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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의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다(빌4장 4)
성경본문:빌립보서 4:4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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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품의 frame을 가지고 보는가?
오래 전에 감신대학에서 있었던 설교대회에서 들은 예화입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어렵게 딸을 키우며 산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유일한 어머니의 희망이었던 이 아이가 이제는 어엿한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이 딸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고, 어느 날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엄마!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제가 들어줄게요.”
그러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딸에게 교회에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딸은 기꺼이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딸은 교회에 간 첫날 좋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서로 험담하는 여자들, 불의한 청탁을 하는 장로님, 식당에서 서로 먹겠다고 다투는 사람들 등등.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딸은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나 다음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을래.”
그러면서 자신이 교회에서 보았던 많은 일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엄마는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 얼굴 밖에는 보지 않았는데, 너는 하루 동안에 참 많은 것을 보았구나.”
성숙한 성품은 기쁨을 낳습니다.
기쁨이 어떻게 성품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좋은 성품의 사람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도 기쁨을 만끽하며, 용서의 삶을 통해서도 솟아나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성숙한 성품의 사람은 환경에 의해 지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경을 지배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품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의 '옥중서신'을 통하여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옥중에서 로마서를 썼고,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임을 확신했으며,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기뻐하라!'라고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기뻐했습니다. 그는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복음이 전파되는 기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했고, 예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겼으며, 나머지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성품을 결정짓는 이 기쁨이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
정말 멋진 성품의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오는 구원의 기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박국 3장 17-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보니까, 이 기쁨의 성품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고 노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자신이 배운 것을 보고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4장 9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도 바울은 기쁨으로 살기 위해 기쁨의 장애물들을 정복했습니다. 그는 기쁨의 감각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기쁨의 장소를 '주 안에서'로 정했습니다. 그는 기쁨의 적인 '염려'를 정복했습니다. 그는 영적 훈련을 통해 '기쁨의 거룩한 습관'을 습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기뻐했다면 우리도 기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면 우리도 배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1.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로 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쁨의 서신을 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엔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작정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환경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해야겠다!"
그의 기쁨은 ‘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환경은 늘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 거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불변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는 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는 그는 감옥이라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 안에 거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죽음의 위협 가운데 있을 때, 실라와 함께 찬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요. 지진이 나며 옥문이 열린 것입니다.
환경에 좌우되는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지만, 환경을 뛰어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존 템플턴이 쓴 [성공론]이라는 책에 나오는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 그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문제점을 찾아내 사사건건 시비하던 관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어떤 사항에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이 반드시 반대할 것이라고 내기를 걸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링컨 대통령의 한 친구가 왜 그 사람을 해임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젊었을 때의 경험을 들려줬습니다.
링컨이 시골 길을 가다가 한 농부가 말이 끄는 쟁기로 땅을 경작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링컨이 인사를 하려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말 옆구리에 말파리가 붙어 앉아 말을 깨물며 성가시게 하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말파리를 쫓아낼 요량으로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그를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게나, 말파리는 이 늙은 말이 움직이도록 해주고 있을 뿐이라네."
그 후에 링컨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자신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를 괴롭히는 사람조차도 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아직 링컨이 좋은 성품의 사람으로 존경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신비로운 기쁨을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어려운 사람과 환경을 통해 기쁨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인격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을 'integrity'라고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환경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것, 자신의 가치관이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본질에는 "God First"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며, 내가 주 안에서 변할 수 없는 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2.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로 합니다.
사람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슬픔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관계가 좋을 때는 행복하지만, 바로 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참으로 다른 인생의 갈 길을 가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저는 신문에서 하는 갖가지 여론 조사를 할 때마다 너무나 신기합니다. 어쩌면 저렇게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말입니다. 하다못해 우리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하면서 서로가 적이 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서로 지지한다는 것조차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에 편지를 쓸 때도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4장 2절입니다."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둘 다 열심히 사역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열심히 없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을 지지하며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주 안에서’ 같은 생각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비전이 우리의 비전이 되고,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신앙인의 성숙은 바로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마음,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겠다는 마음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에게 누군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래전 [천국의 섬]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남쪽 <증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의 주민 90% 이상이 교회를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 배후에는 문준경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시집 간지 얼마 안 되어 버림받은 아픔을 안고 신학을 공부하고 고향에 내려와 순교하기까지 사역한 전도사님 때문에 말입니다.
문 전도사님이 개척한 교회 중에 ‘임자도’라는 섬에 ‘진리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중심이 된 이판일 장로님의 가정이 있는데 공산당에게 가족 13명을 포함한 교인 48명이 순교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1950년 10월 교인들이 <진리교회>에서 몰래 예배를 드리는데 공산당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교인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지 않을 사람은 손을 들고 나오라고 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판일 장로는 “이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짓을 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라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동네의 좌익 청년이 몽둥이로 장로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게 되었고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죽창과 몽둥이로 때리고 찔러 생매장한 사람들이 수백이요, 순교한 사람이 48명입니다.
홀로 목포에 있어 살아남은 장남 이인재가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에게 그 날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는 죽을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원수를 사랑으로 갚아라.”
그 말씀에 새 힘을 얻었습니다. 아버지 이판일 장로님이 78세였고, 어린아이 이완순을 포함해 한 가족 13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순교의 기적을 뛰어넘은 용서의 기적이었습니다.
임자도에서 일어난 48명의 순국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해군부대가 섬으로 진입해 올 때 참관인으로 이인재 목사를 동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반나절 동안 섬을 수색하며 좌익을 검색하는데 이인재 목사의 손을 통해 태극마크가 박힌 완장을 차는 사람은 살게 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처형을 당하는 생사가 갈린 숨 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교인들을 죽인 좌익들은 다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인재 목사가 다 용서한 것입니다.
정태기 목사의 증언입니다.
“1959년 임자도로 이사를 하였는데 좀 깨인 사람들은 다 진리교회를 다니더군요.
이미 상당히 불이 붙어 있던 때입니다.
순교로 믿는 사람들 씨가 말랐었는데 만일 그때 이인재 목사님이 이들에게 보복을 했더라면 진리교회는 부흥이 안 됐을 겁니다. 이인재 목사님이 보복을 하지 않고 원수를 끌어안았기 때문에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이인재 목사는 1954년 신학교에 진학해서 목사가 되었고 아버지가 개척했던 진리교회에 부임하여 아버지를 대신해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다가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마을 청년을 용서하고 그 사람의 아들을 직접 가르쳐 중매까지 서서 장가를 보냈는데 나중에 이 사람은 열심히 예수를 믿어 장로가 됐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용서한다고 할 때, "용서를 베푼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란 가해자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기 위해서는 조건 없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와서 물었던 물음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입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 말 속에서 베드로가 가진 용서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종교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몇 번의 횟수를 정해놓고 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늘 정해놓은 테두리에서 율법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품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성품의 사람이 한없이 용서하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용서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이 윤택해지고 인격이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의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서는 나를 위해 마련된 선물입니다. 내가 용서할 때,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품의 사람이 갖게 되는 가장 큰 유익은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용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아니 영원히 계속해서 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용서한다고 해서 우리의 기억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영성’이 필요한 것은 옛 감정이 되살아날 때마다, 또 용서하겠다는 매일의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용서한다는 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용서란 성숙한 사람에게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잊고 용서하자!"라고 결심은 했지만, 어느 순간에 어떤 사건이 단서를 제공하는 순간 이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고구마 줄거리를 캐는 것처럼 머리를 들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 순간 여러분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또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승리한 자만이, 용서할 은혜와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용서의 성품은 당신으로 하여금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여 주는 원동력입니다.
3. 염려하지 않기로 한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염려하지 않는 비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염려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는 가장 큰 적은 염려입니다. 오늘날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 신경안정제라고 합니다.
요즘 가장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병이 ‘공황 장애’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 것 같은 생각, 내가 죽을 것 같은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큰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 수년 동안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9.11테러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건물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언제 테러가 일어날지 두렵습니다. 또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염려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폐실 공포증이 있습니다.
작은 공간에 들어가면 숨이 막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 자신을 생각해 보니까, 어렸을 적 저희 형이 저를 창고에 가둬놓고 놀라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기억이 강하게 제 머릿속에 박혀 있습니다.
그 기억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목사인 제가 창피한 일이지만, 인간이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저에게도 이런 장애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병원에 계실 때마다 그 자리를 지켰던 저에게, 아버님의 증상이 저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가 아니라 염려 속에서 말입니다.
이처럼 염려는 여러분의 삶과 성격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은 의부증과 의처증이 바로 이런 염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염려한다고 달라질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의심’ 또한 염려에서 발생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결심해야 합니다. 어떤 염려도 나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 안에서"
혹시 이런 찬양을 아시나요?
“너 근심걱정 와도 어려운 일 당해도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 당해도 슬픈 일이 와도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주님의 사랑 속에 거하라. 그의 평화 속에 유하라.
그분의 영원 속에 자유하라. 주 지키리”
4. 물질에 흔들리지 않겠다.
혹시 여러분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 보셨습니까? 경제적인 압박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며 가정의 평안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질의 어려움은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가난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 가운데는 물질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도 역시 사역 가운데 물질의 어려움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도우시며,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의 말씀은 이 모든 삶의 과정에서 성숙하게 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성숙한 사도 바울의 성품이 가장 잘 드러난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감옥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지 않을까요? 정말 잔잔한 미소 가운데서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요?
누구도 예수 안에서 솟아나는 이 기쁨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이 기쁨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의 성숙한 성품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왜 짜증을 내십니까?
어떤 때에 여러분은 자녀를 질책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십니까?
결국은 내 안에 채워지지 못한, 내 안에서 조바심을 내는 것들, 결국은 나의 부족함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의 기쁨을 앗아 갈 수 없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희생을 통해 찾아오는 기쁨
"사랑은 희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사랑은 즐거운 일보다는 힘들고 희생해야 하는 일에 더욱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은 기쁨은 희생을 통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대개 받는 것보다는 주어야 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그의 책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이 (그리고 교회도 심심찮게) 사랑에 덧씌워진 거짓된 화려함을 벗겨 내야 할 때다.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이라고."
어쩌면 이 사랑이 힘들어서 교회에서조차 행복과 교제, 만족의 측면만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희생이 없이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가장 명백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시는 희생이 없이는 구원의 역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분명한 고백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분명히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는 신문, 책, 매스컴을 통해 자기 관리를 선전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히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을 열심히 모아서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서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자에게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 것이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만족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의 성품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역설적이고 도전적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막 8:34)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3)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왜 오늘날 깨어지는 가정이 그렇게 많을까요?
기쁨을 상실해 버린 가정이 왜 그렇게 많을까요?
결혼을 하는 순간 여러분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결혼을 하는 순간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쾌락과 안락함을 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대가 깨지는 순간, 상대방이 불치의 병에 걸리는 순간이나 감정적인 갈등이 생길 때, 경제적인 역경이나 자녀의 문제로 이혼을 생각할 수 있는 문제들이 생겼을 때, 희생을 하기보다는 쉬운 쪽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받는 것보다 희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만족과 필요를 채우기보다는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어떤 가정에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가정, 아니면 우리 가족의 누군가를 위해 끊임없이 덮어주고 희생해 주는 사랑이 있는 가정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당신에게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성품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물어보셔야 합니다.
사랑이란 "사랑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희생적인 사랑의 성품이 너무 힘든 일이기에 곧 바닥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며 계속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오랜 기간 사랑과 섬김과 치유와 상담의 시간을 보낸 후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마 14:23)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5-16)
이 영적 재충전이야말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계속 성품을 가능하게 합니다.
충전된 자만이 거듭된 희생과 용서 그리고 기쁨 속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늘 기쁨이 넘치는 그런 성품을 가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늘 당신의 삶을 영적으로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 세상의 누구도 받은 것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옹달샘이 깨끗하고 신선한 것은 늘 멈추지 않고 솟는 물의 근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닮기를 그렇게 소원했던 많은 성품 말입니다. 기쁨의 성품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기쁨의 성품은 훈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드는 것,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