새롭게 다짐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신학이 뭡미꺼?] 하느님을 향한 이야기요, 그분을 향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 곧 신학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관한 이해입니다.
올 한 해 저는 여러분들에게 신학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학은 하느님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에 관해 올바르게 알아가려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신학은 단순히 성경과 교회 전통과 가르침, 전례와 역사에 대한 연구에 머무는 학문적 활동만이 다가 아닙니다. 신학은 하느님과 일치된 내 삶에서 우러나온 전인적 고백 행위를 통해 나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가는 신앙 여정입니다. 그 여정 속에서 먼저 성찰적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나의 이성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문명 시대에는 증명 가능하며 확실한 것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과학적 탐구 방법으로 증명 가능한 것이 아닌, 바로 그 자체로 ‘신비(Mysterium)’입니다. 이 신비는 우리 이성으로 어떤 뭔가로 받아들이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不可知한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런 신비를 남김없이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신학대전 1,12,7)’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모해 보이고, 알 수 없으며 감추어져 있는 그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를 깨닫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이 신비는 각자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진리라 하겠습니다.
다행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초대(계시헌장 2항 참조)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바로 ‘계시’라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초대에 우리 인간이 맞갖게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信仰’입니다. 마치 부모의 부름에 자녀가 응답하듯이 ‘계시啓示’와 ‘신앙’은 그렇게 서로 마주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앙은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가톨릭교회교리서, 150항)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하느님의 뜻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을 믿고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기적이나 환시와 같은 강렬한 사적 계시를 체험해야만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생생하게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하느님에 대해 묻고, 하느님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서 하느님을 찾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런 신앙은 스스로를 속이거나, 잘못된 ‘나’와 하느님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통, 병, 상처, 어두움, 좌절 같은 것조차도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여정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은 느낌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어떻게 ‘나’를 구하고자 하시는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깨닫는 것이 신앙이고, 우리가 희망하는 신앙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마산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은 언제나 내가 믿는 것에 대해 스스로 노력하여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더불어 신앙을 위해 교회의 가르침이나 전통적인 교리에 대해서도 스스로 잘 알아가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고백하고 믿는 것에 대해 묻고 찾으며 알아가는 자세,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1베드 3,15) 두는 자세이고, 우리가 신학을 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에페 2,8)이며,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선물을 온전히 받아안고 기쁜 소식을 전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여러분 각자의 마음 안에 다시 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43.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382항)
봉사의 본질 망각한 권력 되지 않도록 성찰해야
“머리로는 하느님을 열심히 연구하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는 않는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넘쳐 나지만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지는 못한다. 지식과 친밀함, 이것이 팬과 제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다.”(카일 아이들먼 「팬인가, 제자인가」)
대가 없는 희생
만일 누가 이런 제안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에게 맡기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한 숭고한 봉사이고, 모두가 당신에게 고마워할 것이고 당신의 헌신을 통해 기쁨과 행복을 얻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은 무척 힘든 일이고 보상도 매우 적거나 없을 수 있고 그 일로 인해 건강을 해칠 수도 있고 심지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누구든 선뜻 수락하기 어려울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 중에 수위권 논쟁이 있지요?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은지 서열과 권력의 높낮이를 논쟁하고 있던 참인데 마침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슨 일로 논쟁하느냐?”라고 물으셨으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마르 9,34 참조) 수고와 희생에 대한 대가와 보상, 권력을 원하는 암묵적 표현으로 보입니다.
봉사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봉사와 희생은 힘든 것이고 그 가치와 숭고함은 누구나 잘 알지만 그렇다고 강요될 수도 없습니다. 물론 봉사와 나눔, 사랑을 베푸는 그 자체로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가신 사랑과 봉사의 길을 가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봉사의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적극적 의미를 강조합니다.(「한국가톨릭대사전」 ‘봉사’ 참조)
더욱이 권력을 갖고 높은 자리에 있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권력의 목적은 봉사와 공동선이며(「간추린 사회교리」 168항, 408항 ,412항), 이를 위해 개인이나 단체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중재해야 하며,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 합니다.(169항) 나아가 그런 자리와 권력이 봉사라는 본질을 망각한 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스스로를 신격화할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382항 참조) 사랑의 실천과 봉사는 신앙인의 의무이며, 인간이 갖는 세속적 권력의 참뜻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스스로에 대한 성찰
저도 사제로 살면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봉사와 나눔보다 보상에 욕심을 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저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봉사하고 헌신하겠다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부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와 헌신을 위함이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사제이건 정치인이건 그 누구든 간에 봉사와 사랑이 결여된 삶은 파국을 맞이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그 한 가지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유혹이며, 우리는 깨어서 성찰하고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하나 봅니다. 가장 먼저 나의 삶을 주님 말씀 안에서 성찰해야 합니다.
“인간의 권위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한계를 벗어날 때,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그러나 승리의 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역사에 걸쳐서 스스로를 절대 권력으로 높이려는 모든 권력을 물리치신다.”(「간추린 사회교리」 382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43. 주님의 기도 ④ (「가톨릭교회 교리서」 2816~2821항)
하느님 사랑 깨달으면 하늘나라를 살게 된다
류시화 작가의 ‘어두울 때 비로소 눈은 보기 시작한다’라는 글에 코기족 원주민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메리카 코기족 인디오들은 안데스산맥 북쪽 끝 해발 5900m의 높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코기족 원시종교의 사제 ‘마마’는 신점을 쳐서 장차 사제가 될 운명을 지닌 아이를 선택합니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산 위쪽의 동굴로 옮겨집니다. 아이는 일절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해와 달조차 볼 수 없습니다. 사제들은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어머니인 알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화와 종교의식을 아이에게 가르칩니다.
마침내 18년의 혹독한 수련이 끝나는 날, 아이는 사제의 손에 이끌려 시에라 산맥의 새벽빛 아래로 나옵니다. 그때의 충격! 놀라움과 경이로움! 수다스러운 초록색 나뭇잎들, 바위에서 자라는 이끼, 골짜기를 나는 새, 최초로 살에 와 닿는 햇빛,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들! 아이는 경외감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고 위대한 어머니 알루나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불안합니다. 그 불안을 가라앉혀 줄 존재는 창조자뿐입니다. 창조자는 세상 안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창조자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을 창조자가 아닌 자기 욕망을 채울 대상으로 보기에 눈이 멀었습니다. 반면 세상 욕망을 이긴 인간은 모든 것에서 창조자의 사랑을 보고 바로 이곳이 천국임을 믿게 됩니다. 이를 위해 오랜 싸움이 필요합니다. “성령 강림 이후로 ‘육’과 성령 사이의 결정적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2819)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으면 이 세상 것들은 하느님의 선물일 뿐 더는 집착의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과 세상을 이기려는 사람만이 성령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오직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그 나라가 오소서’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로마 6,12)라고 권고합니다.
저는 어릴 적 어머니가 저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해서 참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리가 어디인지 찾으러 나가려는 마음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이 불안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어머니가 나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는지 살펴보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 일하며 생긴 굳은살을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불안하게 느껴졌던 집이 다시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성체와 성혈을 영하며 가져야 하는 느낌입니다. 지상에서의 유일한 행복이 나의 아버지 집에 머무는 것임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새로운 눈을 열어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분의 무덤에 머물렀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마음의 평화가 없을 때 그분은 “마리아야!”라는 이름을 불러 그녀를 무덤이 아닌 동산으로 불러내십니다. 우리도 자기 욕망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묻혀 하늘나라의 새 빛을 볼 수 있도록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청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