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머스, 나는 황금빛 숫자 5를 보았네, 1928년, 섬유판 위에 유채와 금박 등, 90.2 x 76.2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1920년 어느 날 밤, 미국의 시인이자 의사였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뉴욕시 9번가를 걷다 소방차의 엄청난 사이렌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어둠을 가르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새빨간 소방차가 지나가는데, 그 속도가 워낙 빠르고 거리가 가까워 차체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고, 다만 황금빛 차량 번호 ‘No. 5′만이 큼직하게 시야에 들어왔다가 진한 잔상을 남기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시인은 13행의 한 문장짜리 시를 지었다: ‘비와/ 불빛 가운데/ 나는 어두운 도시를 지나가는/ 강렬하게/ 움직이며/ 아무도 듣지 않는/ 징이 쨍그렁대고/ 사이렌이 울부짖고/ 바퀴들이 요란히 굴러가는/ 빨간/ 소방차 위에/ 황금빛/ 숫자 5를 보았네.’ 윌리엄스와 절친한 사이였던 화가 찰스 디머스(Charles Demuth·1883~1935)는 이 시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를 윌리엄스의 초상화라고 했다.
디머스는 어두운 배경을 사선으로 날카롭게 가르고 곳곳에 눈부시게 밝은 가로등과 환히 불을 밝힌 상점의 쇼윈도를 그려 넣어 화려한 도심의 밤기운을 표현했다. 그 가운데서 황금빛 숫자 ‘5′ 세 개가 마치 빠른 속도로 정면을 향해 돌진하듯 점점 크게 그려져 화면을 뒤덮었다. 나팔 모양 사이렌을 매달고 있는 새빨갛고 날카로운 형태는 거대한 소방차다. 숫자는 다가오고, 차량은 멀어지는 구성은 소방차가 지나간 뒤에도 요란한 사이렌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그 순간의 긴박함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뉴욕시의 소방차는 오늘날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귀를 찢을 듯이 크고 위협적인 사이렌을 울리며 거침없이 달린다. 물론 세계 어디든 소방차가 출동하면 재빨리 길을 터주는 게 의무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1963)는 과장된 상징주의를 배제하고 평면적 관찰을 기본으로 한 ‘객관주의’의 시를 표방하며 작품을 쓴 미국의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투철한 현실 인식과 인간미로 해체된 세계에 시적 통일을 줬다고 평가받는다. 뉴저지주(州) 러더퍼드 출생. 영국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系)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학부 졸업, 유럽에 유학한 후에 출생지에서 개업하였으며, 평생을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E.파운드 등과의 교유에서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아 초기의 시집 「신 포도 Sour Grape」(1921) 「봄과 모든 것 Spring and All」(1923)으로 신선한 즉물적 시풍을 확립하였다. 과장된 상징주의를 배제하고 평명한 관찰을 기본으로 한 ‘객관주의’의 시를 표방하였고, 시집 「브뢰헬의 그림, 기타」(1962)로 1963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또한 비근한 제재로 일상의 언어를 구사하여 장대한 서사시를 엮은 5부작 「패터슨 Paterson」(5권, 1946∼1958)은 특히 유명하여 비근한 제재로 일상의 언어를 구사하여 장대한 서사시를 엮어냈다. 미국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이 밖에도 「자서전 Autobiography」(1951)과 소설 「흰 노새 White Mule」(1937) 「In the Money」(1940) 등과 평론이 있다.
윌리엄스 시의 특징은 철저히 일상적인 미국어를 써서 이념에 의하여 사물을 희석하거나 과장함이 없이 일상생활의 주변사물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미국의 감수성을 미국적 화법과 영어의 리듬을 바탕으로 표현하려고 했기에 그의 시는 같은 시기의 모더니스트보다 오히려 이전의 프로스트, 휘트만의 시적 전통과 닿아있다. “관념이 아닌 사물로 말하라”(Say it, no ideas but in things)는 말은 윌리엄스 시의 모토이다. 다분히 사상주의적인 즉물시(卽物詩)를 고집한 그는 사상주의 시의 주창자인 파운드의 시론에는 동조하면서도 그의 시에 대해서는 결코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는 파운드나 T. S. 엘리엇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국적도 지방성도 없는 시, 그리고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한 시를 배격했다. 그는 시에서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contact)을 강조했고 대상과 직대면하여 감각으로 면밀히 검증한 사물들을 다루었다.
윌리암스는 그의 시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도덕이나 교훈 같은 것들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시에 녹아있는 그의 눈을 통하여 독자들이 현실(The Real)의 아름다움을 보기를 원했었다. 우리는 'no ideas but in things (관념이 아니라 사물에서)'라는 표현에서처럼 그의 작품관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사상주의(Imagism - 1912년경에 일어난 시의 풍조: 운율에 중요성을 두어 정확한 영상으로 표현의 명확성을 꾀함)의 영향을 받은 윌리암스는 이미지스트(사상주의 시인)의 여섯 가지 원칙을 충실히 반영하였다.
윌리엄즈는 난해한 실험파 시인으로 《기질》에서는 사상파의 기술을 사용했다. 그는 구어를 사용하여 일상생활을 솔직한 자유시로 읊었다. 그는 시에서 본질적인 것만을 캐려고 했다. 그의 것은 마치 한 토막씩 잘라 놓은 것 같은, 냉철하고 날카로운 시가 되었다. 그는 까다로운 사상파 시인이다. 그의 장편 서사시 《패터슨》의 명칭은 그의 고향에 붙인 이름인데, 윌리엄즈는 여기서 미국의 풍부한 일상생활을 미학의 결핍과 정서의 빈곤과 대조시키면서 묘사하고 있다.《패터슨 Paterson》에서 한 격언을 설명하면서 윌리엄즈는 “사물 속에서가 아니라면 아무런 개념이 없다. 시인은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의 문맥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이 나아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갖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지스트(사상주의 시인)의 여섯 가지 원칙은 1, 일상적 언어를 사용하되 반드시 정확하게 써야 한다. 모호하고 관습적인 언어는 배척한다. 2, 새로운 감정은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미 있어온 리듬을 모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미 있어온 감정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시를 위하여 싸운다. 시인의 개성은 전통적인 형식보다 자유시로서 더 잘 표현될 것으로 생각한다. 시에서의 새로운 운율은 새로운 사상을 의미한다. 3, 재재의 선택은 자유로워야 한다. 새로운 재제를 노래한 시가 반드시 새로운 예술은 아니다. 그 제재를 보는 눈이 새로워야 한다. 4, 명확한 사상(이미지)을 주어야 한다. 시가 철저하게 개별성을 지향하여야 하며, 절대로 모호한 일반성을 다루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5, 견고하고 명료한 시를 쓸 것. 모호하거나 불분명한 언급을 피할 것. 집중적 표현을 존중해야 한다. 6, 마지막으로 '압축'이 시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빨간 손수레(The Red Wheel-Barrow)/ 윌리엄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so much depends
upon(너무나 많은 것이 달려 있다)
a red wheel
barrow(붉은 손수레 바퀴에)
glazed with rain
water(광택을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들)
beside the white
chickens.(그 옆으로 지나가는/ 병아리들)
시인은 감정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인 사물만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작품의 내용도 지극히 단순하다. 마당 한편에 손수레가 놓여 있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 손수레 옆에서 하얀 병아리들이 놀고 있다. 하얀 병아리들 옆에 있는 비에 젖은 붉은 손수레는 시각적인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 작품은 고즈넉한 시골 마당의 한 광경을 묘사한 사상파 시이다. 그 손수레에 “너무 많이” 달려 있다.
이 작품의 요체는 “너무 많이”가 무엇을 지칭하는 가인데 일차적인 의미로는 손수레에 많은 짐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손수레는 보통 바퀴가 하나 있고 손잡이가 두개 있는 형태인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은 세워져 있지만 사용할 때에는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옆으로 흰 병아리들이 세상모르고 지나가고 있다. 손수레가 넘어지면 병아리들은 목숨이 위험하다. 세상만사가 이런 게 아닐까? 그러한 것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위태로운 사람들의 삶에 균형 유지가 필요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할 말 있어요(this is just to say)/ 윌리엄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1963년) - I have eaten/the plums/that were in/the icebox//and which/you were probably/saving/for breakfast//forgive me/they were delicious/so sweet/and so cold 내가 먹었어/냉장고 안에 있던/자두를//아마도/당신이/아침에 먹으려고/아껴둔 것이겠지//미안해/너무 맛있었어/아주 달고/아주 차가웠어
찰스 디머스(Charles Demuth·1883~1935)는 미국의 신비주의 화가이다. 사실적인 관찰과 입체파 추상화의 조합을 사용하여 꽃, 과일, 채소를 소재로 한 수채화를 많이 그렸다. 생동감 넘치는 색채, 기하학적 형태, 역동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작품에 "마법 같은 생동감과 거의 충격적인 감각"을 부여한다. 또한 초상화나 인물의 장면을 그렸는데, 종종 동성애적이거나 풍자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수채화 물감, 연필 스케치, 유화물감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력이 풍부하고 양식화된 이미지를 그렸다. 또한, 카페, 극장, 서커스, 목욕탕 등 다양한 배경으로 친구, 연인, 유명인, 사교계 인사들을 묘사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대형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산업 풍경입니다. 그는 현대 건축과 기계의 기하학적 형태, 날카로운 윤곽선, 평면적인 색채를 강조하는 정밀주의 스타일을 채택한다. 그는 미국의 도시와 농촌 환경을 진보, 힘, 아름다움으로 상징해 묘사한다. 비스듬한 각도, 극적인 조명, 글자를 사용하여 역동적이고 추상적인 구성을 만든다.
찰스 디머스(Charles Demuth·1883~1935), ‘…And the Home of the Brave’, 1931년. 출처: Wiki.
찰스 디머스(Charles Demuth·1883~1935), ‘칼라 백합(Calla Lilies)’, 1927년. 출처: Wiki.
출처: 조선일보 2024년 11월 05일(화)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Daum, 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