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종친회장 공적비
김해 수로왕릉 일원을 둘러보다가 3개의 비석을 만났다. 왕비릉 정문 앞 자투리땅에 작은 주차장을 만들면서 그 한쪽에 세운 비석이었다. 왕릉을 멀리 벗어난 때문인지 주차하는 사람 중에도 비석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락종친회 사무실은 수로왕릉 정문 앞인데 비석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적지를 순례하다보면 흔하게 접하는 비석이지만 오늘은 ‘金永俊’이란 함자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혹시 젊은 날 직장에서 모신 최고경영자가 아닐까 싶었는데 맞았다. 비석 중간쯤에 한국전력과 한국중공업이 들어 있었다.
정치인 김대중과 김종필 비석을 제쳐두고 난 가장 안쪽의 ‘鈍甫 金榮俊 名譽會長 功績碑’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항상 위트가 넘치던 생전의 김동길 교수가 말년에 토크쇼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인생 한번 가면 끝이에요. 비석이 다 무슨 소용이에요, 묘에 묻힌 사람이 자기 비석에 쓰인 글이 궁금해서 다시 나와 본 사람 있답디까?” 그 김 교수가 김해김씨인지는 모르지만 그도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이곳 공적비 주인공들과 그쪽 세상에서 조우했으리라. 김대중은 원래 성씨가 尹이었으니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겠다.
김영준 회장은 서기 42년 낙동강 하류에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을 시조로 1916년 예천에서 태어나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군정청 조림목사로 관계에 첫발을 디뎠다. 농림부장관으로 퇴임하기까지 초대 산림국장과 서울 제1부시장, 경제기획원 차관보, 한일회담 경제협력위원회 한국 측 수석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국가발전과 경제부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관직을 물러난 후는 흥한화섬과 동신화학을 맡아 건전기업으로 키웠고 특히 한국전력과 한국중공업 사장을 겸임하면서 세인들에게 탁월한 경영인이란 평을 들었다.
70세 이후인 1986년부터 1999년까지 가락중앙종친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국내외의 종친들을 규합하고 허씨와 인천李씨까지 적극 참여시켜 명실상부한 가락중앙종친회를 만들었다. 전국 2백여 개의 시군구 종회를 결성하여 조직을 크게 확장시켰고 1987년 재일본 가락종친회까지 만들어 재외 종친들에게도 종친의식을 심어주었다. 1991년엔 가락부녀회까지 만들어 宗婦들을 宗事에 참여시키니 충효가 이어지고 가풍이 회생되는 공적을 남겼다. 가락국 시조 김 수로왕과 허 왕후 그리고 10대 讓王과 桂花 왕후의 영정도 제작했다.
崇善殿과 納陵后陵을 비롯하여 德讓殿과 양 왕릉 崇武殿과 興武王陵 등 殿陵 정비사업을 입안하고 국고지원을 이끌어내어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崇安澱을 창건하여 가락국 2대 道王, 3대 成王, 4대 德王, 5대 明王, 6대 神王, 7대 惠王, 8대 莊王, 9대 肅王의 위패를 모시니 首陵朝 이후 단절되었던 가락국의 宗朝享祀가 이어지게 되었다. 한국 고대사의 일부인 가락국의 역사규명을 위하여 1987년 옛 수도였던 이곳 김해에 문화재단 가락국 사적연구원을 설립하여 散失된 가야관계 문헌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는 열정을 보였다.
金 회장은 대성동과 良洞里 고분을 발굴조사하고 출토된 유물들을 보존관리하기 위하여 김해에 국립박물관 건립을 입안하는 등 가야사 연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가락국의 실체를 재현하기 위해 옛 수도였던 김해에 古都복원사업을 발의하고 그 기본계획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 모든 종친들이 가락인으로써 자긍심을 가지게 되고 전에 없는 대동단결을 이룩하여 1500여 년 만에 가락국의 영광을 재현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公의 공적을 기려 황조근정훈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금탑산업훈장까지 수여했으며 가락종친회에서는 가락대장 제1호를 수여하여 빛나는 公의 업적을 기렸다. 2004년 9월 7일 향년 89세로 영면하니 가락중앙종친회에서는 만년 幽宅을 宗中葬으로 정하였다. "不敏한 후생은 두 손 모아 절하고 公의 발자취를 더듬어 銘을 올린다. 청렴한 소신은 공직사회 귀감이요, 탁월한 경영은 경제부흥의 원동력일세. 崇祖報恩은 忠者의 사표라 幽石에 銘을 새기니 빛나는 公德이 不朽하리라." 2005년 4월 23일 독립기념관 사무처장이 비문을 짓고 한국서예가협회장이 글씨를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