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에 있는 삼국시대 초기의 고분군.
개설
서쪽으로 향한 구릉에서, 발굴 전 10여 기의 고분이 훼손된 상태로 지표에서 확인되었다. 1982년 2월 임당동 2호분이 도굴되어 순금제 귀걸이 및 장신구·은제허리띠·곱은옥〔曲玉〕·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등 중요한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기 직전 당국에 적발되어 임당동고분군의 중요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조사가 1982년 7월부터 12월까지 실시되었으며, 모든 경비는 영남대학교 박물관이 전담하였다. 또한 이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곳의 북편 능선이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도 많은 원삼국시대의 무덤들이 조사되었다.
이 고분군은 본래 사적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인접한 경산조영동고분군과 통합되어 사적 제516호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내용
제일 먼저 발굴된 고분은 제2호분이다. 이 고분의 봉토는 3분의 1이 이미 파괴된 상태였으나, 4분법으로 조사하였다. 봉토는 얇은 판석으로 된 청석을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둥글게 쌓았고, 바닥부분은 일부 흙으로 다지고 회를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구조는 표형분으로 2개의 무덤을 남북으로 함께 붙여 만든 것이며, 축조 순서는 남쪽에 있는 무덤이 먼저 만들어졌고 북쪽에 있는 무덤은 뒤에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1개의 무덤은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으로 구성되어 있고, 으뜸덧널의 뚜껑은 큰 화강암 편평석을 사용하였으며, 딸린덧널은 나무로 뚜껑을 하였다.
제2호분 다음에는 제5·6·7호분을 비교·조사하기 위해 차례로 발굴되었는데, 봉토축조 방법은 제2호분과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으며, 봉토가 2개 또는 3개로 연결되어 있는 여러덧널식〔多槨式〕이었다. 제5·6·7호분을 모두 발굴한 결과 제5호분에서 독〔甕棺〕1개, 제7호분에서 독 1개 등을 포함하여 모두 15개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제5·6·7호분의 주위에는 평면에 원형 또는 반원형으로 둘레돌〔護石〕이 돌려져 있었다.
특징
독 2개를 제외한 무덤의 구조는 모두 으뜸덧널과 딸린덧널로 되어 있다. 북분(北墳)의 으뜸덧널은 크기가 가로 1.3m, 세로 4m, 깊이 2m이며, 딸린덧널은 가로·세로 각각 4m, 깊이가 1.5m 가량 된다. 남분(南墳)의 경우 크기가 북분과 비슷하나 딸린덧널의 대부분이 집을 지을 때 잘려나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남분의 주위에 원형으로 둥근 둘레돌을 돌렸으며, 여기에 반원형으로 북분의 둘레돌을 붙여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둘레돌은 무덤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임당동고분군은 암반굴착덧널무덤〔岩壙木槨墓〕으로 모두 청석암반을 파서 무덤구덩이를 만들고 거기에 덧널〔木槨〕을 설치한 것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에서 차이가 났다. 으뜸덧널에서는 주로 금동관편(金銅冠片), 금제귀걸이, 금동제귀걸이, 금은제반지, 금제장식, 곱은옥, 금은제구슬, 유리구슬, 대롱옥〔管玉〕, 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금동제고리자루큰칼〔金銅製環頭大刀〕, 철제큰칼〔鐵製大刀〕, 쇠투겁창〔鐵矛〕, 삼지창, 백화수피편(白樺樹皮片), 주검받침〔屍床〕, 흙구슬, 토제구(土製球), 그릇받침, 각종 토기, 뼈장식품, 비단조각, 사람뼈 등이 발견되었다. 딸린덧널에서는 청동말종방울〔靑銅馬鐸〕, 금동제마구류, 철제마구류, 쇠화살촉, 쇠도끼, 숫돌, 쇠손칼, 각종 토기류, 삼두마고배(三頭馬高杯), 붉은긴목항아리〔赤色長頸壺〕, 상어·생선·돼지·사슴과 닭의 뼈 및 각종 조개껍질류, 사람뼈 등이 주로 수집되었다.
의의와 평가
임당동고분군의 으뜸덧널에서는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장신구·무기·토기 등이, 딸린덧널에서는 순장자를 포함하여 저승에 가서 사용할 각종 일상도구·마구류·음식·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2,000여 점의 유물은 당시의 사회·문화·경제·기술의 양상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된다.
임당동고분군이 위치해 있는 지역은『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왕조에 “파사왕 23년 압독국(押督國)의 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는 기록의 압독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삼국사기』지리지 장산군조(獐山郡條)에 의하면 압독국은 일명 압량국(押梁國)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경산군에는 아직도 압량면이 있고 바로 압량면에 임당동고분군이 속해 있으므로 압독국과 이 고분군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귀중한 유물과 금동관은 이 고분군의 주인공이 정치적 지배자의 신분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기록에 나와 있는 삼국시대 초기 소국(小國)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고분군의 발굴은 삼국시대 초기 압독국의 역사와 문화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출토된 유물과 무덤의 구조는 신라와 가야의 특징을 함께 보여주고 있지만, 그 자체의 고유한 특색도 잘 나타나 있다. 경주지방의 초기 고분의 구조와 유물을 이 고분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근처에 있는 가야고분의 성격과도 비슷한 점이 있어 신라와 가야 사이에서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고분군으로서 높게 평가된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 『임당의 고분과 생활유적』(한국상고사학회 편, 학연문화사, 2000)
- 「경산임당유적발굴조사보고」(장용석 외, 제3회 영남문화재연구원조사연구발표회,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1996)
- 「임당고분의 일고찰」(정영화,『인류학연구』6, 1991)
- 「임당동고분군발굴개보」(정영화,『한국고고학년보』10,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