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하는 삼국지 이야기를 두고 제 잘난척이라고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두가지인데, 삼국지에 관해서는 상품화되고 이미지 메이킹으로 다듬어진 잘못 표현된 인물과 역사에 대해 되도록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는 게 이유입니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군주와 재상은 단연 유비와 제갈량입니다. 제 생각에는 외려 헌제-조조가 은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모범적인 케이스라면 전자겠습니다. 그런데 재상이 늘 군주와 화합하는 것은 아니지요. 알콩달콩 티격태격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일도 벌어지는데 전체 역사를 조망해서도 상당히 독특한 관계가 동오의 손권과 장소에게서 엿보입니다.
가장 단적인 것이 자치통감에 실린 이 일화입니다.
"명제 태화 3년(229년)
여름, 4월 병신일(13일)에 오왕이 황제에 즉위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쳐서 황룔이라고 하였다. 백관들이 다 모이자 오의 주군은 공로를 주유에게 돌렸다.(필주 : 이 일은 주유전의 마지막에 그 상세한 언급이 나옵니다.) 수원장군 장소가 홀을 들어서 공덕을 기리며 찬양하려고 하면서 아직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의 주군이 말하였다.
만약에 장공의 계책대로 하였다면 오늘에는 이미 밥 빌어먹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오.
장소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땅에 엎드려서 땀을 뻘뻘 흘렸다."
"장소가 늙고 병들어서 자기의 관직과 지위와 거느리던 부대를 반환하니 다시 벼슬을 주어 보오장군으로 삼고 반열은 삼사(삼공) 다음에 서게 하였으며, 누후로 고쳐서 책봉하고 식읍을 1만호로 하였다.(필주 : 한의 건국공신인 평양후 조참이 받은 식읍이 1만 8백호입니다.)
장소는 조회할 때마다 말하는 기세가 웅장하였고 의로운 모습이 얼굴에 나타났으며, 일찍이 직언하여 뜻을 거역하고서는 중간에 나아가서는 알현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 한의 사신이 와서 미덕을 말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오의 주군이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장공을 이 자리에 앉게 하였더라면 저 사람은 굽히지 않고는 말을 못하였을 것이니 어찌 다시 스스로 자랑하였겠는가!
다음 날 환관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안부를 물었다. 이를 계기로 장소를 보자고 청하자 장소가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피하여 사죄를 하니 오의 주군은 무릎을 꿇고 그것을 말렸다. 장소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옛날에 태후와 환왕(손책)께서 이 늙은 신하를 폐하께 부탁하지 않으시고, 폐하를 이 늙은 신하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리하여서 신하의 절개를 다하여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하고 있었으나 저의 뜻이 얕고 짧아서 폐하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어리석으나 마음으로는 나를 섬기기 위한 것이었으며, 뜻은 충성을 더하다가 목숨을 끝낼 뿐입니다. 만약 이에 마음과 뜻을 바꾸어서 영광된 자리를 훔치고 폐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일은 신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의 주군이 사과하는 말을 하였다."
이 일화는 평상시에 장소가 자신의 공적과 지위를 높다고 여겼으나, 손권이 이전의 그의 실책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오나라의 인물다운 인물로는 장소를 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손권의 입장에서 장소는 애증의 대상인데, 실제로 장소는 적벽에서 화친을 주장한 흠을 제하면 오나라 최고의 공신입니다.
손가의 세력은 손책이 죽은 뒤에 중심을 잃고 흐트러졌었는데, 손책의 고명을 받은 장소가 손권을 손책의 다음 후계자임을 공표하고 그를 주군의 예로 받들어 모심으로써 군신간의 기강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동시에 손책이 애써 이룩한 공업이 흩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당시에 손권을 주군으로 생각하던 자가 매우 드물어 말을 하는데 있어서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기술이 주유전에 나오는데, 주유와 장소는 손권이 대업을 같이 할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그를 받들고 힘써 매진한 것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즉위식에서 저리한 손권의 입장도 이해가 가나, 무려 20년전의 일을 들추어 문무의 대신들 앞에서 장소를 공격한 것은 그의 도량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사실 조조와 싸우자 외친 것도 노숙, 주유와 오나라 강맹한 무장들을 제외하면 모두 마찮가지였던 일이었습니다. 일종의 권위확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여하간 방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일 이외에 가장 큰 사건은 장소의 집 문에다가 점토를 바르고는 불을 지른 것이 있습니다. 평소에 강직하고 직언하는 장소의 성품이 군주인 손권을 자주 거스르고 비위를 상하게 한 이유가 가장 크지만, 이 일도 건국공신이자 노신인 장소에 대한 처사로는 상식 밖의 일입니다.
손권이 그 오랜 재위기간동안 나라를 보존했었던 이유는 자신을 절제하며 뜻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항상 주위의 대신들에게 협의를 하고 고쳐 생각했기 때문인데, 말년에 손권이 폭주한 까닭으로 하나 꼽을 것이 장소같은 인재가 매우 드물어지며 대신들이 자신들의 밥그릇만 챙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손권을 제어할만한 상국도 없었고, 그보다 나이든 대신들도 살아있지 않았습니다. 주유와 노숙은 일찍 죽었고, 장소와 제갈근도 말년에는 병사하여 자취를 감춥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육손이었는데, 그는 손권과 동년배였고, 후기에 들어서 손권이 육손에게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손권이 그 말년에 가 회남을 얻는데 굉장한 의욕을 보이는데,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가 통치했던 50년간 강남의 경제력은 후한말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했으며, 여기에는 내치와 온건적 외교에 힘쓴 장소의 힘이 컷습니다. 그러나 형으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은지 매우 오래됐음에도 천하 13주 중 고작 하나의 주를 얻는데 그쳤으며, 육손이 군사를 맡아본지 20년이 지나도록 한치의 땅도 얻은 게 없었습니다. 또 천하의 패권에서 점차 멀어지는게 보였죠. 손권이 죽음에 이르러 제갈각에게만 고명한 것도 따지고보면 오나라에 패권적 인재가 드문 것에 절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아마 손권의 후대에서 손책과 같은 이가 등장했고, 또 원로중에 장소와 같이 수도를 위무하고 병참을 확보할 인재가 있었다면 보다 더 적극적인 쟁패의 길을 걸었을 겁니다. 비록 그게 가정으로 끝나버린 역사이지만 말이죠.
Ps.장소가 언급한 저 "부탁"받았다는 이야기가 정사 배주에 있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나라를 넘겨주겠다는 것과 매우 유사한데, 손책이 죽음에 이르러 장소를 불러놓고 그대가 나의 일을 뒤이어 받아도 좋다고 말한 것이 그렇습니다. 우연치고는 미심쩍은 일이지요.
그래서 알고봤더니, 오가 촉한과 수교를 맺기 위해 사신을 교환하다가 오의 사신이 유비와 제갈량의 일화를 전해듣고는 이를 오나라에 이입했다는 것입니다. 호족의 연맹에 가까웠던 오나라가 군왕인 손씨의 권위가 호족보다 높게 위치하도록 꾸몄다는 게 이유입니다. 배주가 사실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본래 유비와 제갈량의 오리지날인 것이 손책과 장소가 원본인 것으로 바뀌는 게 재밌는 일화입니다. 기록의 신뢰도에서는 정사나 배주가 더 높습니다만, 덧붙여진 이 일화도 의미가 있어 보였습니다.
첫댓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가 유비쪽 중심으로 삼국지를 읽어서 잘 몰라서 물어보는건데요, 손권이 막판에 어떤 폭주를 했나요?
황태자인 손등이 요절해버립니다.(뭔가 씌인 게 틀림없어요.-_-) 이후 황위 후계를 두고 2남과 4남이 다투는데 그 과정에서 붕당을 조성한 이들을 모조리 주살합니다. 육손도 이 후계다툼에 관해 상소를 올렸다가 손권의 답장을 받고 분사합니다. 제 생각에 가장 잘못한 것은 황태자 손등의 죽음을 이유로 태자사우라고 불리던 중신들의 아들을 죽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소의 아들, 고옹의 아들도 있었는데 이 인재들을 죽입니다. 이밖에 우번이 술자리에서 그를 거슬러 눈여겨 두었다가 죽였으며-제갈근등이 말렸었는데 좌천시켰다가 죽입니다.-육손과 더불어 군략에 밝았다는 주거라는 인물도 죽입니다. 주거는 후계다툼으로 기억되네요.
덧붙여 적으면, 오나라 후기에 인재난은 촉한에 못지 않습니다. 삼국이 정립된 229년 이후부터 생각하더라도 장소, 고옹, 제갈근, 반준, 육손, 주연, 손소, 보즐, 여대, 능통, 주환, 서성, 우번, 여범등 차례로 하직하며 손권이 죽을 때는 문무에 걸쳐 인재라고는 과거 비장에 불과했던 정봉, 수춘 함락에 공적이 있는 전종, 산월토벌의 공적이 있는 제갈각, 육손의 족자인 육개와 친자인 육항등을 제하면 내세울만한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버립니다.
후계 다툼으로 육손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그렇지만 그 전에 여일이라는 간신배를 중용했던 것도 폐해가 컸죠. 오죽했으면 반준같은 사람은 이래저래 안되니까 자신이 살인범으로 처벌받는 한이 있어도 여일같은 놈은 연회장에서 죽여버리겠다고 단언했을정도... 몇몇 신하들의 이런 피나는 노력 덕에 결국 여일은 숙청되지만 이때부터 이미 손권의 노망끼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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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에 관한 책을 여러권 읽은 것과, 네이버에 삼국지 카페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게 많습니다. 집에 두고 있는 책은 없고-워낙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소유하기 힘드네요.- 생각날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는데 요새는 자치통감을 다시 보는 중입니다. 네이버 카페는 얼마전에 삼국지 인물들 얼굴은 이래야 했다고 한 그 자료가 나온 곳입니다. 강호동, 유재석 얼굴등도 믹스해놓은 게 있는데, 카페 이름이 도원결의인가 합니다. 네이버 삼도라고 하면 유명하다고 그곳 사람들은 말하더군요.
배송지가 주석을 달기 위해 참고한 서적이 306권이라고 들었습니다. 파성에 그에 대해 적어놓은 게 어디 있을겁니다. 근데 그걸 다 읽을 필요는 없겠고, 지금 읽고 있는 자치통감과 김원중분이 번역한 정사와 배주만 읽어도 됩니다. 전자는 편년체 사서의 대표작이고, 후자는 기전체 사서의 대표작이니까요. 자치통감은 삼국지 자치통감이라고 상하권 각기 600페이지 책이 있고, 삼화라는 출판사에서 현재 계속 번역하고 있는 자치통감 완역본이 있습니다. 완역본의 경우 시대별로 나눠져 있으니 7,8권만 사봐도 될 것 같네요.
저도 네이버 도원결의 까페 회원이에용 ㅎㅎ 잼난글 많습니다~ 삼국지 게임때문에 판곳이지만 ㅎㅎ
감사합니다. 항상 즐겨읽고 있습니다. 근데 한가지, 소설에선 적벽대전 - 이릉전투에 이르는 오의 인재들의 후기를 하나도 다루고 있지 않더군요. 특히나 오의 인재들은 거의 지나가는 식으로밖에 성격이나 공적등이 묘사되어 있지 않은데요. 그 부분을 다음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 삼국지를 너무 좋아해서 게릭님의 삼국지이야기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_+ 저도 손오를 좋아하는데, 오나라 후기의 인재난.. 정말 끔찍한 수준이죠. 그나마 제갈각 역시 상당히 단명한걸로 알고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장소는 더 크게 쓰여질 수 있는 인물임에도 손권의 도량이 장소같은 인물을 포용하기에 너무 부족했죠. 그렇게보면 정말 손책의 요절이 더더욱 안타까운...
진수의 평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지요. 공감합니다.
그래도 하나 남겨두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이 어찌 한쪽에서의 허물만으로 틀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서에도 등장하고 통감에도 나오지만 황제인 손권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장소의 기풍에 압도당해 꺼려했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나마 손권이었기에 장소가 그 명예를 남길 수 있었을 지 않을까 합니다. 원소의 아래에 있었다면 전풍의 짝이 되었을 지 모르고, 조조의 비위를 거슬린 사람으로 목이 남아난 문신도 없는 만큼 손권에게 적합한 재상이었을거라 봅니다. 손권이 오랜기간 통치하면서 그 폐단이 말년에나 등장하는 것도 장소가 있고없고의 차이가 클것입니다. 여일의 일도 장소사후의 사건이고요.
역시나 비스게지식인의 위력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