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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위기, 세상의 위기 매서운 바람과 견디기 힘든 추위. 그리고, 슬픔과 안타까움이 교차한 겨울이었다. 동장군이 자신의 등장을 알리며 새벽서리를 풀잎 위에 떨구던 지난해 11월 말. '무의미 시'를 쓴 '의미 있는 시인'으로 한국문단에 한 획을 그은 시인 김춘수가 영면(永眠)에 들었다. 아내 없이 맞을 혹한이 두려웠던 탓이었을까. 이태 전 텔레비전에서 대면한 위태롭게 흔들리던 노시인의 눈동자가 새삼 떠올라 가슴 한 구석이 서늘했다. '꽃의 소묘'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차가워서 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을 막막해했을 것이다. 그의 문학과는 또 다른 정치적 행보와는 상관없이. 2005년 새해가 열리자마자 한국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것은 언필칭 결식아동에게 제공된 '부실도시락' 파문이었다. 여야를 불문한 정치인들 모두가 선진과 복지를 구호처럼 입에 달고 사는 '잘난 21세기'에 건빵을 반찬 삼아 찬밥을 삼켰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목이 메었던 사람이 비단 기자만은 아니었으리라. '가난의 악순환'과 '복지부동 하는 공무원' 그리고, '연민과 동정을 버린 시민들'이 야기한 이 기막힌 사건 앞에서 우리는 무력했다. 문학 역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땅 문인들 대부분이 "시와 소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아프고도 엄혹한 물음 앞에 선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 외에 세상을 향해 발언할 어떠한 수단도 가지지 못한 작가들이 '쓰지' 않는다면 또 무엇을 할 것인가. 이처럼 슬픈 세상사 속에서 만난 '몰락의 벼랑 끝에 선 활자문화'라는 무시무시한 풍문 속에서도 2004년과 2005년 겨울에 걸쳐 시인과 소설가들은 나름의 악전고투를 펼쳤다. 원로 김지하는 시집 <유목과 은둔>을 내놓으며 2004년을 마감했고, 이어 2005년을 자신이 펼쳐온 '생명운동'을 총망라한 산문집 <생명과 평화의 길>을 상재하며 열었다. 1970년대 중반 <한국의 아이>로 독특한 시적 진경을 펼쳐보였던 노장(老將) 황명걸(70)도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선보여 70대 시인들의 건재함을 알렸다. 남정현·황명걸·김지하 등 노익장 과시... 젊은 작가들도 약진 '분지'의 작가 남정현(72) 역시 실천문학사에서 <대표소설선집>을 간행함으로써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들의 출간은 두 노작가의 문우이자 현존 한국문학 최고령 작가군을 이루는 강태열(73. 시인)과 천승세(72. 소설가) 등에게도 분명 적지 않은 자극이 됐을 터이다. 신예들의 기지개도 독자들을 즐겁게 했다. 이신조는 장편 <가상도시백서>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우화소설'을 만나게 해줬다. 건조한 문체 속에 따스한 온기를 숨기는 그녀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신뢰를 재삼 확인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천명관의 향후 행보도 지켜볼 만하다. 그의 장편 <고래>를 읽은 독자라면 "소설에 대해 우리가 가져온 기존의 상식을 훌쩍 비켜서는 놀랄 만한 다채로움을 지닌 작품"이란 임철우(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평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 분명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며칠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김지우 소설집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와 김탁환의 장편 <부여현감 귀신체포기>는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을 취하고 있음에도 그 의미의 만만찮음에 있어 쌍벽을 이룬다 할만하다. 먼저 김지우가 선보인 일련의 단편들은 핍박받는 사람들과 뿌리 뽑힌 자들에 대한 가없는 신뢰를 행간마다 드러내며, 빅토르 위고와 막심 고리키의 '시혜적 휴머니즘'을 훌쩍 뛰어넘는다. 가난과 소외, 억압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한국적 해원(解寃)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녀의 작품들. 또래의 어느 작가도 눈 돌리는 법이 없는 문제에 다가서려는 노력은 이 젊은 여성작가의 미래에 거는 기대치를 높인다. 좀 낡고 상투적인 어법이지만 '리얼리즘의 힘'을 확인하는 기쁨이 크다.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된 <불멸의 이순신>을 쓴 김탁환은 영상과 활자의 행복한 결합과 그 결합이 가져다줄 시너지 효과를 신뢰하는 작가다. <부여현감 귀신체포기> 역시 서사적 문법에 더해 영상적 문법까지가 배려돼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런 탓에 단순히 '(보는) 재미'에만 치중하고 있을 뿐 문학의 본령에 접근하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도 나올 듯하다. 그러나, 세상엔 의미 있는 소설과 함께 재미있는 소설도 있어야 하는 법. 김탁환이 선보여온 일련의 작품은 경직된 한국문학의 어깨를 풀어주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 여러 여건이 어렵지만, 문인의 무기는 여전 '문학' 문단 내부의 크고 작은 사건도 많았다. 남성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성의 복원'을 이야기해온 소설가 한강(35)은 2005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자유와 위안, 충일로 내 몸을 데워주었던 글쓰기의 고통을 버리지 않겠다"는 옹골찬 수상소감으로 아직 '문학의 시대'가 가지 않았음을 웅변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SBS 드라마로 제작돼 시청자들의 인기를 모은 것도 이채로웠다. 이 역시 문학의 힘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고려대학교 강사 강유정(30)이 신춘문예 3관왕에 오른 것도 화제였다. 문학평론과 영화평론을 영역 없이 오가는 강씨를 볼라치면 일찍이 공자가 나이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칭한 게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이미 회갑을 넘긴 소설가 현기영, 김원일, 전상국 등이 자그마치 26년 만에 문학동인 '작단(作壇)'을 재가동키로 하고 동인지를 낸다는 소식 역시 반가웠다.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변한들 문인이 시와 소설을 쓰지 않으면 무엇을 할 것이며, 글이 아닌 무엇으로 세상을 밝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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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저두요,,