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成皇后의 능(陵) 크기는 얼마만 했을까?
1.
대륙조선이 1910년이 넘어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현 반도(半島)로 이전되었다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는 것이 바로 왕릉(王陵)이다.
실록이나 기타 어디에도 왕릉(王陵)의 크기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몇몇 왕릉공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 존재할 뿐이다. 가령 성종(成宗)의 묘인 선릉(宣陵)의 경우 동원된 노동인력이 9천명에 이르고 있음을 산릉도감(山陵都監)은 알려주고 있다.
능묘(陵墓) 조성기간인 5개월이상을 9천명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조그만 선릉(宣陵)은 9천명이 동원된다면 일주일도 안걸릴 작은 공간이다. 여기에 9천명이라니!! 또 5개월동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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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서울 선릉(宣陵)의 모습이다. 중종릉과 같이 있다. 붉은색 원 안의 성종릉의 조성하기 위해 9천명이 5개월 이상을 일했다는 것이다. 쇼도 정도껏 해야 재밌는 것이다. 도가 지나치면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상식아닌가? 2.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1858년4월23일 태어났다.
고향의 웨슬리언 대학(1881)과 마이애미 의과대학(1883)을 졸업한 알렌은 본시 中國에서 醫療와 宣敎活動을 할 요량으로 1883년에 중국에 입국했으나 아내의 출산과 선교의 어려움 때문에 中國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1884년7월20일 朝鮮에 입국하였다.
甲申政變때(갑신정변) 민영익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舊韓末의 중요한 外交官으로 변신하게 된다.
1887년 駐美 全權公使 박정양의 고문이 된것을 시발로 1894년부터는 駐韓 美國公使館의 書記官이 되었다.
1897년 公使, 1898년 總領事, 1901년 全權公使를 역임하고, 1892년 Korean Repository를 발간했으며, 1900년에는 英國 王立 아시아학회의 韓國支部를 결성하기도 했다.
1905년 乙巳條約이 체결되고 朝鮮의 外交權이 박탈되자 1905년에 귀국하여 故鄕에서 조선관계의 저술과 仁術로 여생을 보내다가 1932년 12월11일에 타계했다. 알렌은 고종(高宗)의 어의(御醫)로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병을 치료했으며, 세밀한 관찰력으로 구한말(舊韓末)의 상황을 예리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바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왕릉(王陵)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미국(美國) 외교관(外交官)으로 15년을 봉직하고 조선(朝鮮)에서 어의(御醫)로서 근무한 이력의 알렌이 거짓을 기록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3. 1895년10월8일 閔妃가 시해되었다. 1천 에이커가 넘는 왕릉이 整地되었다. (1천 에이커=1,224,174坪)무덤 자체가 약 40-50피트(12-15m)이 높이로서 천연의 산등성이에 자리를 잡은 인공 언덕이었다. 알렌의 기록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크기가 1백20만평이 넘었다는 기록이고, 무덤 봉분의 크기가 12-15미터에 이르렀다는 기록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기록은 또다른 독일의 이방인인 에카르트 신부에 의해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바로 고종(高宗)릉의 무덤크기가 15미터에 이르렀다고 그는 고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홍릉은 고종과 민비의 합장묘인 것이다.
에카르트는 그의 책에서 입구에서 정자각(丁字閣)까지 2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했다.
또한 정자각의 제실이 몇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의 직각으로 굽은 곳에 위치했다고 기록하고, 15미터 높이에 위치한 거대한 봉분이라고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 경주(慶州)의 천마총(天馬塚) 높이가 12.7m에 이른다는 것을 고려하면, 홍릉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4. 현 남양주의 홍릉은 구한말의 기록과 전혀 관계없는 곳이다.
에카르트는 분명이 홍릉에 대해서 입구에서 2킬로 이상을 걸어들어가면 비로소 홍살문이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이 반도(半島)의 모든 왕릉(王陵)은 가짜인 것이다. 반도강제이주 세력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황당한 짝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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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런데 다음의 사진은 우리를 다소 당황시킬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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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원 안)이 해방 후 환국해 경기도 남양주 홍릉(고종릉)을 참배했다. 젊은 시절 김구가 해주감옥과 인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고종황제의 명으로 사형을 면했던 인연이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당연히 가짜다. 뒤의 봉분이 거대하지도 않을뿐더러, 반도조선을 진실인양 위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구한말 이방인들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조선(朝鮮)왕릉(王陵)의 규모(規模)를 전혀 짐작할수도 없었을 것이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구한말(舊韓末)의 기록은 모두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종(高宗)의 무능과 민씨척족의 비리, 어리석은 대원군(大院君) 등등... 다 일제가 만들어낸 창착품인 것이다. 보라!!! 200여권이 넘는 이방인의 기록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글쓴이들이 모두 박사,외교관,의사,선교사 들이 대부분이다.
고종(高宗)의 가장 가까이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외로운 투쟁을 끝까지 고수하다 독살당한 비운의 황제, 고종(高宗)을 기록한 그들의 글은, 일제에 의해 창작된 무능한 고종(高宗)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춘추(春秋)에 말하기를 시해당한 왕(王)은 그 적을 주살하기 전에 장(葬)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앞으로의 어느 때인가 우리가 고종(高宗)임금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국장(國葬)을 온 국민의 예의로서 다시 치러야 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조선,지극히 아름다운 나라. 도서출판 살림. 안드레 에카르트 저 조선견문기 집문당. 호레스 알렌 저
2019.3.11. 송계(松溪) |
http://cafe.daum.net/sisa-1/dqFG/899
대륙조선의 지배층들이 한반도로 이주한 이유
https://youtu.be/gz5O_W_YfrE
고종과 태조 이성계 황제묘의 봉분 높이는 10미터 이상이다
분재는 일본것이 아니고 조선의 문화다
'총각'은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놀라운 증거들이 나온다.
고종황제의 장례식 동원인원의 규모는 한반도에선 불가능하다.
건원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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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고인돌인 영국의 스톤헨지도 1954년 조작했다고 보도.
스리랑카에는 1만년된 조선의 역사 자료가 있다고 함.
고승들이 배운다고 함.
스리랑카에 잇는 고인돌을 일제시대에 미국놈들이 가져가서 미국땅에 파묻어놓고,
선사시대 유적이다..라고 선전한다고 사진과 함께 나옴.
물론 처음으로 12.000년전후 한민족이 베링해를(당시는 바다가 아니겠지요) 넘어
알래스카 도착후 미국에 정착..인디언이 되었다고 함.
한민족이 세운 고인돌도 았겠지요.
http://ikbnnews.mediaon.co.kr/news/article.html?no=8024
스리랑카에 존재하는 1만년 조선역사
https://youtu.be/KzYpCzgiMXE
세상에 은폐 되었던 진실..암호 코드명 체로키..그리고 5.18 학살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체로키 인디언의 애국가인 낙원조선을 도용 한것이다.
아메리카땅은 대조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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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cafe.daum.net/sisa-1/f8lD/811?svc=cafeapp
임진왜란 병자호란 남한산성 위치.
조선의 강역
http://cafe.daum.net/sisa-1/dqMu/36089
1710년에도 대조선의 베링해협은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붙어 있었다
http://cafe.daum.net/sisa-1/g1GU/4645
China(지나)는 신라가 어원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