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의 결혼식장에는 처음 신부가 입장할 때는 바그너의 <결혼 행진곡>, 예식이 끝나고 신랑신부가 팔짱을 끼고 하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할 때는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이 신나게 울려 퍼집니다.
만당(滿堂)의 축하 속에서 연주되는 그 두 가지 결혼 행진곡은 축복만 넘치는 곡이 아니어서 내력을 좀 살펴볼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바그너의 것은 그의 가극 <로엔그린>의 제3막에서 전주곡이 끝나고 이어서 나오는 <혼례의 합창>입니다. <로엔그린>이라는 가극은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남녀가 완전 결합을 못 본 채 여주인공 엘자는 남동생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는, 비극도 이만 저만이 아닌 비극으로 끝나는 오페라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결혼 행진곡이라도 그런 비극 속에 쓰이는 곡이 과연 경사스런 결혼식에 걸맞는가는 한번쯤 생각해볼 만도 합니다. 그러나 '식자우환(識字憂患)'즉 '아는 것이 병’이라고 차라리 모르고 그저 축하 기분으로 듣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이어서 본론인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 곡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 여름밤의 꿈>을 토대로 한 극음악으로서 서곡과 12개의 극중 음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 아홉 번째 곡이 바로 <결혼 행진곡>입니다.
소재가 된 희곡도 환상과 유머가 가득한 아주 즐거운 내용이고 음악 역시 대체로 경묘하고 즐거운 만큼 바그너와 같은 시비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곡도 괜히 욕본 일이 있었으니 사연은 이렇습니다.
멘델스존은 18432년 그의 나이 34세 때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명을 받고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 상연용 극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 때 만든 12곡과 앞서 17세 때 작곡했던 유명한 <한여름 밤의 꿈>의 서곡을 그 해 10월 14일 포츠담 궁전에서 초연했습니다. <결혼 행진곡>은 제5막의 처음에 아테네의 시시어스 대공과 아마존의 여왕 히포리타의 결혼 장면에서 연주됩니다.
* 혼례 장면
멘델스존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가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멘델스존이 타계한 지 87년이 지난 1933년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혈통 속에 유대인의 ‘유’자만 섞여도 모든 분야에서 숙청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악사들은 모조리 직장에서 쫓겨났고, 유대인의 작품은 연주가 일체 금지되고 악보는 불태워졌으며 기념비 따위도 남김없이 파괴되었습니다. 물론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연주회장 앞뜰에 세워져 있던 멘델스존의 동상도 철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결혼 행진곡>도 연주가 금지되었습니다. 이 곡이 다시 해금된 것은 나치가 붕괴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습니다. 팔짱 끼고 신나게 퇴장하는 신랑신부 제군, 제양! 아무리 기분이 들떠 있다 하더라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것을 고맙게 여깁시다.
비슷한 꼴을 당한 것이 독일민요 <로렐라이>입니다. 그 노래의 작사자 하이네 역시 유대인이었으므로 나치 하에서는 가사를 바꾸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가사가 바뀐 뒤로는 독일사람 어느 누구도 <로렐라이>를 부르려고 하지 않아 독일 사람이 지은 새 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 유복했던 천재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 ]
멘델스존은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자랐고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활약했습니다. 26세 때인 1835년 이후 3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의 주된 활동 무대이자 대가로서의 명성을 굳힌 곳은 라이프치히였습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얼굴에 폭넓은 지식을 갖춘 높은 교양인으로서 당시 독일 음악계의 리더였던 멘델스존의 이름 펠릭스(Felix)는 행운아라는 뜻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괴테와도 친분이 있었던 당대의 철학자였고, 그의 아버지는 함부르크를 비롯한 북독일 금융가를 주물렀던 대은행가였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여러나라 말을 구사하며 문학을 연구하던 교양 있는 여성이었기에 멘델스존은 그야말로 환경면에서 최고의 행운아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건강만은 행운아가 아니었습니다. 평소 병약했던 그는 1847년 아깝게도 3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맙니다.
20세기에 들어와 나치 집권시절에는 위에서 말한 <결혼행진곡> 뿐만 아니라 그의 대표곡이기도 한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도 '누구의'라는 말은 없고 단지 <바이올린협주곡 E단조>라는 이름으로만 연주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