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연나라가 세운 장성을 검색하다가 명장 진개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까지 점령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끌었고,
후대에 고구려도 같은 장소에서 전쟁을 치렀는데...공격방향이 서로 정반대라는 사실이 재미있네요.
사기 흉노열전과 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진개는 연의 소왕 때 동호(東胡)에 볼모로 갔지만 그곳에 사는 유목민들의 신뢰를 받고 귀국했다가 다시 동호를 기습공격하여 그들의 영토 1천여 리를 차지한 다음에 조양에서 양평까지 이르는 연장성(燕長城)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개 군을 두었다고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알키비아데스가 떠올라 피식 웃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도 적국이던 스파르타의 신임을 얻었는데 볼모가 아니라 자진망명한 것이고, 스파르타인들에게 군사적 정보도 알려줘 고국 아테네의 안보를 위태롭게 만들었죠)
그리고 위략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 2천여 리를 정복하고 만번한(滿潘汗)까지 넓혔다고 나옵니다.
이 기록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았던 모양..
동호와 고조선은 원래 동일한 세력이었고, 삼국사기에서 사마염의 진나라를 한인(漢人)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중국측 기록도 익숙한 옛 이름으로 고조선을 동호라고 표현했다..?
동호 자체가 동이(東夷)를 칭하는 넓은 의미로 공식적인 국명이 아니라 종족명이었다..?
동이와 동호는 서로 계통이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진개가 공취한 2천여 리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군을 설치하였다는 위략의 기록에서 앞의 4군은 실제 동호족의 영토이고, 고조선이 상실한 것은 요동....만번한까지 이르는 1천여 리에 불과하다는 것..?
어떤 사람은 시대별로 거리를 세는 단위(현재 중국은 1리가 5백미터)가 변했고, 1천여 리와 2천여 리는 정확하다고 볼 수 없으며 중국인 특유의 과장일 수 있다고 하네요.
과거 어디선가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할 때까지 나라뿐만 아니라 가까운 마을까지 서로 가격이나 길이, 무게 등 단위가 달라서 개판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진나라 이후에도 한, 당, 송, 명, 청나라 때만 빼고 거의 전란이 빈번했던 시절에 과연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기 힘들네요.
그나저나 진개는 왕이 아니라 일개 장수였지만 전략과 전술이 탁월한 지장인 건 분명합니다.
스키타이나 훈족 같은 북방기마민족들의 주특기..치고 빠지는 기동전술이 아니라 아예 장성을 쌓아 영토를 넓혔다는 건..
진개는 유목민이 아닌 농경민의 사고방식대로 군대를 통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개의 전투상대였던 동호와 고조선의 무기장비에 대해 잘 몰라도..
고구려인이 사용했다는 맥궁은 훈족와 같은 복합궁이었고 화살 종류도 다양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가 동호나 고조선보다 군대의 무기와 전술 등 여러가지면에서 업그레이드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고구려는 연나라와는 반대방향으로 우북평, 어양, 상곡을 공격했지만 그 결과는 서로 달랐죠.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기원전 281년부터 연나라가 진시황에게 멸망당하는 기원전 222년까지..
길게 잡아도 60년을 넘지 못하는 짧은 세월이었지만..진나라가 이어받아 장성을 보강하게 됩니다.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을 치르고 물러선 고구려는 금방 망하지 않고 더 오래 지속되었다는 게 아이러니..
연나라와 고구려의 주변정세가 서로 달랐기 때문일까..
첫댓글 뭐 헤르만헤세도 로마군 복무하고 나중에 바루스 군단을 전멸시켰고, 아이티우스도 훈족에게 갔다가 돌아와서 아틸라를 쳐부순 케이스인 걸 보면 다 똑같은 거겠죠. ㅎ
기록이 딸렸을 뿐이지 연나라와 고조선은 엄청 투닥거렸을거 같구 그 과정에서 경험이 많이 쌓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제 유철이가 고조선을 완전히 점령하는데 좀 애를 먹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