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igin And Concept of Argentine Tango -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의 기원과 개요 - 2
Astor Piazzolla (아스토르 피아졸라, 1921 ~ 1992)
항구 도시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당시 이민자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감정이 고스란히 춤과 음악으로 분출돼 만들어진 아르헨티나발(發) 정의 문화 아이콘, 탱고. 이 단어를 듣고 혹자는 영화 ‘해피투게더’나 ‘여인의 향기’에서 배우들이 보여줬던 현란한 춤사위를, 어떤 사람은 낭만과 열정이 어린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 탕게로스를 떠올린다. 그렇다. 탱고는 ‘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장르다. 그러한 탱고를 춤에서 떼어내 ‘감상을 위한 음악’, 즉 누에보 탱고 Nuevo Tango로 집대성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이다. “나에게 있어 탱고는 발이 아닌 귀를 위한 음악이다”라고 한 그의 말처럼 누에보 탱고는 춤이 아닌 음악 그 자체 울림을 위한 것이다.
"피아졸라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탱고의 거장이다." - New York Times
"그는 인기는 롤링 스톤즈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의 음악은 훨씬 오래 남을 것이다." - La Stampa
KATICA - ANIKÓ - FERENC - CSABA ILLÉNYI - Libertango
(카티카 - 아니코 - 프란시스 - 카사바 일레니 - 리베르탱고)
▼
Astor Piazzolla - Libertango
Violin: Katica Illenyi . Cello: Aniko Illenyi . Violin: Ferenc Illenyi. Violin: Csaba Illenyi . Dohnányi Orchestra Budafok. Conductor: István Silló. Palace of Arts, B. Bartók National Concert Hall
아스토르 피아졸라 - 리베탕고 바이올린: 카티카 일레니
첼로: 아니코 일레니
바이올린: 페렌츠 일레니.
바이올린: Csaba Illeni. 도나니 오케스트라 부다폭.
차장: 이스반 실로. B. 바톡 국립 콘서트홀 예술의 전당.
피아졸라는 1921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친구들로부터 렝고(절름발이)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많이 받았다. 선천적으로 오른쪽 다리가 뒤틀렸기 때문인데 그런 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장애를 음악으로 극복하길 바랐던 아비의 심정이었을까. 10살의 어린 피아졸라에게 아버지는 반도네온을 사다준다. 이것은 피아졸라의 인생은 물론이고 훗날의 누에보 탱고를 탄생시킨 출발점이 되었다. 1929년 아버지가 반도네온을 물려주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하였다. 1930년 그는 부모를 따라 유년기를 미국 뉴욕의 노동자 지역에서 보냈다. 이 당시
그는 탱고보다는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듣고, 바흐, 슈만의 음악과 유행하던 재즈 음악을 반도네온으로 연주하길 좋아했는데, 이는 그가 주로 하던 탱고와 다른 장르의 음악 사이의 크로스오버에도 영향을 미친다. 피아졸라는 열세 살때 당대 탱고의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나고, 그의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가르델은 그에게 '연주 실력은 훌룡하지만, 탱고를 양놈처럼 연주한다'는 평을 했는데, 그 당시 피아졸라가 재즈, 클래식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정확한 지적이었고, 나중에 피아졸라가 정통 탱고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면 수십년 후를 예언한 평이었다. 한편으로 가르델은 피아졸라의 연주 실력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El dia que me quieras)에 단역으로 출연할 기회를 주기도 했고, 자신의 연주 여행에 함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피아졸라의 아버지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했는데, 가르델과 그의 악단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피아졸라는 인터뷰에서 '내가 그때 간다고 우겼거나 아버지가 허락했으면, 반도네온 대신 구름 위에서 하프를 뜯고 있었겠지…'라는 말을 했다. 1936년, 아르헨티나의 고향으로 가족과 돌아오면서 피아졸라는 여러 탱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 당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르다로의 6중주단이었다. 이 당시 탱고는 빅 밴드 오케스트라가 주로 연주하였
기 때문에 이러한 실내악 탱고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피아졸라도 이후 이에 영향을 받아 실내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그의 나이 17살 때,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해 당시 최고의 탱고 악단이었던 아니발 트로일로의 악단에 연주자로 들어간다. 피아졸라는 그 곳에서 월 240달러를 받으며 반도네온 연주 외에도 편곡, 피아노 연주 등을 맡으며 재능을 드러냈지만, 본인은 '카바레는 매음굴이었다'고 회상하면서 그 시절에 대해 넌더리를 내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숙소는 개판이었고, 여러 동료들 중 약 안 빨고, 여자랑 안 논 것도 그뿐이었다고 한다. 그가 익힌 음악들은 전통적인 탱고를 기반으
로 하되, 그 위에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시킨 음악. 그러나 당시 탱고 뮤지션들에게는 이단 취급을 받았다. "난 마치 화성에서 온 외계인 같았다. 모든 탱고인들은 반도네온으로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하는 날 미친 녀석이라고 했다"는 그의 회고는 당시 그의 외로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행히 그는 이런 공격들을 가볍게 넘기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음악"이라고 지칭한 자신의 음악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편집증 환자라고 단정지은 비평가들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늘어나던 젊은 지지자들은 피아졸라의 굳은 심지가 더 마음에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상처받고 소심하게 주저앉았다면.. 탱고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리베르 탱고 Libertango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41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찾아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평해달라고 요청하는 패기를 보였고, 루빈스타인은 이 부탁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면서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고서는 '다 좋은데, 오케스트라 파트는 어디 있나?'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음악이론이 부족했던 피아졸라는 피아노 독주곡을 쓰고는 협주곡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그럼에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를 사사할 기회를 주었다. 이후 피아졸라는 히나스테라의 밑에서 음악 이론을 배우고, 문학, 미술 등 교양을
쌓으면서 탱고 연주자로도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첫 아내 데데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6년간 히나스테라에게 배우면서 첫 클래식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 피아졸라는 점점 기성 탱고 음악계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작품 편곡을 놓고 팔리게 만들려는 트로일로에게 반발을 사기도 했고, 피아졸라도 맘에 안드는 동료나 공연 와서 들으라는 음악은 안듣고 염장질이나 하던 손님들에게 폭죽이나 쓰레기를 던졌다고 한다. 결국 이런저런 문제가 쌓인 끝에 그는 1944년 트로일로의 악단을 떠나 1946년 자신만의 악단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오르케스타 티피카'(이하 티피카)를 결성하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립해나갔다.
Rastrelli Cello Quartett Piazzolla - Oblivion
(라스트렐리 첼로 4중주 피아졸라 - 망각)
▼
https://youtu.be/I26V_CeC2ak
티피카 악단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탱고를 알리며 그의 지지자를 모으던 피아졸라는 다른 한 편으로 클래식 작곡에도 전념했다. 버르토크,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실내악 위주로 창작하였는데, 1945년에는 그의 작품 번호 1번 '현악 합주와 하프를 위한 모음곡'이 초연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인정한 첫 탱고곡 '엘 데스반데(El desbande)'도 내놓지만, 당시만 해도 피아졸라는 탱고보다는 클래식을 더 좋아하였다. 아니, '반도네온 들고 밖에 돌아다니기 쪽팔리다'고 했을 정도로 탱고를 반쯤 혐오하였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탱고 좆까, 나도 스트라빈스키 될거야!!'같은 심정으로 살
았다고. 한편으로 그의 악단 티피카도 열성 팬들을 모으긴 했지만 댄스 반주로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크게 얻지 못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페론 부부가 정권을 잡고 독재자처럼 권력을 휘두르면서 악단에도 페론 가카 찬양의 압박이 악단 안팎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페론주의자였던 피아졸라도 본인이 흑역사로 인정한 '아르헨티나 공화국'과 '페론 찬가'를 연주해야 했고, 후자는 본인이 직접 작곡해야 했다. 이후에도 계속 페론주의자들의 압박에 시달려온 피아졸라는 결국 본인의 탱고에 대한 무관심, 정치적인 압박, 인기 부족에 시달린 끝에 티피카 악단은 1949년 망해버렸다. 이후 피아졸라는 객원 멤버로 연주에 참
여하거나 영화음악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한편으로 클래식 작곡에도 전념했다. 그러던 중 1951년 작곡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향곡(Sinfonía Buenos Aires)'으로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 정통 관현악 편성에 반도네온 두 대를 추가했기 때문에,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지휘한 초연 무대에서 청중들이 '야! 클래식 연주하는데 반도네온 소리 좀 안나게 하라!'며 난동을 일으켰지만, 이 곡으로 파비안 세비츠키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클래식 작곡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어필할 수 있었다. 1953년에는 소편성 관현악을 위해 작곡한 신포니에타 Sinfonietta를 발표했는데, 이 곡의 악보를 프랑스의 전설적인
음악 교육자인 나디아 불랑제에게 보낸 뒤 배우러 오라는 답장을 받고 이듬해 아내와 함께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불랑제와 처음 대면한 피아졸라는 불랑제에게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작곡한 클래식 작품들의 악보를 보여주고 시연했는데, 그녀의 평은 '다 좋은데 말이야, 니 음악에 감정이 안 실린 것 같은데….'였다. 불랑제는 한편으로 피아졸라의 자작곡들에서 뭔가 특이점을 찾았는지, 피아졸라에게 클래식 외에 다른 음악도 한 적 있느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피아졸라는 자신이 탱고를 했다고 밝히기 싫어서 계속 말을 돌리고 우물쭈물했지만, 결국 자신이 탱고 연주자라고 커밍아웃하고 자작 탱고 중 그나마 자신이 있던 승리(Triunfal)를
연주하자 그녀는 이게 진정한 피아졸라 음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클래식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탱고는 그냥 생계 수단으로만 여겼던 피아졸라로서는 이를 계기로 탱고 음악가로 완전히 탈바꿈한다. 이후 파리 유학 시절 피아졸라는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우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는데, 특히 불랑제에게 상당히 엄격하게 배운 대위법과 푸가 작곡은 이후 피아졸라의 여러 클래식 지향 작품에서 매우 자주 응용되었다. 파리 재즈 클럽들에서 재즈 연주를 들으며 그 영향도 받았고, 이후 자신 만의 실내악단을 만들 계획도 세웠다. 또한 연주 스타일도 고쳐 반도네온을 앉아서 연주하는 대신 의자를 밟고 서서 연주하였다.
본인이 말하길 앉아서 연주하면 늙어보이고, 서서 연주해야 관객과 눈을 맞추고 소통할 수 있다고. 이러한 사소한 변화마저 후대의 탱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파리 시절 생각했던 실내악단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기존의 오케스트라, 빅 밴드를 앞세운 탱고와 달리 실내악을 중심으로 했을 뿐 아니라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넣어 기성 탱고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뿐아니라 그는 새로운 탱고(Nuevo Tango)를 내세워 예술성을 주로 하고, 성악을 뺐으며, 재즈를 도입하는 등 상당히 혁신적인 시도로 본국에서는 논란에 휩싸인다. 아르헨티나에서 비
난 세례를 받던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도 해체하고 반 강제로 뉴욕으로 건너가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편곡이나 댄스단 반주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 와중에 1959년 아버지의 부고 소식까지 접하며 최악의 시기를 맛보게 되는데, 이런 절망 속에서 그는 걸작을 하나 내놓았으니 그것이 김연아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유명한 아디오스 노니노 이다. 아버지는 피아졸라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1959년 10월, 해외 순회공연을 떠난 피아졸라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하게 된다. 알려진 바로는 당시에 피아졸라는 고국으로 돌아갈 경비조차 없었다고 한다.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 비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타지에서 외로이 홀로 써내려간 곡이 바로 이 음악이다. 뉴욕에서도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채 피아졸라는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온다.
Astor Piazzolla - Adios Nonino
(아스토르 피아졸라 - 아디오스 노니노)
▼
Astor Piazzolla - Adios Nonino
Astor Piazzola interpreta "Adios Nonino" con la Sinfónica "Cologne Radio Orchestra" de Alemania. Extraído del documental "Astor Piazzolla: The Next Tango"
아디오스 노니노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독일의 교향곡 "콜로네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디오스 노니노"를 공연합니다. 다큐멘터리 "아스터 피아졸라: 넥스트 탱고"에서 발췌했습니다.
피아졸라가 돌아온 1960년 당시 아르헨티나는 날로 바뀌고 있었다. 페론 정권이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고 그렇게 세운 정권이 또 무너지고, 탱고도 로큰롤과 포크의 인기에 치여 시들해지고 있었다. 피아졸라는 이 혼란기를 기회로 삼았다. TV 출연으로 인지도를 쌓았고, 카바레 대신 등장한 소규모 탱고 클럽에 출연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그의 팬과 안티 사이에 대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번은 TV 스튜디오에서 피아졸라와 그의 안티가 우연히 만나 시비가 붙기도 했고, 택시 기사가 '니 탱고가 탱고냐'며 승차 거부를 했을 정도. 그 와중에도 피아졸라는 티피카 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에 이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 퀸테토 누에보 탕고(새로운 탱고 5중주단, 이하 5중주단)를 새로 결성하고 활동에 나섰다. 1961년 하마이카 클럽에서 처음 공연을 시작해서 1962년 676 클럽으로 무대를 옮겨 공연을 하였는데, 청중 수는 들쭉날쭉했지만, 천천히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새로 주자들을 영입하여 옥테토 콘템포라네오(현대 8중주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실험이기 때문에 몇 달 활동하고 5중주단으로 돌아갔지만, 평은 좋았다. 이 무렵의 성공으로 지방 순회 공연도 다니고, 유럽 순회 공연도 기획을 하였다. 같은 해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작품인 '포르테뇨 탱고 풍의 3악장(Tres
movimientos tanguísticos porteños)'이 파울 클레츠키의 지휘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고 히르시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아르헨티나 문화 홍보 차원에서 미국, 브라질을 방문하여 콘서트를 열었는데, 오히려 본국에서보다 평이 좋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함께 공동 작업하여 앨범을 내기도 하여 마침내 첫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클래식도 가끔씩 작곡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무렵부터 부부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피아졸라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66년 두 부부는 별거하고, 이혼이 합법화될 때까지 사실상 이혼 상태에 있다가 1988년에 가서야 공식적
으로 이혼한다. 별거를 시작한 이후 피아졸라는 더 신이나서 합법 바람을 피웠고, 그 와중에도 별거 중인 아내와 밀당을 시도하면서 양다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사는 그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서 1966년부터 67년까지 2년동안 영화음악 두 곡을 제외하고 아무 작품도 쓰지 못했다. 새로운 반전은 1968년에 찾아왔다. 시인 오라시오 페레르를 만나 5중주단도 해체하고 함께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오페레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María de Buenos Aires)'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작업을 이어갔지만 1968년 5월의 초연은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 4개월만에 막을 내렸고, 피아졸라는 빚더미에 올라앉는
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피아졸라는 새로 창작열을 얻고 5중주단을 부활시키고 6중주단도 새로 결성한다. 1968~69년에 관현악 편성으로 작곡한 '탕가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변주곡 (Tangazo: Variations on Buenos Aires)'이 미국 워싱턴 D.C.에서 초연되었다. 페레로와도 계속 함께 작업해 '바친의 젊은이', '광인을 위한 발라드' 등의 히트곡을 작곡한다. 특히 '광인을 위한 발라드'는 4달만에 15만장을 팔아치우고 전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린다. 이러한 활동은 1971년까지 이어졌고, 페레로와 함께 '전주곡 3부작'을, 단독으로 순수 기악곡인 모음곡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Cuatro Estaciones Porteñas)'를 작곡한다. 그러던 중 1971년,
피아졸라는 돌연 5중주단을 해체하고 유럽으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빡빡한 공연 일정을 명목으로 5개월간 파리로 여행을 떠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새 앨범 '퀸텟을 위한 협주곡(Concierto para quinteto)'을 작곡하고, '콘훈토 9'(이하 9중주단)이란 9중주단을 결성한다. 이 밴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청의 지원을 받고 1971년 첫 해외 공연과 72년 앨범녹음을 하며 성장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시 정부와의 계약 이행을 위해 지방 순회공연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1972년 4,5월에는 해외 연주여행을 떠나 이탈리아, 브라질에서의 공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당시 피아졸라는 자신의 콘훈토 9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인 나
카르 협주곡(Concierto de Nácar para nueve tanguistas y orquesta), '바르다리토(Vardarito)', '더블 A의 비가', '숨', '3×4'12, '히피에게 보내는 송가', '40에의 오마주', '9 시리즈', '코르도바의 오마주' 등 명곡을 쏟아내는 등 리즈시절을 찍었다. 그러나 9중주단은 시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면서 와해되었고, 피아졸라는 다시 5중주단으로 복귀한다. 밴드의 와해, 복귀 후의 평론가들의 혹평,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돌아온 페론주의 정권으로 인한 혼란 등이 겹치면서 피아졸라는 정신적으로 흔들린다. 거기에 국내 무대도 줄어들면서 피아졸라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받는다. 하지만 애인 아멜리타의 반대로 이주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곡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거의 아무 작품도 쓰지 못하였고, 결국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다행히 목슴을 건지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어 1972년 10월 퇴원하지만, 피아졸라는 이 일이 있은 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Tine Thing Helseth - Libertango (March 8th, 2013)
(타이닝 헬세스 - 리버탱고 (2013년 3월 8일)
▼
Written by Astor Piazzolla, arranged by Øivind Westby. Orchestra conducted by Halldis Rønning. From the 100th anniversary celebration concert for women's right to vote (in Norway), at Kilden Theatre and Concert Hall in Kristiansand, March 8th, 2013.
Stemmerettsjubileet, festkonsert i Kilden.
작사: 아스토르 피아졸라,
편곡: 오이빈드 웨스트비. 할디스 뢰닝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2013년 3월 8일 크리스티안산의 킬덴 극장 및 콘서트 홀에서 열린 여성 투표권 100주년 기념 콘서트(노르웨이). 스템메리트 쥬빌레에, 페스트콘세르트 킬덴.
피아졸라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후 이주를 결심한다. 1973년 이탈리아인 에이전트 알도 파가니와 계약 후 같은 해 3월 이탈리아 TV 출연을 시작으로 유럽을 주무대로 삼는다. 이 당시 방송용 소곡들을 주로 작곡하였는데, 그것들이 바로 '리베르탱고', '메디탱고', '트리스탱고', '비올렌탱고', '아멜리탱고' 등의 걸작이다. 그 외에도 브라질 순회 공연, 색소폰 연주자 제리 멀리건과의 공동작업 모두 성공하면서 피아졸라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1975년에는 칸 음악제에서 '로큰롤은 한계에 달했다. 영국인들의 침략도 이제 끝이다.'라며 설레발을 쳤을 정도. 또한 에바 페론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기획했으나, 안타깝게도 어떤 영국인 양반이 초
대박 뮤지컬로 먼저 침을 발라놓는 바람에 시망. 그는 후에도 그 작품을 보고 재미있다고 호평하면서도 '내가 만들었으면 더 잘 만들었을거다'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나…. 이탈리아 외에도 피아졸라는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을 돌아다니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75년 로마시에서 황금금수상을 받는 등 영예를 누린다. 그러나 고국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정이 악화되면서 향수병이 도졌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다시 이주를 계획한다. 그러나 영 좋지 못한 일이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오랜 세월 반 파트너, 반 연인 관계로 지내던 아멜리타와 결별한 것. 이 일로 피아졸라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녀의 이름을 딴 곡 '아멜리탱고'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음악'으로 개명하고 그녀의 이름을 자기 앞에서 꺼내지 못하게 하는 등 그녀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다른 한 편으로 그의 오랜 맞수인 트로일로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모음곡 '트로일로(Suite Troileana)'를 작곡했고, 이 작품이 그의 영화 음악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Il pleut sur Santiago)', '뤼미에르(Lumiere)'와 함께 그 당시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75년 중반에 들어서서 피아졸라는 다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전자 음악에 도전한 것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의 전자음악과 재즈의 퓨전에 영향을 받은 그는 신시사이저와 전자 악기를 이용한 실험을 하였고, 1975년 9월에
는 아르헨티나로 귀국해 새로 전자 8중주단을 결성한다. 신시사이저, 전자 오르간, 일렉 기타 멤버들을 포함하고 즉흥 연주를 허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 이 8중주단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보수적인 기존 팬들로부터 거하게 욕을 퍼먹기도 했지만,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피아졸라도 크게 만족했다. 이후 북미, 유럽을 돌며 연주와 창작에 전념하던 피아졸라는 1977년까지 전자음악, 락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500 모티바시오네스' 등의 명곡을 발표했지만, 1977년을 기점으로 다른 멤버와의 갈등 등으로 8중주단 역시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1978년에는 그 해 조국에서 거행된 월드컵을 위해 작곡을 하였으나 그 해 월드컵은…. 결국
그 곡들은 모두 월드컵과 관계 없게 제목갈이를 해야 했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8중주단을 포기하고 5중주단을 새로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만들고 깨지고 만들고 깨고…… 새로운 5중주단은 전자음악을 버리고 다시 어쿠스틱한 실내악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안티가 많았지만 해외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5중주단 활동기 동안 '친친'네?, '비유야'등을 작곡하며 작곡가로서도 건재함을 드러냈다. 1979년 초연된 반도네온 협주곡 (Concierto para bandoneón y orquesta)과 1980년 초연된 반도네온과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가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1980년, 다시 해외 활동을 위해 파리로 다시 이주, 5중주단과 함께 유럽 순회 공연을 하는 등 공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80년대 후반에는 영미권 활동에 주력하여 몽트뢰,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장르에서 환영받는 명실상부한 국제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5중주단을 거의 갈아넣다시피한 고된 일정을 소화, 88년 심장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5중주단도 해체하고 회복 후 6중주단을 다시 결성한다. 또…. 이 당시의 음악은 건강 악화의 영향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6중주단은 이전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90년대에도 그
러리라고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팬들도 믿었다. 1990년 7월 3일 그리스 아테네의 헤로데스 아티쿠스 야외 음악당에서 그리스 작곡가이자 지휘자 마노스 하지다 키스가 지휘한 크로마톤 오케스트라와 생애 마지막이 된 공연을 가진 뒤 파리로 돌아와 다음 공연을 준비하던 피아졸라는 8월 5일 샤워 중 뇌출혈로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어 쓰러졌고, 결국 급히 치료를 받은 뒤 귀국해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비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폐렴과 장출혈 등의 질환까지 겹치면서 1992년 7월 4일에 향년 71세로 타계했다. 장례 후 유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평화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끌었던 밴드의 일원이었던,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인 Daniel Binelli는 말했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표현하는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피아졸라는 반도네온으로 표현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의 음악, 바로 그 자체였다.
André Rieu - Adiós Nonino (Farewell Father)
(앙드레 리우데자네이루 (이별의 아버지)
▼
André Rieu, Carlos Buono & The Johann Strauss Orchestra performing Astor Piazzola's Adios Nonino (Farewell, granddad) live in Maastricht.
안드레 리외, 카를로스 부오노,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가 마스트리히트에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를 공연합니다.
Adios Nonino / Astor Piazzolla
피아졸라가 뉴욕으로 이주해 살아가는 동안, 일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고 오히려 경제적으로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탱고댄스쇼 반주를 하고 있을 만큼 곤궁하던 중, 1959년 10월 무도단과 함께 푸에르토리코를 순회하며 아버지 비센테의 타계 소식을 접하게 된다. 여기서 아버지 비센테의 중간 이름이 노니노'Nonino'이고. 아디오스 'Adios'는 스페인어로 작별을 뜻하는 말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피아졸라는 고국으로 돌아갈 경비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비통한 심정을 노래로 지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노니노에게 바친 노래가 바로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 . 안녕 아버지')라고 한다.
현대 음악가 "존 애덤스"가 피아졸라의 음악을 일컬어‘어떻게 탱고 같은 작은 형식 속에 그토록 깊고 넓은 표현’을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존 애덤스는 또 피아졸라의 음악에 대해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빌려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흠집 많은 인간의 혼란, 땀과 연기에 찌든, 백합향기의 오줌냄새를 맡는, 음식자국과 죄에 물든, 낡은 옷처럼, 주름진 육신처럼, 감시, 꿈, 불면, 예언, 사랑과 미움의 말들, 어리석음, 충격, 목가, 정치적 신념, 부정, 의심, 긍정 따위로 순결을 잃은 영혼"
Piazzolla - Boda Real, Maxima Zorreguieta
(피아졸라 - 왕실의 결혼식, 막시마 조레기에타)
▼
https://youtu.be/AYU-n7Ket-c
2002년, 네덜란드 왕세자인 빌럼 알렉산더르와 아르헨티나 출신의 부인인 막시마의 결혼식 때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가 연주된 슬픈 사연이 있는데, 네덜란드 왕자 빌럼 알레산더르와 우연히 만나 결혼하게 된 '막시마 소르기에타'(Maxima Zorguieta)란 아르헨티나 여인의 사연이다. 아버지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고위공직자였다는 이유로 네덜란드 왕가에서 결혼을 반대하게 되나 왕자는 끝까지 결혼 허락을 구합니다. 결국은 네덜란드 왕가에서 여자측 아버지는 결혼식에 불참한다는 걸 전제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고 하며 결혼을 겨우 허락합니다. 왕가의 배려로 아버지없이 결혼식을 올리는 막시마를 위해 탱고 악단의
'아디오스 노니노'축가를 마련합니다. 막시마는 이 축가를 들으며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 곡이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푸에르토 리코 공연 중 아버지의 임종소식을 듣고 뉴욕으로 돌아와서 슬픈 마음을 가눌길 없어 몇 시간 만에 눈물로 만든 아버지를 위한 곡임을 상기하면 황태자비 막시마의 마음에 가슴 깊이 다가가는 공감이 있었을 거라 여겨집니다. 또한 이 곡은 피겨의 여왕 김연아의 마지막 공연 무대곡으로 '소치 Sochi 올림픽'에서‘이별’이라는 컨셉을 잡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별을 고하는 느낌을 아주 세련되고 감각적이게 풀어나가며 피겨 스케이팅 생활의 매듭을 지었는데, 김연아가 공식 무대에 안녕을 고하기에 최고의 곡이었던 것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Libertango / Astor Piazzolla 1974
탱고 댄서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곡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Grace Jones가 부른 I've Seen That Face Before의 원곡이기도 한 이 곡은 말 그대로 일반적인 탱고가 아닌 현대적인 비트감이 넘치는 자유스러운 형식을 보여준다. 피아졸라의 74년도 앨범 'Libertango'에서 그는 그의 Nuevo Tango(New Tango)에서 갖은 실험적인 기법을 동원한 탱고를 선보이고 있는데(드럼, 플륫, 일렉트릭 기타, 일렉트릭 베이스, 하몬드 올갠 등 락적인 구성을 보여준다고 해도 좋겠다.) 그 실험에 일종의 도화선이자 정점 같은 곡이라고 생각한다. 카바레에서 탱고를 연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피아졸라와는 달리 블랑제는 탱고야말로 피아졸라 음악의
근원임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만들도록 격려했다. 그제서야 오랜 방황에서 돌아와 자신의 뿌리를 갖게 된 피아졸라는 그 뿌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대통령은 바뀌어도 좋습니다. 대주교나 추기경, 축구선수... 다른 것은 다 바뀌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탱고는 다릅니다. 탱고는 있던 그대로 놔둬야지요." 그는 음악가로서의 그의 인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음악은 여자 이상이지요. 여자와 결혼을 한 다음 이혼할 수 있지
만 음악은 그렇지 않지요. 한 번 결합을 하고 나면 평생동안 영원히 사랑하고 땅에 묻힐 때도 함께 묻힙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직선적이고 솔직하다. 그는 감상에 빠지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현학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이라면 반대하겠지만, 나는 확신한다. 그는 당신을 감동시킬 것이다." 모든 것이 비틀거리고 꼬여 있는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무엇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저 슬프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탱고가 그렇고 그것을 만든 피아졸라가 그렇다.
다음은 기돈 크레머의 피아졸라 음악에 대한 감상평이다.
"한 번 경험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힘을 가진 에너지가 있다." "처음 피아졸라가 연주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은 충격이었다. 거기에는 에너지의 강한 전율이 있었다. 한 번 경험하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의 힘을 가진 에너지였다. 그 힘은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확장시키고, 존재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게 하며,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관능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무조건 대립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피아졸라는 바흐를 매우 존경했고 아마 오늘날이었다면 바흐도 피아졸라를 그 못지않게 존경했을 것이다. 나는 바흐의 작품에서 철학자, 또는 사제로서의 그가 아니라 지금이라면
우리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고 있을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본다. 나는 피아졸라의 음악을 지나치게 관능적인 소리로 포장한 몇몇 싸구려 음반을 알고 있다. 내게 있어 그것은 마치 바흐의 음악을 기계적으로 들려주는 것과 똑같이 낯설고 어색하다." "피아졸라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내게 특별하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언제나 특별하지만 음악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무엇보다 특별하다. 음악과의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전에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하게 하고 현대 음악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내게 있어서 음악이란 단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져야 한다는 것은 아주 본질적이다." / 기돈 크레머
Astor Piazzolla - Libertango
(아스토르 피아졸라 - 리베르탱고)
▼
Lyrics
그러니까 만져봐
So touch
가까이 다가와
Come closer
그러니까 만져봐
So touch
가까이 다가와
Come closer
우리 사이의 불
The fire between us
키스해줘
Kiss you
그리고 너를 만져봐
And touch you
나는 당신을 원한다
I want you
그러니까 만져봐
So touch
당신을 생각합니다
Thinking of you
Moscow City Symphony "Russian Philharmonic". Phonograph Jazz Band. Conductor: Honoured Artist of Russia Sergey Zhilin. Soloists: Yuri Medyanik (bandoneon), Rodion Petrov (violin). Pair of dancers: Inna Svechnikova, Dmitry Chernysh. Moscow International House of Music, Svetlanov Hall. September 30, 2010
모스크바 시 교향곡 "러시아 필하모닉". 축음기 재즈 밴드.
차장: 러시아의 예술가 세르게이 지린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솔로 가수: 유리 메드야니크(반도네온), 로디온 페트로프(바이올린).
댄서 쌍: 이나 스베치니코바, 드미트리 체르니쉬. 모스크바 국제 음악원, 스베틀라노프 홀. 2010년 9월 30일
Liber
번식과 성장을 주관하는 전원의 신이며, 여성신은 리베라(Libera)이다. 리베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로마신화의 바카스)와 동일시되며, 리베라는 데메테르 또는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들 신에게 봉헌하는 축제를 리베리아(Liberia)라고 불렀으며, 해마다 3월 17일에 거행되었다. 이 축제는 일종의 성인식 같은 성격도 지녀서, 성년이 된 소년들이 처음으로 어른옷을 입는 날이기도 하였다. 리베르는 로마 제국에서 명주(名酒)로 이름
났던 팔레르노 포도주에 얽힌 신화와 관련이 있다. 리베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캄파니아 지방을 지나가다가 마씨코산 기슭에 사는 팔레르누스라는 늙은 농부의 집에 들렀다. 팔레르누스는 보잘것없고 지저분한 차림의 리베르를 정성껏 환대하였으나, 가난하여 대접할 것이 별로 없었다. 리베르는 우유를 포도주로 바꾸었고 이것을 마신 팔레르누스는 잠이 들었다. 팔레르누스가 깨어나 보니 산기슭이 온통 포도나무로 뒤덮여 있었으며, 이로부터 팔레르노 포도주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Grace Jones - I've Seen That Face Before (Libertango)
(그레이스 존스 - 나는 그 얼굴을 전에 봤어 (리베르탱고)
▼
Lyrics
이상해, 나 그 얼굴 본 적 있어
Strange, I've seen that face before
그 사람이 내 문 근처에 매달려 있는 걸 봤어
Seen him hanging 'round my door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Like a hawk stealing for the prey
낮을 기다리는 밤처럼
Like the night waiting for the day
이상해, 그 사람이 집에 가는 동안 나를 따라다녀
Strange, he shadows me back home
돌 위에 발자국 소리가 울려퍼진다
Footsteps echo on the stones
비오는 밤, 하우스만 대로(Hausmann Boulevard)
Rainy nights, on Hausmann Boulevard
바에서 흘러나오는 파리 음악
Parisian music drifting from the bars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Tu cherches quoi, rencontrer la mort?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Tu te prends pour qui?
당신도 인생을 싫어합니까?
Toi aussi, tu détestes la vie?
바와 레스토랑에서 춤을 추다
Dance in bars and restaurants
원하는 사람과 함께 집으로
Home with anyone who wants
이상하게 그 사람이 거기 혼자 서 있네
Strange he's standing there alone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나를 뼛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Staring eyes chill me to the bone
그의 방에서 조엘과 그의 여행가방
Dans sa chambre, Joël et sa valise
그의 옷을 살펴보자
Un regard sur ses fringues
벽에는 사진이
Sur les murs, des photos
후회 없이 멜로 없이
Sans regret, sans mélo
문이 꽝 닫혔어요
La porte est claquée
조엘이 갇혔어요
Joël est barré
Grace Jones는 가수이자 배우,슈퍼모델이다. I've Seen That Face Before는 1981년 발표한 5번째 앨범 Nightclubbing에 수록된 곡으로, 아르헨티나의 탱고 작곡가인 Astor Piazzolla의 탱고곡인 'Libertango'를 레게 음악으로 편곡, 가사를 붙인 곡이다. 빌보드 차트에는 진입하지 못했으나 벨기에 싱글 차트에서 1위, 프랑스와 네덜란드 챠트 4위를 차지하며 히트곡이 되었다. 007 시리즈인 영화 [A View To A Kill]에 출연해서 강렬하고 인상적인 외모로 주목받았던 그녀는 모델로서도 꽤 인기가 있었다. 이 곡은 1988년 개봉된 Roman Polanski 감독, Harrison Ford 주연의 스릴러 영화 [Frantic (실종)]에서 해리슨 포드가 째즈바에서 여인과 춤추는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곡이기도 하다.
Richard Galliano - Oblivion
(리차드 갈리아노 - 오블리비언)
▼
Oblivion (망각) / Astor Piazzolla
이 음악은 1984년 이탈리아의 마르코 벨로치오 Marco Bellocchio 감독이 제작한 영화 "엔리코 4세 Enrico IV"를 위해 작곡 연주된 음악으로 이후 특히 기돈 크레머 Gidon Kremer와 리차드 갈리아노 Richard Galliano의 명연주 때문에 더욱 음악세계에서 애청곡이 되어 버린 너무도 유명한 피아졸라의 대표곡입니다. 영화 "엔리코 4세 Enrico IV"는 위대한 셰익스피어 Shakespeare의 대표적 사극《헨리 4세》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원작은 1, 2부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탱고와는 달리
피아졸라의 탱고는 사람들이 듣는다. 나의 한가지 후회는 피아졸라를 생전에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탱고의 영혼"녹음을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와서 그의 동료 연주가들과 함께 연주하게 된 것은 그와 가까워지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현대의 기술 덕분으로 피아졸라와 같이 연주도 하게 되었는데. 죠르쥬 깔란드렐리가 나를 위해 작곡해준 "탱고의 회상"에서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연주 일부분을 삽입함으로써 그와 함께 연주하게 된 것이다. 지금 나는 피아졸라가 어떻게 호흡하였는가를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의 결정체가 '탱고의 영혼'이다."
- Yo-Yo MA
https://cafe.daum.net/yswlsj4812
본문은 Chrome 과 글자 크기 110%에 최적화 돼 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