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84번 글에 대한 반론입니다)
큰 수레님,
너무나 좋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이미 5분이 스크랩을 해가셨기 때문에
그 글을 읽는 분들이 오해한다면
작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염불을 사마타 수행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렇지만 한글자 한글자 또렸또렸하게 확인해가며 하는 것이 위빠사나라고 하셨는 데
저는 그 것도 역시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글자에 집중하는 사마타일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사마타]
사마타는 하나에 대한 집중을 합니다.
사마타는 집중을 통해서 산란한 마음을 모아갑니다.
이 것이 사마타의 목적이고, 이렇게 집중된 마음으로 위빠사나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승경전인 해심밀경)
[위빠사나]
위빠사나는 마음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집중과 관찰은 다릅니다.
대념처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탐심이 있으면 탐심이 있는 줄 알아차리고, 탐심이 없으면 탐심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이처럼 위빠사나는 하나에 대한 집중과는 다르게 대상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을 관합니다.
그 과정에서 실체가 없이 생멸하는 대상을 직접 보면서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임을 아는 연기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기된 문제]
이렇게 볼 때 나무아미타불 글자 하나 하나에 집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사마타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대상을 관찰하여 생멸과 변화를 보는 것이 아니고
다만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고정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저는 나.무.아.미.타.불.에 한자씩 또렷또렷하게 집중을 하는 수행도
사마타일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다만 금강경 독송회에서 하는 염불방식은
위빠사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염불도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고
위빠사나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지요.
비록 염불을 위빠사나식으로 할 수는 있지만
큰 수레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은 위빠사나가 아닌 사마타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김열권님의 [다만 바라볼 뿐이다]라는 책에 보면
소리선이라고 하여 염불을 위빠사나 식으로 하는 내용을 소개한 것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부처님의 법은 정확히 언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이 곳에 계신 스님들께서 이 문제를 분명히 언급을 하셔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처럼 이미 공론화가 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불자들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혜국스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을 하시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하셨는 데
솔직히 납득은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타스님을 참 좋아하고
혜국스님의 정진력에 언제가 감동을 하고 배우려고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납득이 되지 않더군요.
...()...
첫댓글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가 쓴 글은 물론 대념처경도 인용했지만, [달라이 라마의 수행의 단계]와 유식 30송(가행위의 4심사관), 그리고 대승기신론과 대반야경(600권), 중론을 참고로 한 것입니다. 소승경전보다는 대승경전이 많습니다. 물론 선종의 법문에 대하여는 성철스님의 선문정로나 육조단경등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다만 한국의 선종에서는 반야에 대한 이해가 불분명함을 말씀드립니다. ...()...
대승기신론에서 설명하시는 止의 수행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중(심일경성)으로 큰수레님도 크게 문제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반야즉 위빠사나인데, 결국 반야는 아와 법의 공성을 철견함으로써 무명을 타파하고, 그 결과로서 연기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반야나 위빠사나가 다른 곳으로 갈 어떤 것도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공성을 터득하기 위하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수행의 원칙인 문사수를 적용해본다면, 공성에 대한 경전이나 논서 혹은 법문을 듣는 것이 문이라면, 이성적 추리로서 공성을 사유한다면 두번째인 思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의 修가 됩니다.
근본불교에서 석가여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이를 닦는 것으로 사념처(신수심법, 즉 위빠사나)를 말씀하십니다. 신수심법의 생주이멸을 관함으로써 공성을 혹은 연기의 이치를 터득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타당한 방법을 제시하셨지요. 대승에 와서는 유식에서 4심사관을 제시한 것 같고(명, 사, 자성, 차별) 중관에서는 반야경과 중론등에 입각한 공성 수행법이 제시되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선종인 데, 논리전개가 흐릿합니다. 석가여래께서도 [내 말을 내가 부처님이 하는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지는 말아라] 이치에 맞고 실제 체험과 부합하거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선종이나 한국의 불교에서 반야에
대하여 흐릿한 태도로 임하는 것은 저와 같은 많은 불자들의 의문에 계속 직면하게 될 것이고, 답변을 명쾌하게 하지 못하고 그 근거를 타당하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설 곳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선의 수승한 점을 잘 알지만 이 문제는 한국선이 넘어야할 관문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