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1913~1960)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는 연대순이란 말은 존재할 수 없다. 청년 카뮈의 머릿속에는 《칼리굴라》에서 《페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단지 《반항인》만이 새로운 단계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시지프스의 신화》는《이방인》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본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사상의 책이며, 괄목할 만한 언어의 중력을 가진 책으로서 한 세대에 걸쳐 심대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신들은 시지프스에게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올리는 형벌을 주었다. 바위는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굴러떨어진다. 그래서 신들은 무익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가혹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 신화는 인간의 삶의 이미지이다. 과연 우리들은 이 지상에서 "무익하고 희망 없는 노동" 이외에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인간들은 짧고 일회적인 삶을 무엇에 쓰고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전차를 타고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네 시간 동안 일하고 점심 식사. 또 전차, 네 시간의 노동, 휴식, 수면. 그렇게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 한결같은 리듬으로 흘러가고......" 또 일한 보람이 있어 우리들이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때는 병이 들든지 또는 전쟁이 일어나서 바위를 다시 굴러내리게 할것이며, 결국은 죽음으로서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불안의 무의미한 성격, 그토록 많은 고통의 무익함을 의식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 조건의 부조리함을 발견하는 일이다. 왜 우리들은 선고 받았는가? 누구한테? 무슨 죄명으로? 환상조차 상실한 이 세계에서 인간은 이제 이방인임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그는 자기 집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이다. 이 우주는 그의 욕망에 부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또 그의 노력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 무엇으로도 충족할 수 없는 이해의 욕망을 품고 인간은 내던져졌다. '사람과 그의 생애와의 이혼,' 배우와 무대 장치와의 괴리, 이것이야말로 부조리의 감정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외침과 세계의 부당한 침묵사이의 대결에서 생겨난다"라고 그는 말한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이 감정은 부조리한 인간을 자살로 끌고 간다. 이것이 바로 이 에세이의 테마이다. 속임수를 모르는 정직한 인간이 인생이 아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자살은 드물다. 그렇다면 인간이 삶에 대해 갖는 의견과 그가 인생을 떠나기 위해서 취하는 행위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뜻인가? 첫번째 해답은 이렇다ㅡ인간과 그의 삶의 연관 관계에 있어서는 철학보다도 더 강력한 무엇이 있다ㅡ "육체의 판단도 정신의 판단 못지않는 가치가 있다. 그리고 육체는 허무 앞에서 후퇴한다." 우리는 사고하는 습성을 갖기 전에 살아가는 습성을 갖는다. 대부분의 경우 죽음의 행위를 육체에게서 동의받기 위해서는 정신은 육체를 기만해야만 한다. 안식에 의존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쉬운 일이고 외형상으로도 무해하다. 육체는 이해하자마자 곧 저항하는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회피술도 있다ㅡ다른 삶에 대한 희망. 그 삶은 행복하고, 그 행복한 삶을 얻도록 함써야만 한다(크리스트교인들의 구원). 또한 인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인생을 초월하는 그 뭔가 위대한 사상, 그 숭고한 사상 때문에 사는 사람들의 기만도 있다. 이 사상은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인생을 기만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 "그래, 내 인생은 실패했다. 부조리하다. 그러나 나는 정의를 위해 싸웠고 언젠가는 정의가 승리하리라. 그리고 이것은 내가 죽고 난 다음 내 행동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죽음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만이다. 사후의 정의는 타인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다. "이 운명적인 죽음의
조명을 비쳐볼 때 삶의 무익함이 비쳐진다. 어떠한 모랄도, 어떠한 노력도, 우리들의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이 통렬한 교리 앞에서 선험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전 인류가 개인과 마찬가지로 시지프스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만이다. 만약 인류가 자유의 바위를 들어올리더라도 그 바위는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내리고 말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은 우리에게 현실을 가려주고 있는 벽이 무너질 때 나타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생각지 못하고 오랫동안 살아왔다. "어느 날 '왜' 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모든 것이 놀라움이 뒤섞인 권태감 속에서 시작된다."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카뮈의 그림자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부조리의 벽에 우리를 직면시킨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일하는가? 몇 년 후면, 어쩌면 내일이라도 죽을지 모르는데. 명성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명성도 확실하지 않고, 또 만약 사후까지 그 명성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내가 그 명성을 알 턱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글에 흥미를 느끼는 이 사회의 유형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며, 또 언젠가는 이 지구조차 사라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어릴 때 부터 우리는 미래를 위해 살아왔다ㅡ"내일ㅡ훨씬 훗날ㅡ나이 들면 너도 알게 될 것이다." 내일, 언제나 내일, 내일이면 죽는데도. 언젠가 사람들은 이 기만을 깨닫게 되고 또한 시간이 최악의 적이라는 사실도 이해한다ㅡ"그때 깨닫게 되는 육체의 반항, 그것이 바로 부조리이다."
부조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도 아니며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의 공존 속에 있다. 원자와 양자,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한 사람, 죄 없는 사람과 죄 있는 사람이 닥치는 대로 빙빙 돌다가 매달리는 이 불합리한 우주,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 깊이까지 울리는 명석함을 추구하는 강렬한 욕망"ㅡ 바로 이 둘 사이의 대립, 이것이 부조리한 것이다. 인간 정신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일이며,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일이며, 자신의 사상에 활력을 주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아무것도 모른다. 이 별들, 이 나무들, 이 고통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내 자신에게 이방인이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 라는 명언은 고해소에서 듣게 되는 "도덕적으로 살아라" 라는 말보다 과연 더 가치있는 말인가? 심각한 빈곤에 대하여 부질없는 농담을 하는 격이다.
어떤 해결책이 있는가? 자살도 허용되지 않고 희망도 허용되지 않는다. 부조리한 의식은 초극되어야 한다. 부조리한 의식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행동 법칙도 부과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반항을 유발한다.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시키는 이 하찮은 이성, 그러나 그것을 유지시켜야 한다ㅡ"산다는 것은 부조리가 살도록 하는 일이다. 부조리가 살도록 하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부조리를 쳐다보는 일이다." 내일은 없다. 이것이야 말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 순간, 감각, 세계의 풍요, 오직 이것만을 음미할 일이다. 《티파자의 결혼》으로 돌아가보자! 운동 선수가 되든지 시인이 되자! 아니면 둘 다 되자!ㅡ"현재의 연속을 향유하는 것, 그것이 부조리의 이상이다." 눈가리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현실과 대결하고 있는 지성 (이때 현실은 지성을 초극한다)보다 더 볼만한 장면이 없을 것이다.
시지프스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을 알고 있다. "그에게 분명히 고통이 되었던 통찰력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켰다. 경멸감으로 초극되지 않는 운명은 없다." 이 점에서 카뮈는 파스칼과 일치한다. 인간의 위대성은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 시지프스의 위대성은 바위가 다시 굴러 내린다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ㅡ"이 압도적인 진리는 그것이 인식됨으로써 의미를 잃는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숱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이 먹고 또한 위대한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라고 말할 때 카뮈는 그를 찬양한다. 이 말은 신성하다ㅡ"이 말은 운명을 인간들 사이에서 조정될 수 있는 인간의 사건으로 만든다."
......나는 시지프스를 산 아래 남겨둔다. 그의 무거운 짐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을 부인하고 바위를 끌어올리는 고귀한 충실성을 가르쳐준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선하다고 판단한다. 이제 주인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무미건조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돌멩이 하나하나가, 밤의 어둠으로 쌓여 있는 이 산의 광물성 빛깔이 오직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 한다......
1942년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그것이 프랑스 청년들에게 미친 영향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처럼 세계가 부조리하게 보였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전쟁, 점령, 전쟁과 부정의 표면적인 승리ㅡ 이 모든 것이 합리적 세계의 관념에 대립해서 강렬한 부정을 나타냈다. 시지프스, 즉 인간은 20세기초에 그 숙명의 산언덕 위까지 바위를 끌고 올라갔다. 1914년 전에는 모든 게 다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에서는 많은 것들이 그래도 좋게 보였다. 희망, 진보ㅡ이런 어휘들이 의미를 갖고 있었다. 1차 대전은 4년 사이에 바위를 산 밑으로 완전히 굴러내렸다. 그런데도 시지프스는 의연히 그 끝없는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2차 대전은 희망조차 무산시켰다. 바위가 모든 것을 망가뜨린 것이다. 시지프스는 그 자리에 기운도 용기도 잃고 부서진 바위 곁에 있었다. 바로 젊은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ㅡ"그래 세계는 그렇듯이 부조리하다. 신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 가혹한 운명에 직면해서 그것을 명료히 의식하고, 그 운명을 경멸하고,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그 운명을 변화시키는 일은 중요한 것이다." 이 목소리가 경청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하느냐,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출처 :
《프루스트에서 카뮈까지》
앙드레 모루아,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