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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다른 편집이다!
유쾌한 인문학자로 돌아온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한마디로 ‘편집’이라고 정의한다. ‘에디톨로지(edit+ology)’는 ‘편집학’이다. 그러나 단순히 섞는 게 아니다. 그럴듯한 짜깁기도 아니다. ‘에디톨로지’는 인간의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편집 행위에 관한 설명이다. 즉, 즐거운 창조의 구체적 방법론이 바로 ‘에디톨로지’인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마우스라는 도구의 발명이 인간 의식에 가져온 변화를 중심으로, 지식과 문화가 어떻게 편집되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2부에서는 원근법의 발견이 가져온 공간 편집과 인간 의식의 상관관계를 다룬다. 3부는 심리학의 본질에 관한 부분으로, 심리학의 대상이 되는 인간, 즉 개인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는가 등을 살핀다.
저자 김정운
1962년 3월 27일 서울 태생으로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심리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는 명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니, 이런 거창한 프로필 따위는 다 잊어도 좋다. '김정운'은 팔뚝 굵은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상에 감사하며, 아침마다 그날 가지고 나갈 만년필 고르기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 거리의 망사스타킹을 보면 가슴이 뛰어 낚시가게 그물만 봐도 흥분하고, 자동차 운전석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목 놓아 따라 부르며 주책없이 울기를 좋아하는 사십 끝줄의 대한민국 남자다. 귀가 얇다 못해 바람만 불어도 귓바퀴가 귓구멍을 덮을 정도고, 한번 폭발하면 대로변에서 삿대질도 일삼는 욱하는 성격이지만, 한번 마음에 담아두면 며칠 밤 잠 못 자며 고민하는 소심남이기도 하다. 기업들이 강연 스케줄 잡기 가장 힘든 강사이자, 방송 매체 섭외 1순위인 그는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 '최고의 명강사'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노는 만큼 성공한다', '일본 열광', '휴테크 성공학' 등이 있다.
프롤로그 | 편집된 세상을 에디톨로지로 읽는다
PART 01.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01 왜 에디톨로지인가?
02 창조의 본질은 낯설게 하기다
03 지식권력은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
04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쥐 때문이다!
05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06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
07 편집 가능성이 있어야 좋은 지식이다
08 예능 프로그램은 자막으로 완성된다
09 연기력이 형편 없는 배우도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이유
10 클래식을 좋아한다면 절대 카라얀을 욕하면 안 된다
PART 02.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
01 관점의 발견과 서구 합리성의 신화
02 우리는 윈도(창문)로 세상을 개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03 원근법은 통제 강박이다
04 권력은 선글라스를 쓴다!
05 시대마다 지역마다 달라지는 객관적(?) 세계지도
06 공간 편집에 따라 인간 심리는 달라진다!
07 독일인들의 공간 박탈감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다!
08 19세기 프로이센 군대와 축구의 공간 편집
09 제식훈련과 제복 페티시
10 분류와 편집의 진화, 백화점과 편집숍
PART 03.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
01 개인은 편집된 개념이다
02 ‘나’는 내 기억이 편집된 결과다!
03 우리는 왜 백인에게는 친절하고, 동남아인에게는 무례할까?
04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편집될 뿐이다!
05 미국은 국가國歌로 편집되는 국가國家다
06 심리학의 발상지 독일에서 심리학은 흥행할 수 없었다
07 프로이트는 순 사기꾼이었다!
08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위대한 편집자였다!
09 항문기 고착의 일본인과 구강기 고착의 한국인
10 책은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니다!
에필로그 |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아주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유쾌한 인문학으로 돌아온 김정운의 신작!
에디톨로지Editology
(지식×편집=창조)
당신은 ‘변태’인가?
그렇다면 창조적 인간이다!
모래밭에 나체의 여인이 누워 있다. 풍만한 가슴은 두 팔로 감싸고, 배꼽 아래 그곳은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그곳’을 가린 ‘그것’은 손바닥만 한 아이팟이다. 당신은 그곳을, 아니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변태다!
쳐다본 게 변태가 아니라 안 쳐다본 게 변태라니, 황당한가? 억울해할 것 없다. 저자는 변태를 이렇게 정의한다. “창.조.적. 인간!”
생식기에 집중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을 가진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본능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자만이 남들과 다른,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시선은 곧 마음이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이 정의되고, 세계가 구성된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여태껏 살아온 방식이며, 이를 통해 자신만의 시각으로 저마다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익숙한 방식과 타성에 젖어 습관대로 사고하며 일상을 반복한다.
창조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것도 아니다. 창조는 기존에 있던 것들을 구성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의 결과물이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라는 뜻이다. 그 편집의 과정에 저자는 주목했다. 그리고 편집의 구체적 방법론을 이렇게 명명했다. 에디톨로지(Editology)!
왜 에디톨로지인가?
통섭, 융합, 크로스오버 등 기존에 에디톨로지와 유사한 개념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너무 세분화되어 서로 전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다. 거의 바벨탑 수준이다. 세상을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최소 단위로 나누고, 각 부분을 자세히 분석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근대의 해석학은 그 한계를 드러낸 지 이미 오래다.
오늘날 통섭, 융합을 부르짖는 이유는 이 낡은 해석학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통섭이나 융합이 아니고, 에디톨로지인가? 통섭이나 융합은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뭐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구체적 적용도 무척 힘들다.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가 그저 마주 보며 폼 잡고 앉아 있다고 통섭과 융합이 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픈 에디톨로지는 인간의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편집 행위에 관한 설명이다.”
편집의 시대가 왔다. 에디톨로지 하라!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편집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말이다. 21세기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그의 탁월한 능력 역시 따지고 보면 ‘편집 능력’이다.
아는 것이 힘인 시대는 지났다. ‘정보의 바다’에서 초딩 ‘지식인’들이 헤엄치는 세상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양질의 정보를 선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낼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지식 편집’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에디톨로지(edit+ology)는 이렇듯 편집을 통해 새로움을 창조하는 방법론이다.
·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마우스의 발명을 중심으로 하이퍼텍스트를 말한다. 도구의 발명이 인간 의식에 가져온 변화를 중심으로, 지식과 문화가 어떻게 편집되는가를 살펴본다.
·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
원근법을 중심으로 공간 편집과 인간 의식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관점의 변화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살펴본다.
·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
심리학의 본질을 말한다.
심리학의 대상이 되는 인간, 즉 개인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는가를 살펴본다
책속으로 추가
독일로 도망쳐 오기는 했지만, 당시 나는 역사의 맨 앞에 서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한국 사회의 대안을 제시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 하루아침에 역사의 가장 뒤꽁무니로 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긴 듯한 상실감과 자괴감에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한국적 상황에서 강요받았던 공부의 방향이 상실되자, 주체적 학습의 내용과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의 때늦은 질문이기도 했다. ‘사회Gesellschaft’와 ‘문화Kultur’의 개념적 차이에 관한 논의에 특히 관심이 갔다. 결국 ‘문화심리학’으로 내 공부 방향을 결정했다.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Was ist deine Theorie? 네 이론은 뭔가?”
면담 신청을 하고, 몇 달을 기다려 겨우 만난 지도 교수는 내게 물었다. 내가 펼쳐놓은 논문 계획서는 읽어보지도 않았다. ‘내 이론이라니?’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내 이론을 생각해본 적도, 내 이론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한국에서 겨우 학부를 마쳤을 뿐이었다. 그것도 매일같이 데모, 수업 거부, 시험 거부로 이어진 대학 생활이었다. 내 이론은 무슨!
이론은 학생이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도 교수는 이제 막 독일에 정착한 내게, 내 이론이 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없다고 했다. 당신의 이론을 배우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나가라고 한다. 석사·박사 논문을 쓰겠다는 학생이 어찌 자기 생각이 없을 수가 있느냐는 거다. 남의 이론 요약하는 것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했다. 스스로 제시하고 싶은 이론의 방향을 생각해서 다시 오라고 했다.
주체적 시선으로 공부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학문적 문제의식이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 주체적 관점이 분명해야 남의 이론을 흉내 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공부하는 방법부터 바꿔야 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저 대가의 이론을 이해하고 외우는 것만으로 내 이론 구성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 본문 83~84쪽
10년 가까이 최고의 시청률을 놓치지 않고 있는 MBC의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박명수와 유재석 사이의 대화다.
박명수: (어금니 꽉) “다음 달이면 부인이 출산하시지요?”
유재석: (무슨 소리) “다다다음 달입니다.”
박명수: “그럼 다다음 달에 출산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해골 그림)
(모함개그 되치기)
유재석: (못 참아) “지금 여기서 바로 저분 고소할 수 없습니까?”
(초반 치열한 신경전)
박명수와 유재석이 나누는, 불과 12초에 불과한 대화에 나오는 자막이다. 두 사람이 실제 나눈 대화는 이 자막의 절반에 불과하다. 두 사람의 행동에 대한 설명과 그림, 그리고 다양한 시각 효과가 실제 멘트보다 더 많다. 사람들은 그 많은 자막의 정보를 화면과 동시에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몰입한다. 외국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 산만하다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대화 중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자막의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인가? 박명수나 유재석일 경우도 있지만, 꼭 두 사람이 아닌 경우도 많다. 자막의 주체는 장면을 편집하는 PD일 수도 있고, 시청자일 수도 있다. 자막은 그 상황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일 때도 있고, 의성어나 의태어일 수도 있다. 요즘은 화려한 ‘CG’가 자막의 중요한 요소로 사용된다. 출연자의 얼굴에 땀이나 눈물을 그려 넣기도 하고,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거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기도 한다. 이같이 화려한 자막을 통해 시청자는 자막이 없을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서적 경험을 체험하게 된다.
<무한도전>이 그토록 오랫동안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자막의 힘에 있다. 자막은 PD의 영역이다. 물론 작가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영상의 편집과 맞물려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영역에 자막을 넣는 것은 전적으로 PD의 책임이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녹화한 화면을 오직 하나의 화면으로 편집해내야 하는 PD나 영화감독은 이 시대 최고의 편집자다. 뛰어난 에디톨로지적 능력을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제7의 멤버’로 불리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만드는 자막은 이제까지 우리가 봐왔던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토록 인기가 있는 거다.
- 본문 109~110쪽
여타 포털 사이트의 메모 프로그램이나 다양한 앱이 있지만 내 경험으로는 에버노트가 최고다. (분명히 밝히지만, 난 에버노트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은 적 없다.) 에버노트는 버그가 많다. 그러나 바로바로 업데이트 된다. 에버노트 개발자들의 마음이 급한 거다. 데이터 관리의 좋은 방법이 발견되면, 채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던져놓는 것 같다. 그래도 참을 만하다. 그만큼 좋은 프로그램이다.
에버노트는 내가 사용하는 모든 IT 기기에서 동기화시켜 사용할 수 있다. 남의 컴퓨터에 들어가 사용할 수도 있다. 급할 때 최고다. 웬만한 텍스트 작업도 큰 불편 없이 할 수 있다.
데이터 관리를 할 때 난 일단 자료를 계층적으로 분류해 저장한다. 에버노트의 각 ‘노트북’이 대분류로 나뉘어 있고, 각 노트북 안에 또 다른 하위 노트북들이 들어 있다. 그 계층구조가 3단계, 4단계까지 올라가는 복잡한 것도 있고, 한 단계에서 끝나는 간단한 것도 있다.
책, 잡지, 신문 등을 읽을 때 중요한 내용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갤럭시 노트의 ‘스크랩’ 기능으로 잘라내 저장한다. (갤럭시 노트의 스크랩 기능은 정말 최고다!) 키워드나 연관된 개념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층적 분류가 세밀해진다. 아날로그적 데이터베이스라면 나중에 감당 안 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에서는 다르다. 분류의 변신과 합체가 언제든 가능하다. 원고를 써야 할 때는 각 노트북과 노트북 안에 들어 있는 각 ‘노트’들이 재편집된다. 검색으로 각 데이터들을 불러내 새로운 분류를 만든다. 네트워크적 지식의 생성이다.
글 쓸 아이디어가 부족할 때면 이런저런 검색 놀이로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일부 살아남기도 하지만, 바로 지워버리는 경우도 많다. 복사본으로 만든 것이니 지워도 된다. 내 에버노트에는 현재 수천 개의 노트가 저장되어 있다. 이어령 선생과 대화하다 보니, 선생의 에버노트에는 1만 4,000개의 노트가 저장되어 있단다. 팔십 노인의 데이터베이스다. 정말 많이 부끄러웠다.
에버노트를 사용해 공동 작업을 하면 정말 효율적이다. 데이터 공유 기능을 이용해 자료를 서로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하면 시간만 절약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집단 지성’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눈으로 보게 된다. 지식 경영이란 이와 같은 구체적 데이터 공유를 통해 가능해진다.
- 본문 369~370쪽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멍하니 있을 때, 생각은 아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가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할 때가 있다. 그러고는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거꾸로 짚어나간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찾아냈을때, 자신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날아다녔던 생각의 범위에 놀라게 된다.
보통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순간이다. 보통사람은 어쩌다 겪는 ‘날아가는 생각’이지만, 천재에게는 일상이다. 천재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생각이 마구 건너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무지 쫓아가기가 어렵다. 내 가까운 후배, 넥슨의 김정주 대표가 그렇다. 한국 IT 분야의 3대 기업이라면 NHN, NC소프트, 넥슨을 꼽는다. 한방에 훅 가는 IT 업계에서 그렇게 성공적으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정주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함께 대화하다 보면 자주 황당해진다. 이야기가 막 건너뛰기 때문이다. 한참을 떠들다 보면 처음 주제가 뭐였는지 아예 까먹는 경우도 많다. 말끝도 대충 얼버무린다. 생각이 날아다녀서 그렇다. 천재의 생각은 날아다닌다. 그러나 그 날아다니는 생각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김정주는 자신의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내 구체화했다. 바로 그것이 그의 특별함이다. 김정주의 아날로그적 삶도 날아다닌다. 전화하면 어제는 서울, 오늘은 홍콩, 내일은 일본, 스페인, 남아공, 뉴욕이다. 사는 곳은 제주도다.
날아다니는 생각은 천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라이’의 특징이기도 하다.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천재는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또라이는 그렇지 못하다. 생각이 그냥 계속 날아간다. 자신의 생각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마구 날아간다.
오늘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보통사람들도 천재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이 일부 천재들에게만 부여한 ‘날아다니는 생각’을 이제 보통사람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로 ‘쥐’ 때문이다. 그건 컴퓨터의 ‘마우스’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생각을 날게 하는 도구를 갖게 된 것이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관심 있는 곳을 클릭하면 생각은 바로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방금 전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다. 이건 엄청난 혁명이다. 그런데 아무도 마우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클릭하면 날아가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클릭했는데 다른 곳으로 바로 안 넘어가고 버벅대면 이젠 아주 신경질까지 낸다.
- 본문 52~54쪽
자라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지적 충격을 받는다. ‘아, 나도 한번 저 사람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다. 지식욕도 일종의 허영이다. 한번 폼 나고 싶은 거다. 사람은 남들에게 폼 나 보이고 싶을 때 성장한다.
어릴 때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이 들면서는 대중에게 폼 나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애나 어른이나 남자는 항상 여자에게 폼 나 보이고 싶어 한다. 헤겔의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핵심은 나도 한번 폼 나고 싶다는 심리학적 ‘동기motivation’다. 내 지적 성장 과정에서는 이어령 선생과 도올 김용옥 교수가 그렇게 폼 나 보일 수 없었다. 나도 그들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었다.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 쓴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인문·사회과학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쓰는 경우는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김용옥이 처음이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전형으로 여겨진 후, 인식주체인 ‘나’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사라졌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주체가 배제된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 본문 66~68쪽
첫댓글 김정운 지음 / 출판사 21세기북스 | 2014.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