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언 3장에 대한 고찰
1. 문학형태
잠언에 나타나는 문학장르는 가르침과 잠언이라는 두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박요한 영식 신부는 잠언의 문학형태를 크게 8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첫번째는 삽입문장(병렬문장)(ibid., p.38.) 삽입문장의 경우, 詩行은 동사없이 이루어진 명사구에 두 사람 또는 두가지 사물이나 대상을 단순히 함께 배치할 수 있으며, 때로는 행위와 결과에 관한 경구들이 단순한 병렬적인 배열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더욱빈번하게는 완료형 동사를 통해 표현된다.
두번째는 비교(ibid., p.40.) 비교 또는 비유는 인간의 상황과 여타의 다른 모든 것, 동물들과 창조된 모든 것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특정한 교훈적인 가르침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비교는 특히 25-27장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세번째는 대구법(ibid., pp.42-44.) 대구법이란, 한 행이나 반 행을 함께 배열함으로서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완전히 드러나게 하는 문학 양식을 가리킨다. 그래서 첫 번째 행을 긍정(동의적 대구법) 혹은 부정(반의적 대구법), 어느 한쪽을 더욱 예리하게 강조하거나 종합하여 전체적인 뜻을 갖도록 완성시켜 준다.(종합적 또는 점진적 대구법)
네번째는 숫자잠언(ibid., p.44.) 숫자잠언은 수수께끼 말투와 같은 양식을 지니고 있기도 한 것으로서, 먼저 일정한 숫자를 지정한 다음, 그 숫자보다 하나 더 많은 수를 들고, 이어서 그 항목들을 나열하는 방식이다. 숫자잠언의 예로는 창 4:24, 잠 30:15-33. 아모스 1:3-2:8, 마 18:22을 들 수 있다.
다섯번째는 톱민(t b-min, 더 낫다)잠언(ibid., pp.45-48.) 이것은 "더 낫다"라는 경구를 이용하는 잠언인데, 이것의 반대의 의미를 지닌 잠언은 "혐오잠언 또는 배타잠언"등이 있다.
여섯번째는 수수께끼잠언, 일곱번째는 아쉬레( ; 축복)잠언, 여덟번째는 자전적인 문체(ibid., pp.49-50, 이스라엘의 현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자전적인 문장 형식을 통해서 표현하는데, 이것은 코헬렛의 전형적인 문체이다. 이것의 예로는 잠언 24:30-34을 들 수 있다.)이다. (ibid., pp.35-51.) 잠언3장에는 동의적인 대구법(3:5, 3:11, 3:13, 3:16), 톱민 잠언(3:14, 3:15), 혐오잠언(배타잠언 - 3:32) 등 여러 가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알아보도록 하자.
2. 잠언 3장의 전체 구조 --- 단락의 구분
잠언3장의 구조를 나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통일된 견해도 없으며, 학자마다 그리고 성경마다 구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잠언 3장의 구조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알아보고, 그 견해들을 토대로 해서 내가 본문을 살펴보기 위해서 본문의 구조를 나누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그러면 우선 여러 학자들의 잠언 3장의 구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앞의 Prologue에서도 언급했듯이 박요한 영식 신부는 잠언 3장을 3:1-12(현인의 말에 순종할 때의 이점), 3:13-24(지혜를 찾음은 곧 행복), 3:25-35(주님이 너의 보증)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학자들은 다른 의견을 취하고 있다. 링그렌은 잠언 3장을 3:1-12(지혜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 3:13-26(지혜의 가치), 3:27-35(권고와 경고)로 구분하고 있고, 또 이형원은 3:1-26(지혜로운 삶의 요소와 대가), 3:27-35(선한 이웃이 되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표준새번역 성서는 3장 전체를 "젊은이에게 주는 충고"라는 제목하에 하나로 커다란 단락으로 묶고, 작은 단락으로는 3:1-2, 3:3-4, 3:5-8, 3:9-10, 3:11-12, 3:13-18, 3:19-20, 3:21-35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NIV에서는 1-12 (Instruction in the fear of the LOAD), 13-35(On wisdom : Blessing, Creation, Admonitions)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NRSV에서는 3:1-12(Admonition to Trust and Honor God), 3:13-18(The True Wealth), 3:19-20(God's Wisdom in Creation), 3:21-35(The True Security)로 구분하고 있으며, 김영일 교수는 1-12(지혜로운 삶에 대한 축복), 13-18(지혜에 대한 찬양시), 19-20(하나님의 창조사상), 21-26(지혜로운 삶에 대한 축복), 27-35(이웃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로 구분하고 있다.
잠언 3장을 구분하는 방법은 학자들마다 다르다. 이 발제문에서 잠언 3장의 구조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러 학자들의 구분을 토대로 해서 1-10절, 11-20절, 21-35절로 나누고자 한다. 이것은 1절과 11절, 21절에 "아이들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 발제물에서는 이 구조를 따라서, 그리고 작은 단락은 표준새번역과 국제성서주석의 구분에 따라서 본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3. 본문에 대한 설명 --- "본문비평과 본문의 내용에 대하여…"
1) 1-10절
* 1-2절
우선 1절은 "아이들아"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아이들아"라는 말은 3장의 11절과 21절에 또 언급된다. 그래서 이형원은 잠언 3장을 "아이들아"라는 말로 시작되는 세 개의 교훈이 연결된 것이라고 본다.(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42.) 1절의 "나의 법", "나의 명령"은 3절부터 언급되는 구체적인 훈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생명을 약속한다. "장수와 가치있고 건전한 생활"이 지혜교사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따르는 사람들이 받는 상급이라고 언급한다.
* 3-4절
3절에는 "인자와 진리를 떠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NRSV성경에서는 "Loyalty and Faithfulness" 라고 나온다. 여기서 "Loyalty"라는 단어는 "충성", "충의", "성실"이라는 뜻인데, 어떻게 이 말이 개역이나 표준새번역에서는 "인자"라고 번역이 되었는지? 히브리어 라는 말은 우리말로 "충성(Loyalty)", "충실(faithfulness)"라는 말로 번역되고, 라는 말은 "충실(fidelity)", "진실"로 번역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인자와 진리"보다는 "충성(충실)과 진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올바른 번역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이형원은 "인자와 진리"를 "사랑과 성실함"과 동일시하고 있다. "인자와 진리"는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함께 사용되고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창 47:29)(창세기 47:29 -표준새번역) - "이스라엘은 죽을 날을 앞두고,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놓고 일렀다.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창 24:27. 창세기 24:27-표준새번역) - "나의 주인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지 않으셨으며, 주께서 저의 길을 잘 인도하여 주셔서, 나의 주인이 동생 집에 무사히 이르게 하셨습니다.하고 찬양하였다."
신 7:6(신명기 7:6-표준새번역-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땅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당신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호 4:1-표준새번역- "이스라엘 자손아, 주의 말씀을 들어라. 주께서 이 땅의 주민들을 변론하신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잠14:22(표준새번역 -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등을 올바르게 유지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시키기 위해 "인자와 진리"가 요구됨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삶의 대가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앞에서도 은총과 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4절), (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42.) " (hesed)"와 " (emet)"라는 단어는, 종종 구약성서에서 짝이 되어 나온다. 매우 드문 경우에는이것들이 비계약적인 인간관계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맥에서 가장 흔한 사용법은 그것들이 신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되듯이, 신과의 동질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출애굽 34:6에 따르면,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주님은 확실한 사랑과 신실이 풍부한 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시편에서는 주님은 이러한 한쌍의 특성을 나타내는 분이시라는 것을 계속해서 찬양한다. 그러나 주님의 선택된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실을 보여줬을 때,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대한다.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반대하여 그의 죄를 위해서 그들의 실패를 강조한다. "그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호세아 4:1) 그리고 이사야는 상상했다. "다윗의 가문에서 확실한 사랑과 신실로 가득찬 왕이 나올 것이다. 그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을 보여주며, 옳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할 것이다."(이사야 16:5), (Kathleen A. Farmer, 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entary, Proverbs & Ecclesiastes-"Who Knows what is Good?", Handsel Press, 1991, pp.35-36.) 3절에 "인자와 진리"를 목에 걸고 다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신성하게 기록된 부적과 같은 것들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 그것을 영적인 것으로써 간주하였다.(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ume V, Nashiville: Abingdon Press, 1994, p.48.)
* 5-6절
5-6절은 완전히 신중심적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즉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의뢰하라는 것으로서, 야훼께서 모든 일에 동행하시며 선한 길로 이끄심을 믿는 생활로서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먼저 내세우지 않는 삶을 뜻한다. 그러할 때 얻어지는 대가는 매사에 그분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는 것이요, 그분이 인생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는 것을 보는 것이다.(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43.) 이렇듯 결론
은 인간의 관점에서 끌어내려진다. 즉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길을 평탄케 하셨음을 경험하게 되리라.(H.링그렌·W.침멀리 공저, 박영옥 역, "잠언·전도서", 국제성서주석 17,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p.46.)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님에 대한 총체적인 신뢰(a total trust in the Load)이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통찰력(잠 28:26), 힘, 건강(잠11:28, 시 52:7, 렘 9:23-24)만을 믿는 자기 신뢰와는 다른 것이다.(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ume V, Nashiville, Abingdon Press, 1994, p.48.)
* 7-8절
여기서는 인간에게서 나온 지혜를 믿지 말라는 경고 즉 야훼앞에서의 겸손한 생활을 강조한다.(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43.) 즉 지나친 자기 확신과 자만을 버리는 것은 주님을 경외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ume V, (Nashiville, Abingdon Press, 1994, p.49.) 그리고 야훼를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것이라는 약속이 나온다.
* 9-10절
9-10절에서는 앞의 마음의 내적인 특성에 대한 언급에서 자연스럽게 실제적인 이익에 관계된 이야기로 바뀌어진다.(ibid., p.48.) 이 단락에서 언급된 지혜로운 삶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야훼앞에 제물을 바치는 생활이다. 재물과 소산의 처음익은 열매(이러한 첫열매는 인간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를 포함하는 상징시스템의 한 부분이다. - ibid.,p.49)를 바치는 행위는 그분이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그분이 세계 만물의 소유자이시며 자신은 그분의 선한 청지기임을 깨닫게 하는 계기도 마련한다. 이러한 생활의 대가로서 야훼로부터 주어지는 물질적인 축복이 약속되고 있다. "창고가 가득히 찬다"는 구절과 "포도주통에 햇 포도주가 넘칠 것이다"는 구절은 독자들의 머리속에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의 풍성함을 영상화시키기에 효과적인 대유적 표현이다.(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43.)
2) 11-20절
* 11-12절
11절에서 히브리어 를 개역은 "징계"로, 표준새번역은 "훈계"로, 그리고 NIV와 NRSV에서는 "Discipline"(훈련, 징계)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는 "교정", "징벌", "훈련", "교육", "경고"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11절의 후반절에 "꾸지람"(개역), "책망"(표준새번역)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 는 "징계" 또는 "훈련"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의 "훈계"라는 말은 11절 하반절의 "책망"과 중복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훈련"이나 "징계"로 바꾸는 것이 조금은 더 매끄러운 번역인 듯 싶다. 12절의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꾸짖으신다"라는 말은 전통적인 신학과는 다르다. "하나님
의 책망", "하나님의 꾸짖음"은 잠언에서는 조금은 낯선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전통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의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하며, 올바른 이는 주님의 꾸짖음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언자들과 지혜 책들의 작가들은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박요한 영식 신부, "이스라엘의 지혜와 교훈 - 잠언",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8, p.84.)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H.링그렌·W.침멀리 공저, 박영옥 역, "잠언·전도서", 국제성서주석 17,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p.47.) 이것의 예로
는 욥을 들 수 있는데, 동방에서 가장 의인으로 인정되던 욥이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욥이 아직도 완전한 의로움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에 그것을 인식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신 사랑의 징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44.) - "여보게, 하느님께 매를 맞는 일이야 즐거운 일 아닌가! 그러니 전능하신 분의 교훈을 물리치지 말게"(욥5:17)
*13절-18절
이 단락은 복이 있다는 찬양으로 시작되며, "행복하여라"(아쉬레)는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락은 개인적인 명령이나 훈계의 형태를 벗어나 지혜를 찬양하는 하나의 노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기록 목적은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권하는 것이다.(ibid., p.44.) 13-15절은 지혜를 얻는 삶이 은, 금, 진주등의 값진 물건들을 얻는 삶보다 더욱 가치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6-18절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소개되고 있는데, 먼저 지혜는 한 손에는 장수의 축복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부귀의 축복을 쥐고 있는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즐겁고 평안한 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어서 그것은 자신을 붙드는 자에게 생명을 제공하는 나무(박요한 영식 신부, "이스라엘의 지혜와 교훈 - 잠언",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8, p.85.) "생명의 나무"는 "건강"과 "장수"를 가리키는 전통적인 표상이다. 이 표상은 이미 창세기 2:9, 3:22과 아카디 문헌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식물"에서 사용된 것이며, 예언자들과 묵시문학에서 다시 사용되는 표상이기도 하다.(H.링그렌·W.침멀리 공저, 박영옥 역, "잠언·전도서", 국제성서주석 17,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p.49. - "생명나무"라는 표현은 고대 동양 전역에서 수많은 신화적 관념들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던 상징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특히 낙원설화와 관련이 있다. 잠언에서 이 표상은 일종의 성구, 즉 일반적으로 생명을 부여해준 힘에 대한 상징이다.)가 된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14절은 "톱-민 잠언"의 한 예이다.(박요한 영식 신부, "이스라엘의 지혜와 교훈 - 잠언", 서울: 성바오로출판사,1998, p.47.)
*19-20절
지혜는 인간이 올바르게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시에 보여주고 세계 질서 가운데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속성이다.(H.링그렌·W.침멀리 공저, 박영옥 역, "잠언·전도서", 국제성서주석 17,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p.49.) 그리하여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공의와 사랑으로 이끄시며 그의 백성들의 지혜로운 삶을 통해서도 이 일을 계속 진행시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45.) 19절과 20절에 나오는 표현뒤에는 물론 고대 동양인들의 세계상이 깔려 있다. 그들의 세계상에 따르면 지구는 대양속에 있는 확고한 기초에 기반을 두고 있는 평원반이라고 한다. 구약성서에서 태초에 깊은 대양의 물을 가르고 땅위에 둥근 하늘을 펼치신 분은 야훼이며 비와 이슬을 끊임없이 내려주시는 분도 야훼이다. 이와 같이 이 단락 전체에서 그의 지혜가 드러난다. 우주에서도 인간의 삶에서와 같은 법이 통용되고, 인간의 삶에서도 우주에서와 같은 법이 통용된다.(H.링그렌·W.침멀리 공저, 박영옥 역, "잠언·전도서", 국제성서주석 17,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49-50.) 19절의 "주님은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명철로 하늘을 펼쳐 놓으셨다."라는 말은 잠언 8:22-31과 같이 "지혜"와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3:19에서는 "지혜"가 창조의 도구 - "여호와께서는(주님은) 지혜로 ~을 하셨으며, ~을 하셨다"의 형식 - 로 서술되고 있으며, 8:22-31에
서는 "지혜"가 창조이전에 존재하는 즉 "지혜의 신격화"(창조의 명공)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잠언을 전체적으로 볼 때 지혜는 잠언의 초반부에서는 "인격화"(1:22-33)된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는 "신격화"(8:22-31)까지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기에는 조금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가 신격화되어 하나님과 같아진다면, "지혜의 만능성"을 주장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조금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3) 21-35절
* 21-26절
다시 "내 아들아"라는 호칭으로 학생의 주의를 끌며, 지혜를 보존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금지령과 명령을 하며, 이에 대한 동기절로 끝맺는다.(21-24절) 이 가르침의 기본 의도는 학생으로 하여금 지혜를 선택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지혜를 찬양하며, 지혜로 세상을 지으신 주님이 "너의 보증"이 되리라고 확신시킨다. 카야츠(Kayatz)는 16절과 22절에서 지혜와 이집트의 ma'at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했다.(박요한 영식 신부, {이스라엘의 지혜와 교훈 - 잠언},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8), p.86.) 21-26절은 다시 지혜를 추구하는 삶의 대가들을 약속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활성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너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것(너의 목에 우아한 장식물이 될 것이다.),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 그리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두려움없이 살게 되는 것등이 있다.(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45.)
* 27-30절
잠언의 다른 어느 장들보다도 신앙적인 색채가 짙은 3장의 마지막 부분인 3:27-35절중에서 27-30절의 이웃 사랑에 대한 권고에는 지혜 교사의 사회적인 책임감이 표현되어 있다. 이 책임감은 지혜교사 외에 예언자들과 신명기 기자들도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곤궁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을 능력에 따라 도와야 한다. 심지어 기쁜 마음으로 즉석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이웃은 본래 같은 씨족이나 동족, 즉 친구와 형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혜문학에서 이 말은 종종 더 넓은 의미를 지니다가, 그 후에는 "우리의 이웃"이라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된다. 그러나 적이나 원수까지도 포괄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악을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박요한 영식 신부, "이스라엘의 지혜와 교훈 - 잠언",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8, pp.86-87.) 사람들은 이웃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기를 복돋워주고 그들을 기쁘게 하도록 요구된다. 이 충고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국제적인 지혜의 보편적인 입장과 일치한다.(H.링그렌·W.침멀리 공저, 박영옥 역, "잠언·전도서", 국제성서주석 17,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p.51.) 이렇듯 지혜자는 지혜를 추구하는 삶의 요소에 신앙적인 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인 면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이것을 3장의 마지막 부분(27-35절)에서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형원은 이 부분의 내용을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22:37-40(표준새번역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야고보서 1:27(표준새번역 -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리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9-21(표준새번역 -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육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앞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사람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본문의 교훈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 구성원들이 사회를 건전하기 유지하기 위해 적용해야만 하는 중요한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이다.(이형원, "잠언", 전망성서주해, 서울: 전망사, 1993, pp.45-46.) 이 단락의 문학적인 구분을 해보면, 27에서부터 31절까지는 동의적 대구법이라는 문학양식을 사용하고 있다.(박요한 영식 신부, "이스라엘의 지혜와 교훈 - 잠언",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8, p.42.) 여기서는 이웃에 대한 잠언저자의 입장이 서술되어 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너의 손에 선을 행할 힘이 있거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라. 너에게 가진 것이있으면서도, 너의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시오, 내일 주겠소하지 말아라"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지금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고, 이웃을 도와줄 수 있음에도 우리는 그 이웃을 외면했던 적이 많았다. 정말 힘들어서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라고 청하려고 하였던 구걸하는 이들, 길거리에서 몸을 누이고 있는 노숙자들, 그들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이나 도와주어야 겠다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어떤 꼬마아이처럼 "아이 더러워!"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 무언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진정으로 우리가 신학을 하고, 이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면 말이다.
* 31-33절
31-35절에는 일시적인 행복에 눈이 어두워 악인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런 자들과 함께 어울리지 말라는 경고는 악인과 의인 혹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에 대한 네 가지 대구로 이어진다. 악인을 부러워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야훼의 미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H.링그렌·W.침멀리 공저, 박영옥 역, "잠언·전도서", 국제성서주석 17,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p.51.) 32절의 "역겨운 일을 하는 사람은 미워하시고"라는 구절은 문학양식중에서 혐오잠언에 속한다.(박요한 영식 신부, "이스라엘의 지혜와 교훈 - 잠언",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8, p.46.)
*34-35절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악인은 자기 주변에 파멸의 구덩이를 만들어 놓는 야훼의 저주의 대상이며, 결국 그들이 받을 대가는 조롱과 수치뿐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받으시 처벌을 받는다. 한편 야훼는 지혜있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며 그들에게 은혜와 명예를 주신다. 이처럼 야훼의 행동은 그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상응한다.(H.링그렌·W.침멀리 공저, 박영옥 역, "잠언·전도서", 국제성서주석 17,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p.51.)
III. Epilogue
1. 잠언 3장의 전체 메시지는?
잠언 3장에 대한 보고서가 거의 완성이 되어가는 듯 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서술해야 할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같다. 잠언 3장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것의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듯 싶다. 나는 잠언 3장을 읽고 나서, 그것의 메시지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한 끝에 나는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충성과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지혜를 찾으며, 주님을 의뢰하라"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2. 잠언 3장의 현대적 의미
앞에서도 나는 잠언 3장 전체의 메시지를 "충성( )와 진실( )를 저버리지 말고, 지혜를 찾으며, 주님을 의뢰하라"로 정리하였다. 그럼 이 메시지가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충성?" 무엇에 대한 충성인가? 그리고 "진실?" 무엇에 대한 진실인가? 이에 대해서 성경은 뚜렷하게 답을 해주고 있다. 충성과 진실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 하나님앞에서의 하나님께 진실이 바로 우리가 지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실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믿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노라고 다짐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 아무런 희생도 따르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며, 하나님앞에 충성이며, 하나님앞에 진실일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우리가 정말 추구해야 할 것은 지혜를 찾으며 주님을 의뢰하는 것일 것이다.
3. 글을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잠언 3장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 - 문학적인 형태, 구조, 본문에 대한 설명 - 에서 알아보았다. 잠언 3장은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고"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고인 것이다. 그럼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 현실의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어 가고 있다. 무엇하나 나아지는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IMF로 인한 대량실업, 그로 인한 예비실업자라고 불리는 수많은 대학생들, 오르는 물가, 급증하고 더욱더 포악해지는 범죄… 진정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우리는 성서로 눈을 돌려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는 한국 교회에서는 소홀히 여김을 받은 지혜문학에 대해서 말이다. 지혜자는 우리들에게 "인자(Loyalty)와 진리(Faithfulness)를 저버리지 말고, 지혜를 찾으며, 주님을 의뢰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3장의 핵심일 것이다. 지금의 우리 아니 나에게 의미있는 말이다. 이제 벌써 신학의 길에 들어선지 4년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느꼈는가? 지금 나의 모습은 마음이 아닌 머리만 커진 모습은 아닐까?
지혜자는 5절에서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일까? 우리의 상황에 너무 안주하여 위와 같은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신학"이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보면 신학은 "신에 대한 논리적인 언설(言說)"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神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신(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의 역사속에서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자 여러 가지의 다양한 노력들을 해 왔다. 우리는 그것을 "신학의 역사"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대해서 배우고, 탐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탐구는 그러한 노력들의 겉모습만을 보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러 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은 그들만의 지적인 이성에 의한 언설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신앙에 근거한 언설이었다.
이러한 진실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내적인 진실된 신앙"이라는 측면을 간과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평신도에게 성경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신학은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그러나 신학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인한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한 것이다. 잠언 3장은 바로 이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 않을까? 벌써 4년이라는 한신에서의 생활을 마감하는 2학기도 끝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한학기동안 "잠언"을 붙들고 씨름했던 우리의 노력들도 서서히 정리를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정말 한학기 동안 우리의 노력, 싸움은 너무나 고된 싸움이었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노력, 부르짖음, 간구였다. "내가 정말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내가 헛되게 살아온 시간들은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등에 대한 생각들이 나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가면서, 지금 이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머리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해본다.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욥이 자신의 생사의 갈림길에서 목놓아 탄식하며 부르짖었던 그 절규와 간구처럼 내가 지금 절실하게 부르짖고 간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이곳의 삶을 정리하면 나의 인생에서는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내가 의지할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지혜자는 그것이 바로 지혜이며, 그 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그치로 싶지많은 않다. 나는 전도자가 외쳤던 외침-"지혜도 필요없고 세상부귀 모든 것이 필요없다. 오직 주님만을 경외하라" - 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욥,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된 욥의 외침, 회개 -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 들이고, 띠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기42:5-6) - 이 필요하다. 정말로 낮은 곳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의 사랑을 깨달았던 욥의 모습이 정말 지금의 나에게는 절실함을 느낀다. 이런 나의 모습, 그리고 이런 우리들의 모습이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며, 날로만 더욱더 암흑으로 치달아가는 이 세상속에서한줄기의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